소설리스트

27화 (27/40)

* * *

[자! 모두가 기다리던 플레이오프입니다! 오늘은 3판 2선승으로 제라드와 추안생명이 경기를 치르게 되는데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뜨거운 함성과 함께 이영중 캐스터가 플레이오프 시작을 알렸다. 그의 힘찬 외침에 들뜬 해설자들이 입을 열었다.

[우선 오늘의 키포인트를 집어보자면, 추안생명은 후반에 막판 스퍼트를 내듯 폭발적인 경기를 보여줬습니다! 그 반면에 제라드는 시즌 후반에 크게 흔들렸죠!]

박동진 해설의 힘찬 시작을 유기현 해설이 이어받았다.

[추안생명이 그 기세를 이어갈지, 아니면 제라드가 부진을 떨쳐내며 다시 미친 경기력을 보여줄지! 그게 제일 관건입니다!]

[하하하, 그러면 오늘 누가 승자가 될지 관계자들과 관객들의 예측을 봐볼까요?]

이영중 캐스터의 말이 끝나서 큰 함성과 함께 무대 전광판에 승부예측이 떠올랐다. 72:28. 제라드의 독보적인 승리 예측이었다. 박동진 해설은 결과를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부진한 모습을 보여줬음에도 굳건한 팬들의 믿음 때문인지 제라드의 승리를 예상하시는 분이 많은 듯합니다.]

[시즌 초반에 보여줬던 호랑이 같은 기세는 대단했죠.]

두 해설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선수들의 세팅이 모두 끝났는지 각 팀의 감독들이 신호를 보냈다. 시작을 알리는 신호를 전해 받은 이영중 캐스터가 웃으며 소리를 질렀다.

[자! 선수들의 준비가 끝이 났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승자가 될지 지켜보시죠! 게임 시작합니다!]

캐스터의 외침과 함께 게임이 시작됐다. 코치와 감독이 사전에 연습했던 캐릭터들을 픽하면서 관중석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오오! 와일드카드 전에서 벌써부터 조커 카드를 꺼내는 제라듭니다!!]

시즌 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캐릭터들이 나오자 대회의 분위기가 한껏 뜨거워졌다.

“처음에 치고 나가는 게 중요한 픽이니까 초반에 단단하게 가자.”

진형의 말에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급하게 굴지 말고, 특히 선우는 은기한테 콜 많이 해주고 주오는 수호 부탁한다.”

“네!”

루퍼의 조언에 선우와 주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역할을 마친 진형과 루퍼가 선수석을 떠났다.

“편하게 하자.”

대회 분위기가 뜨거워지면서 선수들도 같이 뜨거워지면 실수가 나올 수 있었다. 주오는 온화한 말로 선수들을 다독였다.

[병사들이 생성되었습니다.]

진정한 게임 시작을 알리는 내레이션이 화면 상단에 떠오름과 동시에 선수들은 각자 맡은 라인으로 흩어졌다.

제라드는 픽의 의미를 잊지 않고 초반부터 추안생명 선수들의 혼을 빼놓았다. 상대 선수들은 오랜만에 보는 캐릭터들에 당황했는지 실수가 나왔다. 제라드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공격적으로 밀어붙였다.

“애들아, 나 상대 쪽으로 돌아서 들어갈 테니까 각 봐봐.”

상대 정글에서 은신해 있던 은기가 상대 팀들이 앞으로 나오자 그 틈을 파고들었다. 둘이 동시에 위로 떠오르자 선우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은기야! 나 들어간다!”

“들어가서 원딜만 이쪽으로 던져줘요!”

캐릭터 하나는 원하는 방향으로 던져 버릴 수 있는 선우가 도주기를 활용해 상대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은기가 원했던 상대 원딜만 쏙 빼내 은기 앞으로 던졌다.

둘이 전투를 시작하자 상대보다 대쉬기가 하나 더 있던 선우는 그대로 전장에 파고들어 상대 원딜에게 스턴을 먹였다.

가뿐하게 제라드의 첫 킬을 알리는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 그것을 시발점으로 제라드 선수들은 추안생명 선수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주오는 기동성 좋은 캐릭터로 빠르게 전 맵을 뛰어다니며 각 라인에 선 팀원들에게 도움을 줬다.

[아아아!! RAIN!!! 여기서 또 어시스트를 올립니다!]

[RAIN! 미친 건가요?! 지금까지 킬 관여율 100%입니다!]

주오의 히어로 같은 플레이에 해설자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흥분하는 두 해설자를 이영중 캐스터가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제라드! 플레이오프 전에 대체 무슨 준비를 한 거죠?! 리그 막바지에 보였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연습의 효과는 탁월했다. 전보다 좋아지긴 했지만, 수호와 은기는 여전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상대 팀과 같은 선상에서 플레이하면 결국 두 사람의 실수로 한순간에 상대에게 우위를 빼앗기곤 했다.

그래서 제라드가 내놓은 답은 초반에 많이 벌어놓자는 전략이었다. 실수가 나와도 우위가 넘어가지 않을 만큼 많은 이득을 취해놓는 것이 중요했다. 그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모든 라인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주오였다.

자신 몫의 몬스터들을 포기하고 라인전을 하는 선수들의 어시스트가 끊임없이 이어져야 했다. 주오는 그 임무를 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꺄아아아!! RAIN!!! RAIN 선수!!!!]

주오는 차분하게 자신의 힘을 키우고 전략을 세워 킬을 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런 주오와 어울리지 않게 초반부터 이곳저곳을 터뜨리는 플레이에 박동진 해설이 의미 모를 소리를 질러댔다.

흥분해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주오를 부르짖기만 하는 박동진 해설을 뒤로하고 유기현 해설이 마이크를 잡았다.

[RAIN 선수, 노장의 힘을 보여주는 건가요?! RAIN 선수가 이런 플레이를 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놀라는 유기현 해설의 말을 이번엔 이영중 캐스터가 이었다.

[유기현 해설이 현역으로 뛰었을 때 RAIN 선수와도 여러 번 맞붙었지 않습니까?! 그때도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나요?!]

[어후!! 저는 처음 봅니다!!! RAIN 선수에게 이런 야성적인 모습이 있었나요?!]

관중들도 이미 뜨겁긴 마찬가지였지만, 해설들을 따라가긴 역부족이었다. 이미 CKR 리그의 진심으로 알려진 해설진들이 뒤로 넘어갈 듯 흥분하자 그것에 보답하듯 제라드는 더욱 거칠게 추안생명을 몰아갔다.

제라드는 대형 오브젝트인 골렘을 앞에 두고 추안생명과 대치 중이던 상황이었다. 이미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제라드는 그저 탱커가 앞에서 막아주고 딜러들이 골렘을 녹이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수호는 적진에 들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야, 그거 괜찮겠어?”

우찬의 걱정 어린 음성에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게 상대 딜러진을 잡아내고 살아 돌아오는 건 수호의 자랑인 플레이였다. 그렇기에 수호는 자신이 있었다. 성공하면 오브젝트는 물론이고 상대의 선수들까지 한 번에 쓸어버리는 게 가능했다.

“응. 괜찮아.”

“흠, 뭐 어때. 이미 많이 벌어놔서 여기서 수호가 짤린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을 것 같은데.”

선우가 어깨를 들썩이며 괜찮지 않냐고 말했다. 수호가 실패서 4대5로 싸운다 해도 제라드가 승리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만큼 초반에 벌어놓은 이득이 많았다.

“주오 형, 어떻게 생각해요?”

의견이 갈리자 은기가 주오를 불렀다. 말없이 상황을 보고 있던 주오가 입을 열었다.

“수호 하고 싶은 대로 해.”

“레인 씨, 진심이야?”

별다른 고민 없이 내뱉는 주오의 말에 놀란 건 우찬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거 대회야?’라고 말하는 우찬을 다독이며 주오는 말을 이었다.

“대회니까 해봐야지. 초반에 이득 많이 보는 전략 취한 건 실수가 나와도 우위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어. 그러니까 실패해도 괜찮아. 그리고 요즘 실수 나온다고 위축되어 있으면 예전 폼으로 못 돌아가.”

“으음…… 그건 그렇지.”

플레이오프가 중요하다고는 하나 더 중요한 건 그 후에 있을 경기들이었다. 언제까지나 이 전략이 먹히진 않을 거다. 그러니 통할 때 수호와 은기의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게 중요했다.

“수호야, 부담 갖지 말고 해.”

주오의 시선이 수호에게 향했다.

자신을 보면서 눈가를 접어 웃는 주오를 보자 수호는 마음이 벅차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느낄 감정은 아니었지만, 정말 김주오라는 사람이 좋았다. 어떻게든 그에게 우승컵을 안겨주고 싶다.

한번 그 생각이 떠오르자 수호의 머릿속엔 우승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새 손가락이 힘이 들어갔다.

“……잘할게요.”

꼭 그러겠다고 다짐한 수호는 그대로 후방에서 딜을 넣기 위해 자리를 잡으려는 상대 딜러진을 봤다. 자신을 붙잡을 탱커진을 피해서 원딜에게 모든 스킬 콤보를 넣고 돌아와야 했다.

평소라면 무리 없이 해냈을 수호는 상대 원딜에게 충분한 딜을 넣긴 했지만 킬을 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상대를 잡아내지 못한 대가로 추안생명 선수들에게 처치당했다.

[아아악!! SUHO 선수!! 무슨 일이죠?! 대체 왜?!]

그 순간 박동진 해설의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대치만 하면 될 상황에서 들어가는 판단을 한 수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제라드는 선수석까지 들려오는 박동진 해설의 비명을 뒤로하고 골렘에 집중했다.

“골렘부터 쳐!!”

은기의 외침과 수호의 어그로로 공격력 버프를 가져다주는 골렘은 제라드의 손에 들어왔다. 그 후에 적 딜러들보다 크게 성장한 우찬과 주오를 앞세워 상대 팀을 공격했다.

그 싸움으로 선우만이 전사하고, 남은 추안 선수 다섯을 모두 잡아냈다.

[제에에에라드!! 4대5 싸움을 승리로 끝냅니다! 이대로 바로 추안생명 내진으로 들어가 보석을 노립니다!]

유기현 해설의 외침과 함께 죽어 있던 수호가 다시 살아났다. 수호는 이미 추안생명 내진을 지키고 있는 포탑들을 철거하고 내진으로 밀고 들어가는 팀과 합류했다.

추안생명 선수들이 부활하기 전에 보석에 도착한 제라드는 그렇게 보석을 점사했다.

[아악! 추안생명! 이대로 끝나나요?!]

[아아아아! 제일 빨리 태어나는 선수가 3초 남았습니다. 3, 2, 1!]

해설진의 외침과 함께 추안생명 선수들이 하나씩 부활했지만, 그들이 보석을 지키러 오는 순간 게임은 끝났다. 상대가 도착하기 전에 보석을 깨뜨린 제라드의 화면 가득하게 승리 문구가 떠올랐다.

[제라드 GG!!]

[이야, 마지막 추안생명이 조금이라도 제라드 선수들을 길동무로 데려갔다면 승산이 있었을 것 같았는데요! 아쉽습니다!!]

아쉬움이 가득한 해설진들의 탄식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탄식은 이어진 2세트에서도 계속됐다. 그들의 탄식의 대상은 이번에도 추안생명이었다.

초반 제라드의 템포를 따라가지 못한 추안생명은 그렇게 2:0으로 패배했다.

제라드 선수들은 열심히 연습한 전략이 먹혀들어 개운한 얼굴로 헤드셋을 벗었다. 그중에서 표정이 좋지 않은 건 수호뿐이었다.

게임이 끝나고 감독과 코치인 진형과 루퍼가 선수석으로 들어섰다.

“다들 잘했다! 이제 이틀 뒤에 있을 킹콩 잡으러 가자! 그때부터 5판 3선승이니까 더 열심히 해야겠지만 할 수 있지?”

2:0으로 승리한 게 기쁜 진형이 웃으며 선수들을 다독였다. 선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도 잘했어. 스킬 한 번만 더 맞췄으면 잡을 수 있는 거였는데 아쉽다.”

루퍼는 말없이 헤드셋을 챙기는 수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럼에도 수호의 기분은 좋아지질 못했다.

수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왜 전에는 그토록 쉽기만 하던 플레이가 되지 않을까. 왜 실패했던 걸까. 의문이 가득했다. 어느새 수호는 입술을 꾹 물고 있었다.

시선을 테이블에만 향하고 있던 수호는 갑자기 불쑥 시야에 들어찬 주오의 얼굴에 흠칫 놀라 고개를 뒤로 내뺐다.

“……형.”

“수호야, 수호야.”

“왜요?”

“오늘 멋있었어.”

기분을 끌어올려 주려고 하는 말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수호는 더욱 침울해졌다. 고개를 저으며 주오와 눈을 맞췄다.

“아뇨. 전혀요. 아까 실패해서 죄송해요.”

“죄송할 건 아닌데.”

주오는 정말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어느새 짐을 다 챙긴 선우도 옆으로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야, 그래도 전이었으면 너 상대 원딜한테 딜 넣기 전에 죽었을걸. 그거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거니가 너무 신경 쓰지 마.”

많이 좋아진 거라고 말하는 선우를 보며 수호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더욱 잘해야만 했다. 모두가 잘한다고 말했던 전보다 더욱 잘해야만 했다. 그래야 주오와 우승을 할 수 있었다.

수호는 굳어버린 손을 주물렀다.

그런 수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주오가 수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주물렀다. 마사지하듯 손가락 끝부터 바닥까지 부드럽게 눌러주는 손길에 저절로 힘이 풀렸다.

“생각만큼 손이 안 따라주지?”

“……네.”

수호는 주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검은 눈이 불안해 보였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안 되는 거냐고 묻는 시선에 주오는 수호의 손을 더욱 감싸 쥐었다.

“음, 왜 그러는지 말해줄까?”

“네. 전 모르겠어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호를 보는 주오의 눈이 다정하게 빛났다. 이윽고 주오가 방긋 웃으며 수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단 승자 인터뷰하고, 숙소 돌아가서 알려줄게.”

“지금 알려주면 안 돼요?”

수호는 답답했다. 빨리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주오는 매정하게도 초조해하는 수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서 알려줄게. 지금은 생각하지 마. 돌아가서 나랑 데이트해 주면 알려줄게.”

“……데이트요? 돌아가면 다 같이 피드백해야 하잖아요.”

다 같이 모여 진행되는 피드백까지 끝나면 시간은 오후 10시가 훌쩍 넘었다. 그런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보단 돌아가서 피드백을 바탕으로 연습을 더 해야 하지 않을까.

불퉁한 수호의 시선에 주오도 꿋꿋했다.

“그거까지 끝나고 하면 되지. 오랜만에 둘이서 술 마실까?”

술도 못 마시는 사람이 술을 권하는 게 의아해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술은 왜요?”

“수호랑 오랜만에 단둘이 마시고 싶어. 저번에는 다 같이 마셨잖아.”

정규 시즌 1위 때 다 같이 축배를 들었던 게 떠올랐다. 그때는 이유가 있었지만, 오늘은 무슨 이유가 있을까. 아직 플레이오프 첫 경기를 이긴 것뿐이었다. 갈 길은 아직도 멀고 멀었다.

“그렇지만 연습 더 해야 하지 않아요?”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수호의 시선에 주오는 걸음을 멈추고 수호를 바라봤다.

“주장으로서 개인 면담이야. 수호 너한테는 연습보다는 그게 더 중요해.”

주오의 시선은 다정하면서도 단호했다. 수호가 지금 만나고 있는 김주오가 아니라, 제라드의 주장으로서 보여주는 눈이었다. 단순히 너랑 데이트를 하면서 놀겠다는 게 아니라는 시선에 수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짤막하게 나온 수호의 답변에 주오는 눈가를 휘며 웃었다.

그 뒤로 스테이지에서 해설진들과 승자 인터뷰를 간단하게 마친 제라드는 바로 연습실로 향했다.

이미 밤 9시가 넘은 시간이었음에도 코치진들과 감독은 열과 성을 다해서 오늘 경기에 대한 피드백을 이어나갔다.

다음 상대 팀의 성향에 대한 분석, 그리고 오늘 있었던 실수, 다음 상대에게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 논의를 끝마치자 시간은 수호의 예상대로 밤 10시가 훌쩍 넘어가 11시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는 선수들과 코치를 보며 주오가 입을 열었다.

“저랑 수호는 따로 빠질게요.”

“응? 왜? 어디 가려고?”

“잠깐 대화 좀 하려고요.”

의아함이 담긴 시선을 빛내던 진형이 주오의 차분한 눈빛을 보고는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얘기 잘하고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가라. 내일 연습하는데 졸면 혼난다.”

장난스럽게 주먹을 들어 보인 진형은 이내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그 뒤를 따르는 코치와 선수들도 짧게 인사를 건넸다.

“주오 형, 그러면 수호 잘 부탁해. 너무 혼내지 말고.”

마지막으로 나서던 선우가 말없이 앉아 있는 수호를 보고는 주오를 향해 웃어 보였다. 수호는 그런 선우에게 고개를 꾸벅여 인사를 건넸다.

손을 흔든 선우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주오는 수호를 돌아봤다.

“수호야, 뭐 먹고 싶어?”

“전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그러면 이 앞에 김치찌개랑 계란말이 잘하는 곳 있는데 거기 갈까?”

수호는 환하게 웃으며 묻는 주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입맛이 딱히 없는 수호에게 메뉴는 중요하지 않았다.

* * *

주오를 따라 도착한 가게는 오래된 곳으로 보였다. 내부는 작았지만 정말 음식을 잘하는 곳인지 손님들로 북적였다. 연습실이 회사들과 인접해 있어 그런지 늦은 업무를 끝내고 한잔하고 있는 직장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주오와 수호는 다른 손님들과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자연스럽게 유명 메뉴를 주문한 주오는 먼저 나온 소주병을 따 수호의 잔에 따랐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형도 마시려고요?”

“응, 수호만 마시면 외롭잖아.”

그런 걸 딱히 신경 쓰지 않는 수호였다. 무엇보다 맥주도 딱 한 캔만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소주를 마신다는 건 나 오늘 취할 거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아 무서웠다. 수호는 취한 주오를 숙소까지 데리고 갈 자신이 없었다.

“전 취한 형을 데리고 돌아갈 자신이 없어요.”

불퉁한 수호의 시선에 주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호한테 그런 고생 안 시켜. 딱 이거 한 잔만 마실 거야.”

수호가 한 잔을 다 비우면 자신은 입술을 축이며 한 잔을 한 병처럼 마시겠다는 대답에 더 이상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잔을 든 주오가 짠을 외치며 잔을 부딪혀 왔다. 수호는 찰랑거리는 술을 한입에 털어놓고는 잔을 내려놨다. 그러자 주오가 다시 빈 잔을 채웠다.

“뭐가 문제예요?”

주어가 없는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귀신같이 수호가 하고 싶은 질문을 캐치한 주오가 생긋 웃어 보였다. 마신 건지 티도 나지 않는 술잔을 내려놓은 주오가 수호를 빤히 바라봤다.

“수호야, 이번 시즌 많이 부담스러워?”

부담. 수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어요. 아마 아닐 거예요.”

그럴 거다. 늘 겪었던 시즌이었고, 시즌마다 있었던 플레이오프였다. 이제 와서 부담을 느끼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수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수호는 잘은 모르겠지만 아닐 거라고 대답했지만 주오의 시선은 달랐다. 주오는 말간 눈을 빛내며 자신을 보는 수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수호가 부담을 느끼는 것처럼 보여.”

“제가요?”

“응.”

“왜요?”

이번에도 수호의 고개가 갸웃했다. 어느 부분이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정말 자신이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건가? 아리송한 머리로 열심히 생각해 봤지만 잘 모르겠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수호는 평소에 게임할 때 어떤 생각해?”

딱히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킬 각이 보이면 들어갔고, 그냥 몸이 가는 대로 플레이하는 게 수호의 방식이었다.

“생각 안 해요.”

프로 선수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플레이한다는 게 정말 웃긴 대답일 수 있었다. 그게 직업인 사람인데 어떻게 생각이 없을 수 있을까. 주오는 수호의 대답에 미소 지었다.

“그럴 것 같았어. 물론 판단을 하긴 하지만 수호 너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본능적인 감각으로 게임을 한다는 느낌이 강해. 그리고 그걸 성공시킬 피지컬도 가지고 있어. 내가 본 수호는 그랬어.”

회상하는 듯 주오의 시선이 허공을 향해 있었다. 데뷔부터 최근까지 이어졌던 회상이 근래로 넘어온 듯 주오의 시선이 다시금 앞자리에 앉은 수호에게 향했다.

“그런데 요즘은 수호가 생각을 하는 것 같아.”

“……?”

수호의 눈에서 의아함이 더욱 짙어지자 주오가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정확하게는 본능적인 감각보다는 이기기 위한 최선의 판단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쉽게 말하면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플레이 내내 하는 것 같아.”

당연한 소리였다. 이겨야 결승에 갈 수 있었고, 이겨야만 우승을 할 수 있었다. 수호는 당연한 것을 말하는 주오를 뚱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하지. 모든 선수가 이기고 싶다는 마음으로 대회에 임해. 수호 너는 지금 그런 마음이야?”

그것도 당연한 소리였다. 어떤 프로 선수가 이기고 싶다는 마음이 없을까. 누구보다 승부욕이 강한 수호였다. 이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수호를 보며 주오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수호야, 이기고 싶다와 이겨야 한다는 엄연히 달라.”

낮고 차분한 주오의 물음에 수호는 멈칫했다. 술잔을 쥔 채 생각에 잠긴 수호를 보며 주오는 말을 이어나갔다.

“이기고 싶다는 소망이고, 이겨야 한다는 의무야. 그런데 나는 요즘 네가 이겨야 한다는 의무에 짓눌려 있는 것 같아.”

“…….”

반박할 수 없었다. 이기고 싶다는 마음도 있지만, 요즘 수호의 마음에 더 크게 자리한 생각은 이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오가 모두가 꿈꾸는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생겨난 바람이었다.

“이겨야 더 높은 곳에 갈 수 있는 건 맞아. 그런데 그런 생각은 수호 너랑은 안 맞는 것 같아. 너는…… 굳이 이기려고 하지 않아도 돼.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그게 네 플레이의 매력이잖아.”

수호가 지금까지 좋은 성적과 변함없는 기량을 보여준 이유도 그것이었다. 부담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남들보다 강한 승부욕. 수호는 언제나 이기고 싶다고는 생각했지만, 진심으로 이기기 위해서 하나하나 판단하고 행동하지는 않았다.

그저 몸이 가는 대로, 갑자기 떠오른 판단으로, 그런 본능적인 감각으로 게임을 즐겼다.

경기에 대한 압박감이 전혀 없으니 어려운 플레이를 해도 실패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호는 언제나 승자가 되었고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있었다.

그러던 수호가 이제는 게임 자체를 재미있어 하는 것보다 이기기 위해서 게임을 하는 것처럼 보여 주오는 안타까웠다.

주오는 여전히 술잔만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호의 그릇에 김치찌개를 퍼주고는 수호의 볼을 쿡 찔렀다.

이에 볼 점막이 눌리는 느낌에 수호가 고개를 들어 주오를 바라봤다. 뭐 하는 거냐고 묻는 순수한 눈을 보며 주오가 방긋 웃었다.

“편하게 생각해. 이렇게 말해도 한순간에 마음이 편해지지 않겠지만, 내가 해줄 말은 이것뿐이야.”

“……이기고 싶은걸요. 욕심이 생겨요. 자꾸 우승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요.”

여전히 볼이 찔린 채로 한숨과 같은 한탄을 내뱉은 수호는 괜히 숟가락으로 찌개에 들어 있는 두부를 쪼갰다.

“나도 그래. 근데 마음처럼 되려면 수호 너는 그 생각을 떨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매 경기 연습한다고 생각하면 어때? 그러면 부담감이 좀 덜하지 않을까?”

연습에서도 실수가 나오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대회를 연습이라고 여긴다 해도 부담감이 줄어들지는 않을 거다.

“연습 경기여도 실수가 계속 나오는데 그렇게 생각한다고 실수가 줄어들 것 같진 않아요.”

“음, 그것도 그렇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는 듯 턱을 괸 주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차분한 시선으로 수호를 보던 주오가 이내 해답을 찾았는지 환히 웃었다.

“그러면 내가 경기하는 동안 웃겨줄게. 그러면 긴장이 좀 풀리지 않을까?”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수호는 감도 오지 않을 만큼 뜬금없는 해답을 늘어놓은 주오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뚱한 시선이었지만 그 속에 가득한 황당함을 캐치한 주오가 잔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둘이 게임하는 것처럼 느끼면 되지 않을까? 게임에서 데이트하자는 거지.”

“……잘 모르겠어요.”

“음, 나도 아직은 정확하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이 잘 떠오르진 않아. 다음 연습할 때까지는 확실하게 정해서 보여줄게.”

그러고는 주오가 잔을 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짠 하고 싶다고 외치는 그의 행동에 수호는 마지못해 술잔을 들었다.

“형이 뭐 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다고 부담감이 줄까요?”

“글쎄. 그래도 뭐라도 해봐야지. 나는 수호가 그런 마음은 계속 모른 채 게임했으면 좋겠어. 예전처럼 즐겁게 해. 나는 수호가 그렇게 게임하는 게 좋아.”

연인 이수호도 물론 좋았지만, 그만큼 선수 SUHO도 좋은 주오였다. 생글 웃는 주오를 보던 수호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주오는 입술 두어 번 축였다고 벌써부터 귓가에 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형, 귀여워요.”

“응? 갑자기?”

주오는 뜬금없는 수호의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조차 귀여워서 수호는 그를 보며 마주 웃었다.

“형 귀 빨개졌어요.”

“아, 술 때문인가.”

머쓱한 듯 주오가 붉어진 귓가를 만졌다.

“형 집안사람들 다 술 못해요?”

보통 한 명이 못하면 나머지들도 못하는 것 같던데. 수호의 물음에 주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버지 닮아서 못하고, 어머니랑 동생은 잘 마셔. 수호랑 비슷할걸?”

너무 천지 차이인 거 아닌가 싶었다. 한 잔과 네 병은 너무나 많은 차이였다.

갑자기 나온 가족 얘기에 수호는 이것저것 궁금해 묻기 시작했다.

“그러면 외모는 누구 닮았어요?”

“외모도 아버지 닮았어. 동생은 어머니랑 아버지 딱 반반.”

“형 동생도 잘생겼겠네요.”

주오랑 닮았으면 분명 그럴 거다. 주오만큼은 아니라 해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문득 궁금했다. 주오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주오는 수호의 물음에 고민하듯 잠시 생각하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동생도 인기 많았던 거 같아. 지금 대학 다니는데 거기서도 인기 많을걸?”

“사진 있어요?”

수호가 봐온 주오는 사진 찍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해서 물었지만, 의외로 주오는 대번에 눈가를 찡그렸다.

“걔 사진을 왜 가지고 다녀. 동생 사진 없어.”

“……동생이랑 사이 나빠요?”

이렇게까지 주오가 누군가를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걸 본 적이 없던 수호는 주오의 반응이 신기했다. 말간 검은 눈을 깜박이는 수호를 보며 주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그런데 동생 사진을 가지고 다닐 이유는 없지. 수호도 형이랑 누나 있지 않아? 사진 가지고 다녀?”

이번엔 수호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단박에 주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요. 아, 그런데 전에 엄마 생일 때 같이 찍은 사진은 있을 거예요.”

“정말? 보여주면 안 돼?”

주오는 조심스럽게 눈을 올려 떴다. 덩치는 산만 하면서 저런 표정이 누구보다 잘 어울려서 수호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대답 없는 수호의 반응을 거절로 알아들었는지 주오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나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어.”

다급히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주오를 보며 수호는 핸드폰을 켰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 이거예요.”

몇 장 없는 사진첩에서 가족끼리 찍은 사진을 발견한 수호는 주오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수호처럼 하얀 피부에 순하게 생긴 중년 여성과 단정한 학자처럼 생긴 중년 남성을 중심으로 나이 대가 어린 세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사진을 보는 주오의 눈이 반짝였다.

“와, 수호는 형이랑 누나랑 많이 닮았다. 다들 어머님 닮으신 건가?”

“이모가 저희들 보고 엄마 아빠 딱 반씩 닮았다고 하시던데요.”

“귀엽다.”

주오는 여전히 사진에서 환하게 웃는 창호와 수빈, 그리고 유일하게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수호는 넋이 나간 듯 열심히 구경하는 주오를 보며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형이랑 누나요?”

뚱한 수호의 물음에 주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수호가. 너무 귀엽다. 근데 형님이랑 누님분도 귀여우시다. 수호랑 닮았어. 수호 어릴 때 사진은 안 가지고 있겠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묻는 주오였다.

“그건 없어요. 보고 싶으시면 다음에 본가 갔을 때 가져올게요.”

“정말? 약속이야.”

수호의 말에 세상을 다 가진 듯 주오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호는 그런 주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주오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보고 싶었다.

“형도 가져와요.”

“그래! 꼭 가져올게.”

주오와 수호는 어린아이들이 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꼭꼭 걸고 약속했다.

심각한 분위기로 시작됐던 술자리는 어느새 웃음소리가 가득 번졌다. 게임의 승패와 상관없이 침울했던 수호의 마음도 다시 원래의 평온한 상태로 돌아갔다.

* * *

주오와의 간단한 술자리 때문인지 이후로 수호는 한결 편해 보였다. 하지만 역시나 연습에 들어가자 다시 간혹 실수가 터져 나왔다.

“괜찮아! 바텀 라인에서 이득 보면 손해 아니야!”

수호의 실수에 선우가 다급히 콜을 외쳤다. 수호는 주오의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순식간에 전투가 일어나는 바텀에 합류한 수호가 3대2 상황을 만들어내면서 바텀에서 이득을 만들었다.

“예에! 이수호 잘한다!”

선우의 외침과 함께 옆자리에 앉은 은기가 수호에게 하이파이브를 해왔다. 어느새 은기의 실수도 한결 줄어 안정적인 경기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수호는 자신만 잘하면 된다고 급해지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주오가 그런 수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어깨에 내려앉는 따뜻한 무게가 수호의 마음을 더욱 가볍게 만들어줬다. 수호는 다시금 게임에 집중했다.

“수호야! 얘가 나 괴롭혀. 혼내주러 와줘.”

그런데 게임 중간에 갑자기 주오가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울먹거렸다. 연습은 물론이고 어떤 경기에서도 이런 장난스러운 음성과 이런 식의 혼내달라는 콜을 한 적이 없던 주오의 태도에 수호는 당황했다. 당황한 건 수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주오를 제외한 제라드 선수 전원이 멍한 시선으로 주오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주오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더욱 애달프게 수호를 불렀다.

“수호야, 나 아파. 빨리 와줘.”

“아…… 네.”

수호는 홀린 듯 주오가 핑을 찍는 곳으로 열심히 달렸다. 그곳에선 상대편 정글 선수가 주오를 따라다니며 정글 몬스터들을 잡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수호는 상대적으로 1대1이 강한 편에 속하는 상대 정글 캐릭터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던 주오를 도와 상대를 잡아냈다.

얼떨결에 주오를 따라 상대를 잡아낸 수호는 다시 주오를 당황한 시선을 바라봤다.

“레인 씨, 미친 거야?”

“형, 갑자기 왜 그래요?”

특히나 오랫동안 주오와 호흡을 맞췄던 우찬과 은기가 정말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주오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무슨 문제 있냐고 평온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푸흡…… 아니, 아하하! 미치겠네. 형 방금 그거 뭐야?”

그 상황이 웃겼던 선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수호는 이 웃지도 못할 황당한 상황에 여전히 주오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뜨거운 시선을 느꼈는지 주오가 수호를 돌아봤다.

“재미없었어?”

“……방금 뭐예요?”

정말 뭐였을까.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수호는 갑자기 주오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수호의 머리가 당혹으로 정처 없이 뒤섞이자 주오가 가볍게 대답해 왔다.

“수호 긴장을 푸는 법을 열심히 고민해 봤는데 이건 좀 아닌가……?”

나름대로 준비해 온 방법이었다고 어색하게 웃는 주오를 보던 수호에게서 어느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여전히 주오를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게 참 좋았다.

“아니요. 도움되는 것 같아요.”

“정말?”

“네. 방금도 플레이 잘된 것 같지 않아요?”

큰 전투가 아니라서 확실한 효과를 느끼기엔 부족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당황해서 손이 잘 움직였던 것 같았다. 수호의 말에 주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가 막 홍길동처럼 번쩍 나타나서 나 구해준 거 정말 멋있었어. 날아다니는 것 같더라.”

“진짜, 저 형 미쳤나 봐.”

우찬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질린 얼굴을 해 보였다. 어느새 은기는 고개를 박고 웃고 있었다. 선우는 숙인 은기의 등짝을 내리치며 더 크게 웃었고, 뒤에서 지켜보던 루퍼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연습 중인 거 잊었어? 단체로 미쳤냐?”

다들 얼빠져 웃고 있는 동안에도 게임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주오가 가져온 여파에 혼비백산으로 웃고 있던 선수들이 루퍼의 분노에 찬 음성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하지만 게임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주오의 그 장난스러운 울음소리 때문에 헤드셋에서는 억눌린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특히나 선우가 거의 울 것같이 웃었다.

그런 혼란 속에서 빛을 발한 건 수호였다. 주오 때문에 긴장이고 부담이고 내던져 버린 수호는 정말 히어로처럼 전 맵을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결과는 승리였다. 오랜만에 수호의 실수가 나오지 않은 깔끔한 경기력이었다. 부작용으로 다른 선수들의 실수가 가득한 경기기도 했다. 하지만 수호가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했다.

못마땅한 시선으로 선수들을 보고 있던 진형과 루퍼는 대화를 나누고는 입을 열었다.

“주오 너, 앞으로도 그렇게 콜해라.”

“효과 괜찮은 것 같죠?”

“조금 이상하긴 한데 괜찮네.”

여전히 진형은 정말 이런 식으로 콜을 해도 되나 망설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효과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선우는 진형의 결정에 더욱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선우가 은기를 붙잡은 채 끅끅거리자 은기가 선우의 등을 토닥였다.

“형, 그만 웃어요.”

“아니, 아니이! 너는 이게 안 웃기냐…… 풉.”

선우를 다독이는 은기도 주오를 힐끔거리며 웃었다. 우찬은 여전히 충격받은 얼굴로 주오를 멍하니 바라봤다.

“진짜 레인 씨 미친 거 같아.”

“김우찬, 정신 차려.”

주오는 우찬을 다독이고는 고개를 돌려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도 우찬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당황으로 멍한 시선으로 주오를 바라봤다. 주오는 그런 수호를 보며 방긋 웃었다.

“앞으로 수호는 내 수호천사 하는 거야. 내가 콜하면 나 구해주러 와야 해.”

어딘가 장난기 넘치면서도 다정한 주오의 말에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달프게 부르면 어떻게 달려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수호의 귓가에는 비련의 주인공 같기도 하고, 곤란한 상황에 빠진 어린아이 같기도 한 주오의 음성이 맴돌았다.

긴장을 풀려는 목적이라면 정말 완벽하게 목적에 부합하는 방법이었다. 수호는 자꾸만 웃음이 나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정말이지 너무나 웃겼다.

수호는 눈만 데굴 굴려 자신을 보고 있던 주오와 시선을 맞췄다.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 * *

주오의 기묘한 콜은 효과가 있었다. 흔들렸던 추안생명과의 경기와는 다르게 킹콩전에서 수호는 오랜만에 본 실력으로 게임에 임할 수 있었다. 긴장이 되려고만 하면 주오가 구해줘요를 외치면서 수호의 긴장을 풀었다.

[오오!! 오늘은 저번 경기와 달리 SUHO 선수의 움직임이 좋습니다!]

[아, 킹콩도 SUHO의 부진을 예상했을 것 같은데 갑자기 플레이가 살아나서 당황하는 것 같은데요?!]

수호의 플레이가 살아나자 해설진들도 같이 들떴다. 유난히 힘찬 해설들이 빠르게 플레이를 따라가며 말을 이었다.

[오! 제라드!! 미드 지역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배론으로 향합니다!!]

이영중 캐스터의 외침을 박동진 해설이 이어받았다.

[아악! 킹콩!! 이거 막지 못하면 너무 힘들어지는데요!]

[이거 어떻게 막죠?! 아직 킹콩 선수들은 부활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요! 내줄 건 내주고 내각에서 막아야 할 것 같은데요!]

유기현 해설은 흥분한 나머지 의자에서 몸을 들썩였다.

“배론 먹고 바로 집으로 귀환 타자. 그리고 템 정비하고 상대 진영으로 들어가서 우찬이랑 내가 앞에서 어그로 끌게.”

주오의 콜이 끝나자 배론이 처치됐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선수들을 오더에 따라 집으로 귀환을 하고 마지막 전투를 위해 아이템을 정비했다.

병사들에게 버프를 나눠주고 탑과 바텀 라인 양쪽에서 밀고 들어오는 제라드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킹콩은 혼란스러워했다.

그 틈을 타 탑 포탑을 무너뜨린 우찬이 궁극기를 사용해 적진 한복판으로 밀고 들어갔다. 주위에 있는 챔피언들을 한데 모아 내려찍는 궁극기가 킹콩 다섯 명에게 들어가고, 그 위로 은기와 수호와 공격이 이어졌다.

깔끔하게 전부를 잡아낸 제라드는 그길로 보석을 깨뜨리며 승리를 알렸다.

기세를 탄 제라드는 극악의 상성이라고 불리는 체스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체스는 킹콩보다 더욱 쉽게 무너져 내렸다.

3:1이라는 스코어로 승리를 가져온 제라드에게 우승까지 남은 상대는 주이뿐이었다.

[제라드!! 정말 이러다가 우승까지 해버리면 어떡하죠?!]

[그렇게 되면 역사에 이름을 남길 팀이 되는 건데요!! 아직까지 도장깨기로 우승을 한 팀은 없습니다!]

플레이오프 전 크게 흔들렸던 경기력 때문에 세간에 말이 많았던 제라드였다. 그런 제라드가 플레이오프에 들어오자 다시 경기력을 회복해 상위 팀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가자 감동한 해설들이 침을 튀겨가며 열심히 상황을 설명했다.

[그 결과를!! 3일 뒤에 저희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라드와 주이와의 대진! 이야, 정말 기대되는데요?!]

[하하, 어서 그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좋죠?! 정말 이번 시즌은 레전드입니다!!]

박동진 해설이 시즌 마지막까지 볼거리가 많다고 기쁘게 웃자 유기현 해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프링과 마찬가지로 주이와 제라드의 대결인데 과연 그 결과도 전과 같을지 기대되네요. 자, 양 팀 모두 준비 많이 하시고 결승 무대에서도 좋은 모습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네! 그러면 우리는 결승 무대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 * *

[게임/9999999] 와 오늘 제라드 경기력 뭐냨ㅋㅋㅋㅋㅋㅋ

오늘은 또 갑자기 호흡 개좋은데? 얘네 원래 이렇게 경기력이 복불복이었음??

진짜 이러다가 도장깨기 성공하는 거 아냐???

└ 진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약간 스프링 때 경기력 보이는 것 같던데.

└ ㄴㄴ 스프링보단 서머 중반 아님???

└ 그건 아닐걸. 호흡 좋긴 한데 아직 그때처럼 최단 시간 기록 다 깨고 그 정도 경기력은 아닌 듯?

└ 이게 맞는 듯. 지금 딱 스프링 느낌이야.

└ ㅅㅂㅋㅋㅋㅋㅋㅋㅋ 체스 진짜 불쌍하다... 맨날 제라드한테 발려서 킹콩이 올라오길 바라고 있었을 텐데 갑자기 제라드가 잘해 버리네.

└ 이게 운명이라는 건가...

└ 응 어차피 우승은 주이~ 배신자 수호랑 두유 척살 가자!!

└ 버러지 같은 게 계약 기간 끝나서 옮긴 거 가지고 배신자 드립 미쳤네;;

[게임/10000012] 제라드 오프더레코드 무슨 일이야ㅋㅋㅋㅋㅋ

시발 김레인zzzzzzzzz 무슨 콜을 저따구로 하냐곸ㅋㅋㅋㅋㅋㅋㅋ

목소리 무슨 일인데욬ㅋㅋㅋㅋㅋㅋㅋ

수호야, 살려줘! 얘가 나 괴롭혀!

ㅅㅂ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존나 웃기넼ㅋㅋㅋㅋ

└ 아니 진짴ㅋㅋㅋㅋㅋㅋㅋ 김레인 왜 이러는 거임????????

└ 미치겠닼ㅋㅋㅋㅋㅋㅋㅋㅋ 잘 들어보면 다른 선수들 웃는 소리도 좀 들림ㅋㅋㅋㅋㅋㅋㅋㅋ 쟤네도 웃긴 거 같은뎈ㅋㅋㅋ

└ 그 와중에 살려주겠다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수호도 개웃김ㅋㅋㅋㅋㅋㅋㅋ

└ 진짜 얘네 만담 듀오냐??ㅋㅋㅋㅋㅋㅋ

└ 이 형, 갑자기 왜 이렇게 애교가 많아졌어?

└ 진짜 김레인이 갖지 못한 게 뭐냐.

└ 없음.

└ 외모, 돈, 인기, 이수호, 애교. 모든 거 다 가졌네...

└ 여기에 이수호는 왜 있는뎈ㅋㅋㅋㅋㅋㅋ

└ 아 진짜 터졌네ㅋㅋㅋㅋㅋㅋㅋㅋ 싸우고 있는데 누가 저렇게 콜을 햌ㅋㅋㅋㅋㅋㅋㅋ

└ 진짜 김레인 너무 매력 있어... 미칠 거 같아... 형!!!! 레인 형!!!

└ 가만 보면 김레인 남팬들도 하나같이 이 상태인 것 같더라;;

└ 너 같으면 안 그러겠냐;; 진짜 김레인 우상 그 자체...

└ 저 형이랑 사귀는 사람은 진짜 전생이 지구를 구했음. 존나 부럽다. 나도 여자이고 싶어.

└ 남자여도 네가 이수호면 가능할지도....

└ 그만 파라 시발; 고소 들어온다고

└ ㄴㄴ 김레인은 엮으면 더 좋아할걸.

└ ㅇㅈㅇ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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