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40)

* * *

“아, 미치겠네.”

“또 왜 그러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플레이 영상을 보고 있던 은기가 한숨을 내쉬자 선우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은기의 한탄에 수호의 시선도 은기에게로 향했다.

“여기서는 싸우는 것보다 오브젝트 관리하는 게 나았던 것 같아서요.”

연습 경기를 보며 피드백을 하는 것은 좋으나 요즘 은기는 유독 날이 서 있었다.

제라드의 경기력이 좋고, 1위를 하고 있기는 하나 월드 챔피언십을 바로 앞둔 시즌이다 보니 다른 팀들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조급한 마음은 이해가 갔지만, 은기는 정도 이상으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최근 은기는 연습 시간을 빼면 하루 종일 플레이 영상을 보면서 피드백을 했다.

선우가 은기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여기는 싸움으로 이득 많이 봤으니까 괜찮지 않아? 오브젝트 관리한다고 해도 결국 전투는 피할 수 없었을 거고. 양쪽 다 신경 쓰는 것보단 싸움에 집중하는 것도 나는 괜찮았다고 보는데.”

“그런가…….”

“뭐, 내 생각은 그렇다는 거지. 근데 너 요즘 너무 초조해하는 거 아니야?”

순위 싸움이 치열하긴 해도 1위를 지키고 있는 상황인데 유난히 초조해했다. 선우의 물음에 은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너무 부담감 느끼지 마.”

어느새 다가온 주오가 은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은기는 그런 주오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어떻게 저보다 형이 더 여유로워요?”

“하하, 나도 그렇게 여유롭진 않아.”

“거짓말.”

주오의 답변에 은기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은기의 날 선 대답에 연습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선우와 수호는 이게 무슨 대화일까 추측하며 눈을 굴렸다. 하지만 의아함을 해소하기도 전에 코치진들과 회의실에서 얘기를 하고 있던 진형이 나와 입을 열었다.

“그만 떠들고 다시 연습하자! 다들 자리에 앉아.”

진형의 한마디에 선수들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수호는 옆자리에 앉은 주오를 힐끔 바라봤다. 하지만 주오는 그런 수호를 보며 살긋 웃을 뿐이었다.

수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고개를 돌린 주오 때문에 더는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눈을 깜빡이던 수호는 이내 게임이 시작됐다는 메시지가 떠오른 모니터로 시선을 향했다.

킹콩과 진행된 연습 게임은 치열했다. 요즘 긴장감 때문인지 사소한 실수가 잦은 은기의 섣부른 행동으로 게임이 한껏 기울어졌다. 하지만 주오와 수호의 활약으로 게임은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겼지만 은기는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전부터 느꼈지만 최근 은기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점점 예민해지는 모습에 수호는 힐끔 주오를 바라봤다.

1위 축하 파티를 했을 때 괜찮을 거라고 하던 주오였지만, 이 상태가 계속 진행된다면 괜찮을 것 같지 않았다. 은기 본인에게나 팀에게나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칠 것이 뻔했다.

“애들아, 한 시간만 쉬자. 그리고 은기는, 잠깐 나랑 얘기 좀 하고.”

그것을 느낀 것은 수호뿐만이 아니었는지 진형이 은기를 불러냈다. 한숨을 내쉬며 일어난 은기의 표정은 지독하게 피곤해 보였다.

진형은 은기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싸고는 휴게실로 향했다.

아무리 봐도 은기의 상태가 날이 갈수록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말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팀이 흔들릴 때 주오와 함께 선수들을 다독여 주던 것이 조은기였기 때문에 은기의 흔들림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우찬아, 은기 무슨 일 있어?”

게임 직후 나오는 분석 화면을 보던 우찬이 수호를 돌아봤다. 어쩐지 늘 해맑기만 하던 우찬의 표정도 가라앉아 있었다. 우찬의 시선이 잠시 주오에게 향했다 이내 수호에게 돌아왔다.

“……그냥 부담감 때문일걸?”

“그래?”

“응.”

물론 서머 시즌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스프링 결승에서도 떨지 않던 사람이 이제 와서 부담감을 느낀다는 게 이상했다.

“수호야, 쉬는 시간인데 우리도 잠깐 바람 쐬러 다녀올까?”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던 수호는 나지막이 들려오는 주오의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지금요?”

“응. 감독님도 한 시간 쉬라고 하시고, 은기 상태 보니까 얘기도 길어질 것 같아서.”

진형과 은기가 나간 연습실 문을 보는 주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왜 저런 얼굴일까. 생각하던 수호는 연습 시작 전에 은기와 주오 사이에 마찰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가요.”

수호가 주오와 함께 연습실을 나서려 하자 우찬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아! 이수호! 너 나가는 거면 돌아올 때 젤리 하나만 사다 주라. 밑에 편의점에서 파는 포도맛 젤리.”

“알겠어.”

손을 흔들며 다녀오라고 인사하는 우찬과 선우에게 눈인사를 건넨 수호는 주오와 함께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건물을 나올 때까지도 주오는 딱히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통 그게 뭔지 수호로선 알 수가 없었다.

“형 은기랑 무슨 일 있어요?”

“어? 아니. 싸울 일이 뭐가 있겠어.”

그건 그렇다. 숙소 생활을 같이하는 동안 주오와 은기가 부딪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주오도 동생들 편하게 해주려 배려를 많이 하는 편이었고, 은기도 그런 주오를 잘 챙겼다.

그런데 연습실에서는 왜 그랬을까.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는 수호를 보며 주오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걱정돼?”

“사이 나빠지면 안 좋으니까요.”

“예민해져서 그렇지 금방 괜찮아질 거야. 그것보다 수호는 괜찮아? 시즌 막바지라 긴장되고 그러지 않아?”

포스트시즌과 함께 월드 챔피언십 진출 팀들이 대략적으로 정해지는 시기가 지금이었다. 지금만큼 모든 팀이 의욕을 드러내고 또 긴장하고 초조해하는 시기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수호와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글쎄요. 저는 괜찮은 것 같아요.”

불안, 초조와 같은 감정은 전혀 모른다는 수호의 시선은 여전히 말갛기만 했다.

“하긴 수호는 긴장 같은 거 잘 안 하니까. 부럽다. 나도 안 하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는 주오의 표정도 차분하기만 했다.

수호와 주오가 공원 앞 벤치에 앉자 앞으로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우다닥 지나갔다. 주오는 애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형도 긴장해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그렇게 보여?”

아이들 뒤를 따르던 주오의 시선이 수호에게 향했다. 수호는 자신을 보는 생기 가득한 나무와 같은 다갈색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승하고 싶으니까 나도 긴장할 수밖에 없지. 우리 경기력이 떨어지면 어쩌나, 그리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팀들이 너무 잘하면 어쩌나,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문제고. 근데 그래도 내가 주장인데 그걸 드러내면 안 되잖아.”

주장이라는 게 그렇다. 사실 딱히 외적으로 보기에는 주장이라고 해봤자 하는 것은 별거 없었다. 그래도 이런 부분에선 주장의 역할이 중요하긴 했다. 개인으로 하는 게 아닌 팀 게임이었기에 중심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했고, 한 명이 흔들리면 그걸 붙잡아주는 게 주장이었다.

그런 자신이 불안해하고 초조해할 수는 없는 거라고 말하는 주오였다.

수호는 복잡해 보이는 주오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형, 멋있어요.”

“어?”

팀을 위해서 배려하는 것도, 중간에서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는 것도 멋있었다. 김주오는 그냥 멋있었다. 수호는 주오를 보며 웃었다.

“멋있다고요, 형.”

“……수호가 더 멋있어.”

주오는 갑작스러운 칭찬에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렸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조차 멋있게만 보여 수호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가질 않았다.

“좋아해요.”

“……나도. 나도 수호가 너무 좋아.”

당황과 민망함, 그리고 애정이 담긴 주오의 다갈색 눈이 수호에게 돌아왔다. 수호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보며 벤치에 놓인 주오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더 당황한 주오가 주변을 급하게 둘러봤다. 아직 해가 높이 뜬 오후에 장소도 장소였다. 그러다 주오는 주변의 사람들이 자기 일하는 데 바쁘다는 것을 깨닫고는 수호의 손을 마주 잡아왔다.

“하하, 진짜 너무 좋다. 휴식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맞닿은 손에서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수호는 유난히 포근하게 느껴지는 주오의 온기를 꽉 잡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마주 웃은 수호 이내 주오와 함께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느끼며 활기찬 오후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사람이 지나다닐 때면 잠시 맞잡은 손을 떼었다가 얼른 마주 잡고를 반복했다.

그게 꼭 게임하는 것 같아서 주오와 수호는 그럴 때마다 웃음을 터뜨렸다. 한낮의 휴식 시간은 너무도 달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진형이 말한 1시간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주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수호를 바라봤다.

“이제 돌아가 봐야겠다.”

“아쉽네요.”

“그러게. 다음에 또 올까?”

햇빛보다 더욱 따스한 온기를 품은 미소를 지으며 주오가 물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지만…….

“오늘 같은 일이 없으면 낮에 오는 건 불가능하겠죠.”

오후 내내 연습실에 박혀 있어야 하는 두 사람에게는 정말 기약 없는 약속이었다. 아쉽다는 얼굴을 하던 주오는 이내 방긋 웃어 보였다.

“휴일에라도 오자.”

시즌이 끝날 때까지는 없을 휴일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수호는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아, 그리고 월챔까지 끝나면 우리 여행 갈까?”

월드 챔피언십이 끝나면 숨 가쁘게 달려온 한 해도 끝이다. 그 뒤에 바로 올스타전이 있고, 그밖에 다른 경기들도 준비되어 있지만 여행은 즐길 수 있었다.

“좋아요. 어디 갈까요?”

“음, 어디가 좋지. 틈틈이 여행지 찾아봐야겠다.”

두 계절이 지나고 겨울 막바지에나 가는 여행이었지만, 주오는 당장 내일 떠나는 사람처럼 기대에 차 있었다. 그리고 그건 수호도 마찬가지였다.

수호는 국내 전국 투어 일정을 잡듯 여러 후보지를 늘어놓는 주오에게 대답하며 다시 연습실로 향했다.

“제주도는 어때?”

“제주도는 서머 시작 전에 갔었잖아요.”

차라리 다른 곳을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말을 건네며 주오를 보자 그의 표정이 굉장히 침울해져 있었다.

“그때 수호랑 대화도 많이 못 했는걸. 사진도 몇 장 없고.”

하긴. 주오의 말을 듣고 잠잠히 생각해 본 수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주오에 대한 마음을 확신하지 못해서 그와 거리를 두고 있던 때였다. 당연히 대화도 몇 없었고, 같이 무언가를 한 기억도 딱히 없었다. 돌이켜 보면 정말 아쉬운 여행이었다.

“그러면 다시 가요.”

“정말?”

“네.”

고개를 끄덕이자 침울해하던 주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참 다채로운 사람이었다. 김주오라는 사람은. 그게 재미있고 신기하고, 또 귀여워서 주오와 있으면 언제나 즐거웠다.

웃으며 연습실로 들어가려던 수호는 돌연 걸음을 멈췄다. 불현듯 무언가 생각난 듯 아, 하는 작은 탄성과 함께 멈춘 수호를 주오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왜 그래, 수호야?”

“우찬이가 젤리 사다 달라고 했던 거 깜박했어요.”

“아, 나도 잊어버려서 말을 못 해줬네. 지금 다녀오려고?”

같이 다녀오겠냐고 묻는 주오에게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휴게실에 스낵바 있잖아요. 거기에 포도맛 있는지 확인해 볼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같이 가고 싶은데.”

“바로 옆인데요, 뭘.”

“그래. 그럼 먼저 가 있을게.”

문을 열어 주오를 연습실에 들여놓은 수호는 연습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휴게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안쪽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렸다. 수호는 익숙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월챔 바로 전이니까 예민해지는 거 나도 이해한다.”

“죄송합니다…….”

휴게실 문을 열려던 수호는 문고리를 잡은 채 멈춰 섰다. 진형과 은기의 목소리였다. 이미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1시간이 거의 다 되었는데도 여전히 두 사람의 면담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나. 수호가 망설이는 동안에도 은기와 진형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주오 때문에 그래?”

진형의 말에 수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주오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나 싶었다. 대체 무슨 이유인지 수호가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은기가 안에서 한숨을 내뱉었다.

“……주오 형은 올해가 마지막이니까 우승시켜 주고 싶어요.”

“은퇴 앞두고 있는 애한테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시켜 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해. 그런데 의욕만 앞선다고 성적이 나오는 건 아니잖아. 마음 좀 진정시켜.”

휴게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수호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은퇴, 김주오, 마지막.

현실감이 없는 소리였다. 문고리를 잡은 수호는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알아요. 그래도 조급해지는 걸 어떡해요. 순위 싸움도 치열하고, 지금 이 실력으로 월챔에서 우승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은기의 낮은 음성이 짜증과 불안으로 뭉개졌다.

정말 이건 무슨 소리일까. 방금 전까지 자신과 대화하던 주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게 맞긴 한 걸까. 월드 챔피언십이 끝나고 여행을 가자던 주오가 정말 은퇴를 한다고?

우찬이 부탁한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서 있던 수호는 갑자기 어깨에 내려앉는 손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진형과 은기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 누가 다가오는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수호의 시야에 걱정스럽게 자신을 보는 주오가 들어왔다. 수호는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울컥 치밀어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보는 수호의 당혹 어린 시선과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상황을 파악한 주오가 곤란한 얼굴을 해 보였다.

“너무 안 와서 와봤는데…… 음, 놀랐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주오의 얼굴에는 어색함이 가득했다. 주오는 수호가 놀란 이유가 갑작스러운 자신의 등장 때문인지, 대화 소리 때문인지 몰라 애매한 물음을 던져왔다.

“……형 은퇴해요?”

차분히 내려앉는 수호의 음성은 힘이 없었다.

수호는 아직도 얼떨떨했다. 생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7년 차이긴 하지만 여전히 실력이 있었다. 그래서 주오는 분명 선수 생활을 더 오래할 거라고 당연시하게 생각했었다. 분명 내년에도 자신과 함께할 거라고, 그렇게 여겼다.

“응. 올해가 마지막이야.”

주오의 음성은 조심스러웠지만 단호했다.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다는 듯이.

수호의 눈가가 찡그려진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려 수호가 입을 열었지만, 선수를 치듯 주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일단 다른 데 가서 얘기할까?”

안쪽에서 심각하게 얘기 중인 감독님이나 은기한테도 방해될 것 같으니까. 주오의 말에 수호의 시선이 문 뒤에 있을 두 사람에게 향했다.

말없이 입을 꾹 다무는 수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고 주오는 비상구로 향했다.

비상구는 조용했다. 수호와 주오는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주오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수호였다.

“왜요?”

“뭐가?”

뭐가, 라니. 그게 지금 답변인가. 수호는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주오를 바라봤다. 주오는 유독 매섭게 느껴지는 수호의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형 잘하잖아요. 그런데 왜 은퇴해요?”

“지금이 딱 좋은 때인 것 같아서.”

“좋은 때가 뭔데요.”

같은 팀에서 뛰자고 꼬신 건 주오였다. 그런데 막상 같은 팀이 되고나니 은퇴를 하겠다는 주오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호는 어서 대답해 보라는 눈으로 주오를 바라봤다.

“올해가 딱 좋게 마무리하고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올스타전에서 재인이도 그랬잖아. 조금만 실수해도, 별다른 활약이 없어도 퇴물이라고 욕먹는다고. 커리어가 있는 선수일수록 그게 심해. 그건 수호, 너도 알지?”

모를 리가 없었다. 지금 몇 년째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게 수호였다. 잘하는 신예만 나타나면 늘 비교되기 일쑤였다. 경기에서 캐리를 하지 못하면 실력이 떨어졌다, 이제 예전 같지 않다는 말도 수없이 들어왔다. 그건 모든 프로 선수가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주오는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는 수호를 마주 봤다.

“나도 아직까지는 쓸 만하다고 생각해. 그런데 그 생각으로 계속 프로를 하고 싶지는 않아. 수호야, 나는 언제까지고 잘하는 선수로 기억되고 싶어.”

모든 프로가 바라는 마지막이었다. 언제나 잘하고, 멋있었던 선수.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그것 때문에 은퇴를 하겠다는 주오를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형은 몇 년 더 해도 충분히 그런 선수로 기억될 수 있어요. 저한테 같이 팀에서 뛰자고 했잖아요. 그런데 형이 그만두는 게 어딨어요.”

속상한 듯 수호의 얼굴이 뚱해졌다. 주오가 은퇴를 한다고 해서 관계가 달라질 건 없겠지만, 그래도 싫었다. 지금보다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 거고, 멀어질 게 분명했다.

수호는 그게 싫었다. 같이 연습하고, 같이 숙소 생활하면서 그렇게 있고 싶었다. 지금처럼 함께하고 싶었다.

방금처럼 휴식 시간이 생기면 잠깐이라도 좋으니 산책을 가는 것도 좋았고, 아침마다 자신을 흔들어 깨우며 칫솔을 건네주는 것도 좋았다. 야식을 먹자며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주오를 보는 것도 좋았고, 소소하게 하루에 대해 얘기하다 같이 잠드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주오가 은퇴를 하고 나면 그것도 다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다.

입을 꾹 다물고 바닥을 보는 수호의 손을 살며시 잡은 주오가 허리를 숙여 수호와 눈을 맞췄다.

“미리 말 안 해줘서 미안해.”

수호는 미안하다는 듯 어색하게 미소 짓는 주오와 눈을 맞췄다. 원망이 일었다. 기분 나쁜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먼저 꼬셨으면서…….”

억울했다. 수호는 짧지 않은 프로 생활 중에 올해가 가장 즐겁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느끼게 해준 김주오라는 사람이 이제 없어진다는 것도, 그리고 은퇴에 대해서 자신에게 단 한 번도 말을 해주지 않았다는 것도 너무나 억울했다.

“왜 저한테 말 안 했어요?”

원망 섞인 수호의 음성에 주오의 표정이 흐려졌다. 화가 난 수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굳이 먼저 꺼낼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어. 아직 반년 가까이 시간이 남기도 했고, 사실 나한테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어서…….”

어쩔 줄 몰라 떨리는 음성으로 주오가 말을 건넸지만, 수호에겐 들리지 않았다. 수호에겐 주오가 은퇴한다는 것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은퇴하지 마요.”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수호의 입에서 흐려진 음성이 터져 나왔다.

“……미안해, 수호야.”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주오가 한참 망설이다 결국 그러지 못한다는 사과를 건넸다. 조심스러운 말투였지만 그 속에 자리한 단호한 결심에 수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이 울컥하면서 복잡해졌다. 이게 무슨 마음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쉬움인 것도 같고 서운함, 혹은 배신감, 그게 아니라면 허탈함인 것 같기도 했다.

“우승컵 올해도, 내년에도 같이 들어요. 전 형이랑 같은 팀에서 뛰고 싶어요.”

조금 더 주오와 무대에 함께하고 싶었다. 이제 막 느낀 즐거움을 잃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수호의 손은 주오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나도 그러면 좋겠지만, 그래도 은퇴하겠다는 생각은 바뀌질 않을 것 같아.”

“왜요? 올해도, 내년도, 그리고 내후년도 우승하면 형은 더 잘하는 선수로 남을 수 있잖아요.”

수호 본인도 지금 어울리지 않게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은퇴는 본인의 문제였고 타인이 왈가왈부할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수호는 올해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간절함이 담긴 수호의 검은 눈이 반짝였다. 주오는 그런 수호를 보며 또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 얘기까지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는데……. 사실 프로 생활을 더 이어가는 게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많이 지치더라. 이제는 쉬고 싶어.”

“형…….”

피곤하다는 듯 힘없이 웃는 주오를 보자 더 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지쳐서 이제는 선수 생활을 그만두겠다는 사람에게 자신의 바람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입술을 꾹 무는 수호와 다시 시선을 맞춘 주오가 이내 평소와 같은 미소로 웃어 보였다.

“내가 꼬셨는데 오래 같이 못 뛰어서 미안해.”

“…….”

“남은 시간 동안 우리 열심히 하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고 떨어진 주오를 수호는 여전히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이윽고 수호는 입술을 달싹이다 주오의 손을 놓았다.

“……먼저 들어갈게요.”

“수호야…….”

자신을 부르는 주오의 음성에도 수호는 꽉 닫힌 비상구 문을 열었다. 지금은 주오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 후 연습이 끝나는 동안에 수호와 주오가 나눈 대화라고는 게임에 대한 것뿐이었다. 이야기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짧은 대화.

주오는 대화를 더 이끌어가려고 노력했지만, 수호는 지금의 감정으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수호는 주오만 보면 울컥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명백한 서운함이었다.

“수호야…… 맥주 사 왔는데 같이 마실래?”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이불 속으로 둥지를 틀고 들어간 수호는 조심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낮은 음성에 더욱 이불을 끌어 몸을 덮었다.

“……아니요.”

“그래……. 그럼 쉬어.”

주오가 먹지도 못하는 술을 사 온 이유야 뻔했다.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주려 하는 것임이 분명했지만, 지금 주오와 술을 마시면 화를 낼 것만 같았다. 형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수호는 둥글게 몸을 말고 포근한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신의 침대고, 이불이었다. 주오와 사귀게 된 뒤로 꼭 그의 침대에서 함께 잤기에 자신의 이불을 덮어본 건 오랜만이었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닫게 되자 또 기분 나쁜 감정 덩어리가 울컥 올라왔다.

“뭐야, 수호는 안 나온대?”

“……피곤한가 봐.”

문밖에서 들려오는 작은 음성이 수호는 이불을 꾹 쥐었다. 주오가 은퇴를 하면 이제 같이 잠들 수 없을 거고, 이런 식으로 숙소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일도 없을 거다. 수호는 그게 너무 슬펐다.

왜 자신에게 미리 말을 하지 않았는지도 너무 야속했다.

“같은 팀 하자고 했으면서…….”

틈만 나면 제라드로 오라고, 자신과 함께하자고 하던 주오의 말간 얼굴이 떠올라 수호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

수호는 살면서 처음으로 우울함을 느꼈다. 사람이 너무 좋다는 것도, 그 사람 때문에 이렇게 침울해지는 것도, 모든 것을 느끼게 해준 게 김주오였다. 그래서 마음이 복잡했다.

수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눈을 감았다.

* * *

수호가 대화를 거부하는 일은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수호야, 같이 잘까?’

어제보다 더욱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묻는 주오를 보며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혼자 잘래요.’

그런 식으로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수호와 주오의 대화는 점점 줄어갔다.

분위기를 풀어내려 주오가 발을 동동거리는 걸 알았지만, 여전히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주오의 은퇴를 받아들일 각오가 서지 않았다.

[아아, 제라드!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못한 건가요? 오늘따라 미드 정글 호흡이 좋지 않습니다!]

[그 반면에 3위를 달리고 있던 체스는 오늘 플레이가 미쳤는데요?!]

팀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소통이 줄어들자 당연히 팀 분위기도 어색해졌다. 그 여파는 경기에서 가감 없이 드러났다.

[체스!!! 아아악!!! 체스 제라드에게 2:1로 승리합니다!!]

[어어? 이러면 제라드가 2위, 주이가 1위가 되죠?! 플레이오프 직전까지 경기마다 순위 변동이 일어나다니. 이번 서머 시즌 역시 레!전!드!]

[GG!!!!]

1위를 기념한 축배를 들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제라드는 2위로 내려앉았다.

수호는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게임에 한숨을 내쉬었다. 게임을 하는 내내 상대에게 집중이 되는 게 아니라 옆자리에 앉은 주오에게 온 신경이 쏠렸다.

“오늘 주오랑 수호 많이 흔들리던데 오더 문제야?”

어느새 선수석으로 들어와 두 사람 간의 오더 충돌인지 단순한 실 수인지 묻는 진형을 보며 수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실수했어요.”

“네가? 별일이네. 일단 이 부분은 돌아가서 다시 얘기하자.”

“네.”

진형은 오늘 플레이 중 짚고 넘어갈 부분을 정리한 노토를 다시 보며 이번에는 은기에게 향했다. 은기는 오늘 패배의 타격이 컸는지 여전히 자리에 앉아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진형이 은기의 목과 어깨를 주물렀다.

“헤이, 은기. 너무 처져 있는데? 오늘은 그래도 전보다 실수가 줄었어.”

“그러면 뭐 해요. 졌는데.”

“그러니까 피드백을 하는 거지. 너는 실수 줄여 나가는 것만 생각해. 좀 더 미래를 봐야지. 사람이 흔들릴 때는 있는 법이니까.”

“하아, 잘 모르겠어요.”

한 손으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큰 은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짐을 챙기고는 선수석을 나가 버렸다. 은기의 태도에 우찬이 평소와는 다르게 심각한 얼굴로 진형을 바라봤다.

“은기 저러는 거 괜찮아요?”

“안 괜찮지. 계속 저러면 큰일인데. 일단 우찬이 너는 은기 걱정 말고 네 플레이에 집중해. 선수들 멘탈 관리는 감독인 나와 코치진이 하는 거니까.”

“알겠어요.”

하지만 여전히 은기가 신경 쓰이는지 우찬은 그가 나간 방향을 계속 힐끔거렸다.

정말 곤란한 상황이었다. 팀 전체에 균열이 나고 있었다. 그것에 일조하고 있는 수호가 장비를 챙기기 시작하자 주오가 수호 옆에 다가섰다. 하지만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듯 주오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망설였다.

결국 주오보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선우였다.

“이수호, 네가 무슨 일로 실수를 다 하냐. 나 진짜 놀랐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2위로 떨어져서.”

“뭐, 1위로 올라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 그런데 좀 아쉽긴 하다.”

어깨를 툭툭 두드리던 선우가 이윽고 수호의 목에 팔을 감쌌다.

“자자, 그러면 가봅시다.”

수호는 평소와 다르게 자신을 끌고 나가는 선우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수호의 시선을 눈치챈 선우는 입꼬리를 둥글게 휘어 웃었다.

“내가 눈치가 좀 빠르잖아. 지금 주오 형이랑 불편하지?”

“……어떻게 알았어요?”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애들 다 알걸.”

매일 붙어 살던 두 사람이 갑자기 대화도 줄고 같이 있는 꼴을 못 보니 눈치채지 못하는 게 신기할 지경이긴 했다.

“그래서, 싸웠어? 형이 너한테 이기려고 하지는 않을 텐데.”

애초에 싸움을 해본 적이 없긴 했으나 만약 그렇다면 분명 선우의 말대로 주오가 져줬을 거다. 그게 은퇴 문제가 아니었다면.

수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선우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고는 이내 웃음이 터졌다.

“네가 한숨을 내쉬고 별일이네.”

“선우 형. 형은 알고 있었어요?”

“뭘?”

“주오 형…… 은퇴한다는 거요.”

“아아.”

선우는 낮은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전해 들은 건 아닌데 느낌상 올해가 마지막일 것 같긴 했지.”

이번에는 수호의 시선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어떻게요?”

“스프링 우승했을 때도 우승 소감이 꼭 월챔 우승하고 은퇴하겠다는 느낌이었잖아. 형도 오래 하긴 했지.”

“그게 납득이 가요? 아직도 잘하는데 왜 은퇴를 해요?”

도통 모르겠다는 듯 수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선우는 수호의 어깨를 더욱 감싸 쥐며 말을 꺼냈다.

“잘하니까 그러는 거일 수도 있지. 너 같으면 뛸 수 있을 때까지 뛰면서 성적 점점 안 좋아지고 은퇴하고 싶겠어? 나는 싫다. 나는 조금 아쉽더라도 내가 정말 잘했을 때 그만두고 싶어.”

“……그 말 주오 형도 했어요.”

“보통 프로들이 그럴걸? 어차피 프로게이머가 평생 직업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누구보다 잘할 때 그때를 끝으로 하는 게 가장 기억에도 많이 남고, 나 스스로한테도 부끄럽지 않겠지.”

하지만 여전히 수호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지막에 잘한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싶었다. 다른 선수들은 그런 마음을 품고 선수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수호는 그저 게임이 좋아서 하고 있는 거였다.

“그러면 형은 왜 그만 안 뒀어요? 형 탑솔러 했을 때 잘했잖아요.”

선우는 데뷔 2년 만에 탑라이너 1위를 할 만큼 잘하는 선수였다. 그래서 선우가 서포터로 전향한다는 기사가 나왔을 때 다들 놀라기도 했었다.

“나 겨우 2년 뛰었어. 그런데 벌써 은퇴하기엔 이르지 않겠어? 탑에서 1위 해봤으니까 이번엔 다른 걸로 1위 해봐야지.”

“그러다가 서포터로 1위 못 하면요? 그러면 성적 안 좋아지고 은퇴하는 거 아니에요?”

“너 말이 제법 너무하다?”

“그렇잖아요.”

뭐가 다른가. 은퇴할 때 서포터로 정상에 서지 못한다면 결국 선우가 바라는 이상과 멀어지게 되는 거였다. 고개를 갸웃하는 수호를 보며 선우가 웃었다.

“그래도 탑솔러로 정상에 섰잖아. 그게 남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서포터로도 정상에 설 거야. 그럴 자신 없었으면 난 서포터 전향도 안 하고 바로 은퇴했을 거다.”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는 알게 되겠지. 잔인한 말일 수는 있는데 프로게이머는 나이가 깡패잖아. 너도 언제까지고 세계 최고로 있을 수는 없을걸. 네가 네 전 사람 밀어내고 그 자리 앉았잖아. 넌 밀려난 상태로 은퇴하고 싶냐, 아니면 정상에서 네가 물러서고 싶냐?”

수호는 이번 질문에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의로 내려놓는 것과 타인에 의해서 끌어내려지는 것. 둘 중 고르라면 전자였다.

수호의 검은 눈이 생각에 잠겨 가라앉자 선우가 미소 지었다.

“주오 형이 딱 그런 마음일걸? 그리고 솔직히 은퇴 얘기로 지금 둘 사이가 껄끄러워진 거면 난 주오 형 편이다. 아무리 사귄다고 해도 내 길은 내가 정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조언은 해도 강요는 아니다.”

“…….”

그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게 주오의 은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만큼 주오가 수호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했다.

“아아, 난리도 아니네. 은기 이 자식도 문제고 말이야.”

수호는 장난스럽게 불평을 토로하는 선우에게 이끌려 차가 주차되어 있는 지하로 끌려갔다.

* * *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고도 수호와 은기의 상태는 여전했다. 오히려 은기는 떨어진 순위에 조바심 내며 실수를 했고, 수호는 여전히 플레이에 집중하지 못했다. 결국 경기력이 크게 흔들렸다.

[아아! 제라드! 이건 무슨 상황이죠? 갑자기 SUHO 선수 혼자 배론 둥지로 향하고 죽었습니다!]

이영중 캐스터의 안타까운 탄성과 함께 관중들 사이에서 아쉬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요 몇 경기 동안 제라드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컨디션의 문제일까요? 지난번 경기에서 RAIN 선수와 SUHO 선수의 호흡이 틀어져 실수가 나왔었는데 오늘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네요.]

유기현 해설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모니터와 선수석을 번갈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제라드의 오랜 팬으로 있던 박동진 해설은 땀이 나는 이마를 짚으며 눈가를 찡그렸다.

[시즌 후반에서 이렇게 흔들리면 좋지 않은데요. 일단 여기서는 침착하게 다시 호흡을 맞추고 전투를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오늘도 패배하면 4위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죠. 지금 1위부터 5위까지가 승패의 수가 별로 차이가 안 나서 한 게임 한 게임이 아주 중요합니다. 현재는 체이스전 이후로 킹콩 전에서도 패배해서 지금 3위에 있는 제라드로서는 이번 경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선수단 현 랭킹을 보며 유기현 해설이 말을 끝내는 동시에 이영중 캐스터가 소리를 질렀다.

[아, 하지만 이미 배론을 먹은 주이 선수들이 강화된 병사들을 이끌고 제라드의 본진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걸 막을 수 있을까요?!]

수호의 실수로 인해 오브젝트는 주이에게 넘어갔고, 운영에 큰 이득을 주는 오브젝트의 영향으로 제라드는 수세에 몰렸다. 기지 안에서 마지막 전투만이 희망이었다.

“다들 아이템 정비하고, 무조건 막아야 해.”

주오의 말과 함께 본진 안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주이 선수들을 보고 선우가 소리쳤다.

“지금 우리 딜 약해서 상대 탱커 못 잡아! 상대 원딜이나 미드 암살밖에 답 없어요!”

“일단 내가 OZ 보고 있어!”

주오와 선우가 상대와 대치하면서 시간을 끄는 동안 폭딜이 나오는 우찬이 OZ에게 돌진했다.

[아아아!!! OZ 선수! 여기서 BONG 선수의 스킬을 피해 버립니다! 제라드 지금 안 막으면 게임 끝나요!!]

박동진 해설이 비명을 질렀다. 조급해진 상황에서 발을 굴리는 건 제라드 선수만이 아니었다. 해설석에서도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수호! 무조건 따야 돼! OZ든 MAIL이든 무조건 따야 해!”

우찬의 다급한 오더에 수호가 상대의 미드와 원딜을 바라봤다. 하지만 둘 다 이미 단단한 탱커들에게 보호받는 포지션이 나와서 혼자 들어가는 건 무리가 있었다.

“수호야, 내가 같이 뚫어줄 테니까 그때 들어가서 잡아.”

혼란 속에서도 차분한 주오가 말고 함께 상대 탑인 SUBI를 제치고 원딜인 MAIL에게 이니시를 걸었다.

다급한 만큼 집중력이 중요했다. 하지만 요즘 집중력이라고는 보기 힘든 수호는 대쉬기를 사용하면서 요리조리 피하는 상대 원딜을 잡아내지 못했다.

MAIL은 수호를 제치고 제라드의 보석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본 공격력이 강한 원딜이 보석을 타격하자 보석은 빠르게 체력이 빠졌다.

[GG!!!!! 주이가 제라의 보석을 깨뜨리며 게임을 끝냅니다!!!]

이영중 캐스터의 외침과 함께 제라드의 팀원들은 키보드와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처참할 만큼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벌써 3연패를 달성하고 있었다.

자신의 실수가 크게 작용했던 게임에 수호는 두 손에 고개를 파묻었다.

“하아……. 진짜 빡세네.”

우찬이 울먹이며 의자에 늘어졌다. 게임이 끝나자마자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은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장비를 챙겨 선수석을 나갔다. 찬바람이 쌩쌩거리는 은기의 뒷모습을 보며 선우가 곤란하다는 듯 눈가를 찡그렸다.

“분위기 장난 없네.”

“다들 침울해하지 말고 짐 챙겨.”

다른 선수들만큼 화가 나고 침울해하는 건 아니지만 주오의 표정도 굳은 채였다.

“너네 단체로 미쳤어?! 정신 안 차려!”

진형이 흉포한 기세로 선수석에 들이닥쳤다. 원래도 불같은 성격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말을 험하게 하는 편이 아닌 진형이었다. 그런 진형이 포효하듯 외치는 걸 보면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만큼 오늘 경기력은 형편없었다.

수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장비를 챙겼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진형이 수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호, 너 개인 면담 좀 하자.”

“……네.”

수호에게 향한 진형의 형형한 눈빛이 걱정됐는지 주오가 다가오려 했다. 하지만 그런 주오의 팔을 잡아끈 건 선우였다. 선우는 양쪽에 우찬과 주오를 끌고 먼저 선수석을 나섰다.

“거기서 왜 혼자 들어갔어? 거리 조절하면서 시야만 밝혀도 상대 배론 못 먹었을 텐데.”

진형의 말대로였다. 오브젝트를 뺏기기 전까지 주이와 제라드의 기세는 비슷비슷했다. 오히려 제라드가 조금 더 우세한 상황이었다. 그런 팽팽한 상황에서 수호가 한 선택은 승리를 냅다 던져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진형이 이렇게까지 분노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수호는 고개를 처박고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부담감이야?”

“……아뇨. 그냥 집중이 잘 안 돼요.”

“하아……. 일단 돌아가서 제대로 얘기하고 일단 나와라. 넌 돌아가면 제대로 면담이야.”

“네…….”

힘없이 늘어진 수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다독인 진형은 그대로 수호를 감싸 안고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은 대기실대로 분위기가 난리 난 상태였다. 한껏 예민해진 은기와 눈치를 보는 우찬, 그리고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선우. 그리고 말없이 굳은 얼굴로 이 상황을 지켜보는 주오까지.

그런 셋을 앉혀두고 짧게 피드백을 하는 코치진들까지도 표정이 굳어 있었다.

오늘의 결과로 현 순위 4위. 상위 5팀이 순위 싸움이 치열한 만큼 패배했을 경우 등수는 쭉쭉 떨어졌다. 뒤에 있는 상위권 팀의 경기에 따라 순위는 바뀌지만 그래도 1위를 달리던 제라드로서는 뼈아픈 등수였다.

수호는 무거워지는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어, 너 왔냐. 분위기 좀 어떻게 해봐라. 누가 보면 초상 난 줄 알겠다.”

선우가 침울해진 분위기를 띄워보려는 듯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그럼에도 분위기는 여전히 어두웠다.

“……죄송해요. 제가 요즘 집중을 잘 못 해서 이렇게 된 것 같아요.”

“야야, 너만 집중 못 하는 것도 아니고 다 같이 못 하는 거지.”

이런 식으로 다운된 수호를 같은 팀에 있으면서도 처음 본 선우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수호는 그럼에도 고개를 들지 않고 애꿎은 바닥만 노려봤다.

아무도 자신을 질타하진 않았지만 수호도 알고 있었다. 요즘 경기력이 흔들리는 이유가 자신이라는 것을.

수호는 처음 느껴보는 자괴감에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같이했던 팀원들이 실수를 하고 축 처지는 걸 이해할 수 없었던 수호였지만, 최근에는 그들이 왜 그렇게 침울해했는지 알 수 있었다.

“수호야.”

해소되지 않는 답답한 마음을 끌어안고 바닥을 노려보던 수호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낮은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주오가 평소처럼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나랑 얘기 좀 하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