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40)

Chapter 5 어려운(?) 사람

스프링 스플릿이 끝나고 모든 CKR 리그 팀에게는 단비 같은 휴식이 찾아왔다. 물론 제라드도 일주일간 휴식과 여행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 시즌을 어느 팀보다 좋은 성적으로 마감한 제라드 팀원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이야! 바다 색 진짜 예쁘다!”

아직 여름이 되지 않아서 그런지 제주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 덕에 맑게 빛나는 바다를 보며 우찬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폴짝거리며 뛰어다녔다.

우찬의 뒤에 서 있던 은기는 그가 달리며 튀겨대는 모래에 눈가를 찡그렸다.

“야! 모래 튀니까 뛰지 말라고!”

“신난다는데 그냥 내버려 둬. 너도 사실 좋잖아.”

선우는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우찬에게 성을 내는 은기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수호는 물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기에 멀리 떨어진 곳에 서서 신나서 하하, 호호 웃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이 저렇게 좋을까. 한동안은 팀원들이 바다 앞에서 놀고 있을 것 같아 수호는 조용히 암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4월 중순의 제주도는 서울보다 기온이 따뜻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는 느낌이 좋아 수호의 입가에 선뜻 미소가 걸렸다.

“수호는 바다에서 안 놀아?”

낮은 음성이 바람을 타고 수호의 귀를 간질였다. 수호는 심장이 단번에 쪼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설레는 마음과 함께 찾아온 불안한 마음 탓이었다.

수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느새 자신 앞에 서 있는 주오를 바라봤다. 주오는 평소와 같은 온화한 얼굴이었다.

주오를 보고 있으면 간질거리는 산뜻한 느낌이 찾아왔다. 주오를 향한 마음을 깨닫기 전에도, 그리고 깨달은 지금도.

“……물 안 좋아해요.”

“그래도 보는 건 예쁘지?”

에메랄드빛으로 환하게 빛나는 바다를 보는 주오의 눈이 반짝였다. 수호는 생각했다. 바다도 예쁘지만, 그걸 보고 있는 주오가 더욱 예쁘다고.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다음 순간 수호는 더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느끼는 게 맞는 것일까. 방심하는 순간순간마다 주오를 향한 감정이 툭툭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수호는 괜히 무릎만 내려다봤다.

“……보는 건 예뻐요.”

“바다 놀러 온 것도 기념인데 우리 사진 찍을까?”

대체 어디서 난 건지 주오가 결코 일반 카메라라고 볼 수 없는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 여행 온다고 만반의 준비를 다 한 주오가 나이와 안 맞게 어리고 귀엽게 보였다.

“사진은 아까 찍었잖아요.”

이미 제라드 공식 유x브 채널에 올릴 영상과 사진들은 사무국에서 찍어 간 후였다. 굳이 또 찍을 이유는 없어 수호가 고개를 갸웃하자 주오는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이건 우리 둘만 찍을 사진. 그래서 카메라도 가지고 온 건데, 혹시 싫어?”

주오가 눈가를 축 내리며 시무룩한 얼굴을 해 보였다. 이쯤 되면 주오 본인도 수호가 저 얼굴에 약하다는 걸 알고 일부러 하는 것 같았다.

수호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는 주오와 한동안 거리를 두고 싶었다. 하지만 주오가 저럴 때면 마음처럼 쉽게 멀어질 수가 없었다.

결국 수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찍어요.”

수락이 떨어지자 주오가 수호 곁으로 한걸음에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자 한순간에 보디워시의 코코넛 향이 훅 느껴졌다. 자신이 쓸 때는 몰랐지만, 주오가 쓰면 향이 정말 좋았다. 달콤한 향기가 수호의 마음을 사르륵 녹여갔다.

그게 좋으면서도 긴장돼 수호는 몸을 굳혔다.

주오는 그런 수호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싸며 자신에게 당겼다.

“수호야, 여기 봐.”

“……네.”

카메라를 들어 올리고 앵글을 보며 활짝 웃는 주오를 힐끔 본 수호가 자신을 비추는 앵글에 시선을 맞췄다. 옆에 선 주오로 인해 수호는 심장이 크게 뛰었다. 둥둥, 자신의 심장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설레고 두렵게 만드는 격한 소리에 수호가 숨을 삼킨 그때 셔터음이 터졌다. 찰칵하고 여러 번 이어지는 소리가 끝날 때쯤에는 머리가 핑하고 돌았다. 너무 숨을 오래 참은 탓이었다.

수호는 여전히 쿵쿵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사진을 보며 환하게 웃는 주오를 바라봤다.

“사진 잘 나왔다.”

주오를 보던 수호가 시선을 돌렸다. 카메라로 향한 주오의 맑은 눈이 너무 반짝였다. 그게 너무 예쁘고 탐이 나 곤란했다. 수호는 괜히 발끝으로 모래를 푹푹 찍었다.

“숙소 돌아가면 파일 수호한테도 보내줄게.”

“네.”

“야, 김주오, 이수호! 이제 슬슬 갈 거니까 빨리 와!”

때맞춰 자신들을 부르는 진형의 외침이 반가웠다. 수호는 어색해진 주오와의 시간을 벗어날 수 있어 안심이 되었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수호가 힐끔 주오를 바라봤다. 주오는 아쉽다는 얼굴을 한 채로 수호를 바라봤다.

“벌써 갈 시간인가 봐. 이만 갈까?”

“……네.”

둘은 무거운 걸음을 떼며 천천히 일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음에 둘이 놀러 올까?”

“네?”

갑자기 날아든 주오의 물음에 수호는 놀라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그런 수호를 주오가 따스한 시선으로 반겨왔다. 수호는 또다시 쿵 내려앉는 가슴에 숨을 들이마셨다.

“그냥, 다음에 수호랑 둘이 오면 좋을 것 같아서.”

“아, 기회 되면…… 그때 와요.”

기회가 되면. 수호는 시선을 돌리며 말끝을 흐렸다. 이제 주오와 둘이 서서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긴장되고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여행이라니. 수호에게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피하듯 시선을 돌리는 수호를 보며 주오가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주오에게서 시선을 돌린 수호는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수호야.”

“……왜요?”

“손잡아도 돼?”

차분하게 흐르는 주오의 음성에 모래사장을 사뿐히 밟고 가던 수호가 멈칫했다. 수호를 따라 주오의 걸음도 멈췄다.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주오의 시선을 마주한 수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 많잖아요.”

“역시 그렇지?”

아마 평소 같았으면 수호는 주오의 질문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거다. 그는 타인의 시선 따위를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주오도 알고 있을 사실이지만, 그는 수호가 내민 답변에 그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보일 뿐이었다.

괜히 마음이 무거워진 수호는 다시 시선을 내린 채 걸음을 옮겼다.

일상이 되어버렸던 주오와의 스킨십이 없어진 건 결승전을 앞둔 며칠 전부터였다.

2주가량 주오와 수호의 사이는 제법 멀어졌다. 수호는 주오와 단둘이 있게 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고 수호 쪽에서 종종 먼저 해왔던 스킨십이 사라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의 관계는 어색한 거리감을 가지게 되었다.

수호도 주오를 전처럼 편하게 대하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주오만 보고 있으면 온몸의 근육들이 급격하게 굳었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두근거리는 마음은 수호를 긴장하게 만들었고, 혼란스럽게 했다.

그럴수록 수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주오를 향한 감정은 명백한 사랑이라는 것을.

수호는 처음 겪어보는 지독한 첫사랑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아 수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만 가고 있었다.

* * *

김주오는 요즘 이수호와 마찬가지로 번뇌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주오는 요즘 초조함과 불안감 속에서 산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뼈저리게 알아갔다.

김주오는 올해가 프로 생황을 하면서, 그리고 살면서 가장 기쁘고 소중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오래도록 좋아하던 사람과 가까워졌고, 그 사람도 어느 정도 자신에게 호감을 비췄다.

그래서 주오는 더욱 노력했다. 수호가 자신에게 더욱 마음을 열어주기를 바라고 바랐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수호는 멀어져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수호가 단순히 기분이 좋지 않은 걸로 여겼다. 지독한 몸살을 앓고 난 후 컨디션이 아직 전부 회복되지 않아서 쉬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결승전을 치르고 난 후에도 수호는 어딘가 자신을 불편하게 여겼다.

‘수호야, 우리 데이트 갈까?’

휴일에 수호와 함께 밥을 먹거나 산책을 하는 건 이제 주오에겐 일상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결승전이 끝나고 꿀 같은 휴식을 얻은 주오는 수호에게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수호는 곤란한 눈으로 시선을 맞추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그냥 쉴래요.’

‘아직도 몸이 안 좋아?’

‘아뇨, 그건 아닌데. 그냥…… 쉬고 싶어서요.’

그렇게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가는 수호를 보는 주오는 참담함을 느꼈다. 그때 확신했다. 수호는 지금 그저 자신을 피하는 것이라고.

그 후에도 여러 번 수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전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수호를 대했지만 수호는 그럴 때마다 그저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주오는 수호가 어색한 눈빛과 표정으로 자신을 밀어내고 거리를 둘 때마다 발을 디디고 있는 땅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왜 갑자기 수호가 자신을 다시 불편하게 여기는 건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물어보는 순간 수호가 어떤 대답을 꺼낼지 두려웠다.

‘형,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우리 이제 그러는 거 그만둬요.’

그런 말을 꺼낼까 무서워 주오는 섣불리 수호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기다렸다. 먼저 수호가 말을 해주길.

하지만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더욱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더 이상 수호가 자신을 피하는 걸 주오는 견딜 수 없었다. 이제는 수호와 가까워지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수호가 자신에게 보여주던 담백하고 순수한 미소를 잃고 싶지 않았다.

담담하게 입술을 내밀며 입을 맞춰달라고 하는 수호의 모습을 다른 이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주오는 자신을 보며 두근거린다고 말하던 수호의 말간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갑자기 거리를 두는 거야? 내가 다시 부담스러워졌어?

주오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었다. 수호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노력할 것이다.

주오는 일행에게 향하는 걸음을 옮기는 수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당장에라도 저 반듯하고 늘씬한 몸을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주오는 뜨거운 마음을 죽이며 천천히 수호의 뒤를 따랐다. 주오는 그가 가는 길을 언제나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주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랑해, 수호야.”

이제는 5년이 되어버린 지독한 짝사랑이 응축된 짧은 고백은 산뜻한 제주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주오는 이제 시간이 흐르는 걸 막연히 기다릴 수 없었다.

* * *

저녁때가 되자 분위기가 한껏 들떠 올랐다. 바비큐 파티가 시작되자 다들 전투적으로 고기를 집어 먹기 바빴다.

고기라면 환장하는 이진형과 김우찬, 조은기가 푸드파이터처럼 그릴 위에 있는 고기들을 쓸어 갔다. 그 덕에 젓가락만 빨고 있던 선우가 결국 폭발해 옆에 앉은 우찬의 등짝을 후려쳤다.

“야, 작작 먹어라! 너네만 먹냐? 우리는 입이 아니라 아가리야?”

“형이 빨리 안 먹는 걸 왜 우리 탓 해요?!”

질겅질겅 고기를 씹으며 우찬이 억울한지 빼액 소리를 질렀다. 그게 선우의 성질을 더 건드려 등짝을 한 대 더 얻어맞은 우찬이었다.

“형, 이거 먹어요.”

양심에 찔린 은기는 잘 익은 고기 몇 점을 집어 선우의 앞 접시에 놓아줬다. 선우는 이제 와서 챙겨준다고 네 죄가 없어지냐는 매서운 눈빛으로 은기를 바라봤다.

은기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선우의 앞에 고기를 더욱 얹어주었다. 선우는 고기를 집어 입에 넣으며 은기를 노려봤다.

“내가 얼마나 널 업어 키우고 서포팅해 주는데 나쁜 자식. 서포터에 대한 사랑이 이것뿐이지?”

“아, 형 미안하다고요.”

“역시 원딜은 왕자고 서포터는 그저 도구다 이거 아니야.”

계속해서 한탄하는 선우 때문에 은기가 땀을 삐질삐질 흘려댔다.

“하하하! 그러게 말이야. 서폿은 그저 도구지. 왕자가 그런 도구의 서러움을 알겠어?”

두 사람을 구경하던 진형이 호탕한 웃음을 흘리며 잔에 가득 차 있던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선우가 진형을 세모 눈으로 바라봤다.

“감독님도 똑같아요. 은기보다 더 정신없이 드신 분이 감독님이거든요.”

“하하, 그랬나?”

얼렁뚱땅 웃음으로 넘어가는 진형의 태도에 선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시끄러운 맞은편과 다르게 수호와 주오는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었다. 여전히 고기를 잘 먹지 않는 수호가 쌈 야채와 구운 김치, 버섯들에 밥을 먹고 있자, 주오가 음료를 담은 컵을 건네 왔다.

수호는 주오의 작은 배려에도 흠칫하고는 이내 고개를 꾸벅했다.

“……고마워요.”

“많이 먹어. 맛은 있어?”

“네.”

수호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새송이버섯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오는 입을 꼭 다물고 오물오물 씹는 수호를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수호는 자신에게 향한 주오의 시선이 좋으면서도 긴장돼 무의식적으로 주오에게 향할 것 같은 시선을 테이블로 향했다.

자신을 보지 않는 수호 때문에 주오의 다정한 다갈색 눈에 씁쓸함이 스쳐 지나갔다.

“근데 요즘 둘이 싸웠어?”

고기를 흡입하듯 먹은 우찬이 슬슬 배가 부른 듯 배를 만지며 수호와 주오를 바라봤다. 수호는 느닷없는 질문에 우찬을 바라봤다.

“어?”

“아니, 요즘 둘이 좀 서먹해 보여서. 싸웠나 싶었어. 근데 진짜 싸운 건 아니지?”

“야, 넌 그냥 밥이나 먹어라.”

순수한 의문을 품은 우찬의 등짝을 선우가 후려쳤다. 눈치는 진짜 어디가 팔아버린 거냐는 선우의 타박에 수호는 괜히 자신의 앞 접시를 젓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남들이 보기에도 서먹해 보이는 건가. 나름대로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수호는 괜히 주오를 힐끔 바라봤다. 형도 그걸 느끼고 있을지 몰랐다.

주오는 평소랑 다르지 않은 얼굴로 우찬을 보며 입을 열었다.

“싸우긴.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 뭐, 알아서 하겠지만 혹시나 문제면 말해. 좀 있으면 서머 시즌 시작인데 제일 중요한 미드 정글이 틀어지면 문제 많은 거 알잖아.”

“아, 좀 그냥 먹기나 해라.”

“아! 선우 형 진짜 난 걱정하는 거라고! 이번 시즌이 얼마나 중요한데!”

월드 챔피언십에 출전하는 팀은 단 세 팀. 그리고 그중 한 자리는 서머 우승팀이었다. 스프링에서 우승을 했더라도 월드 챔피언십에는 출전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모든 팀이 서머 시즌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월드 챔피언십으로 향하는 직행 티켓을 얻을 수 있는 시즌이었기에 우찬도 괜히 팀워크가 흐트러질까 걱정하는 거였다.

수호는 괜히 입술을 꾹 씹었다. 정말 이대로 시즌을 시작하면, 제대로 집중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긴 했다.

“팀워크 문제는 나랑 주오가 신경 쓸 문제니까 너네는 개인 피지컬 실력이나 더 끌어올릴 생각이나 해라. 이번에는 꼭 월드 챔피언십 우승하고 말 테니까.”

묵묵히 맥주를 들이켜고 있던 진형이 진지한 얼굴로 선수들을 둘러봤다. 그의 시선이 주오에게 고정됐다.

“꼭 우승하자.”

주오는 자신에게 향한 진형의 단호한 다짐에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이번에는 꼭 우승할 거예요.”

“아주 좋은 마인드야. 김주오 우승컵 들어 올려야지!”

진형은 자신 있는 주오의 말에 만족한 듯 크게 웃었다.

수호는 진형과 주오를 번갈아 봤다. 늘 우승을 바로 앞에서 놓친 사람들이다 보니 우승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수호는 문득 스프링 우승컵을 들어 올렸을 때를 떠올렸다. 어떤 시즌보다 감격스럽고 기뻤다. 수호는 힐끔 주오를 봤다. 주오와 가장 빛나는 자리에 함께 서고 싶었다.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수호는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뜨거워지는 마음에 차가운 맥주를 홀짝 마셨다. 시원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몸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하지만 정작 뜨거운 마음은 여전했다.

우승하는 것에 욕심내지 않는 선수는 없었지만, 수호는 요즘 더욱 그 욕심이 커져가는 자신의 마음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욕심내게 된 이유는 바로 주오였다.

그와 함께 우승하고 싶었다. 스포트라이트가 가득한 그곳에 함께 서고 싶었다.

수호는 주오만 떠올리면 복잡하게 들끓는 감정에 다시 마음 한구석이 착잡해졌다.

“저는 먼저 들어갈게요.”

“어? 왜? 술 더 안 마셔?”

진형과 끝까지 술로 어울려 줄 수 있는 수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형이 아쉽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수호는 그런 진형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이만 마시려고요. 그러면 놀다가 들어오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수호는 걸음을 옮겨 펜션으로 향했다. 바비큐 파티 때문에 전부 밖에 나가 있는 탓에 펜션 안은 저녁 숲속처럼 조용했다.

수호는 소파에 앉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하고 아늑한 곳에 있으니 마음이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주오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그렇게 불편하고 긴장되는 거라는 걸 수호는 살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수호는 벽면 가득한 창가 너머로 바비큐장을 바라봤다. 단단하고 반듯한 뒷모습이 바로 시야로 들어왔다.

언제부턴가 좋아하게 된 주오의 등이었다. 곧고 듬직한 등이 얼마나 의지가 되는지, 그리고 따뜻한지 수호는 알고 있었다. 가끔씩 그를 안을 때마다 손바닥에 닿는 그 탄력 있는 촉감까지도.

수호는 새삼 다시 뛰기 시작하는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감정은 수호에겐 쥐약이나 다름이 없었다. 김주오가 좋은 건 맞다. 하지만 수호는 자신이 없고 혼란스러웠다.

처음으로 가진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 사람이 같은 팀, 그리고 그렇게 부담스럽게 여겼던 김주오라는 게 수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주오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오는 남자였다. 자신과 똑같은 성별의 사람.

수호는 그래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남자를 좋아해도 되는 걸까. 그리고 그게 같은 팀 사람이어도 괜찮은 걸까.

수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눈을 감고 소파에 등을 댄 수호는 문득 펜션의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 천천히, 하지만 망설임 없는 규칙적인 발소리가 수호가 있는 거실로 점점 가까워졌다.

발소리만으로도 저 사람이 누군지 눈치챈 수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새 이제는 주오의 발소리마저 기억하고 있는 자신이 낯설었다.

발소리의 주인공인 주오는 어느새 바로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수호는 물끄러미 자신을 보는 주오의 시선에 등골에 소름이 쭈뼛 섰다.

“수호야, 괜찮아?”

수호는 다정하게 내려앉는 주오의 음성에 천천히 눈을 떴다. 수호는 시야 가득 들어오는 주오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에게 향하는 감정이 순식간에 벅차올랐다.

“뭐가요?”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별로 안 좋아 보여서.”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것을 보고 걱정이 됐었나 보다.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픈 거 아니에요. 그냥 입맛이 없어서 빨리 들어온 거예요.”

“다행이다. 또 어디 아픈가 해서 걱정했거든.”

“정말 괜찮아요. 아주 건강해요.”

수호의 말에 주오가 살짝 웃었다.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미소에 수호의 귓가가 어느새 붉어졌다.

반칙이에요. 지금 형 때문에 혼란스러운데 그렇게 웃으면 어떡해요.

수호는 주오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시선을 내렸다.

“…….”

“…….”

어색한 적막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괜히 숨이 막혔다. 수호는 초조해지는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런 수호를 제지하듯 주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수호야.”

낮게 내려앉은 주오의 음성에 수호는 움직임을 멈췄다.

“……왜요?”

조심스럽게 묻는 수호의 머리 위로 주오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주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수호는 묵묵히 무릎만 바라봤다.

좋아한다. 그가 자신을 보는 게 좋다. 하지만 그만큼 숨이 막혔다.

전에는 그저 좋다고만 여겼던 주오의 시선을 이제는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주오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눈치챈 이상 그건 무리였다. 수호는 입술을 꾹 물었다.

“……요즘 힘든 일 있어?”

한동안 말이 없던 주오가 망설이다 꺼낸 말은 자신을 향한 걱정의 말이었다. 왜 그런 걸 묻는 걸까. 수호는 주오의 질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어요.”

힘든 일 같은 건 없었다. 굳이 꼽자면 그건 주오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었다. 아직은 혼란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자신의 마음. 수호는 지금 그 감정이 문제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이 마음.

“수호야, 미안해.”

자신의 마음을 어찌할지 몰라 착잡해하던 수호는 갑자기 날아든 주오의 미안하다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사과였다.

의아한 눈으로 주오를 바라보자, 그가 묘하게 찡그린 얼굴로 웃어 보였다. 매우 씁쓸하고, 미안하다는 얼굴이었다.

수호는 어째서 주오가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주오가 저런 얼굴을 하는 게 싫다는 거였다.

김주오라는 사람은 웃는 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뭐가 미안해요?”

“내가 수호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아서.”

“네?”

근래에 주오에 대한 자신의 감정 때문에 혼란스러웠지만, 그건 자신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주오가 사과를 하는 건지 수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오는 여전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수호의 앞에 앉았다. 한껏 아래로 내려간 주오를 내려다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한테 부담 준 것 같아서.”

“부담이요?”

“……요즘 너 나 피하잖아.”

수호는 한숨처럼 힘없게 터져 나온 주오의 말에 몸을 굳혔다. 주오를 피한 건 맞았다. 하지만 그걸 주오가 눈치챘을지는 몰랐다. 아까 우찬이 싸웠냐고 물었을 때 혹시 주오가 눈치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정말 그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숨기고 싶었던 잘못을 들킨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수호는 당황과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수호도 어쩔 수 없었다. 김주오라는 사람을 우정이 아닌 사랑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자 그를 평소처럼 대할 수 없었다. 수호는 평소에 연애에 관심이 없었고, 본인이 누군가를 드라마나 영화처럼 열렬히 사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수호는 주오가 좋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아늑했다. 이따금 참을 수 없는 간질거리는 마음이 복받쳐 올라왔고 그래서 두려웠다. 특정한 사람에게 이런 크나큰 마음을 갖게 되는 게 무서웠다.

“……형, 저는 모르겠어요.”

“어떤 게?”

망설이다 내뱉은 수호의 말을 주오는 여느 때와 같이 다정한 말투와 시선으로 응대했다.

자신을 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전과 똑같은 애정을 품고 있는 주오였다. 수호는 다시금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보는 김주오의 시선이 너무도 좋았다. 하지만 과연 이게 맞는 걸까. 같은 남자에게 느껴도 되는 감정일까. 만약 괜찮다고 해도 이 감정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

수호는 어느 것 하나도 명확하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형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누가 알려줬으면 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수호는 혼란과 불안함에 고개를 숙였다. 그런 수호를 묵묵히 내려다보던 주오가 수호의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모르겠으면 생각해 보면 되지 않을까? 수호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그걸 모르겠으니까 고민하죠.”

“그건 그렇네.”

말없이 웃기만 하던 주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수호는 내가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묻는 주오의 표정은 여전히 평소와 같았지만 그의 다갈색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슬프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그런 눈을 하는 것은 정말 싫었지만, 수호는 선뜻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지금은 주오와 거리를 두고 싶은 게 수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결단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 주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명확히 알 수 있을 때까지는 그랬으면 했다.

“……형, 죄송해요.”

수호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떨궜다.

애초에 주오에게 향한 마음이 정말 연애의 감정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더군다나 같은 남자.

수호는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이것보다 더한 고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주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널 불편하게 만들 마음은 없어. 그런데 수호야, 그건 말해줘.”

“어떤 걸요?”

무엇을 말해달라는 걸까. 고개를 갸웃하는 수호에게 주오가 옅게 미소 지었다.

“네가 모르겠다는 게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단순히 내가 불편해서 피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지금 혼란스러워서 피하고 싶은 건지.”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듯 평소와 같은 얼굴과 다정한 음성으로 묻는 주오의 눈빛이 어딘가 슬퍼 보였다.

수호는 단순히 김주오라는 사람이 불편해서 피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수호는 자신을 보는 주오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형이 불편한 건 맞지만, 그래서 피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냥 형에 대한 제 마음을 정확히 모르겠어요. 형이 좋아요. 그런데 이게 맞는 건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형이랑 저는 같은…… 남자잖아요.”

주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해서 수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자신의 감정을 설명했다. 또박또박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이던 주오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전보다는 한결 편안해진 미소였다.

“하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한국 사회에서 같은 남자와 연애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큰 각오가 필요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언제고 함께할 팀원이라면 더더욱 고민될 문제였다.

고민하는 수호가 이해된다는 듯 주오가 빙긋 웃자 수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은 이렇게 생각이 많은데 주오는 어떻게 하면 저렇게 편안할 수 있을까.

“형은 괜찮아요?”

문득 궁금했다. 주오는 어떤 고민을 했을까. 아니, 고민이라는 걸 하긴 했을까?

의아함이 가득 담긴 수호의 시선이 주오에게 향하자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처음에는 고민 많았지. 분명 팬으로서 널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그게 아니더라. 그래서 이게 팬심인지 아닌지 한동안 고민 많이 했어. 그러다가 팬심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지. 그래서 포기도 하고, 마음도 접어보려고 했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았어. 너는 여전히 TV에 나오고, 경기장에서도 자주 마주치고 하니까 접을 수가 없더라.”

주오도 그때 지금의 수호와 다를 게 없었다. 본인이 이상하게 느껴졌고, 비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남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리라곤 주오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떼어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수호는 계속해서 눈에 밟혔고, 그만큼 더욱 좋아졌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마음을 버릴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주오의 선택이었다.

“나는 포기가 안 됐어. 계속 네가 좋았고, 더 좋아졌어. 내가 이상한 놈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생각보다 네가 좋은 게 더 컸어. 만약 수호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이면 신중하게 생각해 봐.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큰지, 아니면 널 이상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더 큰지.”

주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닫고는 혼란스러운 눈을 하고 있는 수호를 보며 미소 지었다.

“……너무 어려워요.”

“어려운 문제지. 그런데 수호야.”

수호는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주오의 음성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주오가 한 걸음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수호는 순간적으로 좁아진 거리감에 몸을 굳혔다. 긴장감이 등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경직된 몸으로 수호가 눈을 깜빡이는데 주오가 그 앞에 몸을 숙이고 앉아 눈을 맞췄다.

“오래 생각해도 괜찮아. 나는 네가 확신을 가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그래도 그 끝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으면 좋겠다.”

“……형이 생각하는 게 뭔데요?”

“남들이 생각하는 연애. 내가 생각하는 건 그거야. 너랑 데이트하고,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늘 함께 시간 보내는 거. 내가 원하는 건 그런 소박하면서도 대단한 일이야.”

주오의 말에 가슴이 설렜다. 수호가 거리를 벌리기 전과 같은 일상이었다. 같이 잠들고, 눈을 뜨고. 밥도 먹고 휴일에는 종종 밖에 나가 시간을 보내는 일. 수호가 너무나 좋아하는 일들이었다.

수호는 가슴께가 뭉클하게 뭉쳐졌다. 저도 형이랑 그러는 거 좋아요. 그런데 만약 잘못되면요?

연애라는 건 영원할 수 없다. 분명 오래도록 사랑하는 사이는 있지만, 그게 주오와 자신이 될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수호는 그게 두려웠다.

“……생각해 볼게요.”

“사랑해, 수호야.”

짧은 한마디에 주오의 가득 담긴 진심이 너울거렸다. 수호는 간질거리는 마음에 눈을 꼭 감았다.

“내가 너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인 것 같아. 의외로 한번 내뱉으면 그다음은 아주 쉬워.”

주오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수호의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수호는 머리칼을 헤집는 주오의 손길이 좋아 그저 묵묵히 그의 손이 떨어질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뿐이었다.

* * *

짧은 휴식이 끝나자 서머 시즌 개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월드 챔피언십 직행 티켓이 달린 시즌이다 보니 선수들의 투지는 더욱 들끓었다.

하지만 수호는 투지는 들끓었지만 연습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수호는 오늘도 화면 가득 떠오른 패배라는 문구를 묵묵히 바라봤다.

“하아, 요즘 좀 힘드네.”

“그러게요. 다들 연습을 빡세게 하는 건가.”

아슬아슬하게 패배를 맛본 선우가 의자에 몸을 푹 기대며 한숨을 내쉬자 은기가 게임 딜량 그래프를 보며 중얼거렸다. 수호는 그저 묵묵히 화면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요즘 제라드의 분위기는 전처럼 좋지 않았다. 여행을 마치고 연습에 돌입했지만, 어쩌서인지 예전만큼의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호흡이 찰떡같던 정글과 미드의 부진이었다.

뒤에서 선수들의 경기를 보고 있던 코치와 감독이 서로 대화를 나누더니 이내 진형이 수호의 뒤로 다가왔다.

수호는 어깨 위에 놓인 진형의 손을 힐끔 보다 이내 고개를 들었다. 푸근한 인상의 진형이 웃고 있었다.

“수호 요즘 힘들어 보이네. 잠깐 감독님하고 얘기 좀 할까?”

“네.”

조만간 한번 불리게 될 거라 예상했던 탓인지 진형의 면담 요청이 그렇게 놀랍진 않았다. 수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로 향하는 진형의 뒤를 따랐다.

회의실 문이 닫히고 자리에 앉자 진형이 걱정 어린 얼굴로 수호를 바라봤다.

“요즘 통 집중을 못 하는 것 같던데 무슨 일 있어?”

수호는 진형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수호 본인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최근 경기 때 집중력이 바닥을 찍고 있었다. 어떤 경기든 재밌게만 느껴졌던 게임이 요즘에는 전처럼 재미를 느끼기 힘들었다.

아마 생각이 다른 곳으로 향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진형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수호를 바라봤다. 이윽고 진형이 회의실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다행이지만. 그런데 요즘 수호 네 폼이 내려간 것 같아서 걱정이다. 물론 당사자인 네가 더 힘들겠지만.”

“죄송해요. 요즘 집중이 잘 안 돼서요.”

“혹시 나 모르는 곳에서 팀 내 트러블이 있는 건 아니고? 사실 요즘 너랑 주오가 예전 같지 않아서 루퍼 코치도 걱정하고 있거든. 우리 경기력이 흔들리는 것도 정글 미드 호흡이 틀어진 게 가장 큰 이유기도 하고. 혹시 둘 사이에 문제 있는 거냐?”

체이스는 5인 팀 게임이었다. 아무리 개개인의 선수가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팀플레이가 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는 게 체이스라는 게임이었다.

그 사실을 진형도, 수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팀에서 가장 신경 쓰는 문제는 개인의 캐리력이 아닌 팀원들 간의 불화였다.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한 진형의 시선에 수호는 그저 고개를 저어 보였다.

굳이 따지면 불화는 아니었다. 전처럼 늘 붙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수호는 주오와 원만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팀메이트. 딱 그 정도의 선이었다.

“문제는 없어요. 그냥 요즘 생각할 게 있어서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서머 시즌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번잡한 생각이 많이 들 시기이긴 하지. 우리가 스프링 시즌 우승을 해서 남보다 더 좋은 위치에서 시작하는 건 맞지만, 그래도 직행 티켓이 가장 안전한 건 너도 알지?”

서머 시즌에서만 얻을 수 있는 월드 챔피언십 직행 티켓.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 잘해보자. 정말 주오와 문제 있는 거면 나한테 얘기하고. 그거 말고 다른 문제가 있어도 얘기해라.”

진형은 힘내라는 듯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진형이 회의실을 나서자 수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수호의 의식은 모두 옆자리에 앉은 주오에게 향해 있었다. 수호도 난생처음이었다. 게임을 앞에 두고 다른 것에 이렇게 생각이 팔려 있는 것은.

수호는 불투명한 회의실 너머로 보이는 선수들의 검은 인영을 바라봤다. 그중에서 유독 키가 큰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김주오는 제주도 여행 뒤로 먼저 수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가 먼저 다가올 때는 팀적으로 대화를 나눠야 할 때, 아니면 불가피하게 수호에게 말을 걸어야 할 때뿐이었다.

수호는 어쩐지 그게 서운했다. 그래서 수호의 시선이 주오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게임을 하느라 모니터를 보고 있을 때도 옆에 앉은 주오가 신경 쓰여서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먼저 거리를 두자고 한 것은 본인이었으면서도 막상 주오가 멀어지자 신경이 쓰였다. 수호는 이 난해하고 답답한 마음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호는 여행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하고 생각했다. 주오를 좋아하는 마음과 그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 서로 상충하는 마음에 우위를 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서 벌써 서머 시즌 개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런 식으로 대회가 시작되면 분명 집중하지 못할 게 뻔했다.

수호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 수호가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문을 열고 들어오던 선우가 눈을 맞추고는 피식 웃어 보였다.

성큼 다가와 진형이 앉았던 수호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선우가 턱을 괴고 신기하다는 듯 수호를 바라봤다. 주이에 있을 때도 이런 눈으로 자신을 보던 선우였기에 수호는 평소와 다른 없이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봐요?”

“신기해서.”

“뭐가요?”

“네가 이렇게까지 게임에 집중을 못 하는 게?”

선우가 바지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포장을 뜯어 입에 물었다. 볼이 볼록해지도록 사탕을 볼 이쪽저쪽으로 옮기며 먹는 선우를 보며 수호가 시선을 내렸다.

“죄송해요.”

“이수호가 이렇게 풀이 죽을 때도 있고 신기하네. 집중 못 하는 거 주오 형 때문이지?”

말 안 해도 빤히 보인다고 듯 선우가 눈가를 휘며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치 빠른 선우에게 아니라고 해봤자 거짓말인 걸 눈치챌 게 뻔했다.

“형은 언제나 눈치가 빠르네요.”

순순히 인정하듯 말을 꺼내자 선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래서 왜 그러는데? 싸운 건 아닐 거 아냐. 주오 형이나 너나 싸움 걸 타입은 아니니까.”

싸운 것도 아니면서 둘 사이가 서먹서먹해지는 이유라고 하면 답은 하나였다. 특히 둘의 오묘한 관계를 누구보다 먼저 알고 있던 선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문제는 애정사라는 것을.

“그냥,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면 네가 그렇게 고민하겠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면서 사는 네가? 그냥 솔직하게 말해봐. 연애 문제지?”

가볍게 묻는 선우의 말에 수호의 눈이 커졌다. 잘 놀라지 않는 수호가 보이는 극적인 반응에 선우는 빙긋 웃었다.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참 이수호다운 둔감한 태도였다.

“그렇게 티 내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그래서 뭐가 문젠데? 너랑 형이랑 둘 다 사이좋았잖아.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안 이상해요?”

“뭐가?”

선우는 수호의 질문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썹 끝이 올라갔다. 그러고는 수호가 답을 할 때까지 입에 문 사탕을 이리저리 굴리며 잠자코 기다렸다.

“형이랑 저랑 둘 다 남자잖아요.”

“눈이 있으면 모를 리가 없지.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야?”

이번에는 수호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남자끼리는 이상한 거 아닌가?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되고 안 되고 정해진 건 없지. 물론 우리나라 정서상으로는 안 된다는 쪽이 가깝겠지만. 그렇다고 우리나라에 동성애자가 없는 건 아니잖아.”

선우의 말처럼 한국에 동성애를 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간혹가다 TV라든가 인터넷상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수호는 그게 자신이 될 거라고 상상을 해본 적도 없었다.

“그게 제가 될 줄은 몰랐어요.”

“대부분이 모르겠지. 누가 알겠어. 만약 누가 나한테 너 나중에 남자랑 연애하게 된다, 이러면 개소리하지 말라는 말이 바로 나올걸?”

그만큼 처음부터 본인이 동성에게 끌리는 사람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동성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상상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 중에 수호가 있었다.

수호는 재미있다는 듯 은근한 미소를 띤 선우에게 향하던 시선을 돌려 유리창 너머 주오를 바라봤다.

게임을 하고 있는 듯 자리에 앉아 열심히 손을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수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흐릿한 인영에도 이렇게나 가슴이 떨리는데,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래도 잘 모르겠어요. 누구를 좋아해 본 게 처음이라 제 감정도 감당 못 하겠어요.”

심각하게 가라앉은 수호의 음성이 선우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대체 그 나이 먹고 뭐 했냐? 하긴 이수호가 천연기념물이긴 하지.”

수호가 연애 경험이 없다는 건 같이 지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사실이었다. 선우는 어울리지 않게 고민에 빠진 수호를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고민만 하려고? 좋아하면 만나야지. 그래야 마음 편해. 멀어질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매일 같이 있는데 마음 뗄 수는 있겠어?”

그게 문제였다. 주오만 보면 초조해졌다. 불안해지는 자신이 낯설고 무서워서 거리를 두면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결론은 아니었다. 오히려 거리를 두면 둘수록 더욱 초조해져만 갔다.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어련하겠어. 이수호, 그냥 좋으면 받아들여. 그게 너한테도, 주오 형한테도 좋을 거다.”

도르륵도르륵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던 선우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며 가볍게 말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수호는 한껏 깊어진 시선으로 창 너머의 주오를 바라봤다.

‘수호야, 수호야.’

‘나는 수호랑 데이트 하고 싶은데.’

‘사랑해, 수호야.’

곁에 붙어서 화사하게 웃던 주오가 떠올랐다. 계속 그렇게 있고 싶었다. 애정이라는 이 낯설고 두려운 감각을 김주오와 함께 느끼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은 편안해질 수 있을까.

물끄러미 주오를 바라보는 수호를 보며 선우가 빙긋 웃었다.

“만약 주오 형이 제가 싫어지면 어쩌죠.”

뜬금없이 흐른 수호의 한마디에 선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소리라는 듯 크게 웃는 선우를 바라보자 그가 눈을 맞춰왔다.

“네가 먼저 질리는 경우는 있어도 주오 형이 너한테 먼저 질릴 일은 절대 없을걸. 5년을 너만 쫓아다녔는데. 만약 네가 받아준다고 하면 저 형은 진짜 하늘을 나는 기분일 거다.”

수호는 고민이 한결 풀린 듯 표정이 편안해졌다. 수호의 변화를 확인한 선우가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아무런 생각 없이 사는 게 제일 잘 어울려. 괜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네가 고민이 많아지니까 요즘 연습이 안 되잖아.”

“그건 죄송해요. 그런데 형도 많이 죽잖아요.”

“어허? 들어갈 각이 너무 예뻐 보이는 걸 어떡해.”

선우가 눈썹을 비쭉거리고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수호는 그런 선우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형은 계속 탑 하는 게 나을 뻔했어요. 너무 무모해요.”

“야, 너보다는 아니다. 나는 그래도 1대4 같은 누가 봐도 무모한 상황은 그렇게 많이 안 들어가거든.”

“다 잡을 수 있으니까 들어가죠.”

“너 진짜 재수 없다. 됐으니까 그만하고 나와. 연습해야 돼.”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가벼운 걸음으로 회의실을 나서는 선우를 보던 수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우라는 사람은 신기한 사람이었다. 박선우도 따지고 보면 생각 없이 사는 부류였다. 하지만 그러면서 누구보다도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은근히 선우와 얘기를 하다 보면 명쾌하게 답이 나올 때가 많았다. 그리고 그때가 지금이었다.

수호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회의실을 나섰다. 좋으면 좋은 대로.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이. 수호는 선우가 했던 말들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연습실로 들어섰다.

게임을 하고 있던 주오가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주오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수호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산들거리는 간지러움이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짧게 마주친 시선을 떼며 눈을 돌리려는 주오에게 수호가 입을 열었다.

“형.”

“어? 나 불렀어?”

수호가 자신을 부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주오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덩치에 안 맞는 귀여움에 수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조금 있다 얘기 좀 해요.”

“……그래.”

잠시 침묵하던 주오가 이내 옅은 미소를 건넸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수호는 신기하면서도 괜히 속이 꾹 막히는 느낌에 주오를 빤히 바라봤다.

“형, 저 좋아하는 거 맞죠?”

“많이 좋아하지. 정말 아주 많이.”

연습실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민망한 상황에, 은기와 선우는 동시에 헤드셋을 꼈다. 하지만 둘 사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김우찬은 눈살을 팍 찡그렸다.

“한동안 조용하더니 또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우찬아, 그냥 눈치껏 닥쳐.”

모니터에 눈을 박고 있던 은기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 덕에 옆에 앉아 있던 선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야, 다 들리잖아.”

“자리가 먼 걸 어떡해요.”

우찬은 은기와 선우에게서 가장 먼 자리였기에 크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선우는 뻔뻔한 은기의 말에 숨죽여 웃으며 헤드셋을 다시 꼈다.

“김우찬, 헛소리하지 말고 게임이나 들어와. 그리고 수호랑 주오 형은 그냥 휴게실 가서 얘기하지? 게임하는 데 방해돼.”

선우가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수호와 주오를 바라봤다.

“선우가 나가라는데 조금 있다가 말고 지금 얘기할까?”

“전 상관없어요.”

결정한 건 바꾸지 않는 추진력 강한 이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그렇게 고민했나 싶을 정도였다.

좋으면 좋은 대로. 아주 좋은 말이었다.

물론 여전히 남자 간에 연애를 하게 된다는 불안과 혼란은 존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주오가 좋은 마음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내가 이상한 놈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생각보다 네가 좋은 게 더 컸어.’

주오가 제주도에서 말했던 그 말은 수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이상했지만, 그보다 주오를 좋아하는 감정이 더 컸다.

흔들림 없는 수호의 고요한 눈과 마주한 주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휴게실로 가자.”

먼저 걸음을 옮기는 주오를 수호가 따라나섰다.

이미 연습이 한창일 시간이라 휴게실은 조용했다. 간식만 한가득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주오는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수호가 맞은편에 앉기를 기다렸다.

“좋다. 오랜만에 수호랑 얘기해서.”

“종종 하긴 했잖아요.”

물론 예전보다 횟수와 시간이 줄긴 했지만, 한 팀에 있고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이기에 대화를 전혀 하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수호가 거리를 두겠다고 선언한 뒤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라고 해봤자 욕실 다 썼어, 아침 먹어, 연습 가야 해, 이 정도의 대화뿐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호의 대답도 네, 이게 전부였다.

오랜만에 자리를 잡고 말을 트려는 상황이 반가운지 주오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수호는 그런 주오의 미소를 빤히 감상했다. 오랜만에 가까이서 보는 미소였다. 달콤하고 풍족한 온기가 가슴속에서 퐁퐁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형이 좋아요.”

끓어오르는 감정에 대뜸 본론부터 꺼내자 주오의 미소가 움찔했다. 주오는 당황함과 얼떨떨함이 섞인 눈을 했다.

“……수호야, 그렇게 박력 있는 모습 보이면 새삼 다시 반해.”

“제주도 이후부터 쭉 생각해 봤어요. 형이 그랬죠? 저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감정이 큰지, 아니면 형을 좋아하는 감정이 더 큰지 생각해 보라고요.”

“그랬지.”

주오는 흔들림 없는 고요한 수호의 검은 눈을 마주 봤다. 혹여나 수호가 자신의 바람과는 다른 답을 내놓을까 불안한 듯 주오의 시선이 얼핏 떨렸다.

수호는 그런 주오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형을 좋아하는 감정이 더 커요. 제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요. 그런데 자꾸만 형이 생각나요.”

“…….”

수호는 감동인지 충격인지 받은 얼굴로 자신을 멍하니 보는 주오를 보며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형 때문에 게임에 집중도 안 되고, 자꾸만 형만 보게 돼요. 형이랑 전처럼 지내고 싶어요. 형이 계속 절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요.”

“난…… 언제나 수호가 좋아.”

“저도 형 좋아요.”

“……어떡하지? 수호가 날 좋아한대.”

어느새 주오의 귓가가 붉어져 있었다. 감격 어린 얼굴을 손으로 덮었던 주오가 손을 내려 수호를 힐끔 봤다. 수호는 여전히 주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덩치에 맞지 않게 부끄러워하고 그만큼 기뻐하는 주오가 귀엽게만 보였다. 수호의 입술이 고운 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우리 연애해요.”

“수호야, 정말 좋아해.”

그 한마디에는 주오의 5년 동안 쌓여 있던 진심이 묻어 있었다. 수호는 자신에게 향하는 그 담백한 말에 충족감을 느꼈다.

아아,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라는 걸 하나 보다.

수호는 활짝 웃었다.

“저도 형이 너무 좋아요.”

수호의 한마디에 주오의 입가에도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가 걸렸다.

한번 말을 내뱉으면 의외로 그 뒤는 쉽다는 주오의 말은 사실이었다. 수호는 인정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을 속도로 주오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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