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40)

* * *

다음 날이 되자 수호는 정말 귀신같이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아파했다는 게 꿈이었던 것 같았다.

수호는 어제와는 다르게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옆에 누운 사람을 바라봤다.

평소라면 주오가 먼저 일어나 수호를 보고 있었지만, 오늘은 반대였다. 밤새 뒤척이는 수호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었는지 주오는 아직도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수호는 눈을 감고 조용히 잠들어 있는 주오를 물끄러미 보았다. 주오가 이렇게 잠들어 있는 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늘 웃고 있어서 온화하고 둥근 느낌을 주는 주오였지만, 막상 이렇게 찬찬히 살피고 있다 보니 생각보다 그의 얼굴이 단단한 인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의외로 무표정하게 있으면 다가가기 힘든 인상이었다. 늘 웃고 있어서 처음 안 사실이었다. 그만큼 김주오가 수호만 보면 싱글거리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좋을까. 수호는 자신을 향한 주오의 열렬한 애정이 신기하면서도 좋았다.

새삼 어젯밤 잠들기 전에 떠올렸던 생각이 수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단순히 형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

지금까지 수호는 당연히 주오에게 향한 감정이 우정이라고 여겼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도, 연애를 해본 적도 없던 수호에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연애보단 우정이 확률적으로 더 높았다.

하지만 그건 수호의 착각이었다. 수호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이건 단순한 우정은 절대 아니었다.

여전히 고른 숨을 쉬며 잠들어 있는 주오가 수호의 허리춤을 끌어당겼다. 수호는 더 가까워진 주오의 얼굴에 숨을 멈췄다. 뺨에 닿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수호는 괜히 두려웠다. 한번 우정이 아니라고 자각하자 두려움이 몰려왔다.

“형, 저 어떡하죠.”

마냥 좋기만 했던 주오가 어렵게 느껴졌다.

여전히 주오를 보고 있으면 좋았다. 같이 누워 있는 지금도. 하지만 어쩐지 무섭고 두려웠다.

우정이 아닌 감정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떻게 김주오라는 사람을 대해야 하는 걸까. 수호는 혼란스러웠다. 애초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맞기는 할까.

몸살기가 사라져 말똥해진 정신이 다시금 아득해졌다. 수호는 처음으로 겪는 낯선 고민에 그저 고개를 다시 이불 속으로 파묻었다. 여전히 옆에 있는 김주오라는 사람의 체온은 따스했다. 그 온기로 인해 수호의 머릿속은 더욱 정신없이 뒤죽박죽으로 변해갔다.

* * *

수호가 쾌차한 이후로 체스와 하는 결승전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물론 수호의 폼도 최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올라왔다.

시즌 초반에도 남과 비교할 수 없는 실력을 뽐내는 수호지만, 그는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강해지는 선수로 유명했다.

그리고 스프링 결승은 시즌 가장 막바지였다. 훨훨 날아다니는 수호 탓에 타 팀들과 진행된 연습 경기는 모두 압승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순조롭게 진행되는 결승전 준비와는 다르게 수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수호는 그게 플레이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걸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대망의 CKR 스프링 스플릿 결승이 열리는 날이 되었다.

한 시즌의 마무리이자 가장 큰 경기여서 그런지 경기장도 평소보다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으며, 축제라도 열린 양 경기장 앞에 세워진 갖가지 부스에서 음식과 굿즈, 선수들 유니폼을 팔고 있었다.

경기 전 잠시 둘러보러 나온 선수들이 인파와는 멀리 떨어진 안전띠가 설치된 곳에 서서 북적거리는 인파를 바라봤다.

“우와, 사람 진짜 많다.”

“티켓이 매진됐는데 많은 게 정상이지.”

놀라서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우찬에게 선우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주이랑 결승전을 몇 번이나 하면서 그때마다 보던 광경인데도 이런 광경을 처음 본 사람처럼 신기해하는 우찬이었다.

우찬에게 끌려 나온 수호와 주오도 심드렁한 얼굴로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주오는 이내 어떤 걸 발견했는지 눈빛을 반짝였다.

“저기요, 저 잠시 저쪽 부스 좀 다녀와도 될까요?”

일반 관객들이 들어올 수 없도록 막고 있는 경호원에게 대뜸 질문을 날린 주오 때문에 선수들의 시선이 주오에게 향했다.

수호 역시 의아한 시선으로 주오를 바라봤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레인 씨, 저기에 뭐 있어?”

우찬은 주오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뭔데, 뭔데, 빨리 알려달라며 버둥거리는 우찬을 보며 은기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은기는 이미 주오가 시선이 팔린 게 뭔지 눈치챈 듯 자신의 눈을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선우도 이내 주오가 뭐에 꽂혔는지 눈치챈 듯 빙긋 미소를 터뜨렸다.

“수호 굿즈가 갖고 싶나 본데?”

이미 주오는 제라드 측에서 만든 공식 굿즈를 다 구매한 후였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수호도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엄청난 대량 구매였다. 그만큼 모았으면서 대체 뭘 더 사려는 걸까.

“저쪽이면 아마 팬분들이 직접 만든 굿즈 파는 곳일걸?”

그런 거라면 주오가 가지지 못한 수호의 굿즈들이 있을 법했다. 주오는 경호원을 바라봤지만, 그는 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하하하하, 레인 씨 아쉬워서 어떡해.”

좌절하는 주오 옆에서 깔짝거리며 우찬이 마구 웃어댔다. 주오는 깔깔거리는 우찬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어딘가 싸하게 느껴지는 미소에 숨넘어갈 듯 웃고 있던 우찬이 입을 합 다물었다.

“너는 맨날 나대다가 혼나는데 아직도 정도를 모르겠어?”

선우는 주오의 심기에 거스르지 않을 정도로만 즐거워하며 우찬을 골려댔다. 어느새 도끼눈을 한 우찬이 선우에게 쫑알쫑알 반박하기 시작했다. 선우는 그런 우찬을 놀리기 바빴다.

“와, 어떡해. 진짜 이수호야. 형, 형! 진짜 팬이에요!”

일반 관객들이 몰려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제라드 선수들이 있던 곳도 엄연히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길목이었다. 인파를 피해 외각으로 돌던 관객 몇 명이 선수들을 발견하고 빠르게 다가왔다.

경호원이 있어 근접하게 다가오진 못했지만, 구역을 나누기 위해 쳐준 안전띠 너머에서 팬들이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수호는 자신의 이름을 반갑게 부르며 달려온 사람에서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수호와 비슷한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발을 동동 구르며 기뻐했다.

“오늘 형들 응원하려고 왔어요! 진짜 어떡해. 아, 그게 아니라 꼭 우승하세요!! 파이팅!!”

“형들 혹시 사인해 주실 수 있어요? 아니면 사진 한 장만요! 그것도 안 되면 악수 한 번만요.”

같이 온 친구 한 명은 당장에라도 울 기세였다.

“세 개 다 해드릴게요. 오늘 응원하러 와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주오는 굿즈 행사장에서 파는 선수들 유니폼을 입고 있는 청년의 등에 사인을 해줬다. 사진과 악수까지 마진 주오는 기쁨에 파도 속에서 헤엄치는 청년을 바라봤다.

“혹시 지금 바쁘신가요?”

“네? 아뇨? 아직 입장 시간 전이라 괜찮은데 왜요?”

청년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그건 주오를 지켜보던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주오가 청년에게 건넨 질문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은기는 고개를 저었고, 선우는 재밌다는 듯 웃어 보였다. 여전히 이유를 모르는 수호와 우찬은 그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네 사람을 뒤로하고 주오가 손가락으로 부스 한쪽을 가리켰다. 아까부터 주오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던 곳이었다. 관객들이 만든 굿즈를 판매하고 나눔하는 장소.

“제가 꼭 갖고 싶은 게 있는데 이 선 너머로는 갈 수가 없어서요. 혹시 대신 사다 주실 수 있을까요?”

누구라도 거절하지 못할 미소를 지으며 부탁하는 주오에게 청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떤 거 사다 드리면 돼요?”

“수호 굿즈 전부요.”

“저 형 진짜 어떡해요.”

뭘 물어보냐고 단호하게 수호 굿즈를 외치는 주오를 보며 은기가 선우를 붙잡고 한탄했다. 수호는 그저 멀뚱히 주오를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해서 갖고 싶은 걸까.

“아, 네! 수호 굿즈는 인기 많아서 매진인 것도 있을 텐데 일단 다녀올게요! 근데 진짜 수호에 대한 형의 애정은 변하질 않네요.”

이미 체이스 프로리그에 관심이 있는 사람 중에 주오가 수호의 팬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게. 시간이 갈수록 더 좋아지는 거 있지.”

주오는 장난스럽게 웃는 청년을 보며 눈을 접어 웃었다.

청년은 단순히 주오의 감정을 팬의 마음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수호는 달랐다. 남에게 당당하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주오로 인해 수호의 귓가가 붉어졌다. 또다시 감정이 일렁이며 몰아쳤다.

번뇌를 느끼는 수호와는 달리 청년은 밝게 웃으며 부스를 향해 뛰어갔다. 청년이 다시 돌아온 건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후였다. 빵빵해진 커다란 쇼핑팩을 들고 온 청년이 주오에게 물건을 건넸다.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주오는 정말 활짝, 방긋 행복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지 주오 본인은 모를 것이다. 수호는 두근거리는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이러는 게 맞는 걸까.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저는 정말 형을 좋아하는 걸까요?

수호는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는 주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형, 이제 들어가 봐야 돼요.”

“아, 가자. 이거 정말 고마워요.”

주오가 청년을 향해 쇼핑백을 흔들었다. 별거 아니라며 웃는 청년에게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어준 주오는 이내 경기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결승전이 시작된다.

수호는 복잡한 마음을 억지로 떨쳐내며 주오를 따라 경기장으로 향했다.

“수호야, 이거 봐봐. 귀엽지 않아?”

주오가 수호와 비슷하게 생긴 제라드 유니폼을 입고 있는 인형을 보여주며 방긋 웃었다. 수호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김주오라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수호의 선택은 회피뿐이었다.

* * *

“형, 저 뒤로 돌아서 진입할게요.”

수호의 말에 주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옆에서 상대 원딜한테 들이박을 거니까 이수호 잘 캐치해라.”

모두의 포지션이 갖춰지자 상대 정글 수풀에 숨어 있던 선우가 대쉬기를 사용해서 골렘 둥지로 향하던 상대의 원딜을 공중으로 띄웠다.

체스의 선수들이 바로 선우를 타깃팅했지만, 서포터 중에서도 방어력이 가장 높은 데다 궁극기를 사용하면 더욱 단단해지는 캐릭터 탓에 선우를 잡아내지 못했다.

선우가 상대 선수들의 어그로와 스킬들을 빼놓고 있자 사방에서 나타는 제라드의 선수들이 한곳에 모여 있던 체스의 선수들을 덮쳤다.

체이스는 대형 오브젝트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게임이었다. 그만큼 대형 오브젝트가 가져다주는 버프는 강력했다. 게임이 말려 상황이 힘들었던 체스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던 오브젝트는 결국 그들을 패배의 길로 인도했다.

[아아아아악! 두유 선수! 왜, 왜 거기서 나오죠?!]

[체스 선수들 쓸리고 있습니다! SUHO가 상대편 마무리를 띄웁니다!]

화면 상단으로 크게 마무리라는 글자가 떠오르자 관중들의 환호성이 커졌다. 이제 기지를 지킬 사람이 없는 체스의 진영으로 제라드 선수들이 밀고 들어가 제일 안쪽에서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는 보석을 깨뜨렸다.

[이렇게 보석을 깨면서 GG!!]

마지막 세트가 끝이 났다. 제라드는 체스를 상대로 3:0 이라는 압도적인 힘 차이를 보여주며 우승을 거머쥐었다.

[20xx CKR 리그 스프링 스플릿 우승팀은 제라드입니다!! 모든 선수들 고생 많으셨고 축하합니다!!]

결승전이 치러졌던 잠실 경기장은 우승팀을 축하하는 관중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와아아아! 우승이다, 우승!”

우승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우찬이 트로피 주위를 폴짝 뛰며 소리를 질러댔다. 평소 같았으면 다들 시끄럽다고 우찬의 뒷덜미를 잡아챘겠지만, 오늘은 다들 흥분했는지 아무도 우찬을 제지하지 않았다.

다들 환한 웃음을 지으며 경기장 중앙에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거대한 트로피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두운 경기장에서 카메라의 셔터음과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가득했다.

수호의 입가에도 어색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언제 느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한 시즌 동안 했던 노력이 보상을 받는 시간이었다.

수호는 두 손으로 트로피를 다시 들어 올리며 반짝이는 눈으로 손안에 들어온 트로피를 응시했다. 뿌듯하고, 기뻤다.

묵묵히 트로피를 보고 있자 머리 위로 큰 손이 얹어지는 게 느껴졌다.

수호는 손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김주오였다. 수호는 단박에 몸을 돌려 등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주오는 갑자기 몸을 돌리는 수호 때문에 놀랐는지 눈이 커져 있었다.

“아, 머리에 종이 붙어 있길래. 놀랐어?”

머리에서 손을 뗀 주오가 축포로 하늘에서 한가득 떨어지는 색색의 종이를 쥐고 웃어 보였다.

수호는 주오에게 트로피를 넘겼다. 얼떨결에 트로피를 받아 든 주오가 눈을 깜빡이고는 이내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주오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트로피의 감촉이 어색하면서도 기쁜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수호야, 고마워.”

“뭐가요?”

“트로피 들 수 있게 해줘서.”

정말로 고맙다는 듯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는 주오를 보자 수호는 덜컹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미안하고, 고맙고 서글퍼지는 느낌.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게 향한 두려움.

수호는 이런 감정에 면역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주오에게 향한 마음이 단순한 우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두려워졌다.

우정이라고 해도 벅찬 감정이었다. 그런데 그게 다른 의미의 감정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수호는 정말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느꼈던 감정들이 한순간에 모두 어긋나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바다가 푸른색이라고 알고 있는 자신에게 사실 바다는 붉은색이란다, 라고 누군가 말해준 것 같은 느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수호는 여전히 환하게 웃는 주오를 보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제는 마냥 마주 보면서 웃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수호는 고개를 돌렸다.

“다들 열심히 했잖아요.”

주오는 시선을 돌리는 수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이내 활짝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우승컵을 들어 올린 탓에 감회가 새로운 듯 주오는 트로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수호는 그런 주오를 힐끔 봤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트로피를 들고 있는 모습은 오래전 인터넷 기사에서 봤던 주오 그대로였다. 누구보다 빛났던 김주오.

수호는 주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음 한곳에서 벅차오르는 감정이 밀려 올라왔다. 기쁘다. 그에게 느끼는 어색함과 반대되는 감정이었지만, 수호는 김주오라는 사람과 우승을 했다는 게 너무 기뻤다.

리그 우승을 넘어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4번이나 했던 수호였지만, 지금까지 누구와 함께 우승을 했다는 게 이렇게 기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그에게 향한 마음이 자신이 생각했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어느새 수호는 주오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고 있었다. 트로피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주오는 멀어지는 수호를 눈치채고는 의아한 눈으로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야?”

“우승, 축하해요. 형 고생 많았어요.”

주오는 들고 있던 트로피를 엉엉 울고 있는 우찬에게 떠맡기듯 넘기고는 수호에게 다가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주오와의 근접한 거리가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다시 한번 제라드 선수들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자, 선수들은 이쪽으로 모여주세요.]

주오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어느새 캐스터가 무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소감을 듣기 위해 올라온 이영중 때문에 주오는 벌렸던 입을 다물고는 살며시 웃었다.

“가자.”

“……네.”

이영중 캐스터는 트로피 바로 앞에 모인 선수와 코치, 감독들을 둘려보며 마이크를 들었다.

“스프링 시즌 어벤져스 팀이라고 불리며 기세가 남달랐는데 이렇게 우승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우선 아직도 울음을 그치지 못한 BONG 선수!”

첫 우승이라 마음이 복받쳐 오른 듯 게임을 승리한 순간부터 계속 눈물만 흘리는 우찬을 향해 이영중이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으, 으흑. 우승해서 정말 기쁩니다.”

눈물을 슥슥 닦아낸 우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영중 캐스터는 그런 우찬이 귀엽고 대견한지 푸근한 미소를 건네며 우찬의 어깨를 톡톡 다독였다. 우찬은 마이크를 쥐고 시상식을 하는 배우들처럼 고마운 사람들을 다다닥 나열했고, 너무 길어진 나머지 이영중 캐스터가 곤란해했다.

“하하, 이곳이 레드카펫인줄 알았습니다. 자! 그럼 제라드의 주장인 RAIN 선수! 이야, 이곳에서 RAIN 선수와 인터뷰를 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에 우승컵을 들어 올려서 기쁨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주오는 옅게 웃으며 천천히 경기장을 둘러봤다. 색색의 종이가 여전히 나풀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관중들이 응원봉을 흔드는 것 또한 주오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우승을 할 수 있어서 정말 기쁘고, 함께 열심히 해준 팀원들에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늦은 시간까지 응원해 주신 팬분들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1세대 프로게이머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RAIN 선수! 우승 정말 축하드립니다. 생방으로 보고 있을 은퇴한 동료 선수들도 많이 기뻐할 겁니다.”

“올스타전을 끝으로 은퇴했던 RUSH 선수가 저보고 오래 해먹으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꼭 월드 챔피언십 우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오오, 벌써부터 그리운 이름이네요. 꼭 RAIN이 월드 챔피언십 우승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1세대 프로게이머! 아직 죽지 않았다고 보여줘야죠!”

주먹을 불끈 쥐며 파이팅 넘치게 외치는 이영중 캐스터를 보며 주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는 자신감과 우승을 향한 열망을 내비치는 주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1세대 프로게이머 중 유일하게 아직도 프로로 남아 있는 김주오는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보통 프로게이머들은 나이가 어렸고 세대 교체도 빨랐다. 어린 선수들은 이길 수 없다는 게 이 판의 암묵적인 생각이었다. 아무리 노장이라고 해도 어린 신예 선수들의 피지컬은 따라잡기 힘들었다.

많은 프로들이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밀려 은퇴를 하는데도 제일 먼저 프로로 데뷔했던 1세대 프로게이머인 김주오는 아직도 건재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증명하고도 남았다.

수호는 새삼 주오가 멋있는 사람임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한 피지컬과 상황을 판단하고, 게임을 어떻게 풀어낼지 설계하는 능력을 고루 갖춘 그는 완벽한 선수였다.

“팬분들께 올해는 꼭 월드 챔피언십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RAIN 선수의 대담한 각오 잘 들었습니다. 꼭 그렇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그 후로 각 선수들의 짧은 인터뷰가 진행되었고, CKR 스프링 스플릿은 성대하게 막을 내렸다.

* * *

[게임/210005] 체이스 결승 예상대로 제라드

솔직히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너무 일방적인 3:0이라서 노잼이었음. 체스가 제라드한테 유독 약한 게 느껴지는 경기였음.

정글 주도권도 없고, 라인전도 말리고 약간 체스 애들이 급해하는 느낌 나더라.

그래도 재밌게 보긴 함. 마지막에 인터뷰하는데 김레인이 러쉬 언급해서 갑자기 먹먹해지더라. 오래 해먹으라는 말이 진짜 진심같이 느껴졌음. 1세대 애들 신예들한테 피지컬 밀리고 퇴물 돼서 약간 쫓기듯 은퇴했잖아. 근데 레인은 아직 남아 있는데다가 정글로는 비빌 신예도 없고.

1세대의 남은 자존심 같음. 이번에는 진짜 월챔 우승했으면 좋겠다.

└ 진짜 걔네가 체이스 프로판 만든 거나 다름없긴 했지. 지들끼리 아마추어대회 하다가 인기 좀 얻게 돼서 그 뒤에 정식 리그 만들어진 거고. 진짜 김레인 우승했으면 좋겠다.

└ 김레인은 체이스 프로판에 토템급이짘ㅋㅋㅋㅋㅋ

└ ㅇㅈ... 그런 사람이 아직도 있는 것도 신기하고, 거기다가 우승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김레인이 대단한 건 알겠는데 그래도 예전보단 많이 죽었지. 우승한 거도 이수호빨 있지 않음?

└ 지도 김레인 대단한 거 아는데 인정하기는 싫다는 건가?

└ 솔직히 이수호 있어서 우승한 덕도 있지. 근데 김레인이 죽은 건 아님.

└ 레인이 설계 다 하면 뭐 하냐 맨날 미드년이 무리하다가 뒈지는데. 지금은 김레인 설계에 맞춰서 플레이 잘 해주는 미드가 있으니까 우승도 한 거지. 그냥 김레인 이수호 둘 다 잘함.

└ 오늘 근데 두유도 장난 없더라. 탑하다가 서폿으로 포변했을 때 뭔가 했는데 서폿도 잘하넼ㅋㅋㅋㅋㅋㅋㅋㅋ

└ 서폿인데 탑처럼 플레이햌ㅋㅋㅋㅋㅋㅋㅋ

└ 탑 = 망나니

└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지막 한타에서 무대포로 들어가는 거 ㄹㅇ 망나니였음ㅋㅋㅋㅋ

└ 오프 더 레코드에서도 말하는 게 뒤로 돌 테니까 알아서 캐치하랰ㅋㅋㅋㅋㅋㅋ

[게임/210010] 김레인 꽃길만 걸어ㅠㅠㅠㅠㅠㅠ

[GIF]

김레인 진짜 웃는 것봐ㅠㅠㅠㅠㅠㅠ 이렇게 웃는 거 너무 오랜만에 봣음 ㅠㅠㅠㅠ 꼭 월챔 우승하자!!

제라드 선수들 진짜 고생 많았다.

진짜 이번에 미드 서폿 영입하고 애들 날아다니는 게 느껴짐. 전에 있던 애들도 못하는 건 아니었는데 애들이 뇌절 많이 했어서 무리하다가 죽는 경우 많았는데 지금 애들은 무리하는 것처럼 보여도 다 살아서 나오고 하니까 진짜 안정적이게 됨 ㅠㅠㅠ

└ 그거 개인정. 전에 있던 미드는 다른 애들에 비해서 좀 실력 떨어졌었음.

└ 결국 미드빨이라는 거네.

└ 이번에는 진짜 월챔 우승 쌉가능. 오늘 소감 말하는데 진짜 레인도 곧 얼마 안 남은 것 같더라. 말하는 게 은퇴 전에 우승하는 거 보여주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았음.

└ ㅠㅠㅠㅠ안 돼ㅠㅠㅠ

└ 레인 없음 못 살아 bbb

└ 레인 은퇴하면 레인수호 주식 떡락인데;;

김레인×이수호 파는 사람 있어??

2권

@정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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