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쉬운(?) 사람
“아니, 조은기 이 멍청아!”
“왜 새끼야.”
“왜 거기서 상대 원딜이랑 1대1을 하고 있어. 앞 라인부터 녹여야지!”
“상대 원딜이 나 물려고 옆에서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데 그럼 가만히 있어? 그러면 가만히 두드려 맞을까?”
“그건 내가 막아주면 되잖아! 이 바보야!”
아침 연습부터 정신이 없었다. 김우찬과 조은기가 열과 성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호흡이 잘 맞는다고는 하나 매 순간 모든 판단이 완벽할 수는 없었다.
결국 우찬과 은기의 의견 충돌이 거세지자 피드백을 하던 회의실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보통 이럴 때면 주오가 나서서 둘을 중재하지만 이번에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선우의 시선이 힐끔힐끔 감독인 이진형에게 향했다. 늘 너털거리며 호쾌한 웃음을 짓는 진형은 지금도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선우를 비롯한 수호와 주오는 이 상황이 아주 잘못됐다는 걸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너 믿고 기다리는 동안 죽게 생겼는데 무슨 소리야?”
“아! 진짜! 조은기!”
씩씩거리며 분을 내뿜는 우찬의 어깨 위로 큼지막한 손이 턱 내려앉았다.
“하하하, 지금이 피드백하는 시간이지 싸움질하는 시간인가? 우찬아?”
“아니, 그게 아니라.”
수호는 진형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지금 처음으로 느꼈다. 화가 난 이진형은 박력이 장난 아니었다.
수호가 애꿎은 생수병만 돌돌 돌리며 어서 이 소란이 잠잠해지길 기다리던 때였다. 뼈대가 단단하고 길게 뻗은 손가락이 수호의 손등을 툭툭 건드렸다. 그리고 그 손가락의 주인을 향해 수호는 시선을 던졌다.
“왜요?”
시선을 받은 주오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수호의 손등에 곡선 두 개를 그려냈다. 수호는 주오가 뭘 그린 건지 몰라 아무 흔적도 없는 손등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주오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아까와 같은 곡선을 그려냈다.
♡
“수호야, 좋아해.”
앞에서 팀원들이 싸우고 감독에게 혼나고 있는 상황에서 참 어울리지 않는 고백이었다.
수호가 주오에게 고백을 받은 건 며칠 전이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면 둘 사이에 달라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팀메이트이자 룸메이트였고, 좋아하는 형과 동생이었다.
물론 형 쪽에서 품은 마음은 흑심이었지만.
굳이 달라진 점을 꼽자면 주오의 애정 표현이 나날이 빈도가 잦아진다는 것. 그리고 그럴 때마다 수호는 곤란해졌다는 점이다.
수호는 주오 때문에 간질거리는 손등을 손바닥으로 덮어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진정해요.”
“수호를 앞에 두고 어떻게 진정해.”
“지금까지 잘 했잖아요.”
그간 주오가 4년간 보였던 행동들이 절대 잠잠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고백 후의 주오에 비하면 확실히 잠잠한 편이긴 했다.
그때는 정말 양보해서 팬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김주오는 누가 봐도 열렬한 구애의 춤을 추는 두루미 같았다.
‘수호야, 좋아해.’
아침에 눈을 뜨고부터 잠들 때까지 듣는 말이었다. 자신을 봐달라고 눈을 빛내며 말하는 주오 때문에 수호는 아침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침에 일어나도 왜 그렇게 잘난 건지.
주오는 부스스한 채로 이불 속에서 얼굴만 내민 채 종알종알 고백해 왔다. 그 덕에 수호는 요즘 아침마다 정신이 없었다. 잠이 깨기까지 오래 걸리는 편인 수호가 요즘은 눈만 뜨면 바로 정신을 차렸다. 바로 김주오 때문에.
주오를 보는 수호의 시선이 뚱했다. 하지만 불만의 빛이 담긴 수호의 눈빛에도 주오는 한없이 다정한 애정이 가득한 눈을 반짝일 뿐이었다.
주오가 건드린 손등이 다시 간지러워진 수호는 애먼 손등만 꾹꾹 눌러댔다. 전에 주오가 깨문 볼도 그렇고 그가 닿았던 곳들이 괜스레 간지러워질 때가 있었다. 진짜 문제라도 있는 건가.
급격하게 심각해진 수호의 눈빛에 주오의 다갈색 눈에도 걱정이 가득 차올랐다.
“수호 어디 아파? 갑자기 표정이 안 좋아졌어.”
수호는 어느새 한 뼘가량 가까워진 주오를 뚱한 눈으로 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니요.”
“그러면 됐어. 수호 아프면 안 돼.”
“얼씨구, 둘이 뭐 하는 거야. 앞에서 은기랑 우찬이 혼나는 거 안 보여?”
잠자코 듣고 있던 선우의 갑작스런 타박을 주오는 가볍게 무시했다. 들은 척도 안 하는 주오를 보며 선우가 대단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주장이 팀을 말아먹고 있어.”
“혼날 만해서 혼나는 거지.”
“가만 보면 진짜 매정하다니까.”
선우가 피식 웃었다. 이윽고 다시 혼나는 은기와 우찬을 구경하기 위해 시선을 돌린 선우였다.
주오는 방해꾼이 사라지자 한 뼘 더 수호에게 찰싹 붙었다. 수호는 찰거머리처럼 옆에 붙은 주오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전이라면 이 정도 거리는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며칠 사이 주오가 다시 불편해진 수호였다. 특히 이렇게나 가까워졌을 때.
수호는 힐끔 시선을 돌려 주오를 바라봤다. 여전히 자신에게 향하는 주오의 눈빛이 열렬했다. 오히려 며칠 새 더욱 심해진 것 같았다.
머리가 아파오는 느낌에 수호는 주오에게 향했던 시선을 홱 돌려 혼나고 있는 은기와 우찬을 바라봤다.
“부담스러워요.”
“그래서 싫어?”
“싫어요.”
부담스러운 걸 즐기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수호의 단호한 대답에 주오의 눈가가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김주오에게 이런 일은 이미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은 겪어왔던 일이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싫어졌어?”
축 내려앉은 처량한 주오의 음성에 수호의 시선이 다시 주오에게 향했다. 바짝 붙은 잘난 얼굴이 침울해져 있었다.
수호는 곤란하다고 느꼈다. 부담스러움에도 주오의 저 세상 서러운 얼굴을 보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싫지도 않았다. 여전히 수호는 주오가 좋았다.
다만 전과는 다르게 미묘하게 불편하다고 해야 할까. 낯설다고 해야 할까.
수호도 정리되지 않은 이 감정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아니요.”
작은 음성이었지만, 주오가 알아듣기엔 충분했다. 주오는 언제 시무룩했었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이윽고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수호를 푹 끌어안았다. 갑자기 달려드는 주오를 피하지 못한 수호는 멀뚱히 그를 올려다봤다.
“수호가 너무 좋아. 정말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수호는 자신을 향한 애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주오를 떼어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귓가에서 콩콩거리는 심장 소리가 거세졌다. 회의실이 어느새 더워진 것 같았다.
귓가에 울리는 웃음소리 때문에 귀가 간지러워진 수호가 주오의 뺨을 꾹꾹 밀었다.
“더워요.”
“어? 지금 실내온도 22도인데.”
결코 덥지 않은 온도였지만 더웠다. 귓가에 후끈한 열기가 빙빙 맴돌고 있었다. 수호는 여전히 떨어지지 않은 주오를 더욱 꾹꾹 밀었다.
“더워요.”
“다음에는 온도 더 낮춰야겠다.”
“얘네는 또 뭐 하는 거야?”
은기와 우찬을 다 혼냈는지 어느새 뒤로 다가온 감독 이진형이 너털웃음을 짓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웃음은 박력 있었다.
선우가 씩 웃고는 입을 열었다.
“연애한대요!”
“동생들 혼나고 있는데 주장이라는 놈은 놀고 있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진지하게 말하는 것치곤 대답이 영 장난스러운 주오의 태도에 진형은 더욱 분노했다.
“아무리 수호가 좋아도 그렇지 주오 너 정신 안 차릴래?”
이번에는 진형이 주오를 갈구는 걸 보며 선우가 재밌다는 듯 푹푹 웃었다. 결국 그 모습을 들킨 선우는 마지막 타자로 진형에게 꾸지람을 들어야만 했다.
그 소란 속에서 수호는 조용히 물만 꼴깍꼴깍 마실 뿐이었다. 여전히 귓가에 남은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그런 수호를 보는 주오의 입가에선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 * *
체이스 스프링 스플릿 개막 3주차. 어느새 1라운드 중반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기대하는 경기, 주이 vs 제라드의 경기가 있는 주였다.
키보드와 마우스 세팅을 끝낸 수호가 자리에 앉았다. 선수들이 게임을 하는 플레이룸은 전면이 유리여서 환호하는 관객들에게 주오와 선우가 손을 흔들었다. 수호는 두 사람이 정말 팬들을 대하는 게 능숙하다고 생각했다.
“하하, 오늘따라 자리가 더 많이 찬 것 같은데?”
관객석을 삥 둘러본 우찬이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우는 자신과 정반대 가장 먼 곳에 앉아 있는 우찬을 보며 웃었다.
“작년 월챔 결승까지 갔던 팀인데 당연하지.”
“에이, 그래도 수호랑 형 빠져서 그런 기대는 안 할 줄 알았지.”
관객석을 향해 우찬이 손을 방방 흔들었다. 그러자 경기장에 환호성이 가득 울렸다.
“저쪽에 루키 있잖아. SUHO의 뒤를 이을 미드라이너! 그 타이틀이 있는데 당연히 많이 보러 왔겠지.”
선우의 시선이 수호에게 향했다. 수호는 마우스 감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설정을 다시 하고 있었다. 관심도 없어 보이는 태도에 은기가 피식 웃었다.
“선우 형, 수호는 관심 없어 보이는데요.”
“수호 너 그러다가 OZ한테 지면 개쪽인 거 알지?”
“수호가 왜 져, 수호는 최고야.”
엄한 곳에서 발끈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오가 굳은 얼굴로 선우를 보고 있었다. 진짜 중증이라고 생각하며 선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미드 많이 봐줄게. 수호는 걱정하지 마.”
“걱정 안 해요.”
“자신감이야?”
“아뇨.”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대답이었지만 주오는 지금 수호가 승부욕으로 불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늘 뚱하기만 한 수호의 눈이 게임할 때만은 진지했다. 그게 또 수호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며 주오는 흐뭇한 시선으로 수호를 바라봤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내가 어떻게 봤는데?”
쌀쌀맞은 수호의 말에 주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부담스러운 눈빛.”
“그렇게 느껴졌어? 나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봤는데.”
주오의 대답에 눈살을 찡그린 건 수호만이 아니었다. 주오와 수호를 제외한 세 사람과 감독인 진형까지 가지 가지 한다는 눈으로 주오를 바라봤다. 당사자인 수호는 그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
“헤드셋 끼자마자 들리는 말이 이런 거라니. 너네 오늘 지면 진짜 밤새도록 피드백받고 연습할 줄 알아.”
“아니, 저희는 무슨 죄예요! 감독님 나빠! 혼낼 거면 레인 씨만 혼내라고요!”
“We are a team.”
이건 말도 안 된다며 분노를 터뜨린 우찬에게 진형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이 정말 너무나 재미도 없고 어이도 없어서 우찬의 눈살이 대번에 찡그려졌다. 우찬과 마찬가지인 은기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진형을 돌아봤다.
“감독님, 진짜 재미없어요.”
“은기 너무해.”
“아하하하, 감독님 그런 건 어디서 배워 왔어요.”
진형의 개그가 통한 건 선우뿐이었다. 폭소를 터뜨리는 선우를 은기가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대체 이게 어디가 웃긴 거냐고 묻는 은기의 시선에 선우가 웃었다.
“왜 그렇게 봐?”
“형 개그 코드가 왜 그래요.”
“에이, 이거에 안 웃는 네가 개그 코드가 더 이상한데?”
여전히 웃음을 잃지 못한 선우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수호는 이런 난장판 같은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마우스 감도 세팅을 끝냈다. 수호의 머릿속에는 승리를 향한 욕망뿐이었다. 다들 입을 모아 잘한다고 말하는 OZ와의 대결이 기다려졌다.
* * *
[자, 오늘 경기는 정말 빅매치죠? 이미 많은 커뮤니티에서 누가 승리할지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 경기입니다.]
흥분한 이영중 캐스터의 음성으로 스프링 스플릿 3주차가 시작됐다. 이영중 캐스터가 흥분할 만도 했다. 오늘 경기는 작년 월드 챔피언십 우승과 준우승팀의 매치다 보니 세계적으로 관심이 뜨거웠다. 그 때문에 캐스터와 해설들의 텐션도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현재 1위와 2위를 달리고 있는 제라드와 주이의 1라운드 매치! 과연 작년처럼 주이가 승리할지, 아니면 어벤져스라고 불리는 제라드가 승리할지 기대가 큽니다.]
[관계자들 평가로는 그래도 주이의 주력 멤버였던 SUHO와 DOYOU가 합류한 제라드가 승리할 거라는 예상이 우세합니다. 하지만 지금 혜성같이 나타난 OZ! 괴물 같은 피지컬과 과감한 전투력이 제라드를 상대로 통한다면 주이의 승리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
격하게 흥분한 유기현이 침을 튀기며 말을 우다다닥 쏟아내자 박동진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분명 주이에도 희망은 있습니다. CKR 리그에서는 생소한 OZ의 플레이가 과연 어디까지 통할지 기대됩니다!]
박동진 해설의 말이 끝나자 이영중 캐스터가 입을 열었다.
[두 해설분들, 오늘의 경기의 키포인트는 무엇일까요? 워낙 쟁쟁한 선수들이 많으니 키포인트를 집기도 힘들 듯합니다.]
[하하, 맞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주목하는 그 라인! 미드가 키포인트입니다. OZ 선수의 그 과감한 전투력이 과연 SUHO 선수에게 얼마나 통할지. SUHO 선수를 뚫어낼 수 있을지가 키포인트입니다.]
[물론 힘든 길일 겁니다. CPL 리그에서 뛰었다고는 하지만 CKR 리그에서는 처음 뛰는 선수이고, 무려 그 상대가 4년 우승 기록을 세우고 있는 SUHO 선수이니. 하지만 부담감을 조금 덜어내면 OZ 선수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미드도 미드지만, 이번 주이 서포터도 신인입니다. DOYOU 선수의 빈자를 RABBIT 선수가 얼마나 채워줄지 또한 관건입니다.]
유기현과 박동진 해설의 말이 끝나자 이영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인이 선수들이 잘해주길 바랍니다! 비등비등해야 게임도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아, 선수들 세팅이 끝났다고 하는군요. 그럼 바로 게임 시작하겠습니다!!]
이영중 캐스터의 시작과 함께 게임은 밴픽창으로 넘어갔다. 서로 까다롭다고 생각하는 캐릭터를 전략적으로 픽하고 금지시키는 과정이 끝이 나자 감독인 이진형과 윤채현이 무대를 빠져나갔다.
“수호야, 미드 계속 봐줄 테니까 적극적으로 밀어붙여 줘.”
“네.”
이번 매치의 키는 미드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주오는 걱정이 없었다. 수호가 요 근래에는 데뷔 때처럼 과감한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플레이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관객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제는 그런 플레이를 못해서 안정적인 플레이만 한다는 말이 돌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주오는 그런 사람들의 생각을 부숴줄 마음을 먹고 있었다. 수호의 라이벌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게임 속 미니맵을 보는 주오의 시선이 매서웠다. 상대편 정글은 초반이 약한 캐릭터를 골랐기에 절대 라인에 개입할 수 없었다. 주오는 상대 정글로 들어가 상대편 위치를 체크해 주면서 곳곳에 시야를 밝혀 나갔다.
미드를 중심으로 시야가 환해지자 수호의 플레이도 한결 편안해졌다.
[RAIN 선수, 과감하게 상대 정글로 파고들어 시야를 밝힙니다. 이렇게 되면 미드 위아래 시야가 다 뚫려서 상대 정글이 더욱 라인에 개입하기 힘들겠네요.]
걱정스러운 듯 박동진 해설의 음성이 조용히 흘렀다.
[QUERY 선수의 라입 개입도 문제지만, 정글 시야를 다 뺏긴 만큼 정글러의 위치를 제라드에서 빤히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라이너들도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네요.]
[그렇죠. 우리 팀 정글이 탑 쪽에 있다는 걸 아는 상대 팀은 바텀으로 향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바텀 라이너들이 힘들 수밖에 없죠.]
[처음부터 RAIN 선수의 시야 장악력이 대단합니다. QUERY 선수를 쫓아다니면서 계속 괴롭혀 주고 있습니다!]
제라드 응원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수호는 찬찬히 OZ와 거리를 두며 상대를 살피고 있었다. 플레이 영상에서 OZ는 캐릭터 간의 상성도 무시한 채 과감하게 상대에게 돌진해 킬을 따내는 선수였다. 지금도 OZ는 수호와 거리를 벌렸다 좁히면서 진입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OZ와 SUHO의 캐릭터는 상성이 반반이었다. 1대1로 싸운다면 무조건 피지컬 승부로 판결이 날 수밖에 없었다.
수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윽고 수호가 앞으로 밀고 들어갔다. OZ는 수호가 거리를 좁히고 공격해 오자 도망가지 않고 받아쳐 왔다. 대쉬기를 사용해서 앞으로 달려오던 OZ의 스킬을 피하면서 수호는 공격을 퍼부었다.
[아! 아아! 미드, 미드! OZ 선수 속박기를 못 맞췄는데 이거 이길 수 있나요?!]
[저 챔피언은 속박기가 딜도 함께 들어가서 못 맞추면 승산이 적은 챔피언인데요! 아! SUHO 선수 OZ 선수의 다른 스킬들도 피해 버립니다!]
[오오! 오오오! SUHO, SUHOOO!!! 솔킬! 솔킬이 터져 나옵니다!!]
캐스터와 해설 세 사람이 의미 모를 효과음과 함께 소리를 질러댔다. 그와 함께 관객석에서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오, 쑤호! 멋있어, 멋있어!”
화면 상단에 크게 표기된 라는 문구를 보자 우찬이 소리를 질렀다. 중요 라인인 미드에서 솔로킬이 터져 나오자 팀에 활기가 피어올랐다.
“모두가 주목하는 OZ를 솔킬 내다니 이수호 아직 안 죽었네.”
선우의 말에 수호가 평소와 같이 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 살아 있어요.”
“농담 좀 알아먹어!”
혼자 또 진지한 수호를 보며 선우가 웃으며 타박했다.
“형, 상대 정글 바텀으로 내려오는데 보고 있죠?”
“설마 안 보고 떠들고 있겠어? 저쪽에 덫 깔아놨어. 오면 이동 속도 느려질 거니까 때봐서 뒤로 빠지든가 각 보이면 잡을 수 있어.”
“오케이. 알겠어요.”
바텀 듀오 조은기와 박선우가 QUERY의 갱킹을 받아낼 설계를 하는 사이 주오가 수호에게 말을 걸어왔다.
“수호 멋있어. 너무 섹시했어.”
“형, 그 말투 우찬이한테 배웠죠.”
요즘 어디서 배웠는지 자꾸 뭐만 하면 섹시하다고 외치는 김우찬이었다. 어느새 그 말투가 주오에게까지 옮은 듯했다. 하지만 말끔한 얼굴로 저렇게 유쾌하게 말하는 게 제법 어울리고 귀여워서 수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수호가 좋아하는 거 같으니까 우찬이한테 더 많이 배워야겠다.”
“적당히 해요. 너무 닮으면 싫어요.”
“응. 적당히 할게.”
“아니, 게임 중에 그만해요! 상대 골렘 잡으러 오는 것 같아요.”
수호와 주오의 꽁냥거림에 조은기가 눈가를 팍 찡그리며 골렘 둥지에 신호를 보냈다.
이미 선우와 주오가 밝혀둔 시야 때문에 둥지 근처가 환했다. 상대 정글이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이었고, 미드에서 나온 솔로킬 때문에 이미 분위기는 제라드로 향해 있었다.
그 두 가지 요인으로 이득도 많이 봤기 때문에 이번 골렘만 잡으면 제라드의 승리 확정이었다.
“전투 준비해야 돼. 아마 상대 정글이 둥지 뒤쪽에서 땅굴 뚫고 들어올 거야.”
“상대 정글은 내가 마크할게.”
선우가 자신만만하게 둥지 안쪽에서 상대편이 들어올 길목을 막고 섰다. 이미 시야를 지워놨기 때문에 상대편 시야에서는 선우가 보이지 않았다. 선우의 위치를 알 수 없게 된 주이는 이쪽 길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시야로 보이는 다른 길들은 이미 주오와 우찬이 작업을 다 해놨기에 그 길을 피해 올 게 분명했다.
그리고 상대는 주오의 예상대로 선우가 기다리고 있는 길목으로 들어왔다. 선우가 적을 마크했다. QUERY에게 타깃팅이 몰리고 상대는 둥지로 들어오자마자 바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게임이 쉽게 끝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생각일 뿐이었다.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OZ가 은기와 선우를 순식간에 처리했다.
“어? 와, 이걸 이렇게 들어와? 진짜 신기하네.”
“저렇게 돌아온다고?”
골렘 둥지 근처와 상대 진영 일대의 시야를 밝혀놓은 제라드가 OZ의 움직임을 놓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OZ는 어느새 주이의 진영이 아닌 제라드의 진영에서 튀어나와 바텀 듀오를 암살했다.
선우는 예상치도 못한 루트에서 튀어나온 OZ를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바라봤다. 선우의 흑백 화면에서 주이와 제라드의 4대3 한타가 이루어졌다.
[아아악! OZ 선수! 대체 왜 저기서 나오는 거죠?]
[한 마리의 맹수처럼 정글 속에서 훅 튀어나오는데 정말 심장 내려앉을 것 같습니다!]
박동진 해설의 하이톤 비명과 함께 유기현 해설이 감탄 어린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무난하게 제라드가 승리할 분위기가 단번에 팽팽하게 변했다.
“OZ 진입하면서 스킬이랑 생존기 다 빠졌어. 바로 잡아. 그리고 쟤네 골렘 둥지 안으로 넘어오려면 돌아와야 하니까 그때까지 OZ만 잡으면 나머지는 딜로 이겨.”
뒤에 있던 바텀 듀오가 갑작스런 암살을 당했음에도 주오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당황하지 않은 건 주오뿐만이 아니었다. 수호는 두 사람이 죽은 순간 바로 OZ에게 달려들었다.
[어어?! OZ 선수 SUHO 선수한테 마크당하는데요? 여기서 못 빠져나오면 무조건 죽습니다!]
[버티기가 가능할까요?! 아군이 올 때까지 버티면 주이에게도 승산이 있습니다!]
이영중 캐스터가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OZ가 빠져나가려는 걸 우찬이 막아냈다. 이동 속도가 급격히 낮아진 OZ는 SUHO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아아! 녹았습니다. 녹았어요! 주이 이제 어떻게 하죠? 여기서 빠질 수 있나요?]
하지만 유기현 해설이 말을 끝맺는 동시에 주오가 벽을 넘어 주이의 세 사람을 공중으로 띄웠다. 붕 뜨는 세 사람 위로 수호가 생존기를 쓰면서 돌격했다. 짧은 단도가 무자비하게 세 사람을 향해 쏟아졌다.
주이도 반항하려 수호를 향해 스킬을 퍼부었지만, 상대의 스킬을 가볍게 피하며 상대를 제압했다.
[오늘 미드들이 난리 나는데요?! SUHO 선수가 나머지 주이의 선수들을 처리합니다!]
[진짜 화끈하네요. 일단 다들 당황할 만했는데 너무 잘해줬습니다. BONG 선수의 슬로우도 그렇고, OZ를 보지 않고 바로 상대 본진을 노리는 RAIN 선수!! 진짜 합이 잘 맞는데요?]
격한 해설을 터뜨리던 캐스터와 해설들은 제라드의 남은 선수들이 주이 진영의 보석을 깨뜨리는 것으로 GG(Good Game)를 외쳤다.
바로 진행된 두 번째 세트도 비등비등한 부분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제라드의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