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40)

* * *

체이스 스프링 스플릿은 개막은 화려했다. 개막전부터 경기를 치르는 제라드 때문에 커뮤니티는 물론 여러 리그에서도 CKR에 관심이 집중됐다. 그리고 그 관심에 보답하듯 제라드는 압도적인 기량 차이를 보여주며 승리했다.

올해 제라드는 어벤져스라고 불렸다. 전년 월드 챔피언십 우승과 준우승 멤버들이 한 팀이 되어 붙은 별명이었다. 그리고 별명대로 제라드는 파죽지세로 승을 쌓아갔다.

3판 2선 승으로 진행되는 경기에서 제라드는 단 한 세트도 내주지 않았다.

현재까지 리그 순위 1위를 달리고 있는 제라드의 팀 내 분위기는 최고였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합을 맞췄을 때부터 분위기가 좋았지만, 막상 시즌이 시작되고 연승을 거머쥐면서 더욱 활기를 얻고 있었다.

대기실 소파에 벌러덩 누워 있는 우찬이 중앙에 있는 TV 모니터를 바라봤다. 모니터에서는 제라드보다 한 타임 먼저 주이와 체스가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1대1 상황으로 지금 경기가 마지막 세트였다.

수호와 선우가 빠진 주이였기에 관계자들의 평가는 불안정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중위권까지는 괜찮겠지만,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포스트시즌에 갈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는 의견. 하지만 막상 시즌을 시작하고 나자 주이는 그런 관계자들의 의견은 헛된 걱정이고 추측이었다는 듯 승승장구 중이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이번에 주이에 새로 합류한 OZ 신태민이 있었다. 수호보다는 부족하다는 의견이 많지만, 그래도 잘하는 선수였다.

대기실에 있는 선수들의 시선은 모두 신태민에게 향해 있었다. 소파를 다 차지한 우찬을 밀어내고 자리에 앉은 선우가 두유 팩에 빨대를 꽂으며 입을 열었다.

“잘하네. 저 루트로 들어와서 뒤를 노리다니 대범한 선택이네.”

“괜히 CPL 리그 물 먹은 게 아닌가 보다. 그쪽 선수들 엄청 화끈하잖아.”

팔걸이에 얼굴을 대고 누워 있던 우찬이 뭉개진 볼 때문에 웅얼거렸다. 신태민은 한국 선수지만 애초에 프로 데뷔를 한국 리그인 CKR이 아닌 중국 리그인 CPL에서 했다.

CPL 리그는 화끈한 경기가 특징이었다. 합을 맞추고 운영을 바탕으로 이득을 굴리는 CKR와는 다르게 CPL은 무조건 전투. 전투를 통한 이득으로 상대 팀과 차이를 벌렸다.

그런 리그에서 활동한 탓인지 신태민의 플레이는 전투적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 실수는 적었다. 보고 있으면 심장을 졸이게 만드는 플레이를 자주 했다. 그 때문에 신태민의 팬은 점점 불어났다. 보는 사람 입장에선 운영을 기반으로 하는 경기보단 치고받고 싸우는 경기가 더 재미있는 법이니까.

“이번 시즌에 주이는 조금 힘들 것 같았는데 괜한 걱정이었네요.”

“그러게. 체스랑 잘 비비고 있네. 아, 저기에 그때 올스타전 나갔던 PEOPLE 있지?”

올스타전에서 주오와 수호, 은기와 합을 맞췄던 선수 PEOPLE 이지한이 모니터 속에서 열심히 플레이하는 모습이 나왔다. 듬직한 몸뚱이의 캐릭터가 몸보다 더 큰 대검을 무자비하게 휘두르자 상대 팀 원딜 피가 반이나 줄어들었다.

“쟤도 저돌적이네.”

포지션 변경 전에 탑 라이너였던 선우가 지한을 보고 와 하며 입을 벌렸다. 은기는 그런 선우를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물론 김우찬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 형이 미쳤나. 형이 남한테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 전에 무슨 노루 새끼 캐릭터로 막대기 붕붕 휘두르면서 막 들어온 게 누군데. 난 그때 형이 미친놈인 줄 알았다고.”

“그건 들어갈 각이 예뻤잖아.”

“아니, 그 캐릭터 물몸이라 들어오면 바로 녹는데 형이 아군도 없이 혼자 우리한테 꼬라박잖아. 어이없지 않겠어? 그때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당시 선우의 상대였던 김우찬은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는 듯 불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우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갑자기 불붙은 탑 라이너들의 대화에 끼고 싶지 않았던 조은기가 수호의 옆에 앉았다. 물론 그 순간 조은기에게 주오의 따가운 시선이 꽂힌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은기는 작게 폭 한숨을 내쉬었다.

“날이 갈수록 주오 형은 질투가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주오에게 향한 말이었지만, 중간에 끼어 있던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은기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는 있는 수호를 보며 다시금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심해질 만한 것 같기도 하네요. 아무튼 결론은 OZ랑 너랑 지금 라이벌 구도 잡혀서 사람들 관심이 엄청나니까 지면 안 된다.”

주이와 대결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미 연습 경기로 몇 번 붙어보았던 주이였지만, 연습 경기와 정규 시즌은 엄연히 달랐다. 경기 한 번 한 번의 승패가 팀의 포스트시즌을 확률을 결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승부욕이 강한 수호는 특히나 질 마음이 없었다.

수호는 모니터 속에서 또 공격적인 플레이로 이득을 가져간 OZ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안 져.”

“우리 수호 파이팅. 나는 언제나 수호를 응원해.”

주오가 생글 웃으며 두 손에 주먹을 꽉 쥐었다. 진짜 뜬금없는 응원이었지만 수호는 제법 기뻤는지 주오처럼 주먹을 쥐어 보였다. 서로 주먹을 콩 마주치는 두 사람을 보며 은기는 작게 웃었다.

“안 돼. 이러다가 수호 손 다치면 어떡해.”

“이런 거로 안 다쳐요.”

“아냐, 다칠지도 몰라.”

이어지는 주오의 주접질에 은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주오와 수호는 은기가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열심히 옹알옹알 대화를 이어나갔다.

마침 모니터 속에서는 마지막 한타가 끝이 났다. 체스의 보석이 깨지면서 결과는 주이의 승리였다.

그리고 주이 뒤에 바로 경기가 있었던 제라드 역시 승리를 거머쥐었다.

* * *

[게임/982013] 오늘 CKR 본 사람?

제라드랑 킹콩 경기는 뭐 당연히 제라드가 이길 거 알아서 그냥 그랬음. 근데 주이랑 체스는 진짜 개재밌더라.

수호랑 선우 나가서 주이 진짜 잘해봐야 중위권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잘해서 놀라는 중임ㅠㅠㅠ 주이 팬으로서 감격 중이야. OZ 진짜 플레이 미쳤어ㅠㅠㅠ

주이 팬들 힘내자!!! 이러면 결승도 꿈이 아닌 듯하다. 존나 설레!!!!

└ 나도 봤으뮤ㅠㅠ 진짜 OZ!!!!!! 수호 빈자리 너무 잘 채워주고 있는 듯 감격이야

└ 저기 글이 시끄러워요

└ ㄱㅆ 안 시끄러울 수 있어?ㅠㅠ 내 마음이 난리 났어

└ 다음 주에 있을 제라드 vs 주이 존나 기대된다. 솔직히 제라드가 이길 것 같은데 OZ가 너무 잘해서 비비는 거 가능할 것 같아

└ 솔직히 수호랑 OZ 1대1 하면 피지컬은 OZ가 더 좋을 거 같은데

└ ???? 너 CKR 본 지 얼마 안 됐지;; 무슨 OZ를 수호한테 비벼

└ 그러게 OZ 아직 신인인데 어떻게 수호한테 비비냐. 월챔 우승을 4번이나 했는데 무슨 OZ가 수호보다 피지컬이 좋다는 소리가 나오냐;;

└ 커리어 그만 들먹이셈. 커리어 빼고 지금 보면 비빌 만해서 하는 말인데 맨날 커리어만 들고 와서 빼액질하네. 진짜 수호 팬들 역겹다.

└ 여기 핫플이냐?? 존나 싸우네

└ 원래 이렇잖아. 누가 이긴다는 말만 하면 개떼처럼 밀고 와서 싸우는 거 하루이틀 봄?

└ 수호 잘난 건 알겠는데 수호 팬들이 이런 식으로 하는 거 보면 정떨어짐

└ 나 OZ랑 수호 둘 다 팬 아닌데 그냥 수호가 더 잘하지 않냐?

└ 객관적인 척하면서 선동하지 마셈

└ 그냥 둘이 플레이 스타일이 다른 거 아닌가? 수호도 피지컬 좋은데 걘 운영을 조금 더 신경 쓰는 거고 OZ는 운영보단 무조건 싸움이고 이 차이 같은데.

└ 둘 다 잘한다고 하면 되지 왜 싸우려고 해.

└ 제라드 어벤저스라고 하는 거 진짜 개꼴깝인데 주이가 이겼으면 좋겠다. 제라드 털리는 거 보고 싶음

└ 진짜 남 잘되는 꼴 못 보는 새끼가 이런 새끼구나.

└ 응~ 어차피 제라드가 이겨~

[게임/999632] 수호 OZ 누가 이길 것 같냐

진짜 맨날 혜성같이 나타난 신인이라고 다들 그러는데 다 한 시즌 반짝이었음. 근데 이번 OZ는 진짜 잘하는 거 같더라. 오늘 배론 둥지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와서 체스 진영 쓸어버리는 거 보고 진짜 소름 돋았음.

CPL 플레이 스타일 화끈해서 보기 좋았음. 미드에서 솔킬도 미쳤고. 수호한테 비빌 신인인 거 같아 보였음. OZ 이번에는 다른 신예들처럼 한 시즌 반짝하지 말고 쭉 잘해서 세체미 됐음 좋겠다.

그래서 결론은 나는 수호가 아직까지는 더 잘하는 거 같아서 다음 주에 있을 경기는 수호가 이길 것 같음.

└ 222 나도 이 의견에 동의함. 수호도 솔직히 이제 5년 차니까 2년 정도 더 하면 은퇴각 잡을 거 같은데 그 뒤를 이을 선수가 나와줘야 되는 거 같음

└ 2년 뒤에도 수호는 존나 잘할 거 같은데

└ 수호 뒤를 이을 선수가 있긴 하냐??? 주이 경기 보면 OZ 잘하긴 하는데 수호만큼 진짜 감탄 나오는 건 아닌 것 같음

└ 신앙심이세요? 진짜 미화 좀 작작 해라. 수호 신인 때보다 더 잘하면 잘했지 못하진 않는데 무슨 소리임;;

└ 난 이 의견에 동의함. 그냥 한국에서 보기 힘든 스타일이라 놀라운 거지 진짜 막 수호 신인 데뷔했을 때처럼 조오오오오온나 잘해서 감탄 나오는 건 아닌 듯.

└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이수호 팬들 많은 건 알겟는데 인정할 건 인정해라 OZ 누가 봐도 잘해서 수호한테 비빌 만한데 왜 그렇게 인정을 안 하는 거임?

└ 그냥 인정하기 싫은 거임.

└ 너네나 닥쳐라;; 그냥 수호가 잘해서 고까운 거잖아;; 인정 못 하고 빼액질하는 거 진짜 꼴 보기 싫네. 그렇게 보기 싫으면 처보질 마.

└ 댓글에서 싸우는 거 진짜 개역겁네. 너네가 잘한다 못한다 비교질해서 뭐 결론 나는 게 있음? 그냥 닥치고 경기나 봐. 어차피 다음 주에 붙어보면 알 건데 왜 열 내면서 싸우는 거야.

└ ㄹㅇ 이해 안 됨.

└ 싸우는 거 재밋네ㅋㅋㅋㅋㅋㅋㅋㅋ 난 그냥 이기는 편 할래. 어쨌거나 다음 주 존나 기대된다.

└ 진짜 언제 토요일 언제 되냐. 치킨 시킬 준비 벌써부터 하는 중이야.

└ 경기 끝나고 커뮤 터질 거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웃김ㅋㅋㅋㅋㅋㅋㅋㅋㅋ OZ 팬이랑 수호 팬 중에 누가 웃을지 보자고~~~~

* * *

“피곤해.”

침대에 파묻혀 베개에 얼굴을 비비적거린 수호가 중얼거렸다. 씻고 나오자마자 침대에 파묻힌 덕에 베개고 이불이고 물기로 축축했다. 주오는 늘어져 버린 수호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어쩌면 저렇게 귀여울까.

“수호 일어나야지. 다 젖어.”

“괜찮아요. 졸려요.”

“머리라도 말리고 자자.”

수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 덕에 베개에 물기가 점점 스며들어 젖은 부분이 넓어지고 있었다. 수호가 잠에 유독 약해 한번 잠이 쏟아지면 정신을 못 차린다는 걸 이미 여러 번 겪어 잘 아는 주오가 수건을 들고 수호에게 다가갔다.

수호는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게임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어리숙했다. 애초에 관심이 없어서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느낌이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는 게임 말고는 딱히 잘하는 게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주오는 수호의 그런 점이 좋았다. 도와주고 챙겨준다며 들러붙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누가 좀 챙겨주라고 사람을 붙여주기 일쑤였다. 그리고 제라드에서 그 역할은 주오의 몫이었다.

박선우를 대신해 2대 수호의 엄마가 된 김주오는 엎어져 있는 수호의 등을 큰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잠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손끝에 닿는 수호의 등허리 라인이 탄탄하고 매끄러웠다.

맨살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왜 수호는 옷을 벗고 자는 버릇이 없는 걸까. 주오는 조금 더 만져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입을 열었다.

“수호 님, 일어나세요.”

하지만 수호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꿈나라로 벌써 들어가 버린 건지 답 없이 그저 색색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주오는 얼굴은 베개에 감추고 엎어진 수호 옆에 몸을 구겨 앉았다. 무릎을 손으로 감싼 주오가 침대에 턱을 올리고 수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굴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지만, 긴 눈매의 끝과 광대, 작은 귀가 빼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번 만져보고 싶다.

주오는 유독 모양이 예쁘게 잡힌 수호의 귀를 빤히 바라봤다. 사람 귀를 보고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처음이었다.

수호를 지켜보는 주오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주오는 늘 궁금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사람이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수호는 언제나 귀엽고, 언제나 멋있고, 언제나 사랑스럽다. 5년이라는 시간을 내리 수호만 봤지만 한 번도 질린 적이 없었다. 오히려 보면 볼수록 수호가 좋았다.

요즘 수호와 사이가 부쩍 가까워진 지금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좋았다.

가끔은 수호가 예상치 못하게 다가올 때가 있었다. 뜬금없이 누가 어깨 위에 턱을 올려놓길래 뒤를 돌아보면 수호가 멀뚱한 얼굴을 하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조금만 더 크게 돌렸으면 부딪혔을 만큼 아주 가까운 거리. 주오의 이성이 무너지는 거리이기도 했다.

그때마다 주오는 세상에 존재한다는 온갖 신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이 수호를 덮치지 않기를 빌고 빌어야만 했다.

“수호야,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응.”

주오가 뭘 묻는지도 모른 채 그저 들리는 소리에 반응하는 수호를 주오가 곤란한 눈으로 바라봤다.

수호가 좋다. 그리고 수호도 자신을 제법 마음에 들어 했다. 늘 수호의 뒤를 쫓던 주오가 바라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주오는 요즘 들어 마음이 심란했다.

수호가 더 자신을 좋아해 주길. 자신과 같은 마음이 되기를.

산등성이에서 구르기 시작한 돌이 점점 더 빨라지듯이 주오의 욕심도 빠르게 커져만 갔다.

수호 너는 어떤 마음일까. 정말 내가 형으로서만 좋은 걸까.

수호를 보는 주오의 눈이 슬프게 가라앉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만큼 수호도 자신을 좋아해 주길. 주오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과연 이대로 가면 정말 그렇게 된다고 보장할 수 있는가? 주오가 내린 답은 ‘아니다’였다. 이대로 가면 정말 이대로만 흘러갈 뿐이다.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수호는 그냥 두면 평생토록 자신이 좋아한다는 의미가 연애의 감정이라는 걸 모를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면전에 대고 말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주오는 그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주오는 웃었다. 혹시나 고백해서 수호가 자신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면 어쩌나 걱정되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포기할 만큼 작은 감정이 아니었다.

수호를 꼬실 시간도 부족했다. 고민하는 데 보내는 시간은 사치였다.

수호는 갑자기 침대가 푹 내려앉는 느낌에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베개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주오가 어느새 허리춤에 올라타 있었다.

“형, 뭐 해요?”

“수호가 안 일어나니까 이렇게라도 머리 말려주려고.”

생긋 웃는 주오를 보던 수호가 다시 고개를 베개에 파묻었다. 하지 말라고 해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는 폭신한 수건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물기를 앗아 갔다.

“잠 와요.”

부드럽게 머리칼을 헤집는 손길에 잠이 밀려왔다. 더욱 몽롱해진 정신에 수호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기분 좋다. 이렇게 조금만 더 있으면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수건으로는 다 말리기 힘드네.”

“응.”

베개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는 수호의 작은 뒤통수를 보는 주오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떠올랐다.

“졸려?”

“응.”

“수호는 졸릴 때만 말 놓더라.”

“응.”

잠에 쫓겨 습관적으로 대답을 하는 수호가 귀엽고 웃겨 주오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대로 끌어안고 잠들고 싶은 게 주오의 마음이었다.

“귀여워.”

“응.”

수호는 주오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알아듣지 못할 만큼 몽롱한 상태였다. 그저 반사적으로 응응, 대답을 건넸던 수호는 갑자기 잠잠해진 주오의 기척에 눈을 떴다. 너무 조용했다.

꾸물거리며 고개를 돌린 수호의 시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주오가 들어왔다. 옅은 미소를 띤 채 자신을 보는 주오는 이미 익숙했지만, 구도 때문인지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수호는 졸린 눈을 힘겹게 끔뻑이며 주오와 시선을 맞췄다.

“형?”

“마사지해 줄까?”

주오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수호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멍한 정신이 더욱 멍해졌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게임할 때 자세가 틀어졌는지 어깨가 아팠다.

수호의 짧은 대답에 주오의 손길이 빠르게 어깨로 다가와 뭉친 부분을 누르기 시작했다.

“아…….”

굳은 부분이 자극되자 터져 나온 신음에 주오의 손이 다급히 어깨에서 물러났다.

“아, 혹시 아파?”

정말 아팠으면 어쩌나 싶은지 걱정이 한가득 담긴 음성에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안 아파요. 시원해요.”

“다행이다. 이 정도 세기가 좋아?”

“네. 형은 이런 것도 잘하네요.”

수호는 주오가 신기했다. 한 팀이 되기 전부터 주오는 뭐든 잘할 거 같은 완벽한 느낌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같은 숙소를 쓰게 되면서 알게 된 거지만 주오는 정말 뭐든 잘했다. 요리도 잘했고, 청소도 잘했다. 그리고 정신없는 팀원들을 다루는 것도 정말 잘했다.

예전에는 주오의 이런 완벽해 보이는 점이 불편했던 수호였다. 하지만 이제는 완벽한 사람이라도 괜찮았다. 김주오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뭉친 어깨를 풀어주는 주오의 손길에 수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맴돌았다.

“수호야.”

“응.”

노곤노곤한 감각이 전신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꼭 아늑한 장소에 있는 것 같았다. 수호는 제라드에 온 것에 진심으로 만족했다.

“좋아해.”

“알아요.”

이런 주오의 가벼운 농담도 이제는 익숙했다.

“아니, 수호 너는 몰라.”

“알아요. 저 많이 좋다고 말하려는 거죠?”

어느새 수호의 어깨에서 주오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말없이 물러선 주오의 손길에 수호는 비척비척 일어나 몸을 돌렸다.

여전히 주오는 수호의 허리춤에 앉아 있었다. 덩치 큰 주오가 저러고 있으니 위압감이 엄청났다. 새삼 수호는 주오가 정말 크다는 걸 느꼈다.

“형, 무거워요.”

“불편해?”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불편하진 않았다. 다만 내려앉는 무게감이 낯설 뿐이었다.

“아뇨.”

“수호야, 수호야.”

“왜 자꾸 불러요.”

평소에도 싱겁게 자신을 부르는 주오였지만, 오늘은 이름을 부르는 주오의 음성에 장난기가 없었다. 낮고 담백한 음성에 수호는 멀뚱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주오를 바라봤다.

하지만 주오는 답이 없었다. 그저 온기를 담은 다갈색 눈으로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의아한 마음에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주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수호에게 늘 보여주는 따스한 미소였다.

“좋아해. 진심으로.”

“저도 좋아해요.”

“너는 나랑 좀 다를 거야.”

주오의 말에 수호의 고개가 다시 한번 갸웃했다.

뭐가 다르다는 걸까. 다른 건 하나도 없는데.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수호도 확신할 수 있었다. 주오가 말하는 좋아와 자신이 말하는 좋아는 다른 게 하나도 없다.

“다르지 않아요. 저도 형 좋아요. 진심으로.”

“아닐 텐데.”

“맞아요.”

꿋꿋하게 서로 같다고 말하는 수호의 눈빛에 오기가 서렸다. 전혀 다르지 않은데 다르다고 말하는 주오의 생각이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런 수호의 두 뺨을 주오가 조심스럽게 쥐고 고개를 저었다.

“달라.”

단호하게 다르다고 말하는 주오 때문에 수호는 울컥 화가 났다. 뭐가 다른지도 말해주지 않으면서. 수호는 자신의 뺨을 감싼 주오의 손을 겹쳐 잡으며 부루퉁한 눈으로 주오를 바라봤다.

“뭐가 다른데요?”

“수호는 내가 형으로 좋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형으로 좋은 게 아니면 대체 어떤 식으로 좋아해야 하는 걸까.

수호는 의미 모를 주오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좋다. 수호에게는 그게 형으로 좋다는 의미와 다를 게 없었다.

수호의 대답에 주오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늘 보여주던 것과 달랐다. 보고 있으면 포근하고 기분 좋아지는 미소가 아니라,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미소였다.

어느새 잠이 쏙 달아난 수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왜 그러는데요. 수호는 당황스러웠다. 주오가 왜 저런 얼굴을 하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그게 싫어. 수호가 나를 형으로 좋아하는 게 정말 싫어.”

“……왜요?”

왜 싫다는 건지 수호는 정말 몰랐다. 분명 먼저 좋다고 한 건 김주오였다.

그런데 왜 싫은데요. 분명 좋아해 달라고 했잖아요.

이유 모를 억울함이 불쑥 올라왔다. 답답한 마음에 수호의 얼굴이 슬프게 구겨졌다. 처음 보는 수호의 표정에 주오의 눈이 커졌다.

“형이 먼저 좋다고 했잖아요. 저보고 형 싫어지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싫어요?”

“수호야, 내 말은 그게…….”

“왜 싫은데요?”

지금 수호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기분 나쁜 적은 처음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주오는 점점 미간에 주름이 지어지는 수호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정말 즐거워하는 미소였다. 수호는 따라가지 못할 주오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눈을 둥글게 떴다.

“수호야, 좋아해.”

“제가 좋아하는 건 싫다면서요.”

주오가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았다. 울컥 화가 다시금 치밀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꾹 다물고 있자 주오가 갑자기 뺨을 죽 당겼다.

“머 하는 거예여.”

“수호가 날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기뻐서. 그리고 네가 너무 귀여워서.”

“형 지금 저 놀리는 거예요?”

“아니,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 근데 수호 놀리는 것도 재밌다.”

장난스러운 주오의 말에 수호의 눈빛이 다시 매섭게 변했다. 그런 수호의 뺨을 다시 조심스럽게 감싼 주오가 환하게 웃었다.

“동생으로 말고, 연애의 감정으로 좋아해.”

“……?”

완벽하게 주오는 자신을 놀리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저런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장난은 또 처음이라 수호는 그저 멍하니 주오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런 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걸까.

수호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사이 주오가 수호와 거리를 좁혔다.

이미 수호의 허리춤에 올라탄 주오였기에 수호는 그저 가까워지는 주오를 멍하니 바라봤다.

“키스하고 싶다고 하면 수호가 나 미워하겠지?”

“…….”

수호는 정말 혼란스러웠다.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제대로 들은 건 맞는지 헷갈렸다.

너무 졸려서 헛소리를 들은 건가. 아니면 애초에 꿈인가? 그러면 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

늘 천천히 돌아가는 수호의 뇌가 지금은 아주 빠르고 거세게 빙글빙글 돌았다. 어지러웠다.

“……장난 그만해요. 재미없어요.”

“장난 아니야. 내가 수호랑 하고 싶은 건 그런 거야. 내가 좋아하는 의미도 그런 거고.”

“미쳤어요?”

수호도 자신도 가다듬지 못하고 내뱉은 소리에 본인 놀랐다. 이렇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다. 혹시 주오가 기분 나빠하면 어쩌나 수호의 검은 조약돌 같은 눈이 설핏 떨렸다. 하지만 주오는 평소와 같이 곧은 시선으로 수호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나 이제 싫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러면 수호는 아직도 내가 좋아?”

주오의 질문에 수호의 답은 간단했다. 좋았다. 갑자기 싫어질 만큼 수호는 주오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렇게 대답하는 게 맞는 걸까.

“…….”

답 없이 뚱한 눈을 한 수호를 보며 주오는 괜찮다며 미소 지었다. 싫은 건 싫다고 말하는 게 수호였다. 대답이 없지만, 그래도 싫다는 말이 나오지 않은 거라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주오는 그거면 됐다고 여겼다.

수호는 아랫입술을 꾹꾹 씹고는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싫지 않으면 돼. 나는 그걸로 만족해. 그리고 수호가 앞으로 내 생각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좋아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줘.”

생각만 하면 되는 거면 수호는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금 말하지만 이수호는 연애의 ‘ㅇ’ 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수호가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굴려도 수호는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걸 수호 본인도 알고 있었다.

백지 같은 하얀 수호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묻어났다.

“어떻게 생각해요?”

이런 답변을 들을 거라고 생각 못 했던 주오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둥글게 휘었다.

“음, 글쎄?”

“그게 뭐예요.”

“이렇게 대답할 거라고는 생각 못 해서 당황스럽네.”

“그럼 뭐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요?”

주오가 생각하는 자신의 답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진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주오가 기웃거리는 수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수호가 발로 찬다고 해도 맞아줄 의향이 있다는 듯 망설임 없는 행동이었다.

“헛소리하지 마세요.”

주오의 가벼운 대답에 수호의 표정이 뚱하게 변했다.

“그게 뭐예요.”

“수호가 정말 좋아. 수호도 그만큼 날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이미 좋아한다니까요.”

“형으로서잖아. 형은 싫어.”

“그건 저도 곤란해요.”

형으로 말고 대체 어떻게 좋아해야 한다는 걸까. 정말 모르겠다는 듯 수호의 까만 눈이 말똥하게 빛났다. 고백한 사람을 아주 말려죽이겠다는 태도였지만, 주오는 그것마저 좋았다. 주오는 수호의 뺨을 가볍게 물었다.

“간지러워요.”

“수호는 너무 어려워.”

“저도 형이 어려워요.”

“나는 너한테 언제나 쉬운 사람이야.”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어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주오만큼 자신을 챙겨주고 받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순순히 인정하는 수호를 보며 주오는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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