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돌아온 FA, 해외로 나갔던 대어들 CKR로 돌아오나?]
데뷔하자마자 신예로 꼽혔지만 중국 리그 CPL로 넘어갔던 미드라이너 OZ 신태민의 계약이 종료되었다. CPL 하위권 팀이었던 ‘T BALL’ 우승의 주역인 OZ가 한국 리그 CKR로 돌아오고 싶다고 밝혔다.
이미 한국 팀 여러 곳에서 그에게 러브콜을 한 것으로 추측되며, 신태민은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보여줄 수 있는 팀을 선택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유럽, 북미 등으로 나갔던 선수들이 대거 한국 리그 귀환 의사를 밝힌 만큼 이번 CKR의 FA 시장은 각 팀의 눈치싸움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많은 선수들이 한국으로 돌아오려는 이유는 이번에도 CKR이 월드 챔피언십 우승컵을 들어 올렸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최근 대회의 상금이 커져 우승을 향한 선수들의 열망이 더욱 달아올랐다. 우승 상금과 월드 챔피언십 우승이라는 꿈을 안고 돌아오는 선수들의 행보가 기대된다.
선수들이 어느 팀을 선택할지는 밝혀진 바가 없지만, 그들이 돌아온다면 올해 CKR 리그는 그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코스모스 한용우 기자
[세계적인 미드라이너 SUHO, 주이와 재계약인가? 계약 종료인가?]
세계 최고의 미드라이너라고 꼽히는 SUHO, 이수호 선수와 그의 팀, 주이의 계약이 올해로 끝이 난다. 2년 계약으로 묶여 있었던 SUHO가 과연 주이와 재계약을 할지가 세계인들의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주이는 SUHO, 이수호 선수와 협상 중이라는 말을 남겼으나 아직 정확하게 SUHO의 거취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SUHO 선수에게 세계 각국의 팀에서 러브콜을 보냈다는 점이다.
해외로 나갈 의사는 없다고 여러 차례 밝혔던 SUHO지만, 이번에 중국 리그 CPL에서 E-Sport 역사상 최고 대우를 약속하겠다며 밝혔다. 현재 SUHO 선수가 받는 몸값이 2년에 40억가량으로 예상되고 있다. CPL 리그에서 제안한 그의 몸값은 최소 70억을 넘길 것으로 추측된다.
과연 SUHO, 이수호 선수는 이번에도 한국 리그 CKR에 잔류하게 될지 그의 거취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sport 매거진 김승태 기자
* * *
올스타전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온 수호는 쉴 틈 없이 바쁜 일상을 보냈다. 곧 있으면 주이와의 2년 선수 계약이 끝이었다. 그 때문에 주이에서 잡아둔 남은 행사들을 참여하느라 수호는 정말 몸이 바스러질 정도로 바빴다.
주이는 FA 시즌이겠다, 연습 경기도 없으니 이때 단물쓴물 모든 것을 빨아낼 생각인 듯했다. 그 덕에 수면 시간이 극도로 짧아진 수호는 오랜만에 즐기는 휴식 시간을 내리 잠으로 보냈다. 그 어느 때보다 다디단 숙면이었다.
근 스무 시간을 잠만 잔 수호가 퉁퉁 부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방에서 기어 나왔다. 잠은 오래 잘수록 더 피곤하다더니 오늘따라 머리가 더 멍한 느낌이었다.
비틀거리며 부엌으로 향하는 수호를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선우가 발견했다.
“이수호, 나는 너 평생 안 일어나는 줄 알았다. 대체 얼마나 자는 거야?”
“머리 아파요.”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찬물을 마시자 선우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부엌으로 다가왔다. 식탁 의자를 빼내고 앉은 선우가 턱을 괬다. 수호는 자신을 싱글거리며 보는 선우를 몽롱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직도 잠이 덜 깬 게 분명했다.
“너 이번에 재계약 안 할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까지 쥐어짜겠다는 거지 뭐.”
“힘들어요.”
“어쩌겠냐, 너 행사 한 번에 몸값이 얼만데. 가기 전에 회사 홍보나 제대로 하고 가라는 거지. 그래도 이제 다 끝난 거 아냐?”
수호는 컵 가득 따라놓은 물을 다 비우고 나서야 정신이 또렷해졌다. 선우의 맞은편에 앉은 수호는 오랜 수면으로 인해 띵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리가 유독 무거웠다.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갑작스러운 핸드폰 울림에 수호가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화면이 환하게 켜진 핸드폰이 어서 자신을 봐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수호는 딱히 연락을 잘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늘 잠잠한 수호의 핸드폰이 울리는 게 의외였는지 선우가 흥미로운 눈을 했다.
“웬일이야? 하긴, 계약 때문에 연락이 많이 올 시즌이긴 하네.”
하지만 핸드폰을 열어본 수호는 어떠한 말도 없었다. 선우는 묵묵히 토독토독 답장을 하는 수호가 의아했다.
“뭐야? 계약 건 아니야?”
“주오 형이에요.”
“……뭐?”
놀라 선우와는 다르게 수호는 심드렁한 얼굴로 답장을 날리고 있었다. 어느새 쏜살같이 수호의 곁으로 다가온 선우가 흥미롭다며 눈을 빛냈다.
“뭐야, 뭐야. 주오 형이랑 이제 연락해?”
“뭐, 가끔이요.”
보내기 버튼을 누른 수호가 핸드폰 화면을 끄며 식탁 의자를 빼내 앉았다. 그 맞은편에 앉은 선우가 눈을 반짝였다.
“형이 뭐라는데?”
“잘 잤냐고요.”
“와아.”
의미 모를 감탄사를 날린 선우가 박수를 착착 쳤다.
수호는 유난히 즐거워하는 선우를 멍하니 바라봤다. 왜 저렇게 신이 났을까. 선우는 유독 주오와 자신이 엮이면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올스타전이 시작되기 전에도 주오에 대해 말하기도 했었고, 그 전에도 경기장에서 가끔 주오가 다가와 헛소리를 하면 옆에서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분명 두 사람이 친한 걸로 아는데 사실 선우는 주오를 싫어하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시무룩한 김주오가 재밌는 걸까.
수호가 멍하니 선우와 주오의 관계에 대해 추측하고 있을 때 선우가 흥미로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둘이 뭐야? 너 이제 형 안 불편한가 보다?”
“뭐,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아요.”
“좋은 형이지. 그런데 평범하지 않아서 싫다고 하지 않았어? 그 얼굴은 계속 봐도 평범해지진 않을 텐데 어떻게 친해졌대.”
선우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선우가 수호랑 친해지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주오가 일방적으로 수호에게 껄떡거렸던 기간에 비하면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건 느낌이 다르다. 4년이나 불편해했던 사람인데 어떻게 올스타전 그 한 달 사이에 이렇게 친해질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선우의 호기심 어린 눈망울과 다르게 수호는 퉁명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늘 저런 얼굴이긴 했지만, 선우는 수호가 별로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아 더 즐거웠다.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실실 웃는 선우와 심드렁한 수호 사이로 발랄한 알림음이 울렸다. 선우의 미소가 한껏 짙어졌다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수호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들어갈게요.”
“야아, 어떻게 친해졌냐니까?”
다시 방으로 기어들어 가는 수호의 뒤에서 선우가 물었다. 집요하게 묻는 선우를 돌아보며 수호가 퉁명스럽게 답을 내놓았다.
“웃겨서요.”
“뭐? 아하하, 그게 뭐야.”
툭 내던져진 수호의 말에 선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즐겁게 웃는 선우를 잠시간 바라본 수호가 고개를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선우의 흥미 어린 시선이 걷히지 않았다.
방문을 꼭 닫고 들어온 수호는 핸드폰을 켰다. 예상과 다르지 않게 주오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GER.D RAIN: 수호야~ 잘 잤어? :0]
[네.]
[GER.D RAIN: 오늘은 뭐 해? *^^*]
이상한 얼굴 표정과 함께 날아든 답장에 수호는 손가락을 움직여 답장을 보냈다.
[아무것도 안 해요.]
[GER.D RAIN: 그러면 나랑 놀래? :)]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답장이 날아왔다. 꼭 언제 수호가 답장을 보내줄까 기다린 것 같았다. 수호는 심각한 눈으로 메시지를 내려다봤다.
[그러면 나랑 놀래? :)]
수호는 괜히 뺨을 문질렀다. 전에 술을 먹고 주오에게 물린 뺨이었다. 가끔 주오에게 물린 자리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혹시 그 이후로 어떤 병균이 생긴 건 아닌가. 수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마 지금 수호의 생각을 주오가 알았더라면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저었을 거다.
난 이빨도 튼튼하고, 병도 없어. 그리고 사지 멀쩡하고 감기도 잘 안 걸리는 건강 체질이야. 그리 억울함을 토로했을 주오의 모습이 떠올라 수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수호는 남에게 연락하는 걸 귀찮아하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요즘엔 핸드폰을 자주 들여다봤다. 조금만 답장이 늦으면 애타게 울리는 핸드폰 때문에 확인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수호는 톡톡 자판을 두드렸다.
[졸려서 숙소에 있을래요.]
[GER.D RAIN: 아 자려고 하는 거면 나랑 놀자. 수호는 옆에서 자, 나는 구경할게. :)]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이 형은 정말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건지 짐작도 안 되는 말을 많이 했다. 지금도 딱 그런 상황이었다.
대체 어디서 자라는 거고, 그걸 옆에서 구경을 왜 한다는 걸까. 그게 노는 걸까. 이 형은 맨날 이러고 노는 건가.
수호는 의문으로 뒤죽박죽 섞인 머리를 천천히 정리했다.
주오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한참 동안 핸드폰을 보던 수호가 답장 대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딱 신호음이 한 소절 들리고 상대방의 음성이 들려왔다.
-수호가 전화를 걸어주다니, 너무 좋다. 그런데 수호야, 나랑 놀래?
놀랄 거면 놀라고, 물을 거면 묻기만 하지. 급한지 쉬지 않고 이어 말하는 주오에게 수호가 물었다.
“형은 놀 때 남 자는 거 구경하면서 놀아요?”
수호의 목소리는 꼭 변태를 힐난하는 듯했다.
-그걸 왜 구경해?
그러고 놀자던 당사자는 그딴 짓을 왜 하냐는 듯 이해가 안 간다는 대답을 해왔다. 전혀 그러지 않는다는 듯 단호한 주오의 대답에 수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그렇게 하자던 당사자가 아니던가. 다른 사람이 핸드폰이라도 뺏어서 답장을 했었던 건가 싶었다.
“형이 그랬잖아요. 형은 구경할 테니 저는 자라고.”
수호가 그렇게 물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는지 수화기 너머로 주오가 납득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수호랑은 그렇게 놀고 싶어. 피곤해서 자고 싶은 거면 꼭 숙소에서 잘 필요는 없지 않아?
그러니까 나랑 놀자고 말하는 주오의 목소리에 기대감이 서렸다.
주오의 말처럼 꼭 숙소에서 잘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디서 잔단 말인가. 수호는 대체 주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어디서 자요?”
-음……. 호텔?
“저는 형이 무슨 생각 하면서 사는지 모르겠어요.”
말끝을 흐리며 호텔이라고 말하는 주오가 수호의 상식에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걸까. 정말 궁금했다.
정말 놀랍다는 수호의 말에 수화기 너머로 주오가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 나도 내가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모르겠어. 근데 수호 생각을 가장 많이 할걸? 그래서 나랑 노는 거 싫어?
“호텔은 싫고, 저녁 먹는 거라면 괜찮아요.”
내리 잠만 자느라 어느새 시간이 점심을 훌쩍 넘어갔다. 스무 시간 동안 잠만 자느라 위가 홀쭉해진 수호는 배가 고팠다.
주오가 제안했던 내용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수호가 만나준다는 말에 주오의 음성에 화색이 돌았다.
-뭐 먹고 싶어? 내가 사 줄게.
설렘과 흥분한 기색이 만연한 주오의 음성에 수호는 곰곰이 생각했다. 무엇을 먹을까. 한동안 고민하던 수호는 먹고 싶은 게 생각나 입을 열었다.
“잔치국수요.”
-잔치국수? 수호 면 요리 좋아하지? 내가 맛있는 곳 찾아볼 테니까 수호는 씻고 와.
수호는 자신이 면 요리를 좋아하는 걸 주오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잠시 의아했다. 하지만 이미 팬들 사이에선 수호가 면 성애자라고 정평이 나 있었기에 주오가 모른다고 하는 게 더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수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5시 40분.
“제라드 숙소는 강남이었죠?”
-응, 너네는 신도림이었지? 내가 그쪽으로 갈게.
딱 씻고 나가면 얼추 주오가 도착하는 시간과 맞을 것 같았다. 수호는 주오에게 보이지는 않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역 앞에서 봐요.”
-그러면 조금 있다 보자.
“네.”
전화를 끊은 수호는 욕실로 향했다. 빠르게 샤워를 마친 수호는 옷을 찾아 이리저리 숙소를 헤집기 시작했다.
거실에서 TV를 보던 선우는 건조대와 옷방을 왔다 갔다 하는 수호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쟤가 도대체 뭘 하나 싶은 시선이었다.
수호가 옷을 다 갖춰 입고 현관으로 향하자 물끄러미 보고 있던 선우가 입을 열었다.
“어디 나가?”
욕은 아니지만 딱히 친구가 많지 않아서 외출이 뜸한 수호가 나간다는 게 신기한 선우였다. 수호는 편한 운동화에 발을 넣으며 입을 열었다.
“밥 먹으러요.”
“엥? 웬일이야?”
고구마스틱을 빠득빠득 씹고 있던 선우가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밥 먹으러 나가는 걸 너무 신기해하는 선우를 수호가 불퉁한 눈으로 바라봤다.
“왜 그렇게 놀라요?”
“밖에 잘 안 나가는 애가 밥 먹으러 나간다니까 그러지. 누구랑 먹는데?”
“주오 형이요.”
“엥?”
이번에는 선우의 입이 벌어졌다.
“너…… 주오 형이 진짜 편해지긴 했나 보다.”
“네. 괜찮아졌어요.”
올스타전이 끝난 이후로 주오가 편안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연락도, 만남도 없었을 거다.
수호는 다시 한번 사람을 외면만 가지고 판단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오는 객관적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사람을 잘 챙겼고, 예의도 발랐다. 가끔 뜻 모를 헛소리를 하긴 했지만, 그것도 재밌었다.
“진짜 신기하네. 아무튼 잘 먹고 와라.”
선우는 다시 고구마스틱을 입에 밀어 넣었다. 하지만 여전히 수호가 신기한 듯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수호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네, 다녀올게요.”
“아, 올 때 맛동산이랑 두유 좀 사다 줘!”
간식거리를 입에서 떼놓지 않고 사는 선우의 다급한 외침을 뒤로하고 수호는 숙소를 나섰다.
한겨울이라 그런지 날씨가 추웠다. 전날 눈까지 내려 땅이 얼어 있기까지 했다. 얼굴을 제외한 모든 곳을 둘둘 가린 수호가 미끌거리는 거리를 조심조심 걸어 나갔다.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주머니에서 울리는 알림음에 수호가 핸드폰을 꺼내 들자 주오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GER.D RAIN: 수호야 나 역에 도착했어. 어디야? :0]
이상한 얼굴. 수호는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이모티콘이 웃겨서 짝 웃었다.
[십 분 내로 도착해요.]
김주오에게 답장을 보낸 수호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타박타박 수호가 걸을 때마다 하얀 운동화 바닥에 덜 언 눈들이 검게 짓밟혔다.
머지않아 역 앞에 도착한 수호는 멀리서부터 눈에 확 띄는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수호와 비슷한 패딩에 청바지, 모자를 쓰고 나온 김주오가 서 있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차람이었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보통 남자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있는 큰 키와 모자 아래에서도 빛나는 얼굴 때문에 시선을 끌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보니 다시 체감하게 됐다. 김주오의 얼굴이 정말 흔하지 않다는 것을. 토요일 저녁 수많은 인파 속에서 주오가 한 번에 눈에 들어왔다.
잠시 멈춰서 주오를 보고 있던 수호를 발견했는지 주오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의 주변이 갑자기 환해졌다. 수호는 부담스럽게 잘난 주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괜스레 전에 물렸던 볼이 간지러웠다.
“수호야!”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반기는 주오가 반짝였다. 이미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주오를 보고 있었는데, 저렇게 웃으며 손까지 흔들자 사람들이 아주 대놓고 쳐다보기 시작했다. 물론 주오가 반기는 수호까지도 시선의 주인공이 됐다.
순간적으로 수호도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을 정도였으니 사람들이 시선을 뺏기는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수호는 본인까지 그 시선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들 다 쳐다보잖아요. 조용히 하세요.”
“어? 그래.”
주오에게 다가간 수호가 퉁명스럽게 말을 건네자 그가 웃어 보였다. 주오의 팔을 잡아끌자 그가 멍한 시선으로 자신을 잡은 수호의 팔을 내려다봤다. 주오의 시선을 모르는 수호는 많은 인파 사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너무 보고 싶었어, 수호야.”
“……?”
뜬금없이 날아든 주오의 말에 수호의 걸음이 멈췄다. 고개를 돌려 주오를 보자 그가 따스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수호는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하려던 입을 합 다물 수밖에 없었다.
늘 장난스럽던 주오의 눈빛이 지나치게 진지했다. 그래서 수호도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둔한 수호마저 의아함을 느낄 만큼 주오의 눈빛은 묘했다. 꼭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이 애틋하게 여자주인공을 보는 눈빛이었다.
당황한 수호는 주오가 다시 평소처럼 웃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주오는 여전히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진지한 얼굴로 수호를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말없이 거리에 서서 서로를 뚫어져라 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저기…… 혹시 레인이랑 수호 선수 아니세요?”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두 사람 사이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무리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TV에서만 보던 유명 선수들을 이렇게 실제로 본 것에 감격했는지, 그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헐, 야, 진짜 레인이랑 수호 맞는 것 같은데?”
“형, 형들 진짜 너무 좋아해요!”
“사인 좀 해주시면 안 돼요?”
수호와 레인임을 확신한 소년들이 바글바글 두 사람 주변으로 다가왔다. 조잘조잘 감격 어린 눈으로 말을 거는 소년들 때문에 주오와 수호의 눈싸움이 끝이 났다.
주오가 방금 전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공책이랑 네임펜 있어요?”
“저요! 저 있어요!”
소년 하나가 가방을 급하게 뒤적거리며 공책과 네임펜을 꺼내 들었다. 정말 감격스러운지 주오에게 공책과 펜을 건네는 손이 덜덜 떨렸다. 주오는 그런 애들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형들 어디 가요? 이 근처에 살아요?”
“밥 먹으러 가요. 학생들은 저녁 먹었어요?”
김주오는 팬들과 잘 지내는 걸로 유명했다. 이런 식으로 팬들을 대하는구나. 실제로 팬들과 대화하는 걸 가까이서 처음 본 수호는 신기한 눈으로 주오를 바라봤다.
수호는 낯을 많이 가려 처음 본 사람에게 저렇게 친근하게 말을 하지 못했다. 팬에게도 ‘감사합니다’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 수호는 지금도 얼어 있는 상태였다.
“아직요. 저희도 이제 먹으러 가요.”
“맛있게 먹고 공부 열심히 해요. 피시방 가서 게임하지 말고.”
“저도 형들처럼 프로 할 거예요!”
꼭 그렇게 될 거라고 눈을 빛내는 소년을 보고는 주오가 사인을 한 공책을 수호에게 건넸다. 그러곤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혼자 동떨어져 입을 합 다물고 있는 수호에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수호야, 사인만 해주고 가자.”
“아, 네.”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틈틈이 수호를 살피는 주오였다. 그는 수호가 이 상황을 불편해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호는 자신이 불편해하는 걸 알고 대신 애들과 대화를 나누며 상황을 정리하려는 주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김주오는 보면 볼수록 세심한 사람이었다.
이래서 김주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가. 수호는 공책에 사인을 끄적이며 생각했다.
공책을 다시 주오에게 건네자, 주오는 그것을 학생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럼 우린 이만 가볼게요. 밥 맛있게 먹어요.”
“형들 고마워요! 저희 스프링 시즌 시작하면 꼭 직관 갈게요!”
주오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 선 수호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수호야, 가자.”
주오가 멀뚱히 서 있는 수호의 손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멀뚱거리며 주오에게 이끌려 걸음을 옮기던 수호는 앞서가는 주오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문득 올스타전 마지막 회식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갔었는데.
수호가 지난 기억을 회상하는 동안 두 사람에게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뜨거워졌다. 남자 둘이 손잡고 거리 한복판을 돌아다니니 시선을 끌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남자 둘이 그러고 다니니 더욱 그랬다.
간혹 수호와 주오임을 알아본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했다. 쟤네가 왜 저러고 다니나 싶은 눈치였다.
수호는 주오에게 잡힌 손을 꾸물거렸다. 큰 손이 턱 하고 잡고 있어서 손이 빠지지 않았다. 의외로 부드러운 인상과는 다르게 아귀힘이 대단했다.
주오는 갑자기 움찔거리는 수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호는 왜 그러냐고 말간 눈으로 묻는 주오에게 잡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수호를 따라 주오의 손도 같이 흔들거렸다.
“저 안 졸려요.”
“어?”
주오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수호가 건넨 말이 무슨 뜻인지 감을 잡지 못하는 듯했다. 정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주오에게 수호가 다시 손을 흔들었다.
“안 졸리니까 안내해 줄 필요 없어요.”
“아, 미안해. 잡고 있어서 불편했어?”
그제야 말뜻을 이해한 주오가 수호의 손을 놓았다. 주오는 미안한지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혹시나 자신이 싫어했을까 봐 염려하는 주오를 보며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불편하진 않았다. 주오는 생각보다 손이 고와서 사실 잡고 있으면 느낌이 좋았다. 체온도 따뜻해서 손도 시렵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뜨거웠다. 올스타전에서는 술도 먹었고, 밤이라 길가에 사람도 없었지만 지금은 너무 많았다.
“아뇨. 그냥 사람들이 쳐다봐서요.”
“아아, 그렇긴 하겠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주오가 수호를 이끌었다. 주오가 멈춘 곳은 역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는 가게 앞이었다.
“여기 맛있대.”
“들어가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점원이 웃음으로 반겼다. 사람이 적당하게 차 있는 가게는 인기가 있긴 한 모양이었다. 조금 외진 곳에 있는 곳치곤 사람이 많았다. 주오와 수호는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고 잔치국수를 시켰다.
수저와 젓가락을 세팅한 주오가 헤실 웃으며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는 미리 나온 단무지 하나를 입에 넣어 오독 씹으며, 자신을 흐뭇하게 보는 주오를 바라봤다.
“잘 지냈어?”
“네. 형은요?”
“수호랑 같이 안 지내서 너무 외로웠어.”
수호와 같은 방을 썼던 올스타전이 그리운지 주오가 아쉬운 눈을 했다. 매일 같이 지내다가 이제 떨어져 지내는 사람처럼 구는 주오였다. 수호는 주오의 과장된 아쉬움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주오는 옅게 웃는 수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곤 와아, 하는 의미 모를 감탄사를 뱉어냈다. 수호는 또 왜 저러나 싶었다.
의아한 수호의 눈빛에 굴하지 않고 주오는 더욱 바짝 다가와 수호를 바라봤다. 애정으로 반짝이는 눈빛에 수호가 시선을 돌렸다.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수호는 웃는 게 정말 귀여워.”
“제가 언제 웃었어요.”
본인이 웃은 걸 모르는지 수호가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주오는 그래도 좋았다. 이제는 자신을 보면서 웃는 수호가 너무 좋았다. 테이블에 턱을 괸 채 수호를 보던 주오가 입을 열었다.
“수호는 나 안 보고 싶었어? 나는 많이 보고 싶었는데.”
눈가를 접어 웃는 주오의 얼굴이 너무 환해서 수호는 시선을 돌렸다. 보고 싶었냐고 물으면 딱히 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냥, 조금 생각났던 적은 있었지만.
“그런 적은 없었는데요.”
“수호 너무해.”
급격하게 기분이 다운된 주오가 쭈글거렸다. 시무룩한 눈으로 수호를 보던 주오가 눈가를 접어 웃었다.
“그래도 괜찮아. 지금 수호가 날 만나줬으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해한 수호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뭔가 미묘했다. 괜히 단무지만 뒤적거리고 있자 때맞춰 점원이 음식을 가져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치국수가 테이블에 놓였다. 고명이 가지런히 올라간 게 맛있어 보였다.
수호는 국수를 휘휘 저었다. 뜨거운 걸 못 먹는 수호가 면을 뒤적거리며 식히자 주오가 흐뭇하게 웃었다.
“왜 자꾸 웃어요?”
“응? 그냥.”
“웃지 말고 먹어요. 식겠어요.”
수호와 다르게 올스타전 회식에서도 뜨거운 걸 제법 잘 먹던 주오였다. 그런데 젓가락도 들지 않고 물끄러미 자신만 보니 수호로선 의아했다.
수호의 의문을 눈치챈 건지 주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같이 먹어야 맛있잖아.”
“형은 이상한 데서 세심해요.”
“이런 건 수호한테만이야.”
수호는 주오를 무시한 채 그저 앞에 놓인 잔치국수를 헤집었다. 한동안 후후 불면서 식힌 탓인지 제법 먹을 만한 온도가 되었다. 수호는 호로록 소면을 입에 밀어 넣었다. 수호가 먹기 시작하자 주오도 젓가락을 들었다.
호로록, 면을 먹는 소리만이 테이블을 채웠다. 제법 허기가 졌던 터라 수호는 앞에 앉은 주오를 금세 잊어버렸다. 육수 맛이 제대로 밴 면발에 홀려 호로록 먹고 있는데 갑자기 주오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떡해. 너무 귀여워.”
감탄 어린 음성에 수호는 시선을 들어 맞은편을 바라봤다. 분명 국수를 먹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주오가 젓가락을 내려두고 수호를 보고 있었다. 주오는 무슨 어린아이가 과학실험 관찰일지라도 쓰는 것처럼 흥미 가득한 눈을 하고 있었다.
수호는 급격한 체기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안 먹어요?”
“나도 먹고 싶은데 먹을 수가 없네.”
“왜요?”
“수호 먹는 거 보고 싶어서.”
수호는 김주오가 또 헛소리를 하는구나 싶었다. 이 형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묵묵히 주오를 보고 있자 주오가 팔불출 같은 얼굴로 웃었다.
“다시 봐도 귀엽고, 어떻게 봐도 귀여워. 나는 수호가 정말 너무 좋아.”
정말 그래 보였다. 나는 네가 너무 좋다고 얼굴에 아주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었다.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수호는 이런 애정 표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주오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정말 난감했다.
괜히 전에 주오에게 물렸던 볼이 다시 간지럽게 느껴졌다. 수호는 민망함에 국수에 시선을 처박고 불퉁하게 대답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국수 먹어요.”
평소와 똑같은 뚱한 얼굴이었지만, 주오는 수호가 지금 민망해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4년이나 수호를 관찰해 온 주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주오는 유독 입술을 꾹 닫고 있는 수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응, 맛있게 먹어.”
“……형도요.”
그 뒤로 수호에게 향하는 주오의 시선이 확연히 줄었다. 그럼에도 수호는 괜히 주오가 더 신경 쓰였다. 힐끔힐끔 주오에게 향하는 수호의 시선이 주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대신했다.
밥을 입으로 먹는 건지 코로 먹는 건지 애매한 식사가 끝이 나고 가게에서 나오자 해는 이미 진 후였다.
어두워진 만큼 날씨가 더욱 추워졌다. 그래도 따뜻한 국물 때문인지 속은 제법 든든했다.
“한 그릇 더 먹을 걸 그랬나 봐.”
“왜요? 아직 배고파요?”
아쉬운 듯 중얼거리는 주오에게 묻자, 주오가 고개를 저었다. 배가 고픈 게 아니면 굳이 왜 한 그릇을 더 먹고 싶은 걸까. 수호가 의아함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자 주오가 달싹 달라붙어 왔다.
“저녁 먹으러 만난 건데 다 먹어버렸으니까 이제 헤어져야 하잖아.”
아쉬워서 어떡하냐며 주오가 울상을 지어 보였다.
수호는 진짜 이 형은 한결같구나 싶었다. 어렵고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날들이 정말 자신의 착각이었다고 말해주듯, 주오는 속된 말로 하찮았다.
수호는 옆에 서서 울상을 짓는 주오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선우 형이 심부름 시켜서 가야 해요.”
“두유가? 무슨 심부름인데?”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주오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꼭 오늘 같은 날 심부름을 시켜서 방해를 해야만 했냐고 말하는 듯했다. 수호는 그런 주오에게 말을 건넸다.
“맛동산 사 오래요.”
“과자?”
“네.”
“수호 애들이 심부름 자주 시켜?”
주오는 반 친구들에게 괴롭힘당하는 학생을 걱정하는 선생님의 얼굴을 했다. 이 형은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았다. 수호는 미심쩍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오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러면 다행이지만……. 수호야, 애들이 괴롭히면 꼭 나한테 말해줘.”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주오와 수호는 다른 팀이었다. 애초에 그런 일도 없지만, 만약 있다 해도 주오에게 말해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어차피 형이랑 저랑 다른 팀이잖아요.”
“아, 그렇긴 한데……. 그래도 도와줄 수 있어!”
“그래요. 누가 괴롭히면 꼭 말씀드릴게요.”
꼭 도와주겠다고 눈을 빛내는 주오에게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수호야, 내가 데려다줘도 돼?”
“어디를요?”
갑자기 데려다준다는 주오의 말에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딜 데려다주겠다는 걸까. 편의점? 주오는 자신을 보는 수호에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편의점 들렀다가 숙소까지. 괜찮아?”
“안 될 건 없는데. 굳이 왜요?”
보통 데려다주나. 수호는 자신을 데려다주겠다는 주오가 의아했다. 수호도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누가 데려다준 적도, 자신이 누구를 데려다준 적도 없었다. 남들이 친절하다고 말하는 김주오는 이래서 그런 소리를 듣는 걸까.
수호가 찬찬히 이 상황에 대해서 생각할 때 주오가 갑자기 치고 들어왔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으니까.”
“……왜요?”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는데 나온 주오의 말에 수호는 멍해졌다. 제발 생각 정리할 시간 정도는 줬으면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주오는 수호가 정신을 차리기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좋아하니까.”
수호는 멀뚱히 주오를 바라봤다. 주오랑 말을 하고 있으면 꼭 무한 수수께끼를 하는 느낌이다. 예상치 못한 질문과 답변이 우수수 쏟아졌다. 질문과 답을 매치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지금도 그랬다. 수호도 친구들을 좋아했다. 그래도 굳이 집이 같은 방향이 아니면 데려다주고 그러진 않았다.
주오는 원래 이런 사람인 걸까.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는 걸까. 보통 데려다주고 하는 건 연인끼리 하는 걸로 아는데.
태어나서 한 번도 연애를 안 해본 수호에게는 데려다준다는 게 정말 어려운 문제였다.
“형은 누구한테나 다 이래요?”
“뭐가?”
주오는 수호가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수호가 재차 물었다.
“다 데려다주고, 좋아한다고 하고 그래요?”
정말 궁금했다. 원래 그러는 건지.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주오가 피식 웃었다.
“아니. 보통은 안 그래.”
“그런데 저는 왜 데려다주고 좋아한다고 계속 말해요? 제 팬이라서?”
수호에겐 주오의 모든 게 신기했다. 누군가의 팬인 적도 없었고, 애정 표현도 건조한 수호는 주오의 행동이 낯설고 궁금했다.
대답을 바라는 수호를 향해 주오가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네 팬인 건 맞지만, 그래도 너한테 이러는 건 조금 다른 의미야.”
“대체 무슨 의민데요?”
“수호가 알면 싫어할 의미.”
그게 대체 뭔데요? 수호는 궁금했다. 대체 왜 이러는지. 자신을 보는 주오의 따스한 다갈색 눈동자 때문인지 괜히 민망해졌다. 수호는 볼 한쪽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자꾸만 볼이 간지러웠다.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몰라도 돼. 아직은 비밀이야.”
“제가 싫어할 이윤데 왜 저한테 비밀로 해요.”
“비밀로 해야 해. 이제 겨우 친해졌는데 수호가 날 또 불편해하면 어떡해.”
그건 정말 싫다는 듯 주오가 인상을 찡그렸다. 죽어도 말하기 싫다는 의지가 엿보여서 수호는 섣불리 다시 물을 수가 없었다. 아마 지금이라면 무슨 말을 해도 그가 불편해질 것 같진 않은데 말이다.
하지만 말하기 싫다는 사람을 굳이 다그치고 설득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수호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직은 비밀이라는 건 언젠가는 말해주겠다는 소리일 테니까.
“근데 형 양치 자주 해요?”
“양치?”
주오의 눈이 커졌다. 그러곤 자신을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수호를 당황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수호가 주오에게서 한 걸음 옆으로 떨어지며 되물었다.
“형이 물었던 볼이 가끔씩 간지러워요.”
“어? 나 양치 자주 해! 진짜야! 충치도 없고, 잇몸도 튼튼하고, 다른 부분도 다 건강해. 성병도 없어!”
주오는 예상했던 대로 극구 부인했다. 수호가 말없이 바라보자, 주오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더 열심히 변명하기 시작했다.
“수호야, 믿어줘. 진짜 원한다면 병원에서 검사받고 결과도 보여줄게.”
꼭 증명해 보이겠다고 눈을 빛내는 주오에게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사위를 들이는 것도 아니고.
수호는 옆에서 초조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주오의 팔을 잡아끌었다.
“됐어요. 아니면 아닌 거겠죠.”
“진짜로 맹세할 수 있어.”
“알겠어요.”
수호는 그대로 주오를 끌어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숙소와 가장 가까운 편의점이라 규모는 작았지만, 선우가 말한 맛동산은 많이도 있었다.
수호는 맛동산과 함께 선우가 자주 먹던 과자를 몇 개 더 집었다. 그러고는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주오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형도 먹을래요?”
“사 주려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요.”
고르라는 수호의 말에 주오는 활짝 웃으며 매장 입구 쪽에 있던 호빵 기계를 가리켰다. 여러 개의 호빵이 빵빵한 살결을 자랑하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알겠어요. 무슨 맛 드실 거예요?”
“나는 팥. 기본이 제일 맛있더라. 수호는 무슨 맛 먹을래?”
“저도 팥이 좋아요.”
딱히 먹을 생각은 없었지만, 막상 주오는 먹는데 자신만 안 먹기에는 아쉬운 수호였다. 주오는 웃으며 집게로 호빵 두 개를 집어 꺼냈다.
계산을 마치고 나서자 순식간에 찬바람이 휘휘 몸을 감쌌다.
주오는 먼저 호빵 밑 껍질을 떼어내고는 수호에게 건넸다. 수호는 주오가 건넨 호빵을 앙 물었다. 폭신폭신 촉촉한 게 잘 쪄진 모양이었다. 역시 겨울에는 호빵이 제격이다.
수호는 달달하고 따뜻한 팥 앙금을 맛보며 주오와 함께 걸었다. 주오는 호빵을 이리 쿡, 저리 쿡 찔러보고 나서야 입에 물었다. 한입 크게 베어 문 수호를 주오가 힐끔 바라봤다. 호빵처럼 뽀얀 수호의 볼이 볼록 나와 있었다.
갑자기 볼을 쿡 찌르는 느낌에 수호가 고개를 돌리자 주오가 호빵을 입에 문 채 손가락으로 볼을 찌르고 있었다. 수호는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호빵을 꿀꺽 삼킨 수호가 입을 열었다.
“왜요?”
“수호 볼이 귀여워서. 물어보고 싶다.”
“전에 물었잖아요.”
수호가 전에 주오에게 물린 뺨을 문질렀다. 주오는 그때가 생각나는지 흐뭇하게 웃었다.
“수호가 진짜 하게 해줄지는 몰랐어.”
“형이 하고 싶다면서요.”
그건 맞는데. 주오는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다.
이윽고 주오가 수호의 팔을 덥석 잡고 바짝 다가왔다. 번뜩 얼굴을 들이미는 주오 탓에 수호는 들고 있던 호빵을 떨어뜨릴 뻔했다.
“수호야, 누가 이런 거 저런 거 하고 싶다고 그러면 거절해야 해. 알겠지? 막 다 들어주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주오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막내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처럼 걱정을 한 아름 안은 눈으로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는 이 사람이 자신을 대체 어떻게 보고 있으면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싶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닌데 말이다.
“저도 알아요.”
“그래, 알면 됐어……. 아니, 근데 내가 볼 물고 싶다고 했다고 바로 그렇게 내주면 어떡해! 그러면 안 되는 거란 말이야. 나는 볼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한 걸 해달라고 할 수도 있잖아.”
지금껏 수호에게 그런 걸 바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눈앞에 김주오를 제외하고는. 수호는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게 이런 의미라는 걸 깨달았다. 수호가 불퉁한 눈으로 주오를 바라봤다.
“저한테 그러는 사람은 형밖에 없어요.”
“아냐, 더 많을 거야. 다들 말을 안 하는 것뿐이라고.”
“형, 헛소리는 그만해요. 그리고 얼굴 좀 치워주세요. 너무 가까워요.”
“아, 미안. 너무 이 거리는 부담스럽지?”
자신이 너무 들러붙어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주오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수호는 안전 거리가 확보되자 긴장했던 근육을 풀었다.
“그러면 형이 해달라는 것도 이제 안 해주면 되는 거죠?”
분명 김주오는 그렇게 말했다. 해달라는 거 덥석덥석 해주지 말라고. 수호는 학창시절 말을 잘 듣는 학생으로 꼽혔었다. 그런 성격은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았다.
수호가 앞으로는 조심하겠다고 말하자 주오의 표정이 난해해졌다. 어딘가 절망에 빠진 사람 같았다.
“아니, 그건 아닌데. 나는 예외로 해주면 안 될까? 나는 수호한테 나쁜 마음 없어. 이상한 것도 안 시킬 거야.”
구구절절 자신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주오를 보며 수호는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해서 알겠다고 하니 또 그게 아니라고 그러고. 수호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거절하라면서요.”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하아.”
주오가 갑자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무룩해진 주오의 앞으로 수호가 고개를 내밀었다.
“형 왜 그래요.”
“수호는 너무 눈치가 없어.”
“그건 저도 알아요.”
살면서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기에 수호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눈치가 없는 편이라는 걸. 하지만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눈치가 없다는 건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무룩한 주오가 손가락 틈새를 벌려 눈을 맞춰왔다. 수호는 복잡한 심경이 가득 담긴 눈으로 자신을 보는 주오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들어달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주오가 우울한 눈으로 수호를 바라봤다.
“들어줘. 근데 다른 사람들은 안 돼. 사람들은 다 속이 새까매. 수호한테 몹쓸 짓을 시킬 수도 있어.”
“그게 뭔데요.”
대체 무슨 짓을 시킨다길래 이런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걸까. 수호는 주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수호는 성인이었다. 알 만한 건 다 아는 상태라는 소리다.
수호가 주오의 말을 들어준 건 그가 원한 게 나쁜 짓이 아니어서였다. 애초에 자신을 향한 주오의 애정이 남다른 것을 아니까 해가 되는 짓은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주오는 자신이 무슨 요구를 들어줄까 싶어서 저렇게 걱정하는 건지 수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오는 수호에게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절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건 주오가 수호에게 바라는 일이기도 했으니, 수호가 알게 되면 자신을 경멸할 것 같았다.
“……그런 게 있어. 어쨌거나 남들이 이거 해달라고 했다고 다 들어주면 안 된다는 소리야.”
“저도 안다니까요.”
결국 똑같은 말을 꺼내는 주오에게 수호가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대화를 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다시 걸음을 옮기는 수호의 뒤를 주오가 쫄쫄 쫓았다.
“수호야.”
“왜요.”
“수호야, 수호야.”
“왜요.”
“업어줄까?”
주오의 말에 결국 수호의 걸음이 멈췄다. 덩달아 주오의 걸음도 멈췄다. 수호는 헛소리와 함께 환한 미소를 짓는 주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진짜 김주오라는 사람은 예상치 못한 난제 같았다. 수호는 주오를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저 다리 멀쩡해요.”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왜요?”
“업어주고 싶어서?”
생긋생긋 웃으며 말하는 주오의 말이 수호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자신은 다리가 아프지도, 술에 취하지도, 그렇다고 올스타전 때처럼 졸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굳이 왜 업어준다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수호는 뭔가 답을 알아낸 듯 반짝이는 눈으로 주오와 눈을 맞췄다.
“형 운동하고 싶어요?”
“응?”
이번에는 주오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수호는 얼빠진 주오의 반응에 자신의 답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괜히 머쓱했다. 이번에는 주오의 마음을 알아챘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만만하게 주오와 눈을 맞췄던 수호가 시선을 돌렸다.
“아니면 됐어요.”
“아, 업고 싶다는 게 운동하고 싶다는 의미인 줄 알았어?”
자신을 덤벨 대신으로 쓸 거냐는 수호의 말을 이해한 주오가 물었다. 귀여운 상상이라는 듯 수호를 보는 주오의 눈빛이 흐뭇하게 빛났다.
사실 김주오는 이수호가 무슨 말을 하든 귀엽게 볼 사람이다. 그걸 수호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면 됐어요. 이제 그만 가보세요. 숙소 여기예요.”
아파트 단지 앞에서 멈춘 수호가 손가락으로 눈앞의 건물을 가리켰다. 건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주오가 수호와 눈을 맞췄다. 아쉬움이 가득한 그의 다갈색 눈동자에 수호는 문득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오래 있어도 되었을 텐데.
“저기…….”
“수호 형?”
“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오에게 말을 걸던 수호는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같은 팀인 김기연이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기연은 수호 앞에 선 주오를 발견했는지 흔들던 손을 멈칫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레인 형이 왜 여기…….”
“수호 보러 왔어. 수호야, 들어가 봐. 다음에 보자.”
“아, 네……. 형도 조심히 가세요.”
방금까지 수호에게 보였던 아쉽다는 눈이 어느새 평소의 차분한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수호는 뭔지 모를 아쉬운 느낌에 그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꾸벅였다.
“레인 형, 조심히 가세요. 수호 형, 우린 들어가요.”
“그래.”
기연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던 수호는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주오는 그 앞에서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손을 흔드는 주오에게 수호는 다시 고개를 꾸벅였다.
확실하다. 뭔가 아쉬웠다. 하지만 그게 뭔지,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몰라 수호는 입을 꾹 다물고 곰곰이 고민에 빠졌다.
“근데 수호 형이 웬일이에요? 밖에를 다 나가고. 그것도 레인 형이랑……. 깜짝 놀랐네.”
“응.”
수호가 주오를 불편해한다는 걸 모르는 선수들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기연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올스타전에 가서 두 사람이 가까워졌다고 듣긴 했는데, 이렇게 밖에서 따로 보는 사이가 됐을 줄은 기연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파트 앞에서 주오를 봤을 때 정말 놀라 심장이 펄쩍펄쩍 뛰는 느낌이었다.
기연이 신기함에 수호에게 은근하게 말을 건넸지만, 수호는 무슨 생각에 빠진 듯 의미 없는 대답만 할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기연은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긴 수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수호와 기연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그렇게 숙소를 향해 쭉쭉 올라갔다. 그동안 수호의 이 찜찜한 아쉬움은 무엇일까에 대한 궁금증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알아낸 게 있다면, 만약 기연이 그때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면 분명 주오에게 ‘조금 더 있다 갈까요?’라는 말을 했을 거라는 거였다. 그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