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40)

Chapter 2 신기한(?) 사람 (2)

[자! 올스타전의 마지막 날이 왔습니다. 그동안 많은 경기들이 있었지만, 오늘은 더욱 재미있는 경기가 될 것 같습니다! 바로 이번 올스타전에 처음 생긴 종목이죠. 이인삼각입니다! 두 명의 선수가 하나의 챔피언으로 경기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영중 캐스터의 샤우팅과 함께 무대 위로 선수들이 우글우글 올라왔다.

[다섯 명이서 하던 게임을 총 열 명이서 하게 되니 무대 위가 바글바글하네요. 유럽, 한국, 중국, 북미. 네 개의 리그에 소속된 선수들이 랜덤으로 배정되니 서로 소통은 어떻게 할지 그것도 기대됩니다!]

주오, 수호와 한 팀이 된 선수들은 유럽, 북미, 중국. 정말 모든 리그의 선수들이 다 섞여 있었다. 그건 오늘의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차이점은 저쪽은 한국 선수들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키보드를 담당한 수호는 자신의 키보드 세팅을 맞췄다.

“수호, 파이팅!”

벌써 마우스 세팅을 마치고는 느닷없이 파이팅을 외치는 주오를 바라봤다. 주오는 눈을 가릴 얇은 천을 들고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어제부터 저런 상태였다. 기분이 좋아서 주체가 안 되는 그런 얼굴.

수호는 특유의 뚱한 얼굴로 주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굴 근육 안 아파요?”

“응? 아아, 조금 당기긴 하네.”

“그만 좀 웃어요.”

수호가 세팅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 주오가 의자를 당겨 슬금슬금 수호에게 다가왔다. 뒤돌라며 손을 휙휙 돌리는 주오 때문에 수호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검은 천으로 인해 순식간에 시야가 암전됐다.

“너무 좋은 걸 어떡해.”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데요.”

주오가 잡아 올린 수호의 손이 키보드 위로 안전하게 안착했다. 수호는 네 손가락으로 키를 톡톡 두드려 봤다. 주오는 키감을 확인하는 수호를 보며 활짝 웃었다.

“네가 너무 좋아서.”

“네?”

“수호가 너무 좋아서 어제 네가 포옹해 줬을 때 정말 너무 행복했거든.”

어제 경기 이후로 계속 싱글벙글인 주오였다. 그 이유가 1대1 매치 우승을 했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수호는 자기가 웃는 건 다 너 때문이라고 말하는 주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가려진 시야는 여전히 컴컴했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형은 그런 말을 되게 쉽게 하네요.”

“응?”

예상외의 말을 들었는지 주오의 음성이 높아졌다. 의문이 담긴 주오의 짧은 대답에 수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수호도 생각나는 대로 말을 던지는 편이긴 했다. 그래서 싸가지 없다는 말도 종종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필터 없이 내뱉는 수호도 쉽게 꺼내지 못하는 말들이 있었다. 그건 저런 낯간지러운, 정확히는 애정 표현에 관한 말들이었다.

그래서 수호는 주오가 그런 말을 가감 없이 꺼낼 때마다 정말 신기하고 당혹스러웠다. 물론 지금도.

“보통 형처럼 적나라하게 좋다고 말하지는 않으니까요.”

“아아, 그래서 쉬워 보였어? 나 이런 말 쉽게 꺼내는 사람 아닌데. 수호는 나를 가벼운 사람으로 보고 있나 봐.”

가볍게 여기저기 너 좋아, 말하고 다니는 사람 아니라는 듯 주오가 수호를 원망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수호는 주오의 눈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억울해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본 적 없어요. 그냥, 신기하다는 뜻이었어요.”

언뜻 당황한 듯 수호의 음성이 평소보다는 조금 높았다.

“장난이야. 나는 수호가 신기한데.”

“제 어디가요?”

“왜 이렇게 게임을 잘할까, 그리고 왜 이렇게 귀여울까. 뭐 그런 것들이?”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던 수호가 주오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이 형은 가끔 보면 뜻 모를 소리를 정말 많이 했다.

“저는 귀여운 편 아니에요.”

“아냐, 귀여워.”

“아니라니까요.”

“맞다니까?”

수호와 주오의 투덕거림이 시작됐다. 수호는 주오의 말에 반박하면서도 이게 지금 뭐 하고 있는 상황인가 싶었다. 왜 이런 걸로 실랑이를 하고 있는 거지. 어느 순간부터 주오와 대화하면 말리는 수호였다.

“됐어요.”

“그래. 수호는 귀엽다는 걸로.”

결국 수호는 포기를 선택했다. 게임 시작 전부터 기운 빼고 싶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정면을 보고 있는 수호를 빤히 바라보며 주오가 웃었다. 수호의 입술이 뭐라고 말을 더 하고 싶긴 한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오물거리고 있었다. 이런 어리숙한 면이 귀엽다는 걸 수호 본인은 죽어도 모를 거다.

“수호야, 수호야.”

“…….”

“수호야, 수호야.”

주오가 음성을 낮춰 속닥속닥 불러왔다. 수호는 이 형이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싶었다.

“왜 불러요.”

“정말 좋아해.”

낮은 웃음기가 묻은 주오의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어두운 시야 때문인지 유독 그 음성에 감각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수호는 왠지 귓가가 간지러운 느낌이라 귓바퀴를 긁적였다.

“그래요.”

[자! 모든 선수가 준비를 마친 것 같네요! 그렇다면 게임 시작합니다!!!]

이영중 캐스터의 샤우팅과 함께 게임이 시작됐다. 둘이서 한 챔피언을 함께하는 만큼 컨트롤이 어려운 챔피언들을 다들 피하는 눈치였다. 그 덕에 간단한 스킬 패턴을 가진 챔피언들이 대거 출연했다.

보통 간단한 챔피언들은 체이스 초창기 챔피언과 즐겜픽이 대다수였다. 결국 다들 놀자판이라는 소리다.

수호와 주오도 연습을 할 때 느꼈다. 이건 정말 체이스사에서 즐겜하라고 만들어둔 종목이었다.

결국 주오와 수호도 즐겜픽을 선택했다. 빙글빙글 팽이처럼 도는 게 매력적인 장군, ‘론도’였다.

인게임은 정말 난장판이었다. 적이 바로 앞에 있어도 아군을 향해 스킬을 쓰는 건 다반사였다.

[아아! 이번에도 빗나갔네요!]

[아하하하, 이거 선수들이 맞지를 않아서 죽지도 않을 것 같은데요!]

박동진 해설이 빗나간 스킬을 보며 안타깝다는 듯 비명을 내질렀다. 이영중 캐스터는 허허 웃으며 개판 5분 전이 돼버린 게임을 관망했다.

프로씬에서 개판인 게임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프로들의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는 게 이 게임의 포인트였다.

물론 거기에 수호와 주오도 빠지지 않았다. 눈이 가려진 수호는 주오가 주는 신호에 맞춰서 키보드를 누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수호가 누르는 속도와 주오가 예상한 시간이 다르니 스킬이 맞을 리가 없었다.

“수호야, 이번에는 조금 빨랐다.”

“눈이 안 보이니까 답답해요.”

헤드셋을 껴서 들릴 리 없겠지만 수호는 주오를 향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눈이라도 보였으면 지금보다는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좀 제대로 써보라고!]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너는 화면도 보이면서 왜 못 맞추는 거야!]

진입 각이 보여 들어갔는데 아무도 처치하지 못하고 죽자, 결국 옆자리에 앉은 유럽 한 쌍이 투덕거렸다. 사실 옆뿐만 아니라 경기장 곳곳에 그런 곡소리가 가득이었다.

[하하하, 선수들 많이 답답한 모양입니다. 이 게임은 이인삼각! 둘이서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선수들의 투덕거리는 모습을 화면으로 발견한 이영중 캐스터가 허허허 웃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같은 팀에서 뛰는 선수들끼리도 마음이 안 맞아서 실수가 나오는데 어떻게 한 챔피언을 둘이서 완벽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수호의 속이 답답함에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주오가 입을 열었다.

“수호야, 너 게임 소리는 잘 들리지?”

“네, 잘 들려요.”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개판인 게임 속에서 수호와 주오의 실수가 가장 적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챔피언들은 스킬을 사용할 때 음성이나 특정한 스킬 사운드들이 같이 나왔다. 수호가 오랫동안 우승컵을 독점할 수 있는 데는 그 미세한 소리들을 잘 들을 수 있다는 점도 영향이 컸다. 그래서 상대가 스킬을 쓸 때 그 소리에 반응해서 잘 피할 수가 있었던 거다.

그리고 주오 또한 그걸 알고 있었다. 수호의 인터뷰는 언제나 열 번은 읽어보고 스크랩까지 해서 보관하는 주오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내가 말로 신호를 주는 게 더 느릴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네가 소리로 반응할 수 있는 건 반응해서 스킬 쓰면 될 것 같아. 난 쟤네 모션 보고 공격 준비할게. 그러면 수호 너만 믿는다.”

주오가 일방적으로 수호에게 말하곤 게임에 집중했다. 수호의 대답은 어차피 들리진 않지만 뭐라고 할지는 뻔히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수호는 자신 있었다.

그때 때마침 궁극기를 사용해서 들어오는 챔피언의 소리를 듣고 수호가 진입을 막는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이 중간에 끊기지 않도록 주오는 이동을 멈췄다. 수호와 주오의 타이밍은 딱 알맞았다.

진입을 무사하게 막아낸 소리가 들리자 수호가 바로 공격 스킬을 퍼부었다. 주오는 스킬 모션이 시작되면 자리에서 멈췄고, 그러지 않을 때는 이동을 하면서 상대에게 적절히 평타를 섞어 공격했다.

정말 둘이서 한 몸처럼 하는 플레이를 보고 경기장이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오오오오오!!!]

[오오!! RAIN, SUHO 선수!!! 진짜 한 몸처럼 플레이하는데요? 게임하면서 각성이라도 했나요?!]

유기현 해설의 격정적인 외침에 박동진도 가세했다.

[역시 잘하는 선수들끼리는 대충 어떻게 플레이하면 될지 느낌이 오는 것 같은데요?!]

[이야~ 진짜 CKR의 자랑인 RAIN 선수와 SUHO 선수입니다!!]

이 기세를 타고 주오와 수호, JUHO는 파죽지세로 상대를 몰아 갔다. 결국 상대의 기지까지 팽이처럼 빙빙 돌면서 진입해 적들을 갈아버렸다.

하지만 완벽할 수는 없는 법. JUHO를 잡기 위해 달려드는 상대 탓에 몇 번 죽기도 했다. 하지만 론도는 역시 몰아치는 챔피언이었기 때문에 JUHO는 계속 전력 질주하며 상대를 처치했다.

<레드 팀 승리>

론도의 대검이 상대의 보석을 부수면서 화면 가득 승리 문구가 떠올랐다.

[RAIN 선수와 SUHO 선수가 있는 레드 팀이 승리하면서 게임이 끝이 납니다!!!]

이영중 캐스터의 외침과 함께 수호가 눈을 가린 천을 벗어 던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주오가 환하게 웃으며 수호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수호야, 너무 멋있었어.”

“형도요. 타깃팅 잘해줘서 고마워요.”

주오가 환히 웃었다.

“우리 마음이 잘 맞나 봐.”

“뭐, 괜찮았던 것 같아요.”

정말 괜찮았다. 서로 대화하면서 공격 타이밍을 맞췄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잘 맞았다. 오히려 맞추려고 하는 것보다 본인이 하던 식으로 하는 게 더 잘 맞았던 것 같다. 김주오는 괜찮은 파트너였다.

“사랑하면 닮는다던데 수호도 나름 나를 좋아하나 봐.”

이 형이 기분이 너무 좋아서 헛소리를 하는 걸까. 수호는 주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활짝 웃고 있는 주오를 향해 수호가 입을 열었다.

“형은 기분이 너무 좋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어? 왜?”

주오가 궁금하다는 의문이 가득 담긴 눈을 해왔다. 자신에게 향한 주오의 다정한 시선을 무시하며 수호는 키보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헛소리가 많아져요.”

주오가 뜻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네. 사랑하면 닮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은 아니잖아요.”

“음, 그런가?”

수호가 알기로는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 건 연인 간에 같은 행동을 할 때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주오와 연인도 아니고, 같은 행동을 한 적도 없었다. 수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다 챙겼으면 어서 가요.”

“그래, 가자.”

주오가 마우스를 챙겨 수호를 따라 무대에서 내려왔다.

[즐거운 올스타전이 이번 경기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성적을 평가한 결과 종합 1위는 CKR입니다!!! 월드 챔피언십에 이어서 올스타전 우승을 거머쥔 선수들에게 많은 응원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휴식기를 거치고 스프링 시즌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이영중 캐스터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올스타전이 끝이 났다. 주오와 수호는 무대에서 내려서자마자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진형과 눈이 마주쳤다. 이진형은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오늘도 고생 많았다. 생각보다 합이 잘 맞던데?”

“수호랑 저랑 마음이 잘 맞나 봐요.”

“형이 잘 맞춰줬어요.”

눈이 보이지 않는 수호도 소리를 듣고 잘 반응했지만, 주오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수호의 공격 타이밍에 잘 맞춰 포지션을 잡아줬다.

당연히 두 사람이 이뤄낸 성과였지만 주오는 수호의 칭찬이 감격스러운 모양이었다. 주오가 눈을 반짝이며 생긋 웃었다.

진형은 그런 주오를 보고는 또다시 허허 웃었다.

“아무리 칭찬해도 별 반응 없는 게 김주오인데, 수호가 칭찬하니까 입이 귀에 걸리네. 수호 덕에 올스타전에서 정말 좋은 거 많이 보고 간다.”

주오가 이러는 게 흔하지 않은 일인 듯 이진형이 정말 신기하게 주오를 바라봤다. 오히려 수호는 이진형이 신기했다. 대체 진형이 보던 주오는 어떤 사람이길래 그럴까. 문득 궁금해졌다.

“원래 주오 형 어떤데요?”

“응? 궁금해?”

분명 수호가 물은 건 진형이었거늘 주오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런 상황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일어나니 수호는 이제는 놀라기도 힘들었다.

수호는 순식간에 바짝 다가온 주오의 뺨을 살짝 밀어내며 진형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이진형이 놀란 듯 눈이 커졌다.

“너네 둘, 생각보다 더 친해졌나 보다?”

“뭐, 그런 것 같긴 해요…….”

“우리 많이 친해졌죠. 수호가 이제 제 마음을 알아줬나 봐요.”

주오가 싱글벙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진형은 자신의 팀 주장이 저렇게 좋아하니 기쁜 듯 마주 웃었다.

“주오가 너만 보면 참 애 같져. 평소에는 안 저러는데 말이야. 굳이 따지면 차분한 편이지.”

“……정말요?”

수호는 주오가 차분한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팀과 경기 후 인터뷰할 때를 떠올려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예의 바르고 반듯하게 말하는 게 정말 모범적인 모습 그 자체였다.

“근데 저한테는 왜 그래요?”

수호의 시선이 주오에게 향했다. 주오는 갑자기 진형에게서 자신으로 바뀐 수호의 타깃팅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내 둥글게 접어 웃었다.

“네가 좋아서.”

늘 이 대답이다. 수호가 좋아. 네가 좋아서.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그렇게 물어보면 평소처럼 귀여워서, 그냥 좋아서, 같은 대답을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대답을 들어도 명쾌한 해답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뭔가 미묘하게 어긋난 느낌이었다.

“전 형이 좋아한다는 말이 정확하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어? 말 그대로야. 네가 좋아서 잘해주고 싶어. 수호 너도 날 좋아해 줬으면 좋겠고.”

팬심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맹목적인가? 수호는 주오의 깊고 깊은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초에 수호는 주오처럼 어떤 한 사람을 동경하고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주오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역시 잘 모르겠네요.”

“허허, 사랑 고백이야? 너무 진지한데?”

물끄러미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이진형이 주오의 어깨를 두드렸다. 주오는 진형을 보며 말없이 웃었다.

“뭐 어쨌거나 일단 가자. 오늘 올스타전 끝나서 뒤풀이 회식 있어.”

“오늘은 어디로 가요?”

“오늘? 오늘도 그때 그 집.”

주오의 물음에 진형이 뭘 물어보냐는 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괜한 걸 물어봤다는 주오가 힘 빠진 웃음을 지어 보였다.

수호가 멀뚱히 두 사람을 보고 있자 주오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감독님이 한식, 그것도 고기를 좋아해. 귀찮은 것도 싫어하시고.”

숙소랑 가깝기도 하고, 맛도 한국에서 먹던 것과 가장 비슷하기도 했다. 결국 이진형의 취향이라는 소리다.

수호도 고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같이 나왔던 된장찌개가 제법 입에 맞았었다.

“괜찮네요.”

“수호 입맛에도 맞았나 보네. 전에 보니까 잘 먹는 것 같더라.”

그때 오물오물 음식물을 천천히 씹던 수호의 볼록한 볼이 생각난 주오가 흐뭇하게 웃었다.

수호는 기분 좋은 듯 실실 웃는 주오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웃어요?”

“그냥. 어서 가자.”

“네.”

수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오와 진형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대기실에 도착하자 기다리던 선수들이 환호했다. 그 들뜬 기분 그대로 다 같이 회식 장소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서도 올스타전 우승을 했다는 기쁨에 취해 선수들이 유독 시끌벅적했다.

경기가 저녁 시간을 지나서 끝난 탓이라 그런지 가게는 한산했다.

“예약하신 분들이죠? 이쪽으로 오세요.”

저번에도 봤던 점원이 웃으며 자리로 안내했다. 널찍한 테이블은 이미 기본 세팅이 끝나 있었다. 다 같이 우르르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자 직원이 손질된 생고기를 가져왔다.

고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수호는 이번에도 밑반찬으로 나온 오이를 쌈장에 찍어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자연스럽게 수호 옆에 앉은 주오는 흐뭇한 얼굴로 수호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반찬들을 수호 앞에 가져다놨다. 그런 주오를 참 주책이다 싶은 얼굴로 은기가 바라봤다.

“형, 이러다가 모든 음식이 수호 앞으로 가겠어요.”

“그러게 말이야. 김주오 너무 차별하는 거 아니야?”

은기의 타박에 재인이 동조했다. 주오는 두 사람을 심드렁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차피 너네는 안 먹잖아.”

“그건 그런데요.”

주오와 은기의 투닥거림을 수호는 오이를 씹으며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러쉬 형, 우리는 술이나 시킬까요?”

“그래. 뒤풀이인데 마셔줘야지.”

셋이 그러든가 말든가 지한과 재인은 점원에게 후레쉬를 외쳤다. 몰랐던 사실인데 이 올스타 멤버도 개판인 것 같다.

시원한 오이를 꿀꺽 삼킨 수호가 먼저 나온 된장찌개를 맛봤다. 주오는 공기밥 뚜껑을 열어 수호에게 밀어주었다.

“하아, 됐어요. 제가 수호를 이길 리가 없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기가 한숨을 내쉬며 씁쓸하게 웃었다.

주오와 같은 숙소에 사는 은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주오가 수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의 방에는 수호 사진은 물론이고 사인지, 인터뷰 스크랩, 굿즈 등 정말 많은 수호 관련 물품이 가득했다. 그런 주오에게 수호보다 자신을 더 챙겨주길 바라는 건 오만이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현실을 파악한 은기가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는 뭔가 궁금한 듯, 그리고 할 말이 있는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은기에게 입을 열었다.

“할 말 있어?”

“음, 아니야. 그냥 너도 이제 주오 형이랑 잘 지내는구나 싶어서. 처음에는 네가 형 불편해하는 게 보였거든. 하긴, 형이 좀 귀찮게 굴긴 했지?”

“응.”

“뭐야, 너무 솔직한 거 아니야?”

“이건 솔직한 게 아니라, 매정한 거 아닐까……?”

주오가 시무룩해졌다. 역시 내가 귀찮았구나, 작게 중얼거리며 앞에 놓인 쌈장 종지를 젓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은기는 정말 적응 안 되는 주오의 모습을 보며 처참한 얼굴을 해 보였다.

은기에게 주오는 주오에게 수호 같은 존재였다. 물론 주오처럼 동경을 넘어선 감정을 품고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동경의 대상이라는 것뿐이다.

주오를 보며 프로의 꿈을 키워온 은기에게 주오는 정말 거대한 산 같았고, 정말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늘 멋있고, 대단한 주오가 저렇게 수호에게 까여서 시무룩한 모습을 보이면 은기는 정말이지 슬퍼졌다.

“……그래도 지금은 괜찮지?”

“응, 지금은 괜찮아.”

“하아, 다행이다.”

수호의 답변에 주오가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심장이 철렁 했었는지 주오가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수호는 그런 주오가 웃겼다. 저 형은 정말 덩치에 안 맞게 행동이 아기자기했다.

“형은 웃긴 사람이에요.”

“내가 웃겨? 수호한테 웃긴 사람이라서 다행이야.”

잘못하면 비꼬는 뜻으로 들릴지도 모를 말을 기쁘게 받아들여 주는 주오였다. 주오는 늘 이랬다. 어떤 소리를 해도 대화를 나눴다고 좋아했고, 그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해도 늘 시무룩해지기만 할 뿐 기분 나빠 하지는 않았다.

문득 주오가 자신을 너그럽게 봐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수호는 생각보다 자신을 더 좋아하는 것 같은 주오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마음이 뭔가 포실포실했다. 딱히 주오에게 잘해준 것도 없는데 주오는 왜 이렇게까지 잘해줄까.

원래 같았으면 궁금해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문득 궁금해졌다. 김주오라는 사람이 조금 궁금했다.

“형은 원래 사람이 착해요?”

“주오 형? 착한 편이지. 그런데 또 무서울 땐 무서워.”

무섭다는 말은 주오에게 어울리지 않은 말이었다. 수호가 보기엔 그랬다. 제라드 사람과 얘기할수록 몰랐던 주오의 모습을 알게 되는 게 새로웠다. 주오를 향하는 수호의 시선이 말똥말똥했다.

주오는 수호의 까만 눈이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니까 당황했는지 그의 시선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주오를 향해 수호가 입을 열었다.

“형이 절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응, 많이 좋아해. 너무너무 좋아해.”

“감사합니다.”

수호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늘 주오가 좋다고, 팬이라고 그러면 수호가 건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수호도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잘해준 것도 없는데 진심으로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다.

“형은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그렇게 봐줘서 정말 고마워. 앞으로 더 좋은 사람이 될게.”

주오가 생긋생긋 웃었다. 포근하게 지어진 미소를 보자 수호의 입가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올랐다.

얼굴이 부담스럽다고 그를 계속 피해 다녔던 게 조금은 미안했다. 사람은 생긴 것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데. 수호는 다시 한번 인생의 깨달음을 얻었다.

“둘이 뭐 해?”

여긴 회식 장소였고, 주오와 수호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갑자기 둘만의 세계로 빠져서 낯간지러운 소리를 해대는 꼴에 재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은기는 술 한 잔을 털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연애는 다른 곳 가서 해줘요. 제발.”

“진짜 레인 형 부러워요. 저도 수호 형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역시 수호와 같은 방을 했었어야 했다고 지한이 원통해했다. 주오는 그런 지한을 승리감에 찬 얼굴로 바라봤다.

“제비뽑기를 잘했어야지.”

“만약 지한이가 수호랑 같은 방으로 뽑았어도 네가 가만히 있었겠냐.”

재인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주오를 타박했다. 주오는 그만 닥치라는 얼굴로 재인을 바라봤다.

“와, 수호야, 너 방금 김주오 표정 봤어?”

“아니요.”

열심히 된장찌개에 두부를 떠서 입에 넣고 있던 수호가 주오를 봤을 리 만무했다. 주오는 먹으라는 고기는 안 먹고 열심히 사이드 음식으로만 배를 채우는 수호 앞에 고기를 놓아줬다.

“수호야, 많이 먹어.”

“많이는 필요 없어요.”

“그러면 맛있게 먹어.”

눈가를 휘며 주오가 어린 손녀를 보듯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는 오물오물 음식을 씹어 삼켰다.

“어떻게 보면, 수호가 눈치가 없는 게 주오 너한테는 참 다행이겠다.”

“수호 욕하는 거야?”

재인을 보는 주오의 눈빛이 매서웠다. 재인은 진짜 중증이라며 얼굴을 찡그렸다. 은기가 재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저었다.

“재인 형, 그런 말 하면 주오 형 진짜 화내요.”

“진짜 레인 형은 수호 형 지킴이 같네요.”

지한이만 주오가 그저 수호를 팬심으로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지한을 재인과 은기가 너도 참 대단하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수호보다 더 눈치 없는 애가 지한인 거 같았다.

“주오 형.”

“응? 수호야, 왜 불러?”

재인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주오는 수호의 부름에 눈빛이 변했다. 수호가 늘 봐왔던 부드럽고 다정한 눈이 무슨 일 있냐고 반짝거렸다. 수호는 집게를 들며 고기를 들췄다.

“얘네 더 익히면 타지 않을까 해서요.”

고기 굽기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수호가 보기에도 더 구우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석탄을 제작할 것 같아 말하자 은기가 아차 싶은 얼굴로 수호에게서 집게를 가져갔다.

“형한테 정신 팔려서 조금 태워 버렸네요. 근데 그렇게 먹어도 될 정도니 드세요.”

은기가 원망 어린 눈으로 주오를 바라보며 고기들을 쏙쏙 각각의 앞접시들로 배달했다. 수호는 그중 몇 개를 다시 주오의 앞접시로 옮겼다. 주오는 감격 어린 눈으로 수호를 바라봤다.

“저는 고기 별로 안 좋아해서, 이만큼은 필요 없어요. 형 드세요.”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운 수호가 입가심으로 상추 하나를 뜯었다. 주오는 수호가 준 고기를 입에 넣을 때마다 감격에 젖은 얼굴을 했다. 은기는 참 주책이라는 얼굴로 주오를 보다가 수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만 먹어도 괜찮겠어? 다른 거 뭐 더 안 먹어?”

“딱히 생각 없는데.”

은기의 말에 수호가 고개를 젓고 있을 때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진형이 불쑥 나타났다. 그러곤 수호의 양 어깨 위로 두툼한 팔을 턱 얹었다.

“채현이가 수호 너 많이 먹이랬어.”

뭐 하나 더 먹지 않으면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진형의 무서운 기세에 수호가 메뉴판을 바라봤다. 수호가 속한 주이의 감독인 윤채현과 이진형이 괜히 친한 게 아니었다. 둘이 집요한 성격은 똑같았다. 끼니 걱정하는 것까지도.

채현도 수호를 먹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럴 때마다 수호는 편식하는 초등학생처럼 식탁에 붙들려 선생님의 감시를 받으며 음식을 먹어야 했다. 지금도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면 냉면 먹을게요.”

“그래그래.”

진형은 수호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냉을 주문한 수호는 사람들이 고기를 비우는 걸 바라봤다. 그때 주오가 갑자기 속삭여 왔다.

“배부르면 내가 먹을게.”

괜히 억지로 먹는 걸까 봐 주오가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먹으라면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수호의 대답에도 주오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러면 나랑 나눠 먹을까?”

“음, 그래요.”

씹는 게 귀찮아서 많이 먹는 편이 아닌 수호는 냉면의 반절을 주오에게 넘겼다. 주오 덕에 빠르게 그릇을 비워낸 수호는 그때부터 술을 꼴깍꼴깍 넘기기 시작했다. 물론 술을 못하는 주오는 음료만 비울 뿐이었다.

“진짜 올스타전 너무 재밌었어요. 내년에도 오고 싶어요오.”

어느새 취기가 돈 지한이 말끝이 늘리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재인이 지한의 등을 토닥였다.

“진짜 오고 싶다고요오. 형들이랑 또 게임하고 싶어요. 우린 팀이 다르니까 이럴 때 아니면 못 하잖아요.”

“그건 그렇지. 지한이가 우리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지한의 찡얼거림을 재인이 웃으며 받아줬다. 재인 때문에 더 슬퍼졌는지 지한의 설움이 더욱 커졌다.

“러쉬 형은 이제 은퇴하니까 못 보잖아요! 어떡해요. 너무 아쉬워.”

러쉬 형을 외치며 재인을 끌어안는 지한이었다. 재인은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지한의 등을 두드렸다.

은기도 마지막 뒤풀이라 그런지 술을 제법 걸친 듯했다. 동공이 살짝 흐려진 은기가 수호를 빤히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수호, 우리 형 생각보다 되게 괜찮은 사람이야.”

수호는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는 은기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은기는 멀뚱한 눈을 자신을 보는 수호에게 꿍얼거렸다.

“주오 형 진짜 괜찮은 사람이야. 착하고, 다정하고, 동생들도 잘 챙기고. 너도 느꼈지?”

수호는 이제야 은기가 말하는 우리 형이 누군지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은기 말대로 다정하고 사람을 잘 챙기는 사람이었다.

수호도 앞에 비워진 병이 제법 쌓여 있었다. 수호는 알딸딸한 정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더라. 형 좋은 사람이야.”

“그럼 우리 형 좀 잘 봐줘. 형이 너 얼마나 좋아하는 줄 알아?”

“응, 알아.”

“아냐, 넌 몰라.”

“아니야, 알아.”

둘 다 취했는지 은기와 수호가 서로 자기가 맞다고 조곤조곤 우기고 있었다.

주오는 이 재미나고 보기 힘든 광경을 턱을 괸 채 관람했다. 술기운인지 볼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수호가 진짜 너무 귀여웠다. 저 볼을 한 번만 물어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주오는 생각했다.

음흉한 주오의 생각을 모르는 두 동갑내기는 여전히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형이 진짜, 어디 가서 까이고 다닐 사람이 아닌데. 진짜 인기 많은데…….”

“응, 경기 끝나고 팬미팅 하는 거 봤는데 사람 엄청 많더라.”

“그뿐인 줄 알아? 주오 형 막 방송사에서도 연락 많이 와. 은퇴하면 방송 출연해 볼 생각 없냐고.”

“진짜?”

수호가 조금 흐릿한 시선으로 주오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 힘든 얼굴이긴 해.”

“엄청 잘생겼지. 나 살면서 형처럼 잘생긴 사람 처음 봐.”

“나도.”

실랑이를 하던 게 방금 전이었는데 지금은 또 둘이 죽이 잘 맞았다. 서로 맞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꼴이 제법 귀여웠다.

주오는 수호가 좋아하는 오이를 들이밀었다.

“술만 마시지 말고, 안주도 먹어야지.”

“네, 감사합니다.”

수호는 주오에게 꾸벅 인사하고 오이를 쥐었다. 아삭아삭 씹는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사람이 뭘 먹는 게 이렇게 사랑스러운 행위인지 주오는 수호를 보며 처음 알았다. 오물오물 입을 꾹 다문 채 소리 없이 꼭꼭 씹는 게 작은 설치류 같아서 귀여웠다.

“야, 이수호. 내 말 들어봐. 우리 형이 진짜 괜찮은 사람이라니까. 막 착하고 다정하고. 어? 알아?”

“응, 형 좋은 사람이야.”

이 대화는 분명 방금 전에도 했었던 것 같은데. 주오는 어느새 다시 처음으로 대화 주제가 돌아간 두 사람을 보여 웃음을 터뜨렸다. 은기와 수호가 동시에 주오를 바라봤다.

“주오 형, 왜 웃어요. 우린 진지하다고요.”

“…….”

“얘기 마저 해. 안 웃을게.”

“그래요, 형은 가만히 있어요.”

주오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다시 수호를 바라봤다.

“그래서 주오 형 좋지?”

갑자기 다 건네 뛰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은기의 무논리를 주오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바라봤다. 사실 수호의 대답이 궁금했다. 최근 가까워졌다고는 하나 수호의 진심이 감이 잡히지 않았다. 주오는 수호의 꾹 다물린 입술이 열리길 눈을 반짝이며 기다렸다.

수호는 고심하는 듯 곰곰이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은 것 같아.”

주오는 그게 자신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 해도 좋았다. 어떤 식으로든 수호가 자신을 좋게 봐주면 그걸로 만족했다. 주오의 마음이 쿵쿵 떨렸다. 그 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주오가 행복하길 바라는 은기의 표정도 밝아졌다.

“진짜? 너도 형 좋아?”

몸을 앞으로 바짝 내밀며 되묻는 은기를 보며 수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형 좋아.”

“어떡해. 주오 형, 가망이 없는 건 아닌가 봐요.”

“어떡해. 정말 그런가 봐.”

주오가 감격 어린 눈으로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는 주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저 졸려요.”

잠이 오는지 수호가 눈을 끔뻑거렸다. 많이 졸린지 몸이 앞뒤로 조금씩 흔들렸다. 수호의 어깨를 감싼 주오가 얼굴을 쓱 들이밀었다.

“많이 졸려? 자러 갈까?”

“응, 졸려요.”

수호가 반쯤 눈을 감으며 숨을 색색 쉬었다. 이미 회식은 개판이 된 지 오래였다. 찡얼거리고 있는 지한과 그걸 달래는 재인, 은기도 머리가 아픈지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서도 왁자지껄 사무국 직원들이 취해 떠들고 있었다.

상황을 살핀 주오는 수호를 부축해서 일어났다. 주오는 이때 자신의 키가 큰 편이라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키가 아닌 수호가 기대어오니 제법 묵직했다. 주오는 수호의 어깨를 감싸 넘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걸었다.

“감독님, 저희 먼저 들어갈게요.”

“어어, 그래그래. 조심히 가고!”

이진형도 얼큰하게 술기운이 올라왔는지 건성건성 손만 흔들어 보였다. 올스타전이라도 자신이 이끈 한국 팀이 우승을 하니 그도 기쁜 모양이었다. 주오는 정규 시즌에서 우승이라는 성적을 내지 못한 게 미안해져 옅게 웃어 보이고는 가게를 나섰다.

열두 시가 넘어가니 바람이 제법 찼다. 주오는 걸으면서 자는 건지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뜨고 있는 시간보다 더욱 긴 수호를 내려다 봤다.

“수호야, 괜찮아?”

“괜찮아요. 근데 졸려요.”

“택시 타고 갈까?”

“걸어가요. 택시 잡는 것도 시간 걸리잖아요.”

숙소랑 가까워서 걸어간다 해도 10여 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택시 잡고 오는 것까지 생각하면 오히려 택시가 더 오래 걸릴 지경이었다.

수호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눈을 감고 있었다. 이러다가 전봇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수호야, 그렇게 가면 위험해.”

“졸려서 눈을 못 뜨겠어요.”

“그러면 손잡을래? 내가 안내해 줄게.”

“응, 부탁해요.”

잠결에 취해서 유독 순둥해지는 수호가 곧바로 손을 내밀었다.

주오는 내밀어진 수호의 하얗고 반듯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다시 봐도 정말 예쁜 손이다. 주오는 저 손을 잡고 갈 생각을 하니 갑자기 마시지도 않았던 술에 취하는 기분이었다.

어떡해. 주오는 덜컹덜컹 뛰는 고삐 풀린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수호는 내민 손을 주오가 잡지 않자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주오가 눈앞에서 손을 내려다본 채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저 형이 또 왜 저러나 싶었다.

“형, 안 잡아요?”

“어? 잡아, 잡을 거야.”

주오는 수호가 손을 거둘까 재빨리 잡았다. 수호는 손을 감싸는 따스한 온기에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 가요.”

“응, 그래. 내가 침대까지 잘 데려다줄게.”

“네.”

수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이끌리는 방향으로 걸었다. 주오는 온전히 자신에게 맡겨진 수호의 손을 꼭 붙들었다.

이런 식으로 수호랑 손을 잡고 길을 걷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전에 회식했을 때도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이럴 수 있었을까. 주오는 문득 그때 멍청하게 술을 먹었던 자신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너무 떨려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주오는 어딘지 어색하게 수호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수호가 혹시나 넘어질까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수호야 앞에 턱 있다. 조심해.”

“네.”

수호가 발을 조금 더 높게 들어서 턱을 넘었다. 주오는 수호가 조심히 넘어올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수호가 걸음을 멈췄다. 주오는 어디가 안 좋은 걸까 싶어 수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수호야,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토할 거 같아?”

수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고는 말이 없었다. 주오는 왜 그럴까 싶어 걱정스러운 얼굴로 수호의 말간 얼굴을 들여다봤다. 수호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못 걷겠어?”

“아뇨.”

“그럼 뭐가 문제일까?”

달래듯 나긋하게 묻는 주오를 수호가 바라봤다. 수호의 조약돌 같은 검은 눈이 잠과 술로 인해 흐렸다. 주오를 똑바로 바라본 수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형, 제가 그동안 죄송했어요.”

“응? 뭐가?”

“맨날 형 피해서요.”

부담스럽게 생겼다고 피해서 미안해요. 수호가 웅얼거렸다. 주오는 갑자기 반성의 시간을 갖는 수호가 웃겼다. 그리고 귀여웠다. 주오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내가 그렇게 부담스러웠어?”

“형은 생긴 게 사람같이 안 생겼어요.”

“괴물 같다는 거야?”

주오가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수호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 뜻이 아니에요. 이렇게 생긴 사람은 처음 봤어요. 그림 같아요.”

“칭찬이야?”

멍하니 자신을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수호의 눈이 어딘가 감탄하는 것 같았다. 나쁜 뜻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주오가 환하게 웃었다.

수호는 잠시 고민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일 거예요.”

“하하, 그게 뭐야.”

수호의 싱거운 답변이 웃기다는 듯 주오가 웃었다. 손을 꼭 붙잡은 두 사람이 길에 서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그래서 형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이제 알았어요. 죄송해요.”

“이제라도 알아줘서 다행이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알아?”

“몰라요.”

단호한 수호의 대답이 또 웃겨서 주오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주오가 생글생글 웃는 걸 또 물끄러미 보다 수호가 입을 열었다.

“제가 해드릴 거 있어요?”

“응?”

주오는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일까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수호는 의아함에 찬 주오를 흐릿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저한테 악수도 하고 싶고, 방송도 하고 싶고, 술도 끝까지 마셔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아.”

저번 회식 때 취해서 수호에게 했다던 말이었다. 주오는 민망하고 창피한 기억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주오가 그러는 동안 수호는 몽롱한 정신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형이 술 깨고 나서 말해줬는데 기억 못 하는 거예요?”

“어? 아니, 아니야. 기억해.”

주오는 민망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그래서 뭐 없어요? 사진 찍어줄까요?”

술에 취한 수호는 정말 주오를 들었다 놨다 했다. 평소에는 뭘 해도 반응이 없던 수호가 갑자기 먼저 나서서 뭘 해주려고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말을 기억해 주고 이렇게 신경 써주는 게 너무 좋았다.

하지만 주오는 쉽게 수호의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물론 수호와 하고 싶은 일은 아주 많았다. 이런저런, 뭐 그런 거까지 정말 많았지만 섣불리 꺼낼 수 없는 게 대다수였다.

“사진은 필요하긴 한데……. 아마 수호가 싫어할 거야.”

전부터 탐나던 자고 있는 수호의 사진을 얻고 싶었던 주오지만, 그걸 부탁하면 수호는 변태라며 고개를 저을 게 분명했다.

“그럼 제가 안 싫어할 거를 말해봐요. 하나는 들어줄게요.”

“정말?”

주오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어떤 걸 고르지. 고심하는 주오의 시야에 수호의 불그스름한 볼이 잡혔다. 주오가 가볍게 웃으며 찬바람을 받아 더욱 붉어진 수호의 볼을 콕 찔렀다. 볼에 살이 많은 편이 아닌데도 참 부드러웠다.

수호는 갑자기 볼이 찔렸는데도 당황하지 않고 주오를 바라봤다.

“뭐 해요?”

“그러면 볼 한 번만 물어봐도 돼?”

이미 몽롱한 수호의 시선이 주오의 말 한마디에 더욱 멍해졌다. 술기운에 무뎌진 사고가 잘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있던 수호가 자신의 볼을 비비적거렸다.

“저는 음식이 아니에요.”

“알아.”

아는데 왜 물려고 할까. 수호는 이해가 안 가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왜 먹으려 해요.”

“그래서 안 돼?”

주오의 눈이 간절하게 반짝였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있어 그다지 밝지 않은 거리임에도 주오의 눈이 반짝이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수호는 웬일인지 주오의 눈을 뚫어져라 마주 봤다.

“……한 번만이에요.”

“진짜? 정말로 물어봐도 돼?”

주오의 눈이 더욱 반짝였다. 주오는 수호가 마음을 돌릴세라 빠르게 수호의 뺨을 꾹 잡았다. 작은 머리통이 손안으로 폭삭 들어왔다. 주오는 격하게 수호의 볼을 이리저리 문대고 뽀뽀를 하고 싶은 마음을 최선을 다해 참았다.

주오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오자 수호가 눈을 꾹 감았다.

주오는 아플까 봐 흠칫 굳은 수호의 볼을 손가락으로 푹푹 찌르고는 이내 뺨 한쪽을 앙 물었다.

스물둘이라도 성인 남성이었다. 보송보송하지 많은 탄탄한 볼에 주오의 이가 박혔다. 주오는 사람에게 식욕을 느껴보긴 처음이었다. 아프지 않게 살살 이를 세워 물어본 주오는 수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수호가 흠칫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주오와 수호의 시선이 맞닿았다.

눈을 끔뻑끔뻑 뜨는 수호의 반대쪽 뺨에 주오가 다시 입을 맞췄다.

주오는 만취한 수호가 내일 지금 일을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겨우 가까워졌는데 이제 다시 멀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하지만 동글동글 까만 눈을 보자 참을 수가 없었다.

주오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있는 수호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주오가 씁쓸한 얼굴로 수호를 바라봤다.

“미안해. 볼만 문다고 했었는데 다른 것도 해서.”

수호가 욕을 해도 주오는 할 말이 없었다. 역겹다고 더럽다고 그러면 어쩔까 걱정됐지만, 그래도 수호가 그렇게 말한다면 받아들일 각오가 있었다.

주오는 수호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덩치는 산만 한 게 움츠려서 눈동자만 힐끔거리는 게 귀엽다면 귀엽고, 웃기다면 웃긴 꼴이었다.

수호는 쭈굴거리는 주오를 보다 입을 열었다.

“형 동생 있댔죠.”

“어? 응. 너랑 동갑인 남동생 하나 있어. 왜?”

주오는 갑작스런 호구조사에 슬금슬금 눈치 보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호는 그런 주오를 바라보다 갑자기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생한테도 그러죠?”

음? 주오는 자신의 행동을 엉뚱하게 받아들이는 수호의 반응에 안도해야 하는지, 허탈해해야 하는지 난해했다.

어색하게 웃은 주오는 수호의 말을 곰곰이 씹다 이내 인상을 찡그렸다. 동생한테 그러냐는 말이 정말로 끔찍했다.

“동생한테 이런 적 없어.”

“근데 왜 저한테는 그래요?”

수호는 역시 알딸딸한 상태인 듯했다. 이쯤 되면 주오가 품은 마음이 단순한 팬심은 아니라는 걸 눈치챌 만도 했는데, 수호는 여전히 몰랐다.

주오는 이 무심하고 눈치 없는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게 과연 잘한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주오는 생긋 웃었다.

“수호, 너니까.”

“이상해……. 형 가끔 보면 진짜 이상해요.”

잠이 다시 몰아치는지 수호가 눈을 끔뻑거렸다. 다시 스르륵 눈을 감는 수호는 더 이상 대화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주오는 수호의 손을 다시 잡고 손등을 토닥였다.

“많이 졸린가 보다. 이제 걷지 말고 업히자.”

“졸려요.”

주오는 잠들어가는 수호를 달래며 업었다. 둥실둥실 움직이는 주오의 등에 업힌 수호는 편안히 잠들었다.

길쭉한 걸 업은 더 길쭉한 사람이 천천히 밤길을 걸어 나갔다. 주오는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푹 박고 잠에 든 수호를 업어 들고 부드러운 콧노래를 불렀다.

바람과 함께 섞인 주오의 허밍은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됐다. 꿈만 같은 올스타전이 막을 내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