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뭔가 갑자기 끝나 버린 술자리였다. 수호와 주오는 재인과 지한의 방에서 나와 본인들의 객실로 향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객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갑자기 몰려드는 피로에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얼떨결에 눈이 맞은 채로 각자의 침대에 엎어진 수호와 주오였다. 주오는 이제는 습관이 된 듯 눈가를 접어 웃었다.
“먼저 씻을래?”
수호는 폭신한 이불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형 먼저 씻어요.”
“귀찮은데.”
“저도요.”
두 사람은 대화를 잇다 작게 웃었다.
“그냥 이대로 잘까?”
주오의 물음에 수호가 고개를 다시 저었다. 그래도 양치는 해야죠. 이가 썩어요.
“치과 갈 시간 없어요.”
수호의 대답이 재밌다는 듯 주오가 크게 웃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왠지 노곤해지는 것 같았다. 수호는 아까 들었던 재인의 말이 떠올랐다.
‘넌 오래 해먹어라.’
주오에게 했던 그 말이 왜 이렇게 자꾸만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수호는 몰려드는 졸음에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형은 은퇴 언제 해요?”
“왜, 궁금해?”
수호가 건넨 물음이 의외였는지 주오의 음성에 옅은 의아함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게 좋은지 기쁨이 더욱 크게 묻어났다.
사실 수호는 은퇴라는 거에 그렇게 크게 의미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은 있는 거였고, 언제까지고 프로를 할 수는 없으니까. 은퇴는 몇 년 뒤에, 어쩌면 당장 내년에도 할 수 있는 거였다.
“조금요.”
그런데 아쉬움과 시원함이 담긴 얼굴로 말하던 재인이 잊히지 않았다. 재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 때 주오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글쎄. 때가 되면?”
“형도 부담감이 심해요?”
수호는 경기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선수들이 경기마다 부담과 긴장감을 안고 경기에 임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 늘 여유로워 보이는 주오는 그런 느낌을 받지 않을 것만 같았다.
주오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더니 수호를 바라봤다.
“심한지는 모르겠네. 그런데 없을 수는 없지. 어제까지 나를 좋아해 주고 칭찬해 주던 사람이 내 실수 한 번에 나를 싫어하게 되기도 하니까.”
“그건 그렇죠.”
수호와 주오. 세계에서 인기가 제일 많은 프로게이머를 뽑아보라고 하면 대다수가 두 사람을 뽑을 거다. 그리고 그만큼 그들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없는 꼬투리도 만들어서 욕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다는 얘기였다.
문득 가슴속이 공허해졌다. 분명 즐겁기에 시작했던 게임이었지만, 어느새 두 사람에게 게임은 애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즐겁지. 수호 너도 그렇지 않아?”
“그렇죠.”
“그럼 된 거지.”
눈가를 접어 웃는 주오의 얼굴이 과하게 잘생겨서 수호는 몸을 돌려 천장을 보고 누웠다.
“쳐다보지 마세요.”
퉁명스러운 수호의 음성에 주오가 즐겁다는 듯 웃었다. 잔잔한 울림에 졸음이 몰려왔다.
“어떻게 안 볼 수가 있어. 이렇게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기회도 많지 않은데.”
그건 그렇다. 어차피 주오와 수호는 소속 팀이 달라 경기장이 아니면 마주칠 일이 없었다. 경기도 매일 다른 팀과 치르기 때문에 멀리서 스쳐 지나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수호는 4년이라는 시간을 같은 리그에서 뛰었지만, 딱히 주오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대화를 나눌 기회마다 주오가 부담스럽게 달라붙어서 그와 자주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수호는 이번에 계약 종료였지?”
수호는 졸음이 몰려오는 눈꺼풀을 끔뻑끔뻑 밀어 올렸다. 정말 잠들 것 같았다. 하지만 착실하게 질문에는 대답했다. 그래도 졸음이 한가득한 음성이라 발음이 분명치는 않았다.
“네.”
“재계약할 거야?”
그건 아직 수호도 결정하지 못한 사안이었다. 딱히 머물고 싶은 것도, 그렇다고 떠나고 싶은 것도 아닌 그런 상황.
물끄러미 수호를 보고 있던 주오는 그가 아직 결정을 못 한 걸 눈치챈 듯 몸을 번쩍 일으켰다. 그리고 아주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는 천장을 보고 있었지만 알 수 있었다. 지금 김주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분명 엄청나게 희망찬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 거다.
“그러면 제라드로 올래?”
“싫어요.”
전에도 이와 같은 말을 박선우가 똑같이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수호의 대답마저 지금과 같았다.
사실 그때만큼 싫은 건 아니었지만, 순간적으로 그렇게 말이 나와 버렸다. 수호는 아, 하며 작은 탄성을 뱉어냈지만 딱히 반박할 이유도 없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런 수호의 행동으로 김주오는 조금 슬퍼졌다. 단칼에 거절당한 주오의 눈가가 시무룩하게 굽어졌다. 하지만 곧 주오는 다시 눈을 반달로 휘었다. 주오가 어느새 자신의 침대에서 벗어나 수호의 침대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주오가 침대 옆에 앉아 턱을 턱 올리고 수호를 바라봤다.
“왜 싫을까? 선우도 제라드로 온다고 하던데 이참에 수호도 같이 오면 좋지 않을까?”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수호가 친한 선수라고 해봤자 박선우가 전부였다. 낯가림이 심한 수호가 다른 팀으로 가서 적응하는 걸 힘들어할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렇지만 그런 이유 하나로 팀을 선택하는 건 어떤 사람도 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누가 팀 계약을 해요.”
“나는 그렇게라도 수호가 와줬으면 해서. 너랑 같은 팀에서 뛰고 싶어. 수호도 생각보다 내가 마음에 든다고 하지 않았어? 우리 팀 꽤 괜찮아. 아마 한국 팀 중에서 가장 처우가 좋을 거야.”
그건 맞다. 이수호도 이 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주이도 여러 번의 월드 챔피언십 우승으로 선수들에게 잘하려 노력하지만 애초에 제라드와는 달랐다. 거대 기업을 등에 업은 제라드는 그 어느 곳보다도 선수들 케어에 신경을 많이 썼다.
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건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오기 싫어할까. 설마 나 때문인가?”
주오가 수호를 초조한 눈으로 바라봤다. 천장만 묵묵히 보고 있던 수호가 고개를 돌려 주오와 눈을 맞췄다. 침대에 턱을 턱하니 올린 채 자신을 보는 다갈색 눈이 꼭 슈렉에 나오는 그 고양이 같았다. 백 구십이 넘는 키의 남자가 하기에는 징그러운 눈이었다.
하지만 그게 제법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다시 봐도 불편한 얼굴이다.
“…….”
대답 없는 수호를 보며 주오가 쓰게 웃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밝은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편해하는 것 같으니까 이제 그만할게. 나 때문이라면 마음은 아프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잘 생각해 봐. 수호 너 외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뛰고 싶다고 했지? 그럼 제라드로 와야 할 거야. 어떻게 봐도 너 같은 선수를 제값 주고 계약해 줄 곳은 제라드뿐이니까.”
이미 월드 챔피언십 우승을 4번이나 한 수호는 몸값이 세계 그 누구보다 높았다. 하지만 한국은 시장이 좁았고, 프로게이머 선수에게 해외 리그보다 더 많은 돈을 줄 여력도 없었다.
하지만 제라드는 해외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수호의 몸값을 맞춰줄 수 있었다. 굳이 뛰어야 하는 리그라면 더 많은 연봉과 더 많은 케어를 해주는 곳을 선택하는 게 당연했다.
수호도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머물고 있는 주이와의 재계약이 얼마나 아둔한 선택인지를.
“……생각해 볼게요.”
“그래, 좋은 쪽으로 결정되면 좋겠다. 그런데 수호야, 안 씻을 거야?”
주오가 다시 평소와 같은 다정하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호도 씻고 싶었지만 너무 졸렸다. 눈이 마구 감기는 걸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양치는 해야 하는데.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잠을 깨려 하는 수호를 보며 주오가 눈을 빛냈다.
“수호 못 일어나겠으면 자. 자는 동안 씻겨줄게.”
이건 무슨 소리일까. 수호는 몰려오던 잠이 흔적도 없이 허둥지둥 도망가는 게 느껴졌다. 수호가 이해 못 한 얼굴로 멍하니 고개를 갸웃했다. 졸려서 헛것을 들었나 싶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주오는 전혀 잘못 들은 게 아니라고 알려주듯 싱긋 웃었다.
“자도 괜찮아. 조심히 씻겨줄게.”
“형, 변태 같아요.”
“어? 그래 보이나? 나름 조심하고 있는데.”
주오가 자신을 모르겠다는 듯 볼을 긁적였다. 수호는 김주오를 진짜 이해 못 할 사람이라고 새삼 다시 느꼈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다.
“형은 제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이상한 사람이에요.”
“너한테 뭐라도 제일이 되었다니 다행이야. 그게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좋은 사람. 김주오가 객관적으로 좋은 사람이기는 했다.
수호는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 주오를 올려다봤다. 자신이 앉아 있기도 하지만 주오는 키가 너무 컸다. 잠깐 봤음에도 목이 아파 주먹으로 약하게 목을 톡톡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일은 아니어도 형 좋은 사람 같긴 해요.”
“수호야, 나는 네가 이런 말 할 때마다 너무 무서워.”
주오가 무섭게 굳은 얼굴로 속삭였다. 그렇게 말하는 본인이 더 무서울 거라는 생각은 못 하는 모양이다.
“형이 그런 얼굴로 말하는 게 더 무서워요.”
늘 웃고 다니던 사람이 이렇게 얼굴을 굳힐 때마다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언제는 늘 그가 웃고만 다녀서 미소로봇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얼굴을 보면 웃는 게 더 나은 것 같다.
“미안, 놀랐어? 너무 좋아서 순간 굳어버렸네.”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온 주오를 힐끔 보며 수호가 입을 열었다.
“형은 웃는 게 멋있어요.”
그 말을 남기고 수호는 슬슬 샤워를 하려 주섬주섬 잠옷을 챙겼다. 그래서 수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이번에는 눈치가 없는 수호도 단박에 알아차릴 만큼 주오의 귓가가 붉어져 있었는데 말이다.
김주오는 자기 자신이 두려워지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수호가 이렇게 툭 내뱉는 말들이 얼마나 황홀한지 그는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주오가 수호를 답싹 끌어안고 침대로 기어들어 가고 싶어 한다는 것도 수호는 모를 거다.
수호는 파자마를 다 챙겨 욕실로 향했다. 수호의 뒤에서 주오가 입을 열었다.
“너는 언제나 멋있어.”
기쁨과 설렘, 그리고 묘한 긴장감이 담긴 주오의 음성에 수호가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주오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수호는 고개를 갸웃하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감사합니다.”
* * *
[아아악! RAIN 선수!! 배론, 배론! RAIN 선수가 적진 한복판으로 파고 들어가 배론을 스틸합니다!! 저길 어떻게 들어갈 생각을 하죠?]
박동진 해설이 하이톤 비명을 지르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배론의 둥지는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쉽지 않은 구조로 되어 있었다. 사방이 벽인 둥지 안으로 들어가 상대 정글과 상대 팀 선수들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리는 주오의 플레이에 관중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와중에 죽지 않고 살아서 빠져나가는 김주오를 상대 팀 정글이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배론이 주는 버프의 힘을 없애는 방법은 일정 시간이 지나거나, 아니면 상대를 죽이는 방법뿐이다.
유럽 팀 선수들은 우왕좌왕 주오를 잡기 위해 쫓았다. 하지만 벽 너머에서 주오를 위해 닻줄을 던진 재인으로 인해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했다.
체이스에는 게임의 흐름을 순조롭게 만드는 수많은 오브젝트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골렘과 배론, 이 두 가지는 다른 어떠한 오브젝트들보다 중요했다. 골렘은 전투에 힘을 실어주는 공격력과 방어력의 버프를 준다. 그리고 배론은 게임 운영에 힘을 실어주는 병사들의 공격력과 방어력, 그리고 사거리를 늘려준다.
[아니, 아니이. 그는 신입니다. 정글을 그냥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고 있습니다! GOD RAIN!! 진짜 유럽 팀 어떡하죠? 이기기 위해서는 무조건, 무조건! 저 배론을 먹었어야 했는데.]
유기현 해설도 난리법석을 떨며 주오를 칭찬하기 바빴다. 이건 어느 누가 봐도 명백하게 주오의 슈퍼 플레이었다.
[이야, 정말이지. 괜히 유명한 선수가 아닙니다. 이름값만 높고 막상 증명하지 못하는 선수들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RAIN 선수는 진짭니다.]
이영중 캐스터의 능청스러운 소리에 아직도 주오의 플레이에 빠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박동진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매 시즌 저렇게 좋은 플레이를 보여줄 수 있죠? 보통 저런 무리한 플레이가 나오면 실수가 많은 법인데 RAIN 선수는 실수가 없습니다. 진짜 대단한 선숩니다!]
[갓레인! 갓레인! 진짜 목 놓아 울부짖고 싶네요. 저도 선수 시절 정글이었기에 알거든요. 저 상황에서 들어가는 게 정말 쉽지 않다는 걸. 시야도 없는 곳을 저렇게 유유자적 들어가서 야! 이건 내가 가져간다? 이러면서 홀라당 배론을 먹고 살아 돌아오다뇨. 진짜 멋있습니다.]
해설을 하기 전 선수 생활을 했던 유기현이 정말 대단하다는 듯 엄지를 척척 치켜들었다.
[얼굴만 멋있는 줄 알았는데, 플레이도 정말 멋집니다.]
장난스러운 유기현의 말에 박동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서 얼굴이 왜 나오죠? 뭐 아무튼! 그가 멋진 선수라는 건 정말 반박할 수 없겠네요.]
해설들과 캐스터가 난리법석을 떨며 주오를 칭찬하는 것보다 한국 팀 선수들의 반응이 더 뜨거웠다.
“아아! 형, 사랑해! 진짜 너무 사랑해요!”
배론을 스틸하고 살아 돌아온 주오를 보며 지한이 소리쳤다. 목소리에서도 그의 들뜸이 드러났다.
“진짜 시야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들어갔어요? 타이밍 너무 미친 거 아니에요?”
은기까지 합세해서 헤드셋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와글와글 시끄러운 소리에도 주오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아직 게임 안 끝났다. 러쉬, 닻줄 고맙다.”
“네가 들어갈 것 같아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타이밍 잘 맞았지?”
재인은 화려한 플레이는 없지만, 지금처럼 늘 언제나 안정적으로 팀원들을 서포팅하는 데 특출한 선수였다. 올스타 멤버 중에서도 은기를 제외하면 의외로 가장 주오와 호흡이 잘 맞는 선수이기도 했다.
“너무 좋았다. 이제 집 가서 정비 한 번 하고 한타하자.”
“네!”
“수호야, 너는 상대 원딜만 보면 돼.”
“알겠어요.”
주오의 말에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드가 해줘야 할 건 딜로 찍어 눌러주는 것. 앞 라인 탱커들은 원거리 딜러인 은기가 처리해 주면 된다. 이미 잘 큰 상태이기도 했고, 지한과 재인이 은기는 잘 지켜줄 거다. 상대 팀 선수들이 재인을 물려고 할 때 수호가 상대의 원딜을 자르면 무조건 승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말이 쉽지. 모두 생각처럼 잘된다면 이 세상에 게임을 못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하지만 이수호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선수였기에 모두가 수호가 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수호는 해냈다.
“원딜 자르고 상대 미드 잡았어요.”
“아, 진짜, 올스타전 뽑히게 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이런 사람들이랑 한 팀에서 게임하다니!”
흥분에 찬 지한이 팬들에게는 들릴 리 없는 팀 보이스에 크게 소리 질렀다. 그리고 지한보다 더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건 해설자들이었다.
[아아아악! SUHO 선수!!! 상대 서포터 쉴드가 엄청나서 원딜을 잡기 힘들었을 텐데 그걸 한 번에 잡아버립니다!!]
[미드까지 잡아버렸어요!! 진짜 SUHO……. 대체 어쩜 저렇게 게임을 잘할 수가 있죠?]
흥분한 박동진과 유기현의 난장판 해설이 오가자 이영중이 하하 웃으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명색의 세계 1위 선수 아닙니까?! 저런 선수가 1위를 하지 그럼 누가 1위를 합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아, 정말 짜릿합니다. 올스타전. 이벤트전인데도 선수들이 참 연습을 많이 한 게 느껴지네요.]
유기현의 말에 박동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PEOPLE 선수와 MOO 선수도 올스타전 첫 출전인데 생각보다 잘 적응하고 호흡을 잘 맞춰가고 있네요.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선수들입니다.]
[네, 그러는 사이에 벌써 한국 팀이 유럽 팀 기지의 보석을 깨고 승리합니다! GG-!]
결과는 한국 팀의 승.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한국 팀의 누적 점수가 쭉쭉 올라갔다. 북미, 유럽, 한국, 중국. 네 개의 리그가 참가한 올스타전의 선두는 한국이었다.
[정말 뜨거운 경기였습니다. 프로 신에서는 킬 스코어가 높이 나오기 힘든데 무려 삼십 킬이나 나왔네요.]
박동진이 놀랍다는 듯 경기 자료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유기현 또한 자료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올스타전이니 그냥 치고받고 난타전으로 가자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역시 킬이 많이 나와야 재미있는 법이죠.]
[그렇습니다. 역시 화끈! 해야, 그래야 올스타전이죠.]
이영중 캐스터가 두 사람의 말을 받아쳤다. 그러곤 이어마이크에서 소리가 들려오는 듯 카메라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 승리의 주역인 RAIN 선수와 SUHO 선수의 인터뷰가 준비되었다고 하네요. 자, 그럼 만나보시죠.]
이영중 캐스터의 말과 함께 카메라가 아나운서와 선수들에게 넘어갔다. 카메라 앵글 안으로 주오와 수호가 비쳤다.
수호의 옆에 착 붙은 주오가 누가 봐도 쟤는 지금 기분이 좋구나, 라고 생각할 만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에 반해 수호는 여느 때와 같은 퉁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RAIN 선수, 수호 선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정하은 아나운서의 인사에 주오와 수호가 고개를 숙였다.
“오늘 유럽 팀과 정말 뜨거운 경기를 펼쳤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한국 팀이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요. 올해 월드 챔피언십에서 강세를 펼치던 유럽 팀을 압도하는 모습에 많은 팬분들께서 열광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준비했는지와 소감을 들을 수 있을까요?”
주오가 전달받은 마이크를 입에 가까이 가져가면서 입을 열었다.
“우선 유럽 팀과 즐거운 게임을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올스타전이다 보니 정규 시즌에서는 쓸 수 없었던 픽들이 나와서 당황스럽기도 했고, 그만큼 즐거웠습니다. 준비는 다른 팀들과 똑같이 했을 듯합니다.”
주오가 마이크를 수호에게 건넸다. 마이크를 건네받는 두 사람의 손이 살짝 스쳤다. 수호는 움찔 떨리는 주오의 손가락을 힐끔 보고는 입을 열었다.
“올해도 올스타전에 참가해서 다른 리그 선수들과 게임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역시 올스타전은 승패보단 즐거움이 제일 중요하겠죠? 하지만 그래도 승리하셨다니 기분이 더 좋으실 듯합니다. 아까 배론 둥지에서 RAIN 선수가 적진으로 들어가 스틸을 하셨는데 어떻게 그런 판단을 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팀 내부적으로 스틸하자는 콜이 있었던 건가요?”
정하은 아나운서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주오를 올려다봤다. 주오는 수호를 힐끔 보고는 답변했다.
“내부적으로도 지금 배론 먹고 있을 것 같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체크할 겸 둥지로 가봤는데 스틸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들어가는 선택을 하게 됐습니다.”
“오오, 저는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던데 역시 RAIN 선수는 게임 보는 눈이 다르신 것 같습니다. 정말 멋진 플레이였어요!”
“감사합니다.”
주오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정하은 아나운서는 묵묵히 마이크를 쥐고 서 있던 수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 한타에서는 SUHO 선수의 플레이가 돋보였는데요. 상대 원딜과 미드를 동시에 잡아낼 수 있다는 판단을 처음부터 하신 걸까요?”
“원딜은 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운이 좋으면 미드까지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하게 내뱉은 수호의 감상은 언뜻 들으면 오만해 보일 수도 있는 답변이었다. 언제나 인터뷰를 이렇게 하는 수호지만 이 때문에 안티도 많았다. 하지만 주오는 수호가 하는 말이 나쁜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흐뭇하게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는 옆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도 묵묵히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했다.
“역시 SUHO 선수도 남들이 보지 못하는 각이 보이시는 모양입니다. 우선 리그별 매치 중에서 유럽과 첫 시합을 하게 됐는데, 남은 북미와 중국은 어떻게 상대하실지 생각해두신 게 있을까요?”
유려하게 흘러가는 아나운서의 질문에 수호가 답했다.
“딱히 생각해 둔 건 없습니다. 그저 올스타전인 만큼 재밌는 경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팬분들이 속상해하시지 않도록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주오가 덧붙여 대답했다. 정하은 아나운서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RAIN 선수. 팬들을 많이 아끼시네요.”
아나운서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주오는 수호의 어깨에 묻은 먼지가 신경 쓰였다. 주오가 거슬림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수호의 어깨를 톡톡 털었다.
수호는 어깨에 닿는 가벼운 손길에 고개를 돌려 주오를 바라봤다. 그러자 주오가 고개를 살짝 숙여 수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수호는 갑자기 훅 다가오는 주오의 얼굴에 놀라 고개를 뒤로 물렸다.
“왜요?”
“아, 먼지 묻었길래. 놀랐어?”
“조금요.”
“미안. 근데 그쪽으로 가면 화면에서 나갈 거야. 이쪽으로 조금만 와.”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옆으로 떨어졌던 수호의 팔을 주오가 살짝 잡아 당겼다. 수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주오의 옆에 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정하은 아나운서가 웃었다.
“RAIN 선수가 SUHO 선수를 많이 챙기네요. 보기 좋은 선후배의 모습인 것 같아요.”
“아, 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수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하은 아나운서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빛냈다. 어딘가 짓궂어 보였다.
“RAIN 선수가 잘 챙겨주시나요?”
인터뷰에서 물어볼 질문은 아닌 것 같았지만, 올스타전이라 그런지 해설진도 아나운서도 정규 시즌보다 한결 편안하게 진행을 하는 듯했다.
“네. 잘 챙겨주세요.”
분명 잘 챙겨주고 있었다. 늦잠을 자면 꼭 깨워주고, 잠이 안 깨서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으면 치약을 쭉 짠 칫솔을 가져다줬다. 그리고 끼니마다 열심히 먹였다. 엄마도 이것보단 덜할 거다.
주오가 해줬던 일들을 곰곰이 떠올리는 수호를 보며 정하은 아나운서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RAIN 선수 같은 선배가 있어서 SUHO 선수도 좋을 것 같네요. 앞으로도 두 선수의 우정을 응원하며 인터뷰는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안녕!”
아나운서가 활짝 편 손을 귀엽게 흔들었다. 주오도 그렇게 인사를 건네고 수호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렇게 인터뷰는 끝이 났다.
카메라 불이 꺼지고 정하은 아나운서가 웃으며 주오와 수호에게 말을 붙였다.
“오늘 경기 정말 재밌었어요. 특히 배론 스틸 정말 멋있었어요!”
정하은이 눈을 빛내며 주오를 올려다봤다. 하얗고 쭉 뻗은 아나운서는 누가 봐도 미인이었다. 그리고 그 아나운서에 대한 소문이 하나 있었다. 그녀가 주오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소문이었다.
카메라가 꺼지자 주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여자였다. 수호는 스태프분에게 마이크를 건네고,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주오가 반듯한 얼굴로 살짝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나운서에게 좋게 봐줘서 고맙다고 말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아나운서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스태프들이 눈치껏 두 사람의 주변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눈치가 없는 수호는 멀뚱히 서서 주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얘기를 하고 있는 주오를 기다려야 하는 건지, 아니면 먼저 가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모르겠으면 물어보면 되겠지.
“형.”
물어보기로 결심을 내린 수호가 주오를 부르자마자 주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무슨 주인 목소리에는 무조건 반응하는 강아지도 아니고. 분명 큰 목소리도 아니고 평소와 같은 크기의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그런데 바로 알아들은 주오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소란스러운 경기장에서 대체 어떻게 바로 들을 수 있는 거지. 김주오는 청각이 되게 좋다. 그게 수호가 내린 결론이었다.
“응, 수호야. 이만 가자.”
주오는 아나운서에게 급하게 인사를 하고 수호에게 달려왔다. 가자고 한 것도 아니었고,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그는 바로 수호의 생각을 눈치챈 듯 걸음을 옮겼다.
수호는 자신의 옆에서 걷는 주오를 보다 힐끔 뒤를 돌아봤다. 아직 대화하고 있던 것 같던데.
고개를 돌리자 정하은 아나운서가 입술을 삐죽이며 주오를 보고 있었다. 저런 표정을 하는 건 또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너무 빤히 쳐다본 모양이었다. 정하은 아나운서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수호가 눈동자를 또로록 굴렸다. 눈 돌릴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수호가 그냥 정하은 아나운서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수호의 인사에 정하은 아나운서가 미소 지어 보였다.
수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주오를 바라봤다. 앞을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주오는 어느새 수호를 보고 있었다.
“수호, 아나운서님이랑 친해?”
주오가 다정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형이 친한 것 같던데요. 아까 대화하시던 거였으면 저 먼저 가도 괜찮았는데.”
수호의 말에 주오가 아, 하는 작은 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안 친해. 그냥 오늘 경기 너무 재밌었다고 하시더라.”
“그런 얘기 하는 게 친한 거 아니에요?”
수호의 기준에선 그랬다. 말이 없는 편이기도 했고, 애초에 낯을 가리다 보니 수호에게는 소소한 얘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친하다는 거였다.
주오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왜 저렇게 기뻐하는 거지.
“그러면 나도 수호랑 친한 거네.”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건가 싶었지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이번 올스타전에서 부쩍 주오와의 관계가 깊어진 것 같긴 했다.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운서님보다는 친하죠.”
“와아, 너무 좋다. 수호랑 나랑 친하다니.”
주오가 정말 활짝, 활짝 웃었다. 어쩐지 발걸음도 경쾌해 보였다. 긴 다리로 방방거리며 가니 걸음이 너무 빨랐다. 수호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백구십이 넘는 주오에 비해서는 작았다.
“형, 너무 빨라요.”
“미안. 너무 기뻐서 순간 들떠 버렸어.”
주오가 다시 걸음을 늦춰 수호의 옆에서 걸어갔다. 그들의 유니폼 등에 적힌 SUHO와 RAIN라는 글자가 나란히 움직였다.
나란히 걷던 수호와 주오는 대기실로 돌아가는 모퉁이를 돌다 바로 앞에서 나타난 외국 선수의 벼락같은 외침에 멈춰 섰다.
[헤이, 수호!]
부름의 당사자인 수호는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앞에 선 외국 선수를 바라봤다. 하얀색과 푸른색이 섞인 유니폼을 보니 북미 선수였다. 기억으로는 BABA 선수였다.
북미에서 최근 떠오르는 신예로 꼽히는 선수. BABA는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수호를 보고 놀라고 좋아하고 있었다.
[진짜 수호다. 진짜 나 정말 네 팬이야. 오늘 경기도 너무 짜릿했어!]
급작스런 부름에 놀란 것도 잠시였다. 정신을 차린 수호가 고개를 꾸벅였다.
[고마워.]
[수호, 지금 바빠? 안 바쁘면 사진 찍어줄 수 있어? 어차피 오늘 경기도 끝났는데 우리 숙소 가서 노는 건 어때? 네 팬인 애들 되게 많아. 어차피 숙소도 같은 호텔이라 상관없을 것 같은데.]
BABA는 흥분한 탓인지 아니면 원래 말이 빠른 편인지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충 무슨 의민지는 알겠는데 확실치가 않았다. 수호가 갸웃거리자 BABA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아, 소리를 냈다.
[천천히 말하면 이해하려나? 우리 숙소 와줄 수 있냐고. 우리 팀에, 수호, 너 팬인 애들이, 되게 많아.]
이번에는 말을 천천히 한 덕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수호는 BABA가 원하는 답을 해줄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곳에 굳이 찾아갈 이유도 없을뿐더러 끝나고 주오와 연습을 해야 한다.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 연습이 있어.]
[호우, 즐기자는 올스타전인데 그렇게 연습을 많이 해? 그래도 연습 때문이면 어쩔 수 없지. 그러면 사진은 찍어줄 수 있어? 나 네 팬이야.]
BABA가 핸드폰을 꺼내는 듯 유니폼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수호는 사진 정도는 괜찮겠다 싶어서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방해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김주오였다.
[미안, 팀원들이 기다려서 가봐야 하거든. 사진은 다음에 찍는 게 어떨까?]
웃으며 말하는 주오로 인해 BABA의 움직임이 멈췄다. BABA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장난스럽게 웃었다.
[사진 찍는데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잖아. RAIN, 네가 수호 팬이라고 들었는데 내 마음도 몰라주고 너무한 거 아냐?]
주오도 미안하다는 듯 BABA를 보고 웃으며 수호의 팔을 잡았다.
[진짜 급해서 그래. 우리 인터뷰 때문에 늦어져서 빨리 가봐야 해. 올스타전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사진은 다음에 찍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래. 네 말대로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 그 대신 그때는 레인도 같이 찍어주기야.]
BABA가 많이 아쉬운 듯 수호와 주오를 빤히 바라봤다. 주오는 그런 BABA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는 수호를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수호, 레인! 오늘 정말 멋있더라! 다음에 우리랑 붙을 때도 재밌게 하자!]
[그래, 다음에 봐.]
[그리고 RAIN! 독점은 나쁜 거야!]
주오는 뒤에서 뾰로통한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는 BABA를 돌아보고 웃었다. 수호는 얼떨결에 주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우리 그렇게 급했어요?”
“아니? 아직 연습까지 여유 있어.”
근데 대체 뭐가 바쁘다는 거지. 수호는 주오에게 잡힌 팔을 살살 흔들었다. 그 덕에 수호를 잡고 있던 주오의 팔까지 흔들렸다.
“아. 계속 잡고 있었네.”
주오는 이제 기억난 척 수호의 팔을 놨다. 수호와 주오는 다시 나란히 걸어 나갔다. 수호는 여전히 주오가 바쁘다고 했던 게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의문스런 눈으로 주오를 바라봤다.
“근데 왜 바쁘다고 했어요?”
“수호, 네가 불편해할까 봐.”
“사진 정도는 괜찮은데.”
“그래? 그게 정말이면 나 마음이 아플 것 같아, 수호야.”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수호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보자 주오가 눈가를 축 내렸다. 가슴에 손을 얹은 그가 옛 기억을 되돌아보는 듯 얼굴이 점점 시무룩해졌다.
“……주오 형?”
수호는 또 이 형이 왜 이러나 싶었다. 멀쩡하다가 꼭 이렇게 사람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상해질 때가 있었다. 진짜 이상한 형이다.
그 이상한 형인 김주오가 야속하다는 듯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야 전에 내가 사진 찍어달라고 했을 때 기억 안 나?”
“사진이요?”
그런 적이 있었던가. 오래 묵은 기억을 하나둘 퍽퍽 파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오가 말하는 그날의 기억이 번뜩 떠올랐다.
그때는 수호가 데뷔하고 반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당시 주오와 수호는 지나다니면서 인사만 했을 뿐 딱히 친분도 없었고, 대화조차 나눈 적 없는 사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김주오가 갑자기 수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수호야.’
수호는 주오와 대화는 해본 적 없었지만, 김주오는 익히 알고 있었다. 정말 유명한 선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물로 그를 처음 봤을 때 수호는 정말 사람이 너무 잘생기면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는 걸 처음 알았다.
김주오는 보고 있으면 괜히 긴장하게 되고 초조해지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다가와서 말을 걸었을 때 수호는 당황했다.
‘왜요?’
하지만 감정이 표정에 잘 드러나지 않는 수호는 여전히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후배라는 게 참 어렵고 말이 많았던 시절이었기에 수호의 말투와 표정이 선배들에게는 참 고깝게 보였을 때였다.
‘너 말이 좀 짧다?’
‘인기 많으면 좋구나. 싸가지가 없어도 되고.’
주오와 함께 있던 팀원들이 바로 인상을 찡그렸다. 수호는 자신의 어떤 점이 그렇다는 건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불러서 대답한 게 죄인 건가.
수호가 생각에 빠진 사이 주오가 굳은 얼굴로 두 사람을 돌아봤다.
‘너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때 주오가 등을 돌리고 서서 그의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다른 선수들의 사색이 된 표정을 보면 꽤나 무서운 얼굴을 했었나 보다.
‘아니, 그냥 대답하는 게 너무 널 무시하는 것 같아서…….’
선수 중 한 명이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다시는 어디 가서 그렇게 말하고 다니지 마. 처음으로 너네랑 같은 팀이라는 게 창피하다.’
‘야, 그래도 말이 좀 심한 거 아니야?’
기분이 상했는지 말을 더듬었던 남자가 눈을 매섭게 뜨고 주오를 노려봤다. 주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말이 심하게 느껴졌다는 게 신기하네. 어쨌거나 수호한테 할 말 있으니까 먼저 가 있어.’
‘하, 그래. 얘기 잘 나누고 와라.’
남자는 기분이 상한 듯 팽 돌아 가버렸다. 다른 선수가 주오를 흘긋 보더니 이내 성이 난 선수를 따라나섰다. 수호는 눈앞에서 목격해 버린 타 팀의 불화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만 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 주오가 갑자기 뒤를 돌았다. TV에서 봤던 그 여유로우면서 다정한 미소를 짓고는 주오가 입을 열었다.
‘우리 팀 애들이 말을 심하게 했지? 미안해, 수호야.’
‘괜찮습니다.’
애초에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고, 그리고 사과를 해야 한다면 그건 김주오가 아니었다. 수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주오가 어색하게 웃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 듯 그의 입가가 움찔했다.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가볼게요.’
‘아! 아니야. 할 말 있어.’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수호를 주오가 다급히 불렀다. 수호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다. 주오가 급한 마음에 잡은 모양이었다.
그때 수호는 알 수 있었다. 김주오라는 사람이 정말 부담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그냥 보고 있어도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데 이렇게 닿고 있으니까 더했다. 그 느낌이 싫어 눈가를 살짝 찡그리자 주오가 다급히 손을 떼어냈다.
‘함부로 잡아서 미안해.’
‘아니에요. 그런데 할 말이 뭔데요?’
‘아, 별건 아니고 그냥 수호랑 같이 사진 찍고 싶어서. 괜찮을까?’
주오가 살긋 웃었다. 눈매가 둥글게 말리고 입가를 시원하게 뻗어 올라가는 그 미소를 보던 수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진 찍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죄송합니다.’
‘……그래? 아쉽다. 수호랑 같이 사진 찍고 싶었는데.’
작게 중얼거린 주오가 갑자기 어디서 생겨난 건지 모르겠지만 사인지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수호를 향해 쭉 내밀었다.
‘그러면 사인은 괜찮을까?’
부담스럽게 자신을 보며 반짝이는 주오의 눈에 수호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사인 정도는 괜찮을 것 같기에 주오에게서 펜을 건네받았다. 펜 뚜껑을 뽁 따서 사인지에 직직 선을 그렸다.
주오에게 건네자 그가 사인지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사인 고마워, 수호야.’
그게 주오에게 건넨 첫 번째 사인이었다.
떠오른 옛 기억에 수호의 입술 사이로 작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주오는 이제 기억났냐며 시무룩한 얼굴로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는 머쓱해졌다.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곤란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냈다.
주오는 진심으로 시무룩해하고 있었다. 수호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변명하고, 없던 말을 하는 건 성격에 맞지 않았다.
“나는 그 뒤로 수호한테 그런 얘기도 못 했었는데…….”
“죄송해요.”
수호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주오를 살폈다. 주오는 괜찮다며 미소를 지었지만, 역시 울적해 보였다. 주오는 정말 밉다는 듯, 그렇지만 네가 너무 좋아서 원망은 못 하겠다는 듯 눈동자가 여러 빛으로 반짝였다.
말간 주오의 눈빛에 수호가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보고 있자니 묘한 눈이었다. 미안해지고, 또 초조해지는 그런 눈.
“내가 얼마나 수호랑 사진을 찍고 싶었었는데. 역시 내가 불편한 걸까? 지금도 불편해?”
말을 잇는 주오의 음성에서 씁쓸함이 묻어났다. 이게 아닌데. 수호는 당황스러웠다. 수호는 당황해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그때 왜 나한테는 사진 안 찍어줬었어?”
“그게…….”
수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됐다. 수호가 시무룩한 눈으로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주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때 그의 부탁을 거절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형 얼굴이 너무 부담돼서요.”
“……응?”
주오는 수호가 조심스럽게 꺼낸 대답에 얼이 빠진 얼굴을 했다. 이런 비슷한 얘기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기억을 더듬으며 주오의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았다. 이내 기억해 냈는지 주오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수호, 전에 나한테 했던 말 기억해?”
“어떤 말이요?”
“내 얼굴이 부담스럽다고, 그래서 쳐다보지 말라고 했던 말.”
주오의 말에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쳐다보지 말라고는 했던 적이 있었지만, 부담스럽다고 말한 적은 없었는데. 언제 자신의 마음이 들킨 건가 싶어 수호가 경계 어린 눈으로 주오를 바라봤다.
멍한 수호의 눈이 미심쩍게 빛나자 주오가 웃었다.
“회식 다음 날 아침 먹으면서 그랬어. 잠에서 덜 깬 것 같았는데 그래서 기억 못 하나 보다.”
“제가 그랬다고요?”
수호는 정말 당황했다. 자신이 잠에서 잘 못 깨는 타입인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런 식으로 직접적으로 말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수호는 숨겨왔던 진실이 까발려졌다는 사실에 놀라 입을 벙긋거렸다.
주오는 유난히 놀라 굳은 수호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수호는 깜짝 놀라는 일은 있어도 이런 식으로 놀라는 일은 극히 적었다. 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는 게 흥미로운 듯 주오의 눈이 반짝였다.
“수호는 내 얼굴이 그렇게 부담스러워? 나 어디서 그런 말 들어본 적 없는데.”
주오 입장에서도 수호의 그 말이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 평생 살면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잘생겼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부담스럽다는 소리는 전혀,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말을 수호에게 들었을 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주오는 부담스러운 인상의 사람도 아니었다. 쌍꺼풀이 짙은 것도,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부담스러운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주오는 수호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대체 어디가? 거울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수 없었다. 주오는 어서 수호가 입을 열어 그 답을 알려주길 기다렸다.
수호는 곤란해서 눈가를 살짝 찡그린 채 입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작게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요?”
수호가 되물었다. 꼭 주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처럼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수호 입장에선 정말 거짓말 같았다. 대체 저 얼굴이 어떻게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있다는 건지.
키는 무식하게 크면서 얼굴은 또 무식하게 작았다. 그 작은 얼굴에 요목조목 들어찬 눈코입이며, 웃을 때 부드럽게 휘는 눈매 하며, 어떻게 봐도 똑바로 보기 부담스러운 얼굴이었다.
“응, 한 번도 없었는데.”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거짓말이에요.”
“정말 아닌데.”
갑자기 실랑이가 시작됐다. 이게 대체 뭐라고 이렇게 믿지 못하는 건지 주오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수호는 그 웃음이 꼭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았다. 수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렇게 생겨서 그런 말을 안 들어봤을 리가 없어요.”
“내가 어떻게 생겼는데?”
억울하다는 듯 수호의 음성이 높아졌다. 주오는 태평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수호가 보는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길래 저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지 너무 궁금했다. 수호는 입을 달싹이다 이내 주오를 바라보며 내뱉었다.
“너무 잘생겼잖아요.”
“응?”
주오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서 저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부담스러운 이유가 잘생겨서? 멍하니 사고회로를 굴리던 주오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입장에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귀여울까. 주오는 당장에라도 수호를 껴안고 이곳저곳에 뽀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수호는 자신을 몽글몽글 따뜻한 빛으로 바라보는 주오의 눈을 보고 눈가를 찡그렸다.
“형은 너무 잘생겨서 부담스러워요.”
“그래서 나랑 같이 사진 찍기가 싫었던 거야?”
“……네.”
수호가 고개를 돌렸다. 답을 해줬으니 이제 말을 더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주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긴 다리로 훌쩍 다가와 수호의 앞을 막았다.
그 부담스러운 얼굴로 그는 싱긋 웃고 있었다. 시원하게 올라가는 양쪽 입꼬리와 부드럽게 휘는 그의 눈매가 정말이지 사람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수호야, 그거 칭찬이지?”
즐거운 듯 싱글벙글 웃는 주오가 얼굴을 쭉 들이밀었다. 수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쭉 뺐다.
“얼굴 치워주세요.”
“왜, 부담스러워서?”
“알면서 왜 물어봐요. 너무 가까워요.”
“그래도 이제는 나랑 사진도 찍어주고, 대화도 해주고 하는 거 보면 전처럼 불편하진 않나 보다.”
그건 그렇다. 그의 얼굴 자체가 부담스러운 건 변함없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편하긴 했다. 보고, 보고, 또 보니 조금쯤은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면 처음 그를 봤을 때처럼 온몸에 털이 바짝 솟았다.
주오는 오랜만에 수호의 경계 어린 눈빛을 보고 빙긋 웃었다. 그래서 자신을 볼 때마다 이런 눈을 했었던 거였구나. 이제야 납득이 갔다.
“불편해요.”
“거짓말.”
“거짓말 아니에요.”
“이제는 우리 친하잖아.”
“……그건 맞는데.”
수호가 걸음을 뒤로 물리며 주오와 거리를 벌렸다.
“그런데 내가 부담스러워서 피하고 싶을 만큼 잘생겼어? 보통 잘생기면 좋아하지 않나?”
“저는 아니에요.”
주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잘생긴 사람은 다 싫어해? 예를 들면 연예인이라든가.”
수호는 명쾌하게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아니요.”
너무나 가볍게 흐르는 수호의 답변에 주오의 고개가 한 번 더 갸웃했다. 꼭 그게 ‘그런데 왜 나만 불편해해?’라고 묻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수호의 예상이 맞았는지 주오가 수호의 생각과 똑같은 질문을 해왔다.
“그런데 왜 나만 불편해해?”
이 질문에는 수호도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그 이유는 자신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수호는 그 이유를 찾고 싶어 주오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봐도, 봐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째서 김주오만 보면 묘하게 긴장되고, 초조해지는지를.
“저도 몰라요.”
“그걸 수호가 모르면 어떡해. 알아야 수호가 불편하지 않도록 조심이라도 할 텐데.”
주오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마스크라도 쓰고 다닐까? 그러면 얼굴이 안 보이잖아.”
주오는 자신의 얼굴 때문에 수호가 불편해하는 거라면 가리고 다닐 생각도 충분히 있었다. 그러면 지금보다 조금 더 수호와 가까워지지 않을까. 주오는 초조한 마음으로 수호의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만 불편하면 될 걸 형이 왜 가려요.”
“그래도 수호가 불편해하니까.”
급격하게 시무룩해진 주오가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는 그 말간 눈망울에 움찔했다. 정말 불쌍해 보이는 눈망울이다.
“됐어요. 예전만큼 불편하진 않으니까. 이제는 가끔만 긴장돼요.”
“응? 긴장?”
주오는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싶었다. 부담에서 긴장으로 수호의 주제가 변했다. 수호는 주오와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그냥 형 보면 긴장돼요. 그래서 부담스러웠던 건데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예전만큼 긴장은 안 되더라고요.”
수호의 말에 멍해진 주오의 입에 벌어졌다.
긴장된다. 긴장.
자신만 보면 긴장된다는 말에 주오가 놀란 눈을 깜박이며 수호를 내려다봤다.
보는 순간 긴장하게 만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주오의 기준에서는 딱 두 분류가 있었다.
무서운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
과연 수호에게 자신은 어떤 의미일까.
주오는 뒤죽박죽 혼란스러워졌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그런데 아니면 어쩌지 하는 불안함도 함께 차올랐다. 주오의 마음이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수호는 자신이 한 말이 주오에게 어떤 번뇌를 가져다줬는지 모른 채, 그저 평소와 같이 뚱한 얼굴로 주오를 보고 있었다. 그 말간 얼굴에 복잡해진 건 주오의 마음뿐이었다.
“수호는 너무 어려워.”
“……?”
수호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눈을 해 보였다. 수호 입장에선 주오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속을 잘 모르겠는 사람.
“저는 형이 어려워요.”
“그래서 긴장돼?”
“글쎄요. 그것보다 빨리 가야 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기다릴 텐데.”
복도 한복판에서 실랑이를 벌이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자는 말에 주오가 아쉽다는 듯 눈매를 내렸다.
“나는 수호랑 둘이서 더 놀고 싶은데. 수호는 싫어?”
또 시작이네. 수호가 주오를 힐끔 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매정한 수호의 걸음에 주오가 애달프게 소리를 질렀다.
“수호야, 같이 가!”
“놀고 싶으면 혼자 놀다 오세요. 저는 연습 갈래요.”
“수호 연습하려면 나랑 같이 해야 하잖아. 오늘 이인삼각 연습하기로 했던 거 기억 안 나?”
다갈색 머리칼을 팔랑거리며 주오가 달려왔다. 자신의 옆까지 도달하기까지 다섯 걸음도 안 걸린 것 같았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수호가 옆에서 열심히 자신을 쫓아오는 주오를 보며 입을 열었다.
“기억나요. 그런데 형 어릴 때 뭐 먹었어요?”
“응? 글쎄. 그냥 주는 대로 먹은 것 같은데. 왜?”
주오는 뜬금없는 수호의 질문에 눈동자를 한 바퀴 돌리며 생각하고는 이내 싱긋 웃었다.
“왜 그렇게 키가 크나 해서요.”
“아아, 조금 크긴 하지.”
백구십이 넘으면서 조금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했지만, 주오는 그렇게 느끼는지 못하는 듯했다.
“우리 집은 사람들은 다 키가 커.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걔는 나보다 더 커.”
“형보다요?”
주오보다 더 크다는 말에 수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주오가 그런 수호를 귀엽다는 듯 내려다봤다.
“그래서 징그러워.”
주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동생을 생각하며 짓궂게 웃는 주오가 신기했다. 늘 어른스러운 이미지였는데 가족 얘기가 나오니 뭔가 어린애 같아졌다.
“신기하네요.”
“뭐가?”
“형이 그렇게 웃는 게 신기해서요.”
“내가 어떻게 웃었는데?”
“음, 청개구리같이?”
수호의 답변에 주오가 웃음을 터뜨리곤 수호의 작은 머리통을 슥슥 쓰다듬었다.
수호는 갑자기 닿는 주오의 손길에 놀라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생각 없이 수호를 쓰다듬었던 주오도 눈이 커졌다.
“어……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귀여워서 그만.”
“형은 제가 귀여워요?”
“응, 엄청 귀여운데.”
“형, 이상해요.”
수호는 살면서 귀엽다는 말을 부모님 이외의 사람에게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늘 자신을 보면서 사랑스러운 무언가를 보듯 눈을 반짝이는 주오가 신기했다. 대체 자신의 뭘 보고 귀엽다는 걸까.
“수호가 이상한 거야. 왜 본인이 귀여운 걸 모르지?”
“……형 진짜 이상해요.”
주오의 주접질에 수호가 고개를 홱 돌렸다. 언뜻 수호의 입가가 떨리는 것 같았다. 주오는 싱글싱글 웃으며 종알종알 계속 말을 이었다.
귀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연습실까지 가는 그 길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