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40)

* * *

주오는 침대에 누워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수호는 핸드폰을 쥔 채 하루 종일 웃음을 잃지 않는 주오를 보며 ‘저렇게 계속 웃으면 얼굴근육이 아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입꼬리에 경련이 올 것 같은데도 주오는 여전히 시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화면에서 뭘 발견했는지 그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싹 지워졌다. 무슨 욕설이라도 본 걸까. 듣기론 김주오는 악플에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러면 저 심각한 얼굴은 무엇 때문일까.

수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갑자기 주오가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수호와 주오의 시선이 마주쳤다. 놀라서 눈을 깜빡거리던 수호는 뒤늦게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적에게 치명타를 맞은 것만 같은 이 느낌. 고개를 돌리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비비적거리고 있자, 주오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수호야, 수호야.”

또 살금살금 다가온 주오는 어느새 수호 바로 뒤쪽에 서 있었다. 진짜 사람 놀래기 선수인 것 같다. 수호는 이럴 때마다 경계심이 쭈뼛 솟았다.

“왜요?”

“있잖아…… 수호한테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을까 해서.”

주오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이번 분명 거절할 것 같은데. 딱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호는 평소보다 유독 더 조심스러운 주오의 음성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에는 이 형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다.

“뭔데요?”

주오는 손에 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는 수호를 똑바로 바라봤다.

제발 쳐다보지는 말아달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같은 방에서 지내면서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역시 주오가 이렇게 눈을 똑바로 마주칠 때면 수호는 도망가고 싶어졌다.

수호가 순간 움찔하는 걸 눈치챘는지 주오가 시선을 살짝 피하며 웃었다.

“우리가 같은 방도 쓰고, 예전보다 대화도 많이 하고, 사진도 같이 찍고 그랬잖아?”

“그랬죠.”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인 거지. 고개를 갸웃하는 수호에게 주오가 갑자기 활짝 웃었다.

“핸드폰 번호 알려줄 수 있어?”

“……네?”

결론이 왜 그렇게 나는 걸까. 아니, 애초에 왜 이걸 묻는데 그렇게 조심스러운 걸까. 김주오라는 사람은 하나부터 열까지 물음표 투성이였다.

수호가 다시 고개를 갸웃하자 주오가 초조한 얼굴을 하며 다급히 말을 이었다.

“수호, 너랑 연락하고 싶어.”

“왜요?”

같은 방에 있고, 이미 충분히 대화도 하고 있는데 굳이 핸드폰으로 연락할 필요가 있는 걸까. 수호가 내린 답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왜긴……. 수호랑 더 대화하고 싶어서?”

수호는 정말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화를 더 하고 싶은데 굳이 핸드폰이 왜 필요하나. 같은 방에서 핸드폰으로만 연락하고 싶다는 걸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같은 방에 있는데 왜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요? 금언게임이에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묻는 수호를 보는 주오의 입이 벌어졌다.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이해하지 못한 멍한 얼굴이었다. 수호는 눈치가 없는 편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지만, 수호 본인은 모르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김주오는 수호가 정말 눈치가 없다는 걸 새삼 다시 깨달았다. 명확하게 말해줘야 알아듣는구나. 주오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연락하고 싶다는 건 올스타전이 아니고 한국으로 돌아가서야. 수호, 너랑 잘 지내고 싶어. 혹시 부담되면…… 안 알려줘도 괜찮아.”

부담된다면 깔끔하게 물러나겠다는 주오의 얼굴은 말과 다르게 씁쓸함이 흘러넘쳤다. 비 맞은 강아지 같았다. 크기만 보면 강아지는 절대 아니었지만.

수호는 주오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손을 내밀었다. 주오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수호의 손을 보고 놀란 듯 눈을 깜빡거렸다. 이게 뭘까 싶은 얼굴. 잠시 멍하니 있던 주오는 갑자기 자신의 손을 수호의 손 위에 올려놨다.

이번에는 수호가 이게 뭘까 싶은 얼굴을 했다. 두 사람은 서로 겹쳐진 손을 바라봤다.

“……형, 손 말고 핸드폰이요.”

“아, 여기.”

주오는 수호의 말에 작은 탄성과 함께 손을 거둬갔다. 그리고 사진 찍었을 때 보였던 미소보다 더욱 감격에 젖은 얼굴을 해 보였다.

수호는 조심스럽게 손 위에 얹어진 주오의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번호를 누르려던 수호는 먼저 보이는 배경화면 때문에 손가락이 멈칫했다.

낮에 찍은 사진이 어느새 주오의 배경화면이 되어 있었다.

“잘 나왔지? 생각보다 감독님이 사진을 잘 찍으셔. 제라드에서 워크숍 갈 때도 선수들 사진 찍어주시거든.”

“그러네요. 그런데 배경화면까지 하실 줄은 몰랐어요.”

보통 팬이라 해도 배경화면으로까진 잘 안 하지 않나? 수호는 이렇게 자신이 배경화면으로 되어 있는 팬의 핸드폰을 본 건 처음이라 얼떨떨했다.

“많이 좋아하니까.”

주오의 낮고 다정한 음성이 평소와 똑같지만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뭔가 미묘했다.

수호는 시선을 들어 주오를 바라봤다. 주오는 그를 닮은 시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과 입을 부드럽게 휘며 웃는 그의 미소는 참 따뜻해 보였다.

수호는 사람들이 왜 주오를 좋아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멍하니 주오를 보던 수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시선을 내려 전화번호를 찍었다. 콕콕 0, 1, 0, 9……. 순서대로 번호를 눌러가는 수호를 보며 주오가 작게 속삭였다.

“나는 수호가 거절할 줄 알았어.”

주오의 말대로 수호도 며칠 전이었다면 분명 거절했을 것이다. 분명 그랬을 거다. 수호는 번호를 찍은 핸드폰을 주오에게 건넸다.

“저도 몰랐는데 저는 형이 마음에 들었나 봐요.”

그랬으니까 지금은 생각이 달라진 거겠지. 여상하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뱉어낸 수호는 힐끔 주오를 바라봤다. 주오는 마치 메두사와 눈이 마주쳐 돌이 되어버린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형?”

수호의 부름에 주오가 정신을 차렸는지 흐려졌던 눈동자가 선명해졌다. 주오가 웃었다. 어떻게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어색한 미소였다.

“고마워. 마음에 들어해 줘서.”

부끄러워하면서도 기쁜, 그런 감정이 한껏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수호는 듣고 있으려니 자신마저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낯설어하는 수호는 어떻게 해야 하나 눈을 도로록 굴렸다.

수호에게는 다행이라 해야 할지, 때마침 이 묘한 분위기를 깨듯 초인종이 울렸다. 적막을 깨고 날카롭게 날아든 소리에 수호와 주오의 고개가 돌아갔다.

닫힌 문에서 감독인 이진형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오야, 수호야.”

“감독님 오셨나 봐요.”

수호가 주오를 힐끔 바라봤다. 주오는 어느새 평소 같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긴 다리로 훌쩍 문으로 다가간 주오가 문을 열자 진형이 눈인사를 건네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잘들 쉬고 있었어?”

“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연습 시간까지 아직 남았는데.”

진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 때문 아니고 올스타전 마지막 날 있는 이인삼각 알지?”

“아아…….”

진형이 찾아온 이유를 파악한 주오가 미소를 지었다. 올스타전에서 치러질 경기 중 유일하게 그것만 출전 선수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눈치 빠른 주오의 반응에 진형이 허허 웃었다.

“주오, 내가 왜 이 방에 왔겠어?”

이진형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수호를 바라봤다. 시선의 주인공이 된 수호는 알 수 있었다. 이인삼각에서 주오의 파트너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유독 이번 올스타전에서 그와 많이 엮이는 것 같다. 그 전에 있었던 올스타전에서는 운명의 장난인 것처럼 두 사람이 합을 맞출 일이 없었다. 그때는 기껏해야 연습실에서 리그별로 진행되는 게임이 전부였다.

“수호랑 주오랑 같이 나가게 됐으니까 둘이 연습 잘 해봐라. 이번에 주최 측에서 야심차게 만든 이벤트전이니까 좋은 모습 보여줘야지.”

“알겠습니다.”

“방법은 한 명이 키보드만, 한 명이 마우스만 움직이는 거야. 그리고 키보드 담당은 눈을 가리고, 마우스는 귀에 헤드셋 씌운다더라.”

괴상한 룰이었다. 눈이랑 귀는 왜 막는 건지. 수호와 주오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두 사람을 보는 진형이 표정 풀라는 듯 허허 웃었다.

“뭐 서로 마음이 얼마나 잘 맞는지가 중요하다는 거겠지. 키보드 하는 선수는 눈이 안 보여서 마우스 맡은 애가 시키는 대로 타이밍 잘 맞춰서 스킬을 써야 하고, 마우스 하는 선수는 키보드 맡은 애가 무슨 말을 하든 못 들으니까 알아서 키보드 선수의 호흡에 맞춰서 잘 공격하라더라. 여튼 호흡 안 맞춰보고 경기 나갔다가 난리만 날 것 같으니까 잘 준비해 놔. 다른 리그 녀석들도 연습 많이 한다는 것 같으니까.”

“번거로운 규칙이네요.”

“팬들 입장에선 재밌겠지. 늘 잘하는 선수들이 둘이서 아웅다웅하면서 실수투성이로 게임하면 친근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할 테니까.”

올스타전 의의는 ‘모두가 즐겁게’였다.

정규 시즌의 프로 경기들은 팬들이 따라 할 수 없는 플레이가 많았다. 보는 사람도 긴장하게 되는 플레이가 난무하는 정규 리그에서 벗어나 선수와 팬 모두가 신나게 즐기자는 게 올스타전이었다. 그래서 선수들도 올스타전에서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플레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연습은 별개의 문제였다.

“오늘부터 연습해 볼게요.”

“그래그래.”

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오는 수호를 바라봤다.

“키보드 할래, 마우스 할래?”

“전 뭐든 상관없어요.”

“그러면 내가 마우스 해도 될까?”

웃으며 묻는 주오를 보며 수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는 뭐든 괜찮았다.

“그렇게 하세요. 제가 키보드 할게요.”

“다 정해졌으니까 나는 그럼 가보마. 조금 있다 연습 때 보자.”

“안녕히 가세요.”

이진형이 손을 흔들며 방을 나섰다. 진형이 나가는 걸 바라보던 주오가 수호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 * *

연습 시간이 되자 연습실로 사람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늘 시끌벅적한 음성과 함께 등장하는 막내, 지한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왔어?”

“언제나 레인 형이랑 수호 형은 빨리 와 있네요.”

수호는 지한에게 멍한 정신으로 손을 흔들었다. 주오는 시간 약속에 늦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방을 쓰는 수호도 주오에게 이끌려 늘 두 사람이 제일 빨리 연습실에 도착했다.

하지만 수호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주오는 연습실에 오기 전에 침대에서 도롱도롱,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수호를 열심히 흔들어 깨웠었다. 그때도 수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웅얼거렸다.

‘졸려요……. 형, 나 졸려.’

‘그래. 우리 수호 세수하자.’

유치원생 학부모도 아니고 주오는 수호를 직직 끌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수를 시켜주는 것까지 완벽한 학부모의 모습이었다.

꾸역꾸역 수호를 끌고 연습실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수호는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었다.

졸린 채로 주오에게 끌려온 수호는 여전히 볼을 문질거리며 잠을 깨려 했다. 하지만 요망한 꿈의 노예인 수호는 정신을 못 차렸다.

“뭐야, 수호 왜 저래?”

지한과 함께 등장한 재인이 병든 닭처럼 고개를 꾸벅거리는 수호를 턱으로 가리켰다. 지한도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졸리신가 본데요?”

“뭐야, 왜 입구를 막고 있어요?”

뒤로 나타난 은기까지 합세해서 의아한 눈을 했다. 시선의 주인공인 수호는 여전히 고개를 꾸벅거리고 있었다. 그걸 발견한 은기가 피식 웃었다.

“이수호, 정신 차려라.”

조은기가 막 자판기에서 뽑아 차가운 콜라 캔을 수호의 뒷목에 갖다 댔다. 예상치 못한 서늘한 기운에 수호가 벌떡 눈을 떴다.

“차가워.”

“막 뽑아 왔으니까 차갑겠지. 이거라도 마시면서 잠 깨라.”

조은기가 수호에게 캔을 건넸다. 수호는 받아 든 캔을 땄다. 시원한 소리와 함께 탄산이 톡톡 터졌다. 목을 타고 흐르는 따끔따끔한 느낌에 수호의 눈이 점점 활기를 찾아갔다.

“좀 깬다.”

“그러면 다행이고. 나는 다시 자판기 갔다 와야겠다. 저 잠깐 다녀올게요.”

“다녀오세요!”

“올 때 나도 한 개만 부탁해.”

재인의 말에 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침 은기가 나가려던 문으로 진형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 와 있네. 연습 슬슬 시작할까.”

“저, 음료만 뽑고 올게요.”

“빨리 와라.”

“알겠어요.”

은기는 입술을 쭉 내밀며 연습실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은기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진형이 입을 열었다.

“자, 올스타전이라고 해도 리그별 매치가 있으면 당연히 우승을 노려야겠지? 오늘 북미와 유럽전에서 유럽이 이겼다는 건 다들 알고 있겠고. 우린 북미, 유럽, 중국 다 이긴다는 생각으로 연습해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1대1 매치, 포지션 변경 매치, 이인삼각에 나가는 선수들은 정규 연습 시간 끝나고 따로 시간 줄 테니까 그때 연습하고!”

“네에!”

지한이 큰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쁨받는 타입이었다. 묵묵히 지한을 보던 수호가 시선을 돌려 진형을 바라봤다.

“감독님, 이인삼각은 누가 나가요?”

재인이 손을 들고 묻자 진형이 눈짓으로 주오와 수호를 가리켰다.

“저 둘.”

“아아, 아쉽네요.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재인의 말에 지한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니까요. 저도 해보고 싶었는데 아쉬워요.”

“아쉬우면 내년에 나가면 되지.”

여상한 진형의 말에 올스타전 단골인 재인은 웃고 말았지만 지한은 펄쩍 뛰었다.

“전 내년에 못 올지도 모르는데!”

지한이 슬프게 말하자 은기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슬퍼하지 마. 신인인데 바로 여기 뽑힐 정도면 잘하는 거니까. 지금처럼만 하면 내년에도 올 수 있을 거야. 작년에 왔던 두유 형도 포지션 변경했으니까 경쟁자도 줄었잖아.”

은기의 위로를 들으며 지한이 눈을 반짝였다. 꼭 오고 말겠다고 다짐하는 눈을 보면서 은기가 웃었다.

“맞아요……. 근데 두유 형은 왜 포변했대요? 탑 되게 잘했었는데.”

지한이 물음과 함께 두유(DOYOU), 박선우와 같은 팀에 있는 수호를 바라봤다. 선우와 친하지 않은 은기도 궁금하다는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수호는 갑자기 자신에게 날아든 시선에 눈을 깜빡이다 입을 열었다.

“탑은 질렸대요. 맨날 앞에 서서 두드려 맞는 거 싫다고 하던데요.”

“음? 하하하, 그게 뭐야.”

수호의 간략한 답변에 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한도 같은 탑 라이너로서 어느 정도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포지션 변경해서 간 서폿도 탱커만 하시는 것 같던데.”

은기의 말에 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폿만 몇 년째 하고 있는 재인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뭔가 느낌이 다르긴 하지.”

“하긴 탑에서 탱커 하면 맞는 게 일이니까요.”

서폿이 탱커를 한다 해도 시야를 밝혀줄 와드와 팀에게 필요한 아이템들을 사면 탱템(방어력과 마법방어력 아이템)을 완벽하게 구매하긴 힘들었다. 그래서 제일 많이 맞는 사람을 고르면 보통 탑이었다.

“러쉬, 너도 내년엔 올스타전 오려면 더 노력해야겠다.”

주오의 한마디에 재인이 묘한 웃음을 흘렸다. 정재인은 그저 올스타전에 뽑혀서 참가하는 것뿐이지, 꼭 참가하고 싶어 하는 타입은 아닌 듯했다.

올스타전에 큰 의미를 안 두는 건 박선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서로가 되길 바라고 있을지도 몰랐다.

재인이 선우와 비슷한 점이 많아 보인다고 생각하던 수호는 짝, 하는 큰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하, 이놈들 감독을 앞에 두고! 어쨌거나 주오랑 수호가 나가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이제 연습들 해라.”

“앗, 네!”

여전히 지한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진형의 말이 끝나자 다들 자신의 자리로 가서 준비하고 있던 중국 팀과의 게임을 시작했다. 요즘엔 중국보다 유럽 리그가 더 강하다곤 하지만, 한국과 늘 라이벌이었던 중국도 무시할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는 한국 팀 CKR리그의 승리였다.

* * *

[게임/65132] 아, 진짜 김레인x이수호 주식 떡상 중

[김주오] [사진]

올스타전에서 수호랑 단둘이!

이게 성덕이라는 걸까요? :)

└ [레인동자: 레인 형 진짜 성덕됐네요ㅋㅋㅋ]

└ [플딱이: 둘이 같은 방 쓰더니 친해졌나봐.]

└ [주오수호응원해: 어떡해요. 제가 다 감동했어요bbbb]

└ [iiiiillilili: 수호와 뜨거운 사랑하길...]

└ [만년실버: 진짜 나 남잔데 이렇게 남자 둘 응원해보기는 처음임. 둘이 진짜 보기 좋음.]

└ [응원합니다: 이참에 번호도 물어보세요!!]

위에 글은 오늘 김레인 인xx에서 캡쳐해 온 거임.

근데 진짜 이번 올스타 때 얘네 주식 존나 돌았는데? 그때 피플이 방송 켰을 때도 둘이 같이 앉아 있더니만 진짜 친해졌나 봄.

시발 어떡하냐 진짜. 2d는 짜릿해도 3d는 별로 안 땡겼엇는데 진짜 어쩌다가 얘네 알게 된 뒤부터 진짜 얘네 영상, 썰 올라오면 나 미칠 거 같음 ㅠㅠㅠㅠ

근데 이래놓고 나중에 김레인 여자친구 생겼다고 뜨고 그러면 나 진짜 울 것 같아. 이수호 빠는 거 개진심으로 보이는데 알고 보니까 진짜 팬심이었던 거면 어쩌지?

진짜 내 믿음 배신 안 했으면... 나처럼 레인x수호 빠는 애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 진자 아까 이거보고 나 현기증 났잖아 ㅜㅜ 4년을 응원했는데 진짜 주오 혼자 일방적이었어서 나 솔직ㅎ히 이쯤 햇으면 탈덕해야되나 싶었는데 오늘 저 사진 보고 그런 생각했던 내 뺨 치고 싶었음.

└ ㄱㅆ: 진짜ㅠㅠ 둘이 너무 잘 어울리지 않음? 김주오 웃는 것 봐. 너무 진심이잖아ㅠㅠ

└ 진짜 이번 올스타 때 둘이 같은 방이라더니 그래서 친해졌나봐!! 얘네 좋아하면 이 영상도 봤나?

https://youtube,com/watch?v=AVSATRA10a 예전에 김주오 스트림 방송에서 수호 언급했던 건데 진짜 너무 귀엽거든... 우리 오빠 이수호 얘기만 나오면 하찮아지잖아ㅠㅠ

└ ㄱㅆ: 헐 진짜 너무 고마워ㅠㅠㅠ 수호 얘기할 때 웃는 것 봐 진짜 너무 좋음!!

└ 이수호 저렇게 웃는 거 보기 진짜 힘든데 여기서 보네;; 김주오랑 진짜 친해진 듯?

└ 나도 월챔 우승컵 들 때랑 가끔 주이 사무국에서 영상 올려주는 거에서 가끔 본 듯.

└ 222 이거 찐이다.

└ 근데 진짜 객관적으로 만약 둘이 사귄다고 하면 진짜 괜찮음?

└ 난리날걸?

└ 이번에 수호 주이랑 계약 끝나는 걸로 아는데 어디 갈지가 개궁금함. 내가 알기로 김레인은 제라드 계약 1년 남은 상황인데 만약 이수호가 제라드 가면 진짜 개꿀잼일 듯.

└ ㄱㅆ: 진자 너무 좋아. 거기서도 둘이 같은 방 썼으면bbbb

[게임/65941] 얘네 공식 된다에 내 모든 걸 건다.

[사진]

[사진]

[사진]

일단 위에는 작년도 올스타 사진

두 번째는 올해 올스타전 인터뷰 사진

세 번째는 아까 올라온 김주오 인xx에 올라온 사진

김주오는 수호 데뷔하고 나서부터 이수호 팬이었음. 근데 혼자서 좋아한다고만 난리치고 이수호는 반응 없었음. 그게 작년 올스타 사진보면 이때까지도 그럼.

그리고 두 번째 사진은 올스타전인데 둘 사이 간격 보임? 주오만 웃고 수호는 무덤덤함. 이것도 일방적.

그리고 오늘 올라온 따끈따끈한 사진 이게 ㄹㅇ 관건임.

우선 주오랑 수호 사이 응, 빈틈없어~

그리고 주오는 뭐 수호랑 있으면 언제나 해맑으니까 스킵한다 치고. 수호가 문제인데 수호도 웃고 있음. 어느 정도 둘이 사이 가까워졌다고 볼 수 있음.

그리고 둘이 원래 공식 인터뷰 자리 아니면 사진 같은 거 찍지도 않는데 이건 딱 봐도 경기강 무대 뒤에서 찍은 거임. 그건 둘이 어느정도 같이 붙어 다닌다는 사실임.

이거 진짜 발전 가능성 개높음. 나도 둘이 개빨았는데 너무 이수호가 반응 없어서 탈덕하려고 했었는데 이거 보고 다시 뿜옴. 얘네 올해 안으로 사귈게 될 거임.

└ 와드 박고 갑니다.

└ 둘이 진짜 사겼으면 좋겠다. 그냥 잘난 놈들끼리 만났으면...

└ 그래도 사귀는 건 말 안 되는 듯. 둘이 친해진다는 것까지면 모를까.

[게임/70160] 1대1 매치 우승 누가 할 거 같냐??

오늘 애들 하는 거보니까 느낌이 올해도 수호일 것 같은데. 아까 중국 선수 개바르던데;;; 진짜 왜 그렇게 잘하지?

└ 세체잖아요.

└ 이번에 게임사에서 파워랭킹 먹인 거 1등이 이수호잖아. 그럼 이수호가 1위 할 가능성 제일 높겠지.

└ 근데 난 개인적으로 김레인 응원함.

└ 22222 우리형 뭔가 삘이 조만간 은퇴할 거 같은데 1대1 우승한 번 해야 할 듯.

└ ??? 김레인 은퇴함???????? ㄹㅇ로?????

└ 퇴물도 아닌데 무슨 은퇴임;; 아직도 애들 다 처바르고 다니는데;; 맨날 체이스 시즌 종료할 때마다 김레인 랭킹 10위 안에 들잖아.

└ 근데 오래 했잖아. 김레인이 예전에 자기는 박수 칠 때 떠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었음.

└ 잠깐만 존나 싫어... 나 우리 형 못 보내는데.

[게임/71654] 이번 올스타전 제일 기대되는 종목 뭐임?

난 개인적으로 이인삼각이랑 1대1.

└ 난 리그별 매치 한국vs중국.

└ 요즘엔 중국보다 유럽 아님?

└그래도 중국애들이 싸움 겁나 해대서 볼 때 재밌음.

└난 그래도 리그별 매치는 별로... 한국이 북미, 유럽, 중국 다 이겨야 본전이잖아. 한 판만 져도 쌍욕 해댈 거 생각하면 진자 역겨움

└ 222 인정.

└ 나도 이인삼각!! 개인적으로 수호랑 주오 나왔으면 좋겠음.

└ 둘이 되면 진짜 개재밋을 듯.

오랜만에 무료하고 나태한 삶을 살고 있는 선우는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들을 턱을 괸 채 보고 있었다. 그러곤 한 게시물에 시선을 멈췄다.

주오가 오늘 낮에 올린 그 사진을 캡처한 게시물이었다.

“호오.”

아주 흥미롭다는 듯 사진 속 두 사람을 보던 선우가 피식 웃었다.

“이수호, 끔찍한 소리 하지 말라더니.”

주오 형 혼자 수호를 좋아하는 게 안타까워서 너도 좀 좋아해 보라니까 수호가 했던 말이 그거였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말라고.

김주오와는 정말 손끝도 닿지 않을 듯이 말하던 이수호가 이런 사진의 주인공이라니. 거기다가 웃고 있기까지 했다.

“대체 주오 형이 어떻게 꼬신 거야? 쟤가 쉽게 넘어갈 애가 아닌데.”

선우가 느낀 수호는 오히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부담스러워해서 더 멀어지는 타입이었다. 수호는 주오의 얼굴이 부담스럽다고 했는데, 주오는 수호만 보면 자꾸만 말을 걸고 자꾸만 뭘 하려고 했으니 수호가 더 피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주오 형이 뭔가 다른 방법이라도 취한 건지, 사진으로 봐도 수호가 어느 정도 경계심을 푼 것 같았다.

“정말 쌍방인 거 보게 될지도 모르겠네.”

“뭐가요?”

선우의 중얼거림에 뒤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주이’의 SUBI가 물었다. 여전히 화면에 시선을 박은 채로 묻는 동생에게 선우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수호가 넘어갔나 봐.”

“수호 형이 어딜 넘어가요?”

선우의 말에 SUBI 김기연이 돌아봤다. 열심히 전투 중에 돌아본 탓에 그의 화면이 흑백으로 변했다.

“아!! 선우 형! 죽었잖아요!”

김기연이 난리법석을 떨며 오열했다.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왜 하필 제라드한테 지고 난리야?”

“형이 말 걸어서 그렇잖아요! 그래서 뭐 수호 형이 어딜 넘어갔는데요?!”

“그런 게 있다. 넌 게임이나 해라. 봉친놈한테 죽지 말고.”

“제가 죽고 싶어서 죽었어요? 하…….”

김기연은 다시 고개를 홱 돌리고 모니터를 노려봤다. 젊어서 그런지 승부욕이 엄청났다.

선우는 다시 사진을 보며 싱긋 웃었다. 선우는 이미 제라드로 가는 게 확정되었지만, 수호는 아직 이적이 미확정인 상황.

수호가 주오와 친해진다면 그를 제라드로 데려가기 쉬울 터. 선우는 즐겁게 웃었다. 김주오와 이수호가 함께 있는 팀이라면 세계의 어떤 팀이 와도 절대 질 자신이 없었다.

“역시 수호는 제라드로 데려가야겠어.”

선우도 역시 프로였기에 우승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은 팀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니 이수호라는 복병과 적이 되고 싶지 않았다.

선우는 모니터 속 사진을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꼭 친해져서 돌아와. 그래야 나도 좋고, 주오 형도 좋지.”

선우는 생긋 웃었다.

* * *

올스타전은 하루하루 큰 즐거움과 놀라움을 안겨주며 진행됐다. 특히 한국 팬들에게는 이보다 더한 재미는 없을 것이다. 1대1 매치에 출전했던 선수들이 무사히 16강전을 통과하여 8강에 이름을 올렸다.

선수들 간의 호흡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고, 결국 같은 방에 모여 간단히 술을 마시는 자리도 생겼다.

지한과 재인의 방에 다 같이 모인 선수들은 품에 맥주를 한 캔씩 품고 있었다.

재인은 지한의 손에서 넓게 펼쳐진 카드 중 한 개를 뽑았다. 무사히도 도둑은 아니었다. 재인은 똑같은 카드 두 장을 카드 더미에 던지며 입을 열었다.

“너네 반응 뜨겁더라?”

재인의 말에 지한이 빙긋 웃었다.

“주오 형 SNS 말씀하시는 거죠? 저도 봤어요. 그거 기사도 났던데.”

“기사까지 났다고?”

입에 고인 맥주를 삼킨 은기가 기가 차다는 듯 물었다. 기사의 당사자인 수호는 조용히 재인의 손에 펼쳐진 카드를 심각한 눈으로 바라보다 하나를 뽑았다.

조용히 카드를 패 속에 넣은 수호가 은기를 향해 카드를 펼쳤다.

“다들 나의 일방적인 짝사랑을 응원하고 있나 봐.”

유일하게 맥주 캔을 품지 않은 주오가 건전하게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웃었다. 은기는 참 주책이라는 얼굴로 주오를 바라봤다. 재인은 주오의 말이 웃긴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다 응원하더라! 진짜 기사까지 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니까요. 다들 주오 형이랑 수호 형한테 관심이 많나 봐요.”

벌써 두 캔을 다 비운 지한이 새로운 맥주의 풀톱을 땄다. 시원한 소리가 경쾌하게 흘렀다.

“수호야, 사람들이 우리한테 관심이 많대.”

수호는 은기가 뽑아 간 카드를 어딘가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김주오가 웃고 있었다. 수호는 손에 남은 카드 패로 시선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가요.”

“진짜 수호 형도 한결같네요.”

할 말 없게 만드는 간략한 답변에 지한이 주오를 불쌍하다는 듯 바라봤다. 주오는 개의치 않았다. 남의 시선이 뭐가 중요한가. 자신의 마음이 중요한 것을.

유독 수호를 향해 반짝이는 주오의 눈을 보던 재인이 혀를 찼다.

“사람들도 응원하니까 어서 받아주라고 주오가 너한테 눈치 주나 보다.”

재인이 마지막 한 모금을 입에 털어 넣었다. 수호도 목이 탔다. 손에 카드가 제일 많이 남은 사람은 이번에도 역시나 수호였다.

언제나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수호였지만, 승부욕은 누구보다 강했다. 그렇기에 수호는 지금 재인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아까부터 조은기가 카드를 가져가고 나면 정재인에게서 똑같이 생긴 카드를 뽑고 있었다. 얄궂은 타이밍이었다.

집중하고 있는 수호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주오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게 참 말하기 민망할 만큼 음흉하다는 걸 눈치 없는 수호와 지한만 몰랐다.

은기는 수호에게서 뽑아 든 카드를 카드 더미에 버리며 주오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주오는 망설임 없이 카드를 뽑아 들었다. 어쩜 다들 그렇게 뽑기를 잘하는지 뽑는 족족 카드를 버렸다.

“눈치라니. 나는 수호한테 그런 짓 안 해.”

어느새 다시 수호의 차례가 돌아왔다. 이미 재인의 손에는 카드 한 장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주오와 지한은 손에서 카드를 털어 낸 지 오래였다.

수호는 남은 한 장을 뽑았다. 정말 운이 이렇게 없을 수가 있을까. 도둑이 손에 들어왔다.

은기는 수호의 손에 남은 두 가지 카드를 보고는 왼쪽 카드를 집어갔다. 그리고 게임은 끝. 수호의 패배.

은기는 정말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이 결과가 어이없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또 너야, 이수호?”

“…….”

수호는 손에 남은 유일한 카드 도둑을 노려봤다. 왜 자꾸만 자신의 손에 들어오는 걸까.

대답 없는 카드를 노려보는 수호가 신기하다는 듯 지한이 말했다.

“형 진짜 운이 없는 거예요. 아니면 못하는 거예요?”

순수한 의문이겠지만, 수호는 그 말이 너무 슬펐다. 주오가 어느새 슬금슬금 수호에게 다가와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수호가 그냥 인기가 많은 거야. 도둑이 자꾸 찾아오네.”

“형, 그거 위로하는 게 아니라 속 뒤집어놓는 것 같은데요?”

나름 의기소침해하는 수호를 위로하려고 하는 주오였지만, 남이 보면 놀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수호는 맥주를 꼴깍꼴깍 넘겼다. 벌써 네 번째 패배였다.

“쟤 저런 운이 필요한 게임은 못한다더라. 유명하잖아. 이수호 운 없다고.”

“하긴…… 그러니까 주오 형 같은 사람이 달라붙지.”

재인의 말에 은기가 작게 중얼거렸다. 물론 이 말은 들은 사람은 주오밖에 없었다. 주오가 눈가를 접어 웃었다.

“은기야.”

“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조은기는 모르쇠가 되었다. 수호는 둘이 대화를 나누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수호의 속에서는 활화산이 타고 있었다. 분명 다시 해도 질 것 같은데, 그렇다고 이렇게 그만두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수호가 입술을 꾹꾹 씹고 있을 때, 다시 수호의 시야로 주오의 얼굴이 훌쩍 들어왔다. 수호는 순간 귀신보다 더 무섭고 놀라운 그의 얼굴에 화들짝 놀랐다. 전에도 말하지 않았는가. 이수호는 잘 놀란다.

“……왜요.”

수호는 아래에서 자신을 다정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김주오의 다갈색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쭈뼛 털이 서는 느낌이었다. 수호가 고개를 뒤로 물리자 주오가 고개를 뒤로 뺐다.

“속상해 보여서. 맥주 더 줄까?”

주오가 새로운 캔을 흔들어 보였다. 수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찮아요.”

“아, 맞아. 근데 재인 형 이번에 계약 끝나시죠?”

문득 생각난 듯 지한이 두 손바닥을 짝 치며 재인을 홱 돌아봤다. 그 큰 소리에 주오와 수호, 은기의 시선도 재인에게 향했다.

킹콩에서 4년이나 뛴 재인이었기에 이번에도 재계약을 할 것 같지만, 그래도 궁금하긴 했다.

수호도 곧 FA였다. 계약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어디로 둥지를 틀까 생각 중이었다. 사실 주이에 계속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다. 불편한 점은 없으니까.

“어. 올스타전 끝나고 한국 돌아가면 계약도 끝이지.”

가벼운 재인의 답변에 지한이 눈을 반짝였다.

“팀 옮기세요? 아니면 재계약?”

재인은 지한을 보며 싱긋 웃었다.

“글쎄?”

물어본 사람 궁금해서 속 뒤집어지게 만드는 답이었다. 지한은 재인의 옷소매를 잡고 찡얼거렸다.

“에이, 그게 뭐예요.”

재인은 주오가 흔들던 캔맥주를 따 마셨다. 이번 맥주는 딱히 취향이 아니었는지 그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캔을 내려놓은 재인이 특유의 가벼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아마 은퇴할걸?”

“……네?”

이번 말은 수호에게도 뜻밖이었다. 아마 이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그럴 것이다.

재인은 늘 올스타전에 뽑힐 만큼 인기도 많고, 아직까지 실력이 좋았다. 서포터 중에서 모두가 입 모아 1위라고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출중했다.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은퇴라니.

재인은 자신을 보고 있던 주오와 눈을 맞추고 싱긋 웃었다. 은기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미묘한 얼굴을 해 보였다.

“너도 내 생각 알지 않아?”

“……대충은?”

재인과 주오는 동년배였고, 데뷔한 시기도 비슷했다.

“프로 생활 오래 하기도 했고, 그만큼 부담감도 많지. 조금 실수만 해도 퇴물이라는 소리나 듣고. 그래서 약간 이 판에 물렸달까?”

갑자기 심각하게 흐르는 이야기에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특히 이 이야기를 먼저 꺼낸 지한은 더더욱 얼어붙어 있었다. 재인은 답 없는 사람들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어린애들한테 양보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그래도 마지막에 올스타전에 참가해서 나름 즐겁게 놀다가 간다.”

“형…….”

지한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였다. 주오는 조용히 말을 하는 재인을 보며 웃었다.

“네 뜻이 그렇다면 별수 없지. 그래도 아쉽네.”

두 사람은 한 번도 같은 팀에서 경기를 뛴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동년배가 주는 동지애는 무엇보다 강했다. 1년이 프로판에서는 엄청난 차이였다. 데뷔를 같이 해 6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주오와 재인의 동기들은 하나둘씩 떠나갔다.

지금 두 사람과 같이 데뷔해서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재인과 주오, 단둘뿐이었다. 재인이 은퇴하면 남은 건 주오 한 사람뿐이다.

재인은 혼자 남을 주오를 보며 힘내라는 듯 웃었다.

“넌 오래 해먹어라. 나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직도 넌 잘하잖아.”

“형도 아직도 잘해요! 진짜 너무 잘하신다고요!”

지한이 번뜩 소리쳤다. 꼭 본인을 퇴물 취급하는 재인이 못마땅한 듯했다. 이제 막 프로가 된 지한에게 재인과 주오는 높고 높아 끝이 보이지 않는 탑과 같은 사람이었다. 동경하는 선수들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재인은 그런 지한의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나도 알아. 그러니까 올스타전에 뽑혀 왔겠지.”

“그래서 은퇴하시고는 뭐 하시게요?”

묵묵히 듣고 있던 은기가 물었다. 재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요즘에는 스트리머도 잘나가니까 그거 해도 괜찮겠지. 근데 우선은 좀 쉬고 싶다.”

재인의 말을 들으면서 홀짝홀짝 술을 마시고 있던 수호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친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봐왔다. 아쉽지 않을 리 없었다.

“코치 제의도 많이 들어오실 텐데 혹시나 다시 돌아오고 싶으시면 돌아오세요.”

수호가 그렇게 말할지 몰랐다는 듯 재인이 순간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그래. 이 판 떠나고 나면 그리워지긴 하겠지. 내 이십 대 청춘을 다 바쳤는데.”

즐겁게 웃던 재인이 말없이 자신을 보고 있던 주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는 꼭 오래 해라. 내가 코치로 돌아왔을 때 네가 있어야 그래도 적응하지 않겠냐.”

“너한테 코칭 받는 게 반갑지는 않을 것 같은데.”

“진짜 매정하다니까. 수호한테만 다정하지 말고 남들한테도 다정해져 봐.”

문득 재인의 눈길이 수호에게 닿았다. 수호가 빤히 눈을 맞추고 있자 재인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이제 이런 얘기는 그만하고 마저 게임 해볼까?”

그렇게 게임을 다시 시작했지만, 아까만큼 분위기가 흥겹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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