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신기한(?) 사람 (1)
얼굴에 찬물을 끼얹자 몽롱했던 정신이 명확해졌다. 수호는 뺨과 턱 선을 타고 흐르는 물을 수건으로 닦아냈다. 젖은 앞머리를 수건에 비비적거리며 침대에 앉자 디리릭 소리를 내며 객실 문이 열렸다.
거리낌 없이 객실을 열고 들어올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수호는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룸메이트인 김주오였다.
주오는 수호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수호가 보기에도 정말 조심스러운 걸음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꼭 누구를 놀랠 작정을 하고 들어오는 모습이었다.
이미 자신과 눈을 마주친 후였으면서도 왜 저렇게 들어오나 싶어 수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들어와요?”
“어? 내가 어떻게 들어왔는데?”
정작 본인은 몰랐다는 듯 주오가 수호의 물음에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수호는 주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살금살금 들어오시길래요.”
“아, 미안. 너만 보면 이렇게 걷는 게 습관이 돼서.”
“……?”
이건 또 무슨. 왜 자신을 보면 살금살금 걷는 게 습관이라는 걸까. 의아함과 경계심이 조약돌 같은 수호의 눈동자에 떠올랐다. 수호의 반응을 귀신같이 눈치챈 김주오는 더욱 해사하게 웃었다. 꼭 ‘나는 착한 사람이야. 경계 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수호는 나 보면 꼭 피하니까…….”
주오의 말에 수호는 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다. 수호는 주오에게서 시선을 돌려 애먼 침대 시트를 바라봤다.
“그렇게 걷지 말아요. 변태 같아요.”
“그래? 그럼 내가 가도 안 피할 거야?”
“글쎄요.”
아마 피할 거다. 하지만 아마 전보다는 덜할 것 같았다. 수호는 다시 시선을 들어 주오를 바라봤다. 이상한 사람. 물끄러미 주오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입을 열었다.
“어제 미안했어.”
대체 뭐가 미안했다는 걸까. 미안해할 짓을 한 적이 없는데. 수호는 주오가 말한 지난밤을 떠올렸다. 하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수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통 모르겠다.
“뭐가요?”
“어제 실수한 것 같아서.”
수호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건 딱히 한 적 없었다. 그래서 수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거 없었어요.”
“그래……? 그래도 수호한테는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는데 술 취해서 업혀 오는 꼴 보여서 마음이 속상해.”
이수호에게 김주오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럴 때 유독 체감할 수 있었다. 술 취해서 업혀 오는 모습을 보인 게 왜 속상하다는 걸까. 자신이 말을 못 알아듣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수호는 주오와 대화할 때면 그게 자신의 착각이었나 싶었다.
“……그게 왜 속상한데요?”
이 사람은 정말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수호는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지금까지는 늘 속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궁금하지도 않았다. 근데 지금은 문득 궁금해졌다.
어젯밤 술에 취해서 헛소리를 하던 김주오 때문일까. 그는 정말로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악수 하나로 그렇게나 서운해하던 모습이 떠올라 문득 수호는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어쩐지 귀엽게 보였다.
주오는 수호의 물음에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는 이내 웃어 보였다. 눈가를 접어 웃는 미소가 참 다정했다.
“좋아하니까.”
어렵게 물은 수호와는 다르게 주오의 대답은 너무나 가벼웠다. 그렇다고 감정이 담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며, 정말 그 말 하나만이 진심이라는 듯 그 짧은 답에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수호는 물끄러미 주오를 바라보다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형이 절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수호는 주오에게 어떠한 것도 해준 게 없었다. 오히려 싸가지 없다고 느낄 정도로 그를 피했고, 무시했다. 그렇기에 수호는 주오가 자신에게 가지는 감정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주오는 그런 수호의 의아함을 한 번에 끝내 버렸다.
“그냥 좋아. 그런 거 있잖아. 이유 없이 좋은 것들. 나한테는 그게 수호, 너야.”
수호는 그런 주오의 답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해 못 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신경 끄기로 했다.
“……형은 진짜 이상해요.”
“그래서 싫어?”
“아니요.”
김주오가 싫은가? 주오는 물음에 수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부담스러운 거지 김주오 자체가 싫은 건 아니었다.
수호의 답변에 주오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싫지 않으면 됐어. 그래서 어제 정말 수호 너한테 실수한 거 없어?”
“없어요. 그런데…….”
수호는 이걸 말해야 하나 싶었다. 실수는 아니지만 김주오는 무슨 말을 하긴 했었다.
‘나도 수호랑, 악수도 하고 싶고. 방송으로 사람들한테 수호랑 같이 있다고 자랑도 하고 싶어. 수호랑 끝까지 술도 마셔보고 싶고……. 수호랑 뭐든지 다 하고 싶어.’
서운하다는 듯 그렇게 말하던 김주오. 이걸 말해주면 그가 창피해할 텐데. 그렇지만 본인이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수호를 주오가 초조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런데……? 왜 나 정말 무슨 실수 했어?”
“아뇨. 그건 아니고. 그냥…….”
잠시 고민하던 수호는 이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본인이 한 말인데 그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형이 저랑 악수도 하고 싶고, 방송도 같이하고 싶고, 술도 끝까지 마셔보고 싶고, 저랑 뭐든지 다 하고 싶다고 그랬어요.”
“……뭐?”
자신에 말에 놀란 듯 주오가 이번에는 확연하게 표정이 굳었다.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내 주오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수호를 바라봤다.
“하하, 많이 취하긴 했었나 보다.”
“그런 것 같더라고요. 그래도 재밌었어요.”
그 덕에 김주오라는 인간의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수호를 언제나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던 주오는 그가 어제 일을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수호의 경계심이 조금은 물러졌다는 것 또한.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제의 사건이 좋게 풀린 것 같아 주오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수호가 재미있었다니 다행이네.”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는 듯 어제 하고 싶다던 그 많은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 주오를 수호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주오는 뭔가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 잠긴 수호의 눈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술 깨고 나서는 그런 말 안 하시길래요. 빈말이었어요?”
“……어?”
이번에는 더욱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나 보다. 김주오는 더욱 놀란 눈으로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는 주오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수호 본인도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싶었지만, 그냥 궁금했다. 그리고 김주오라는 사람이 신기했다.
늘 거북하게 밀고 들어온다고 생각했는데 어제를 보면 그 나름대로 참고 있는 듯했다. 부담 주지 않으려는 주오의 태도가 수호에겐 좋게 다가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주오라는 남자가 재미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여전히 저 얼굴은 부담스러웠지만, 그 부담감을 조금이라도 희미하게 만들 만큼의 흥미는 있었다.
주오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빈말은 아니야. 나는 수호랑 이런저런 일들을 같이하고 싶어.”
“……다음에 몇 가지는 해드릴게요.”
“정말?”
주오는 수호의 말에 눈을 번뜩였다. 희망찬 기분이 몽글몽글 그에게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수호는 고개를 돌리며 이제 다 마른 앞머리를 만졌다.
“……별로 어려운 건 아니니까요.”
“고마워. 나는 수호가 참 좋아.”
낯간지럽게 말하며 웃는 주오를 힐끔 바라봤다. 그는 정말 기쁜 듯 방긋 웃고 있었다. 눈가와 입가를 둥글게 말아 웃는 주오의 얼굴은 정말 부담스럽게도 잘생겼다. 수호는 그래서 시선을 돌렸다.
주오는 여전히 싱글거렸다. 수호는 어쩐지 조금 피곤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수호는 다 쓴 수건을 한쪽에 밀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습 가요.”
자신을 지나쳐 객실을 나서는 수호의 뒤로 주오가 따라붙었다. 둘은 연습실로 향했다. 처음으로 수호가 주오에게 건넨 제안이었다.
* * *
올스타전은 뜨거운 성원과 함께 시작됐다. 게이머들과 세계 각국의 팬들이 다 함께 즐기는 국제적인 축제였다. 정식 대회긴 하지만, 이벤트전이라는 색이 강해서 누가 이기든 지든 즐기기 위한 대회였다. 그렇기에 특이한 규칙들이 많았다.
올스타전 스타트를 끊은 게임은 1대1 매치와 포지션 변경 5대5 매치였다.
[북미의 Zstar 선수가 유럽의 Us 선수를 이기고 1대1 매치 16강에 올라갑니다!!]
캐스터의 샤우팅과 함께 직관을 왔던 북미 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Chase는 5대5 팀 게임이지만, 1대1 매치는 올스타전에서만 볼 수 있었다.
팀워크가 아닌 선수의 피지컬만을 가지고 승패를 정하는 경기.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 게임은 프로 선수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개인 기량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1대1 매치는 선수들에게 자존심을 건 승부가 되었다. 그렇기에 이 1대1 매치 우승을 목표로 하는 선수가 많았다. 그리고 그건 한국 팀 올스타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게임이 끝나고 다음 경기로 나서는 주오가 눈을 빛냈다.
“형 꼭 이기고 와요!”
“RAIN 파이팅!”
주오가 키보드와 마우스를 챙겨 무대로 올라가자 조은기와 이지한이 소리를 질렀다. 주오는 뒤돌아 두 사람에게 웃어 보였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 잔잔한 미소가 너무나 듬직하고 여유로워서 두 사람은 걱정 없이 환하게 웃었다.
“수호는 나 응원 안 해줄 거야?”
무대로 올라가던 주오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 콜라 캔에 빨대를 꽂아 빨고 있던 수호가 시선을 들었다. 다 마셨는지 쪼로록 소리가 나자 수호가 빨대에서 입을 뗐다.
“파이팅.”
“그래, 다녀올게. 그리고 수호야, 그 빨대 나 주면 안 돼?”
“미친놈.”
잠자코 옆에서 듣고 있던 정재인이 작게 한마디 내뱉었다. 조은기는 대번에 눈가를 찡그리고는 수호가 다 마신 캔과 빨대를 챙겨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가기나 해요!”
“하하, 농담도 못 하겠네.”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주오의 마음을 단순 팬심과 동료애로 알고 있는 지한과 수호는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레인 형 몰랐는데 진짜 웃겨요.”
“넌 이게 웃기냐…….”
조은기는 순수한 영혼의 대명사 같은 지한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수호는 그런 둘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주오를 봤다.
“이기고 오세요.”
주오는 수호의 응원에 손을 흔들며 무대로 올라갔다.
[이번 경기는 우리 RAIN 선수와 중국의 BRO 선수입니다! 두 사람은 어떤 캐릭터로 경기를 할지 참 기대되네요.]
주오와 중국 선수가 자리에 앉자 무대 위 많은 조명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1대1 매치 시작 후 처음으로 한국 선수의 경기라 캐스터와 해설들의 말이 많아졌다.
[RAIN 선수가 뇌지컬이 뛰어난 선수라고 정평이 나 있어서 다들 피지컬은 부족할 거라 생각하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당연하죠! 수호 선수 이전에 세계 랭킹 1위를 찍던 선수입니다! 이번엔 어떤 챔피언을 픽할지 정말 기대되네요. 전 아직도 예전에 RAIN 선수가 보여줬던 플레이가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해설진들은 과거의 주오가 보여줬던 플레이를 회상하며 웃었다.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어 아직도 인터넷에 RAIN을 치면 제일 많이 나오는 플레이었다.
주오는 백 가지가 넘는 챔피언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동시에 경기장이 관객들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오오! RAIN 선수 원거리 딜이 강한 캐릭터를 골랐네요. 이거 의외의 선택인데요? 저는 RAIN 선수가 여러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유틸성이 좋은 캐릭터를 선택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역시 1대1 매치인데 강한 딜로 찍어 눌러 끝내는 게 빠를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유틸성도 좋지만 1대1 경기는 맞대결을 피할 수가 없어서 딜이 부족하면 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주오는 원거리 딜이 강한 캐릭터를 선택했다.
[그러면 게임 시작합니다!! 경기는 상대를 먼저 죽이는 선수가 승리합니다. 하지만 게임이 길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5분이 되는 순간 게임은 강제 종료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시 그 순간 획득한 골드가 더 많은 선수가 승리하게 됩니다.]
[골드가 많은 선수가 승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병사들 관리도 아주 중요합니다.]
이영중 캐스터의 게임 스타트 신호에 이어서 유기현 해설이 게임의 유의점을 짚었다.
해설들이 빠르게 말을 잇는 동안 게임은 시작됐다. 주오는 상대가 픽한 캐릭터를 확인했다. 상대 또한 원거리 딜이 강한 캐릭터였다.
주오가 선택한 ‘루안’보다 맞딜이 훨씬 강한 ‘위치’였다. 하지만 주오는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RAIN 선수 이번 경기는 까다롭겠는데요. 맵 특성상 전투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맞딜이 강한 위치라니 힘들겠네요.]
[하지만 RAIN 선수가 스킬을 잘 맞추고 상대의 스킬을 잘 피한다면 그래도 승산은 있어요.]
유기현 해설이 능청맞게 이야기하자 박동진 해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건 누구나 다 알죠. 잘 피하고, 잘 때리면 이긴다. 그런데 마음같이 잘 안 되는 게 문제죠. 그래도 저는 RAIN 선수를 믿습니다!]
박동진이 기대의 찬 눈으로 게임 화면을 바라봤다. 화면 속 RAIN과 BRO가 기본 아이템 세팅을 끝내고 마주하고 있었다.
주오와 BRO는 서로 병사를 죽이며 골드를 올려갔다. 주오는 스킬샷이 중요한 캐릭터였기에 처음부터 전투를 하면 승산이 없었다. 병사를 죽여 골드와 레벨을 올려 스킬 포인트를 쌓는 게 우선이었다.
반면 BRO 선수는 먼저 싸움을 거는 편이 유리했지만, 조심스럽게 주오를 견제만 할 뿐이었다.
[위치를 가지고 저렇게 소심한 플레이를 하면 후에 루안의 딜을 감당하지 못할 텐데요.]
[음, 후반에 RAIN 선수의 스킬샷을 다 피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일까요?]
캐릭터 특성상 초반이나 후반이나 위치가 유리한 편이었다. 동일한 시간 동안 딜을 넣는다는 가정하에, 평타 딜이 강한 위치가 루안의 스킬을 하나만 피해도 전투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하지만 오만인지 자신감인지 모를 BRO의 판단에도 주오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일단 지금까지 골드 상황은 두 선수 비슷합니다. 결국 전투로 끝을 낼 듯하네요.]
박동진 해설의 말소리가 경기장에 크게 울렸다. 주오는 획득 골드가 원하던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을 정도가 되자 본진으로 귀환을 선택했다.
5분의 제한 시간이 걸린 1대1 매치. 남은 시간은 1분 30초가량.
마지막 정비의 시간이었다. 상대 선수도 똑같이 생각했는지 상대도 본진으로 향했다.
주오는 공격 속도와 사거리가 늘어나는 아이템을 선택했다. 상대 선수가 선택한 위치는 주오가 선택한 루안보다 사거리도 길었다. 상대적으로 약한 딜과 사거리를 보충해 주는 아이템이 필요했다.
가장 필요한 건 스킬샷이었다. 아무리 딜을 보충해 주는 아이템을 구매했다고는 하나 상대도 분명 기본 딜을 높이는 아이템을 구매했을 것이다.
본진에서 전쟁터로 귀환한 두 선수는 도착하자마자 서로를 향해 달렸다. 상대도 역시 사거리가 증가하는 아이템을 구매했는지 상대의 공격이 먼저 들어왔다. 주오는 상대에게 다가가 딜을 넣었다.
하지만 상대 선수의 딜이 더욱 강하게 들어왔다. 상대 선수는 주오가 거리를 좁혀오자 스킬을 날렸다. 하지만 그는 재빠르게 이동기로 공격을 피하며 상대에게 스킬을 맞췄다. 순식간에 강한 딜이 들어가며 상대 선수와 주오의 체력 상황이 반대가 됐다.
주오의 스킬이 들어가자 관중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유기현 해설도 흥분해 입을 열었다.
[‘심판의 보복’ 스킬이 아주 잘 들어갔습니다! 재빠르게 슉 피하면서 앞대쉬! 진짜 너무 멋있는데요!]
상대는 반 정도 남은 체력에 당황했는지 다급히 남은 스킬을 썼다. 하지만 주오는 이동기 스킬도 사용하지 않고 스킬을 피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남은 스킬을 박아 넣었다.
[오오! RAIN 선수!! 역시 작년 1대1 매치 준우승자입니다! 32강에서 떨어질 리가 없습니다! 한국 선수의 위상을 다시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오는 이동기 스킬의 쿨타임이 끝난 것을 확인한 주오는 상대 선수에게 달라붙어 딜을 넣었다. 이미 이전에 스킬샷을 모두 맞춰둔 덕에 서로 맞딜을 한다 해도 주오가 이긴 게임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주오의 피가 1/3가량이 남았을 때 화면에 문구가 떠올랐다.
[RAIN 선수가 BRO 선수를 이기고 1대1 매치 16강에 올라갑니다!!]
* * *
“잘 피하고, 잘 맞춰야 이긴다는 걸 잘 보여주는 게임이었습니다!! 한국 선수 중 1대1 매치에 참가하는 RAIN, SUHO, MOO 선수 중 처음으로 RAIN 선수가 16강을 확정합니다!”
“역시 한국 선수들이 올라가니까 더 기분이 좋군요. 두 해설분께서도 그러신 것 같습니다. 자, RAIN 선수 축하하고 다른 한국 선수들도 16강에서 만날 수 있었으면 하네요! 그러면 승리한 RAIN 선수의 인터뷰가 있겠습니다!”
이영중 캐스터의 말과 함께 주오를 비추던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다.
게임이 끝나자마자 방송국 스태프들에게 끌려 인터뷰 현장에 온 주오는 미소를 지었다. 정하은 아나운서가 김주오를 바라봤다.
“RAIN 선수, 16강 진출 축하드립니다! 정말 멋진 경기였어요. 소감 한 말씀 해주세요!”
정하은 아나운서가 환히 웃으며 주오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주오는 마이크를 받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나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렇게 16강에 올라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긴장해서 실수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어머, 전혀 긴장 안 하시는 것 같던데요. 너무 잘하셔서 정말 놀랐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다 피하시고 다 맞추시는 거죠?”
아나운서가 과장스럽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으며 질문을 건넸다. 주오는 곤란하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상대 선수께서 너무 긴장하셨는지 각이 잘 보였거든요. 덕분에 이긴 것 같습니다.”
상대 선수는 올스타전에 처음으로 출전하는 선수였다. 그래서 그런지 어딘가 위축되어 있는 모습이 조금씩 보였다. 위치를 가지고 처음부터 강하게 들어오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주오가 병사를 처치하지 못하게 견제를 강하게 했다면, 아마 원하던 아이템을 살 수가 없어서 조금 성가신 상황이 나왔을 거다.
운이 좋았다고 말하며 웃는 주오를 보고 정하은 아나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 선수가 올스타전에 처음 참가하는 선수였죠. 첫 무대인 것도 있지만, 상대가 RAIN 선수여서 더 긴장했을 것 같네요. 그래도 RAIN 선수의 플레이가 좋았던 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죠.”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주오가 정하은 아나운서에게 고개를 꾸벅이자 그녀도 마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인걸요. 이런 겸손한 모습 때문에 팬분들께서 RAIN 선수를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음 경기는 내일모레인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만났으면 하는 선수가 있나요?”
정하은 아나운서의 물음에 주오는 한 사람을 떠올리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확인한 아나운서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RAIN 선수의 미소만 봐도 대답을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수호 선수와 만나고 싶습니다. 작년 결승에서 수호에게 졌으니, 올해는 이기고 싶네요.”
작년에 1대1 매치에서 수호에게 패하고 준우승을 차지한 주오는 올해는 우승이 목표였다. 여유롭게 웃는 주오에게 정하은 아나운서가 물어왔다.
“하지만 16강에서 만나면 결승에서 볼 수 없으실 텐데요.”
“아, 수호랑은 결승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복수해 줄 생각입니다.”
수호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우승을 양보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꼭 우승할 생각이었다. 정하은 아나운서는 주오의 대답에 환하게 웃었다.
“수호 선수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걸로 유명한 RAIN 선수지만 우승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없으신 듯하네요. 그러면 수호 선수와 꼭 결승에서 만나시길 바라겠습니다! 지금까지 RAIN 선수 인터뷰였습니다! 여러분 안녕!”
정하은 아나운서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자 주오도 가볍게 흔들었다.
“다음에 또 봐요.”
주오는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 불이 꺼지는 것을 보고 정하은 아나운서에게 인사를 건넸다.
“RAIN 선수 파이팅이에요! 이번에는 정말 우승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환하게 웃으며 정하은 아나운서가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주오도 선수들이 모여 있을 무대 뒤로 향했다.
선수들은 옹기종기 모여 주오 다음으로 시합에 나가는 은기의 경기를 보고 있었다. 주오는 저 멀리서도 보이는 수호의 작은 머리통을 끌어안고 비비적거리고 싶은 걸 꾹 참고 사뿐사뿐 걸어갔다.
어느새 주오는 자신도 모르게 살금살금 걸어가고 있었다. 저 머나먼 초원에서 포식자들이 사냥을 할 때 발소리를 죽이는 이유를 수호를 볼 때마다 느낄 수 있었다. 도망가면 안 돼. 조금만 더, 조금만 가까이.
그러다 주오는 목표물이던 까만 머리통이 갑자기 홱 방향을 돌리는 걸 보고 걸음을 멈췄다. 까만 머리통은 어느새 밀떡 같은 하얀 얼굴이 되어 있었고, 그 밀떡 위 까만 조약돌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 정말 언제 느껴도 좋았다. 수호가 자신을 볼 때의 느낌은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자신이 푹 빠져 버린 사람의 눈에 맺힐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쾌감을 주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
주오는 새삼 다시 강하게 박동하는 심장을 느끼며 웃었다.
“어떻게 알았어?”
“올 때 된 것 같아서요.”
“그런 거였어? 나는 수호가 나 기다린 줄 알았어.”
“설마요.”
수호는 어느새 옆에 앉아 싱글 웃는 주오를 뚱한 눈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예전같이 자신을 극도로 불편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번 올스타전에도 참여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수호와 가깝게 지내지 못했을 테니까.
“레인 형, 왔네요. 축하해요!”
은기의 경기를 보던 지한이 고개를 돌려 반겨왔다. 주오는 살가운 지한이 귀여웠지만, 자신이 수호와 해보지 못했던 악수를 선수 친 그가 밉기도 했다.
나이 먹고 질투가 많으면 구질구질한 거라던데. 주오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어찌할 수 있나. 수호가 좋고, 질투가 나는데. 감정에 솔직한 건 죄가 아니다.
홀로 자신을 위로하던 주오의 목 위로 두툼한 팔이 감겨왔다.
“주오! 축하한다!”
숨이 턱 막히는 감각에 주오는 목에 감긴 팔을 잡아 떼려 했다. 하지만 무식하게 단단한 진형의 팔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가, 감독님. 숨 막혀요…….”
“어? 하하, 생각보다 힘을 세게 주고 있었네.”
이진형은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팔을 풀었다. 그러곤 주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번엔 개인전 우승해야지.”
“그래야죠.”
“수호, 들었냐? 이번에는 주오가 우승한단다.”
진형은 멀뚱한 눈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수호를 불렀다. 수호의 시선이 주오에게 향했다. 잠시간 말없이 주오를 바라보던 수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주오는 그 미세한 입가의 호선을 똑똑히 봤다. 수호가 자신을 보며 웃었다.
주오는 덜컥 수호의 어깨를 붙잡았다. 수호는 이 형이 갑자기 또 왜 이러나 싶은 얼굴로 바라봤다.
“또 왜 그러는데요.”
“사진 한 장만. 딱 한 장만 찍어도 될까? 아니, 한 장은 부족하고 여러 장 찍어도 될까?”
“레인 형 또 시작이다.”
“그냥 내버려 둬. 관여하면 피곤해지니까.”
이제 주오의 발작에도 익숙해진 지한이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런 지한을 말린 건 재인이었다.
주오는 두 사람이 옆에서 무슨 말을 하든 중요하지 않았다. 수호의 웃는 얼굴을 찍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하지만 수호는 이미 웃던 표정을 지우고 평소의 뚱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떡해……. 사라졌잖아.”
주오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리자 어느새 수호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
“형, 진짜 웃겨요.”
“그러면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 부탁할게.”
수호는 조심스럽게 물으며 자신을 힐끔거리는 주오를 빤히 바라봤다. 찍어줄까, 말까. 수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주오의 눈빛이 불안하게 떨렸다.
그런 두 사람의 미묘한 공기를 깨뜨린 건 눈치 없는 감독이었다. 이진형이 하하하 크게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한 장만 찍어줘라. 주오가 원래 이렇게 고집부리는 애가 아닌데. 어때, 수호야?”
“……한 장은 괜찮아요.”
“수호야, 정말 사랑해!”
주오의 외침에 이진형은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옆에서 주오와 수호를 지켜보고 있던 재인과 지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내 웃었다.
“레인 형, 좋겠어요.”
“지금 쟤 우리 말 들리지도 않을걸?”
재인의 말은 정말이었다. 주오의 귀에는 수호의 음성만 들릴 뿐이었다. 주오는 수호가 말을 바꾸기 전에 재빨리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진형에게 건넸다. 진형은 준비하고 있던 자신의 핸드폰을 힐끔 내려다보고 멋쩍게 웃었다.
“이걸로 찍어주세요.”
“네 폰이나 내 폰이나, 그게 그거지 않냐.”
“달라요. 아주 많이.”
주오는 눈을 번뜩이며 진형을 바라봤다. 진형의 핸드폰으로 찍으면 진형에게도 사진이 남을 거 아닌가. 주오는 절대 싫었다. 이 사진은 자신만 가지고 있고 싶었다.
뜻밖에 주오의 열렬한 시선을 받은 진형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라. 어차피 보내주기도 귀찮을 테니. 둘이 같이 찍을 거지? 둘이 앉아봐.”
진형이 수호의 옆에 주오를 앉히고 카메라를 켰다.
주오는 막상 사진을 찍게 됐지만, 붙어서 찍으면 부담스러워할까 다가가는 걸 망설였다.
수호는 옆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딘가 불편하게 구는 주오를 보고 입을 열었다.
“이러면 인터뷰할 때 찍는 거랑 다를 게 없잖아요.”
“그래도…… 수호는 닿는 거 안 좋아하잖아.”
수호는 어쩌다 주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 참 궁금했다. 그렇게 말을 한 적도 없었는데.
요 며칠 사이로 수호는 주오가 궁금해졌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그에게 어째서 호기심이 생기는 걸까 의문도 들었지만, 아마 그건 주오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김주오라는 사람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허술하고, 이상하고, 웃긴 사람이었다. 수호는 지난 아침을 떠올렸다.
‘으음, 안 돼…….’
그날은 잠이 많은 수호가 무슨 일인지 일찍 깨서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끔뻑이고 있던 날이었다. 늘 먼저 깨어 있던 주오도 아직은 꿈나라였다. 그런데 주오가 침대 위에서 혼자 끙끙거리고 있었다.
수호는 그런 주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체 꿈에서 무슨 일을 당하고 있기에 저렇게 처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이불 속에서 나온 수호는 주오의 침대 앞에 앉았다.
주오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죄 없는 베개를 쥐어뜯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뭐가 안 되는데요?’
너무나 절박한 음성에 수호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이지한, 그건 내 거…….’
이건 무슨 말일까. 이지한이면 PEOPLE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걔가 왜 주오의 것일까. 수호는 갸웃하며 주오를 내려다봤다. 내 팬이라고 했었는데. 사인도 받아 갔는데.
수호는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고개를 다시 갸웃했다. 이런 생각은 꼭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수호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마음이 돌아섰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유 모를 서운함을 품고 돌아서는 수호의 뒤에서 주오가 다시 중얼거렸다.
‘사진…… 수호 사진. 음, 내 거라고.’
여전히 처참한 음성이었다. 뭐가 그렇게 억울하고 서운할까 싶은 음성.
수호는 고개를 돌려 주오를 내려다봤다. 주오는 여전히 인상을 찡그린 채, 방금 전보다 더욱 격하게 베개를 뜯고 있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잡힌 베개가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수호는 주오를 묵묵히 내려다보다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그렇게 좋을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꿈에서도 자신의 사진을 갈구하는 김주오라는 사람이 신기했다. 그리고 그가 짓고 있는 이 표정들도 신기했다. 화낼 때나 억울할 땐 이런 얼굴을 하나 보다.
여전히 잘난 얼굴이긴 했지만, 매일 한방에서 눈뜨고 감는 순간을 함께하다 보니 적응이 되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수호는 주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가락을 뻗어 주오의 뺨을 쿡 찔렀다.
그러곤 본인이 더욱 놀라 빠르게 손을 거뒀다. 생각보다 뺨도 뜨뜻했다. 그 짧게 닿은 뺨에서 느껴지는 촉감과 체온이 묘하게 여운을 남겼다.
그날 아침 말고도 수호가 주오와의 거리감을 좁힐 일은 여럿 있었다. 샤워하고 머리를 말리지 않고 있으면 꼭 주오가 드라이를 들고 나타나 난리법석을 피웠다. 그때 주오의 잔소리는 엄마보다 더했다.
자고 일어나면 보는 부스스한 모습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런 것들을 보고 나니 김주오에게 느꼈던 머나먼 거리감이 어느새 한 발자국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도 거리라면 닿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안 싫어해요.”
“어?”
주오는 한참의 침묵 끝에 흘러나온 수호의 대답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수호는 의아함을 담은 채 자신을 보는 주오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닿는 거 안 싫어한다고요.”
“이수호, 진짜 너는…….”
김주오는 불만과 감동이 섞인 미묘한 말을 내뱉고 고개를 돌렸다. 착각일지는 모르겠지만 김주오의 귓가가 조금 붉은 것 같았다. 그것을 멀뚱히 보던 수호는 다시금 고개를 홱 돌린 주오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반사적으로 입이 벌어졌다.
“그런데 쳐다보지는 말아주세요.”
“응?”
주오가 얼빠진 얼굴을 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싶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수호는 주오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닿는 건 괜찮은데 쳐다보지는 마세요.”
그가 전보다 편하진 건 맞지만, 그래도 가까운 곳에서 마주치고 있기에는 심각하게 부담스러운 얼굴임은 변하지 않았다.
듣는 사람 입장에선 아주 기분 나쁜 말이었을 테지만, 주오는 웃었다. 그러면서 수호와 거리를 좁혔다. 서로의 체온이 느껴질 만큼 가깝게 붙어 앉은 주오는 카메라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늘 웃고 다니는 김주오지만, 지금의 미소는 유독 즐거워 보였다. 수호도 사람인지라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어느새 수호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진형은 핸드폰 화면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웃으며 주오에게로 눈을 돌렸다.
“아이고, 그림 좋네. 주오 올스타전 오더니 성덕됐어.”
“와아아.”
지한은 이유 모를 박수를 치며 주오와 수호를 구경했다.
“감독님, 잘 나왔어요?”
“오야. 잘 나왔다. 가져가.”
이진형은 주오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주오는 잽싸게 핸드폰을 받아 진형이 찍어준 사진들을 보며 웃었다. 싱글생글. 그 말이 이런 얼굴을 보고 쓰는 말이구나 생각이 될 정도로 주오는 정말 기뻐하고 있었다.
주오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핸드폰을 토독토독 두드렸다.
주오가 열심히 뭔가를 하는 건 알았지만, 정확하게 뭘 하는지 못 본 수호는 의아한 눈으로 주오를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수호야, 이거 사진 자랑해도 될까?”
설렘으로 가득한 주오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수호의 앞에 핸드폰 화면이 가득 찼다. 방금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 눈동자를 굴려 주오를 보자 그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허락해 줘. 올려도 될까? 꼭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수호는 다시 시선을 내려 사진을 바라봤다. 두 사람이 지금까지 찍었던 인터뷰 사진들보다 가깝게 붙어 웃고 있는 모습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수호도 막상 사진을 보니 신기했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정말 전보다 편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고마워. 내가 수호가 가장 잘 나온 사진으로 올릴게.”
수호의 허락을 받은 주오는 기쁘게 웃으며 사진들을 휙휙 넘겼다. 그 뒤로 지한이 주오의 어깨 뒤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재인까지 합세해 옆에 붙어서 사진을 구경하기 바빴다.
“아, 김주오, 이게 더 잘 나온 것 같아.”
“그래요? 전 이게 더 사이좋아 보이는데.”
재인과 지한 사이에서 주오가 신중한 얼굴로 사진을 골랐다. 평소와 달리 웃음기 없는 그가 너무 진지해 보여서 수호는 시선을 돌렸다. 아무거나 올려도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수호는 경기장을 가르는 캐스터의 외침에 박수를 쳤다.
[MOO 선수가 1대1 매치 16강으로 올라갑니다!!]
[지금까지 출전한 한국 선수들이 전부 승리해서 한국 리그인 CKR 해설자로서 정말 기쁩니다! 남은 출전 선수는 SUHO 선수 한 명뿐이네요.]
박동진 해설의 여유로운 음성에는 수호도 16강전에 올라갈 거라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유독 자국 리그 선수들에 대한 사랑이 강한 박동진 해설의 말에 이영중 캐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CKR의 자랑이죠. SUHO 선수는 믿고 있겠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잠시 휴식을 가진 뒤에 남은 1대1 매치와 유럽과 북미의 리그별 매치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경기는 30분 뒤에 다시 시작하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캐스터의 말이 끝나고 정확히 30분이 흐른 뒤 경기는 다시 시작됐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대로 수호는 1대1 매치 16강에 오르고 유럽과 북미의 리그전은 유럽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올스타전의 첫날이 무사히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