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40)

* * *

다른 팀에서 모인 선수들이었지만 경력들이 길어서 연습은 수월하게 이뤄졌다.

체이스(Chase)는 다섯 명의 선수가 함께하는 게임이었다. 다섯 명이 게임에서 오브젝트 관리와 전투를 통해 성장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상대 기지의 보석을 먼저 깨는 팀이 승리하는 방식이었다.

맵을 전체적으로 사용하며 오브젝트를 관리하고 모든 선수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역할(정글)의 주오. 맵에서 가장 중요한 길목을 수호하며 상대편 딜러를 암살하는 메인 딜러 역할(미드)의 수호. 원거리에서 상대를 견제하고 가장 강력한 딜을 뿜어내는 원거리 딜러(원딜)의 은기. 딜러들을 서포팅하면서 맵의 시야를 장악해 나가는 서포터(서폿)의 재인. 전투에서 탱커의 역할과 운영에서 중요한 역할(탑)인 지한.

요즘 메타에서는 중요한 길목에서 상대 팀의 접근을 막으며 오브젝트를 관리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렇기에 정글, 미드인 주오와 수호의 합이 좋아야만 했다.

주오는 재인이 시야를 밝혀둔 맵을 보며 말했다.

“삼거리 길목을 지한이가 막고 재인이가 지원해 줘. 수호랑 은기는 나랑 같이 오브젝트 처리하고.”

“근데 쟤네 정글 벽 넘어올 수 있어서 지한이가 못 막을 수도 있는데.”

“넘어와도 괜찮아. 어차피 넘어올 수 있는 애가 정글밖에 없어. 넘어오면 포커싱 오브젝트에서 바로 상대편 정글로 변경해서 딜로 녹여 버려.”

“알겠어요.”

은기의 대답을 끝으로 각자 맡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갈라섰다. 주오는 처치하면 영구적인 버프를 주는 골렘을 치기 시작했다. 골렘의 피가 반으로 내려갈 때쯤 상대 팀에 밝혀둔 시야를 통해 적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레인 형, 저랑 러쉬 형이랑 둘이서는 못 막을 것 같은데요. 쟤네 다섯 다 뭉쳐서 와요.”

“쟤네 오기 전에 골렘 처리할 수 있으니까 물리지만 말고 거리 조절만 잘해주면 될 것 같아.”

차분한 주오의 말에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 이제 제가 딜 안 넣어도 혼자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저는 그냥 상대 기지로 달릴게요.”

전투를 뒤로하고 수호는 혼자 상대편 기지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지한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혼자 기지로 들어가면 짤릴 것 같은데. 수호 형 없을 때 싸움하면 우리 질 수도 있어요. 형이 지금 제일 잘 커서 딜 넣어줘야 해요.”

지한의 걱정 어린 말에 주오가 팀의 아이템 창을 켰다. 수호와 상대 팀이 보유한 아이템을 확인한 주오가 판단을 내렸다. 수호 혼자 들어가도 승리할 수 있었다.

“아니야. 수호가 지금 방어벽 부수기 빠른 템으로 가서 혼자 기지가 벽만 허물고 나와도 이득이야. 그리고 우리 골렘 먹으면 공격력 버프 받으니까 커버 가능해. 그렇다고 바로 싸우지 말고 거리 조절하면서 쟤네 집 못 가게 막아. 수호는 상황 봐가면서 벽 부수고 더 할 수 있으면 안으로 들어가서 포탑도 부숴줘.”

“네. 그럼 어그로 잘 부탁드려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골렘이 죽었다는 메시지가 화면 가득히 떴고, 수호는 상대의 시야가 없는 길로 넘어가 상대편 기지로 달렸다.

아직 수호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상대 팀은 골렘을 잡느라 피가 빠진 주오를 노리고 들어오려 했다. 하지만 주오는 빠르게 거리를 벌리며 들어오기에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포기하기에는 아쉽게 느껴질 만한 위치에 서서 상대를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체력 아이템을 가득 두른 지한이 떡하니 버티고 서서 주오를 보호했다.

상대 팀은 싸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아직 수호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서 전투를 하게 되면 수호에게 뒤를 잡히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수호는 적의 기지를 막고 있는 방어벽 앞에 도착했다. 성벽을 때리기 시작하자 벽에 금이 조금씩 가기 시작했고, 상대 팀은 수호의 위치를 파악했다.

여기서 돌아가든가, 전투를 통해 상대를 다 잡아내고 기지로 달려가든가.

두 가지 선택지 중에 상대 팀은 전투를 선택했다. 수호가 성벽을 치고 있다고 해도 기지 안에는 보석을 지키는 포탑이 있기 때문에 수호 혼자 보석까지 깨기에는 무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밀고 들어오려는 상대의 낌새에 지한과 재인은 뒤로 조금씩 빠지며 원거리 딜러인 은기가 딜을 넣으면서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완벽하게 도망가지 않으면서 살짝살짝 상대가 들어올 수 있도록 틈을 보였다.

상대는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고전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길어지자 수호가 성벽을 허물고 기지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렇다 할 성과가 없는 상대 팀은 다급해져 이내 생존기를 쓰면서 주오에게 들어왔다. 주오는 상대 팀과 견제하며 거리를 벌리는 동안 체력을 어느 정도 회복해 둔 상태였다.

“형, 쟤네 생존기 다 빠졌어요!”

은기의 외침에 주오가 수호에게 물었다.

“수호야, 적 기지 부수는 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2분이면 돼요. 저희 팀 병사들 지금 밀고 들어올 타이밍이에요. 병사들만 안 죽으면 게임 끝나요.”

차분한 수호의 대답에 재인이 말했다.

“그럼 들어간다. 우리가 전투 져도 쟤네 어차피 기지로 제때 못 돌아가.”

“그럼 들어갑니다아.”

재인의 말에 지한이 신난 듯 장난스럽게 말끝을 늘리며 도망가던 것을 멈추고 뒤돌아 상대 팀을 향해 달렸다.

적들은 갑자기 전투적으로 나오는 지한에게 당황했지만 물러설 곳이 없었기에 이내 지한에게 마주 달려들었다.

“쟤네들 탱커한테 스킬을 다 쓰면 어쩌자는 거지.”

이미 성장이 다 끝난 지한은 다섯 명이 아무리 때려도 체력이 달지 않았다. 지한은 간지럽다고 외치며 캐릭터가 들고 있던 거대한 망치를 휘둘렀다. 상대는 띄우는 스킬이 다섯 명에게 다 들어가고 상대가 떠오르자 재인이 그곳에 폭탄을 던져 스턴을 넣었고, 주오는 땅을 파고들어 상대 팀 아래에서 튀어나오며 공격했다. 은기는 원거리에서 스킬을 퍼부으며 딜을 박았다.

전투 대승.

상대를 모두 잡아내는 순간 고품질 헤드셋에서 정갈한 수호의 무덤덤한 음성이 들렸다.

“보석 다 깼어요.”

그 말을 끝으로 화면에 파란 불꽃이 터지면서 승리라는 문구가 가득 찼다. 아주 깔끔한 승리였다.

“이야, 거기서 백도어할 줄은 몰랐는데. 형, 판단 좋네요. 괜히 챔피언십 우승이 아니구나.”

화면에 뜬 승리 문구에 확인 버튼을 누르며 지한이 수호를 돌아봤다. 수호는 지한을 무덤덤한 얼굴로 흘긋 바라보고는 생수통을 집어 들었다.

“그게 가장 빨리 이기는 방법 같아서요.”

“그래도 만약 저쪽에서 수호 형한테 달려들었으면 어떡해요.”

그럴 수도 있었다. 상대가 주오가 있던 본대에 신경 쓰지 않고 수호 쪽으로 바로 달려가 그를 저지하려고 했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어쨌거나 1대5인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주오는 그들에게 수호가 잡히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주오가 수호 대신 지한에게 답했다.

“설마 수호가 잡힐 리가. 생존기도 좋은 챔피언이었으니까 수호가 죽었다고 해도 우리 팀 병사들이 마무리해 줬을 거야.”

수호를 상대로 많은 게임을 하고, 무엇보다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붙었던 주오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호가 된다는 판단을 한 순간 그건 막을 수 없었다.

수호는 피지컬이 월등히 뛰어나면서 판단력도 떨어지지 않았다. 실력이 좋으니 남들이 생각하지 못할 판단까지 가능했기에 수호가 있는 팀이 언제나 우승컵을 들었던 거다.

씁쓸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해서 주오는 수호를 보며 웃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은기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제라드가 준우승으로 끝났죠. 이수호 하나 때문에.”

은기는 부루퉁한 눈빛으로 수호를 바라봤지만, 그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이고 뒤끝도 없었다.

“연습 끝났으면 이만 가볼게요.”

“어? 안 되는데.”

갑자기 자리를 정리하는 수호를 잠시 당황한 눈으로 보던 주오가 입을 열었다. 수호가 주오를 돌아봤다. 연습도 끝난 마당에 왜 안 된다는 걸까. 의아함이 담긴 뚱한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주오가 더욱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오늘 감독님이 회식하신다고 했었는데. 기억 안 나?”

“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얼핏 어젯밤에 김주오가 자기 전에 그런 말을 했었던 거 같긴 했다.

지난밤을 떠올리는 수호의 눈이 아득히 멍해지자 주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수호의 앞에 섰다. 수호는 앞에 드리우는 긴 그림자로 인해 멍해졌던 정신을 바로잡았다.

“수호는 회식 가기 싫어?”

수호는 싫으면 싫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딱히 가기 싫은 것은 아니었던지라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수호의 소리 없는 명확한 답변에 주오가 활짝 웃어 보였다.

“다행이다. 수호랑 같이 가고 싶었거든.”

“형, 그렇게 말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서운해져요.”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던 세 쌍의 눈 중, 조은기가 부루퉁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주오는 아, 하는 작은 탄성과 함께 은기를 돌아보며 살며시 웃었다. 그게 꼭 조용히 입 닥치라는 것처럼 보여서 은기는 눈가를 찡그리며 입을 닫았다.

저 형은 꼭 수호만 끼면 사람이 달라진다니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은기는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회식이래?”

가만히 구경하던 재인이 물어왔다. 주오는 여상하게 대답했다.

“연습실 옆에 있는 식당이라던데.”

“한식?”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감독님이 외국 음식을 즐기지 않아서.”

주오의 대답에 수호가 눈을 반짝였다. 한국을 떠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음식들이 물리기 시작했던 수호였다. 한식이라는 말에 순간 수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봤자 남들이 보기엔 여전히 부루퉁한 하얀 얼굴이었다. 하지만 못 알아챌 정도는 아니었기에 재인이 수호를 보며 웃었다.

“한식 좋아하나 보네? 하긴, 전에 올스타 때도 한식은 잘 먹었었지?”

재인의 말에 주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신을 살피는 주오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재인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수호를 바라봤다.

“좋아해요.”

“그럴 줄 알았어.”

재인은 수호의 간결한 답에 은근한 미소를 띠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자리를 정리했다. 그런 재인을 여전히 가는 눈매로 바라보던 주오는 이내 수호를 돌아봤다. 눈매가 접힌 주오의 눈빛이 따스했다.

“한식 좋아한다니 다행이네.”

수호가 한식을 좋아하는 것쯤은 주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김주오가 누구인가. 만인에게 소문만 수호의 팬. 그리고 소수는 그런 그를 사생팬이라고 불렀다.

수호에게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재인이 수호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니 주오는 순간 신경이 쓰였다. 혹시나 재인이 자신과 같은 마음일까 봐. 하지만 수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자리를 정리해 가는 무심한 그의 뒷모습에 그런 가능성은 접어뒀다.

만약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다면 애초에 몰랐을 리가 없었다. 언제나 수호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주오의 감은 매우 예민했기 때문에.

세계가 주목하는 선수기에 그를 동경하는 선수들도 수없이 많았다. 수호가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좋았지만, 그만큼 싫은 것도 사실이었다. 쓸데없는 관심이 너무 많았다.

주오의 눈가가 살며시 찡그려졌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수호의 시선에 다시 부드럽게 풀렸다.

“다들 정리는 했어? 이제 회식하러 갈까?”

때마침 이진형이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회식할 기대감인지 진형의 거대한 풍채가 더욱 거대하게 부풀어 있는 듯했다.

“감독님, 오늘 메뉴 뭐예요?”

“응? 삼겹살. 왜, 다들 싫어? 아직 한국 떠난 지 얼마 안 돼서 한국 음식이 그립지 않으려나?”

“늘 먹던 거였는데 그립지 않을 수가 있어요?”

“그치? 그럼 빨리 준비해. 배고프다.”

은기의 시선이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늦게까지 잡혀 있던 연습 경기 때문에 이미 시간이 8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문득 시간을 확인한 선수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허기짐을 뒤늦게 느끼곤 헐레벌떡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어서 가요, 배고파요!”

“그래그래, 가자.”

지한의 당찬 외침에 진형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고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수호였지만, 그래도 타국에서 느낄 수 있는 고향의 맛이었기에 눈을 빛내며 걸음을 옮겼다.

* * *

회식 장소는 가까웠다. 연습실이 있는 경기장 바로 옆 블록에 있었기에 허기짐이 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선수들과 감독, 코치, 각 팀의 직원 몇 명이 나란히 앉자 점원이 한가득 고기를 담은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은기야, 고기 구워라.”

“감독님은 매일 저한테만 시키죠.”

은기가 진형의 말에 투덜거리면서도 집게를 집어 들었다. 제라드에 은기만큼 고기를 잘 굽는 사람이 없었기에 언제나 굽기 담당은 은기였다. 그리고 그건 올스타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판에 고기를 올리는 은기의 옆으로 주오와 수호가 앉았다. 수호는 맛있는 소리를 내며 불판에 올라간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며 밑반찬으로 나온 상추를 하나 집었다.

“쌈장 줄까?”

주오가 기다렸다는 듯 쌈장이 담긴 종지를 가져와 수호 앞에 놨다. 수호는 고개를 꾸벅여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상추 끝을 쌈장에 살짝 찍어 입에 밀어 넣었다.

야금야금 풀을 뜯어 먹는 수호를 주오는 귀엽다는 듯이, 진형은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맛있어?”

“네.”

진형의 물음에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는 다시 상추에 쌈장을 콕 찍어 입에 넣었다. 손바닥보다 작았던 상추는 이내 전부 수호의 입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상추 한 장을 모두 먹은 수호는 이어서 같이 나온 파채를 집어 입에 밀어 넣었다.

진형이 야금야금 조용히 야채를 입으로 밀어 넣는 수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채현이가 너 야채 좋아한다고 하긴 하던데. 이것도 먹을래?”

채현은 수호가 속해 있는 주이의 감독이었다. 둘 다 잘하는 팀이어서 상위 라운드에서 자주 부딪히기도 하고, 각각 주이와 제라드로 오기 전에 한 팀에서 감독과 코치를 하기도 했기에 채현과 진형은 사이가 제법 좋았다. 그래서 올스타전 감독을 진형이 맡는다니 채현이 수호에 대해서 언질을 해둔 모양이었다.

진형은 테이블 끝 쪽, 수호의 손에는 닿지 않는 거리에 있던 샐러드를 가리켰다. 육식파인 은기와 진형 앞에 있던 샐러드는 어차피 찬밥 신세였다.

수호는 진형이 가리킨 샐러드를 보고는 입안에 있던 파채를 삼켜 넘기며 대답했다.

“……안 드시면 주세요.”

“그래, 많이 먹어라. 어차피 은기랑 나는 야채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냥 제라드 애들이 보통 다 그렇다면서 진형이 허허 웃었다. 주오는 진형에게서 샐러드 접시를 건네받아 수호 앞에 놓았다.

“많이 먹어. 그래도 너무 야채로만 배 채우지 말고.”

“맞아. 고기도 먹고 해야지. 수호는 너무 말랐다.”

진형이 지글지글 노릇하게 구워지는 고기를 보던 시선을 떼어 수호를 바라봤다. 유독 피부가 하얀 편이라 그런지 수호의 마른 몸이 더욱 말라 보였다. 진형은 자라지 않는 아들이 걱정스러운 아버지 같은 얼굴을 하며 수호를 찬찬히 살폈다.

“역시 너무 말랐어. 체력이 있어야 경기도 오래 뛰지. 많이 먹어라, 수호야.”

진형이 노릇하게 익은 고기 한 점을 집어 수호의 앞접시에 놨다. 수호는 고개를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어쩜 저렇게 말랐을까.”

진형은 수호의 마른 체형에 꽂혔는지 계속 ‘너무 말랐네, 말랐어’라며 중얼거렸다. 풍채가 큰 진형 눈에는 수호가 유독 왜소해 보이는 듯했다.

물론 수호가 마른 편이긴 했다. 하지만 눈살이 찡그려질 만큼 마른 것은 아니었다. 저렇게 걱정 어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처음 겪은 수호도 자신의 팔뚝을 바라봤다.

그렇게 말랐나? 하는 의문이 담긴 수호의 생각을 눈치챈 주오가 입을 열었다.

“신경 쓰여?”

“아뇨, 그건 아닌데, 정말 그런가 해서요.”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수호는 이내 자신의 몸에서 시선을 거두며 진형이 준 고기를 집어 들었다. 고기에 상추에 파채 등등 밑반찬으로 나온 야채를 둘둘 둘러 입에 넣는 수호를 보며 주오가 웃었다.

“예뻐. 너무 신경 쓰지 마.”

주오의 말에 고기를 우물 씹던 턱이 멈췄다. ‘예뻐’라는 말이 과연 자신과 어울리는 말인가. 의문을 띤 수호의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았다.

이윽고 수호는 다시 고기를 씹기 시작했다.

뭐 어떤가. 저 사람은 언제나 저런 느낌이었는데.

생각을 그치고 고기를 씹는 수호와 달리 주오의 말에 은기는 고기를 굽던 손을 멈추고 주오를 바라봤다. 진짜 미쳤냐고 묻는 듯 은기의 눈빛이 매서웠다.

“아, 형. 그만, 그만!”

“뭐가.”

결국 은기는 참지 못하고 김주오를 부릅뜬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주오는 은기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무심한 눈으로 마주 봤다. 그 모습에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오른 은기가 눈가를 찡그리고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밥 먹을 때는 밥만 먹자고요.”

“너는 왜 또 죽상이야?”

주오가 수호에게 품은 마음을 다 알아버린 은기와 달리 아무것도 모르는 진형은 은기를 타박했다. 은기는 불판 위에서 구워져 가는 고기처럼 가슴이 뜨겁고 답답해져 연거푸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형의 옆에 앉아 있던 지한이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무 형은 레인 형이 수호 형이랑 사이좋은 게 질투 나나 봐요.”

무슨 그런 망발을 하냐는 듯한 눈으로 은기가 지한을 바라봤다. 지한은 그런 은기의 눈빛에도 개의치 않고 맑게 눈을 빛냈다. 조은기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채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못 채는 척하는 건지. 어쨌거나 조은기는 자신을 놀리는 것 같은 이지한의 맑은 눈이 싫었다.

“아니, 볼 때마다 무 형이 레인 형 저지시키는 것 같아서요.”

“……네가 아무것도 몰라서 그래. 네가 뭘 알아!”

은기는 해탈한 듯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울분이 치미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한은 처참한 은기의 얼굴을 감상하며 고기를 씹었다.

“제가 뭘 알겠어요.”

고기를 씹어 삼킨 지한이 여상하게 대답했다.

은기는 답답한 자신과는 달리 별걱정 없어 보이는 지한을 노려봤다. 그리고 이내 ‘그래, 네가 뭘 알겠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익어가는 고기를 신경질적으로 잘랐다.

“하하, 다들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사이좋네. 걱정 없겠어.”

“감독님도 제 마음 모르는 건 마찬가지예요!”

은기는 속없이 웃는 진형에게 부루퉁한 얼굴로 투정을 부렸다. 진형은 그런 은기를 웃음으로 달랬다. 전혀 쓸모없는 위로였다.

“아, 맞아. 너네 다 성인이지? 술 시킬까? 역시 회식에는 술이지.”

진형이 옆 테이블에서 이미 각 팀 사무국 직원들이 술을 까는 걸 보며 물어왔다.

진형의 말에 가장 먼저 열렬하게 대답한 건 지한이었다. 스물인 지한은 술이라면 마다치 않았다. 지한은 손을 번쩍 들고는 좋아요를 외쳤다.

속이 답답한 은기도 진형의 말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수호도 딱히 싫은 건 아니었기에 긍정 어린 침묵으로 진형을 바라보자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 보였다.

“친목 도모에는 역시 술이 빠질 수가 없지. 저기요! 여기 후레쉬 세 병이요!”

베를린에서 후레쉬라니 정말 기이했지만, 그래도 한식에는 한국 술이 최고였다.

점원이 가져온 차가운 소주의 뚜껑을 과감하게 깐 진형이 선수들의 술잔에 술을 꼴꼴 부었다.

두 손으로 술잔을 받아 든 수호에게 술을 따르며 진형이 물었다.

“술 괜찮지? 몸에 안 받으면 안 마셔도 돼.”

“괜찮아요.”

수호는 귀하게 자란 도련님 같은 외모와는 달리 말술이었다. 주이에서도 주당으로 소문난 선우보다 훨씬 잘 마셨다. 수호가 술을 즐겨 하지 않아 주이의 팀원이 아니면 모르는 이야기였지만.

주오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 걱정 어린 얼굴로 수호를 바라봤다.

“감독님 강요하시는 분 아니니까 무리해서 마시지는 마.”

“네.”

“수호는 주량이 어떻게 돼?”

수호는 어느새 입안에 넣었던 당근을 우물거리며 씹어 삼키며 답했다.

“네 병 정도 될 거예요.”

“……네 병?”

“그렇게나 마신다고?”

수호의 대답에 놀란 건 주오만이 아니었다. 수호의 앞에 앉아 있던 재인마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호를 바라봤다. 무슨 술을 그렇게나. 두 사람의 표정이 딱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수호는 자신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두 사람을 슬쩍 보고는 이내 다시 노릇하게 구운 마늘을 입에 밀어 넣었다. 고소했다.

“뭐야, 채현이가 그런 말은 안 해줬는데. 그럼 수호 챙겨야 할 걱정은 없겠네. 그런데 주오 너는 적당히 마셔라.”

너털웃음을 짓던 진형은 여전히 수호를 바라보고 있는 주오에게 주의를 줬다.

제라드 팀을 처음 꾸릴 때 팀에서 또라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봉(BONG) 김우찬이 주오에게 반강제로 술을 먹였던 날이 있었다. 주오는 술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날 거하게 취하고 말았다.

그때 190㎝가 넘는 큰 키의 주오를 업고 가느라 팀원들이 온갖 고생을 했기에 그 뒤로 진형은 주오가 술을 먹을 때마다 늘 주의를 줬다. 아마 진형이 술은 강요하지 않게 된 데 그날의 영향이 없지는 않을 거다.

은기는 그날의 아찔했던 기억에 불안한 얼굴로 주오를 돌아봤다.

“형, 전 형 감당 못 해요.”

주오가 취하면 그를 부축해서 호텔까지 데리고 가야 할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기에 은기는 주오가 멀쩡하기를 바랐다.

주오도 주량 때문도 있지만, 애초에 알코올 특유의 코를 찌르는 맛을 즐기지 않아 술을 즐기지 않았다.

“감당 안 해도 되니까 걱정 마.”

“그래요. 꼭 그렇게 해줘요.”

은기는 두 손을 모아 꼭 쥐고 빌듯이 주오를 바라봤다.

주오와 은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호가 달싹 입을 열었다.

“형은, 술을 못하시나 봐요.”

“어? 응. 좋아하는 편도 아니야.”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수호에 살짝 눈이 커졌던 주오가 이내 살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수호는 ‘음,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리며 술잔을 들었다.

주오가 의외로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한 외모뿐 아니라 주어진 여건에서 완벽한 전략을 짜는 주오는 모든 면에서도 완벽할 것 같았다. 그런 주오에게 모자란 부분이 있다는 게 조금은 신기했다.

수호를 바라보는 주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수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모습이었다.

“그게 궁금했어?”

“네.”

어쨌거나 수호가 자신에 대해 궁금해했다는 게 좋은 주오는 환하게 웃었다.

“또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다 대답해 줄게.”

“더 없어요.”

“그러면 내일 또 생기게 되면 물어봐 줘.”

주오의 말에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자신을 궁금해하기를 바라는지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어려운 건 아니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수호가 만족스러운지 주오는 즐기지 않는 술잔을 반갑게 들어 올렸다.

“그것만 먹어라. 제발.”

유독 화사하게 핀 주오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린 진형이 이내 큰 소리로 짠을 외쳤다.

투명한 잔에 담긴 술이 경쾌하게 찰랑댔다. 수호는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화끈한 느낌에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술이 한잔 들어갔다고 선수들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첫 회식. 다른 팀 사람들과 짧은 시간이지만 모여 팀을 이룬다는 기대감. 설렘과 비슷한 감정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웠고, 테이블에는 술병이 한 병, 두 병 늘어갔다.

“저 잠깐 인터넷 방송 켜도 돼요?”

술을 연거푸 들이마신 지한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물어왔다. 진형은 술을 한잔 들이켜며 지한을 돌아봤다.

“왜?”

“올스타전 와서 한번 방송하겠다고 했었는데 다 같이 있는 지금이 좋을 것 같아서요.”

지한이 핸드폰을 조물거렸다. 요즘 프로게이머들이 스트리머 계약을 하거나 따로 인터넷 방송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던 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방금 전에도 주이 쪽 사무국에서 짧게 수호의 영상을 찍고 가기도 했었다.

다들 취한 것도 아니었기에 걱정 없이 진형이 허락하자 지한이 웃으며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지한이 방송을 켜자마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빠르게 입장했다.

“안녕하세요! 피플입니다. 올스타전에서 방송 한 번 켜기로 약속해서 켰어요. 지금은 첫 회식 중이랍니다.”

지한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자 채팅창이 빠르게 올라왔다.

[피하!]

[헐, 피플 진짜 왔어.]

[오빠, 반가워요~]

[올스타전? 누구랑 있는 거임?]

올라오는 채팅 중에 누구랑 있는지 묻는 질문을 발견한 지한이 카메라를 돌려 회식 자리를 비췄다.

“감독님, 러쉬 형, 레인 형, 무 형, 그리고 수호 형! 팀원들이랑 있습니다. 부럽죠?”

“안녕하세요.”

러쉬, 정재인이 인사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은기도 카메라가 자신에게 향하자 손을 작게 흔들었다.

“수호 형이랑 레인 형도 인사해 달라고 하시는데 손 한 번만 흔들어주세요.”

역시나 시청자들에게 핫한 선수는 수호와 주오였다. 지한이 나란히 붙어 있는 두 사람에게 카메라를 비췄다. 주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고, 수호는 시선을 살짝 내리며 고개를 꾸벅였다.

이미 데뷔한 지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언제나 이런 자리가 불편한 수호였다. 그래서 수호는 애초에 스트리머 계약이나 개인적으로 방송을 하지 않는 선수로 유명했다. 공식 경기나 주이에서 자체적으로 만드는 영상에서만 볼 수 있는 수호의 얼굴을 사적인 방송에서 보는 건 정말 희귀한 기회였다.

그러다 보니 지한의 방송은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와, 진짜 이수호야.]

[형형, 지인짜 너무 조하애요!!]

[옆에 레인도 있어ㅠㅠ 무슨 조합이야~]

지한은 복잡한 인파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내 장난스럽게 웃었다.

“수호 형, 진짜 인기 많네요.”

지한의 감탄 어린 음성에 빠르게 채팅이 올라갔다.

[레인 형도 다시 보여줘.]

[수호랑 레인 둘이 같이 앉아 있네. 이제는 좀 친해졌나?]

“글쎄요. 둘이 같은 방 쓰니까 친해지지 않을까요?”

[오, 이번에는 수호랑 친해지는 거 성공하겠다.]

[와, 레인이 같이 쓰자고 그랬나?]

지한은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을 차분히 읽으며 대답했다.

“방 배정은 제비뽑기였어요. 그러면 저희는 이만 다시 회식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아요. 진짜 잠깐 얼굴 보여 드리려고 켠 거라. 그러면 다음에 다시 켤게요!”

[아쉬워요ㅠㅠㅠ 끄시기 전에 선수들 한 번만 다시 보여주시면 안 돼요?]

아쉬움이 가득한 시청자들의 반응에 지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 앉은 형들을 바라봤다. 한 번만 다시 찍어도 되냐고 표정으로 묻는 맑은 지한의 얼굴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수호는 문득 주오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굳어 있다고 해야 할지, 불편하다고 해야 할지, 불만인지.

수호와는 다르게 팬들과 만나는 자리를 불편해하지 않는 주오였다. 팬들에게 잘하기로 유명한 주오가 뭔가 불편해하고 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어 놀라웠다.

수호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주오의 표정이 다시 부드럽게 풀렸다. 어느새 지한이 주오를 찍고 있었다.

주오는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늦은 시간인데 많이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이제 어서 주무세요.”

이미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을 맞이하고 있을 한국의 팬들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넨 주오는 여느 때와 같이 다정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잘못 본 건가. 수호는 주오가 언뜻 불편한 내색을 내비쳐 보였던 게 자신의 착각이었나 싶었다.

하긴 김주오라는 인간은 언제나 정갈하게 정리된 다정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인간답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가 불편했다.

수호에게 주오는 너무 완벽한 사람이었다. 모난 곳 하나 없이 완벽한 사람. 그런 사람이 불편한 기색이라니 역시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수호 형?”

주오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수호는 자신을 부르는 지한의 음성에 정신이 반짝 들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지한과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오마저도 의아한 눈을 하고 있었다.

수호는 한 박자 늦게 아, 작은 탄성을 내뱉고는 지한의 카메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수호를 끝으로 지한이 시청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종료 인사를 건넸다.

방송이 꺼지고 다시 회식 자리는 시끌벅적해졌다. 하지만 반대로 조용해진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김주오였다.

그것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수호였다. 시시콜콜한 말을 건네는 주오는 평소와 똑같았지만, 조금은 풀이 죽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수호는 자신의 착각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지만,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수호야, 이거 다 익었다.”

집게로 노릇하게 잘 구워진 고기를 집어 수호의 앞접시에 놓는 주오를 바라봤다. 수호의 시선을 느꼈는지 주오가 눈을 맞추고는 둥글게 눈가를 접어 웃었다.

“왜? 뭐 할 말 있어?”

“아뇨.”

주오의 물음에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싱거운 수호의 반응에 주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꼭 하고.”

주오가 빙긋 웃고는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안에 든 술을 비웠다.

회식 자리는 한껏 달아올랐다.

아직 술을 조절해서 마시지 못하는 지한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헤실 웃으며 수호에게 술잔을 들이밀었다.

“형, 짠해요.”

“아, 어.”

러쉬, 정재인까지 합세하며 유리잔이 챙, 예쁜 울림을 내며 부딪쳤다. 시원하게 한 잔을 한입에 털어 넣는 지한, 재인과는 다르게 수호는 차분히 잔을 비워냈다.

지한이 잔을 내려놓으며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수호를 바라봤다.

“저 진짜 수호 형 팬이거든요. 고등학생 때 형 게임 플레이 영상 보고 프로 하기로 결심했어요. 진짜 너무 멋있는 거 있죠. 형 피도 반밖에 없었는데 어떻게 3대1을 할 생각을 했어요? 거기다가 이기기까지 하고……. 진짜 그거 보고 전 형이 미친 줄 알았어요.”

“아…….”

칭찬인 거겠지? 수호는 강렬하게 눈을 빛내면서 말을 건네는 지한에게서 시선을 살짝 돌렸다.

상대의 말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수호를 동경해 프로가 된 지한에게는 그것마저도 멋있어 보였다.

수호와 같은 팀으로 지낸 적은 없지만, 올스타전에서 수호를 여러 번 겪어본 재인은 수호 나름대로 쑥스러워한다는 걸 알아서 그저 웃을 뿐이었다.

“형, 악수 한 번만 해주시면 안 돼요?”

지한이 무슨 큰 부탁이라도 하는 듯 수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호는 거절당할 각오를 마친 지한에게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이거면 괜찮아?”

“아, 형. 진짜 너무 좋아요.”

지한은 수호가 손을 물릴 새 없이 빠르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두 손으로 수호의 손을 꽉 잡고서 힐끔힐끔 수호의 손을 내려다봤다. 지한도 수호와 마찬가지로 체격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손만은 다부졌다. 건강한 빛으로 탄 지한의 손안에서 수호의 하얗고 마른 손이 움찔거렸다.

지한이 수호의 손을 살며시 주무르며 요리조리 살폈다.

“같은 손인데 어떻게 그런 플레이가 나오죠? 근데 형은 손도 가느네요. 되게 예쁘다.”

감탄 어린 지한의 말에 재인도 수호의 손을 바라봤다. 하얗고 긴 손가락과 손등 아래로 곧은 뼈대가 고스란히 보였다. 남자의 손인데도 손톱과 손마디가 단정해서 누가 봐도 예쁜 손이라고 할 만했다.

“몰랐는데 수호 너 손 진짜 예쁘다.”

“그쵸. 이런 손은 처음 봐요.”

지한과 재인이 말을 주고받으며 수호의 손을 살폈다. 수호는 이만 손을 걷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멍하니 손을 내준 수호가 두 사람이 자신의 손에서 흥미를 잃기를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계속 그러고 있으면 수호가 불편해할 것 같은데.”

여느 때와 같이 낮고 다정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 다 예상하지 못했던 음성이었기에 그들의 시선이 음성이 날아온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 주오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오가 다시 한번 지한이 꼭 붙잡은 수호의 손에 시선을 두자 지한이 아, 작은 소리를 내며 꽉 잡았던 수호의 손을 놓았다.

“악수만 한다는 게 생각보다 오래 잡고 있었네요. 형, 불편했으면 죄송해요.”

지한이 수호를 향해 미안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며 사과했다. 수호는 과하게 미안해하는 지한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재인은 아차 한 얼굴로 주오와 수호를 잠시 보다 이내 즐겁다는 듯 웃으며 주오에게 시선을 뒀다.

“생각해 보니까 주오도 수호 팬이었지. 김주오는 수호랑 악수해 봤지?”

차분하면서도 장난스럽게 흐르는 재인의 물음에 주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여전히 다정한 눈이었지만, 미미하게 짜증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챈 사람은 적어도 이 술자리에서는 한 사람뿐이었다. 시선을 받고 있는 당사자, 정재인.

재인은 주오의 불만스러운 눈빛에도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없나 보네.”

“수호는 남이랑 닿는 거 싫어해.”

“아, 그래요? 형, 죄송해요. 저는 몰랐어요…….”

주오의 말에 수호에게 더욱 미안해진 사람은 지한이었다. 지한이 정말, 정말 미안하다는 얼굴로 사과를 해오자 수호는 아니라고 말할까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몰랐네.”

“수호한테 너무 그러지 마.”

“그래야지. 수호야, 불편했으면 미안해.”

“아니에요.”

수호의 간결한 답으로 미묘하게 어색했던 상황이 끝이 났다.

지한은 한동안 수호가 아닌 주오의 눈치를 살피다 술이 들어가자 다시 헤실헤실 웃으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멀어지는 지한을 보다 술잔을 들었다. 재인도 술을 못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수호, 주오와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술잔을 비워갔다.

“난 너네 보는 게 너무 재밌어.”

“뭐가.”

난데없이 흐르는 재인의 말에 주오가 대답했다. 수호는 그 옆에서 무슨 의민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언뜻 주오는 재인의 말의 의미를 눈치챈 듯 눈가를 찡그렸다. 재인은 그런 주오를 보며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김레인 파이팅!”

“하아…….”

“너무 그러지 마. 난 진심으로 응원하는 거니까.”

재인의 능청스러움에 주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재인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수호는 이게 무슨 상황일까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뭘 파이팅하고 응원하는 거지. 의문스러워하는 수호의 눈빛을 눈치챘는지 재인이 수호를 바라봤다. 어쩐지 그의 검은 눈이 즐거워 보였다.

“수호도 어서 눈치채길 바랄게.”

“뭐를요?”

“글쎄, 뭘까?”

“정재인, 그만해.”

주오가 이번에는 확실하게 눈가를 찡그리며 재인을 불렀다. 재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저 새끼가. 딱 이런 눈빛으로 주오가 재인을 바라봤다. 재인은 주오의 반응이 웃기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 미안.”

“수호야 헛소리 듣지 말고 이거 먹어.”

주오는 수호의 접시에 고기를 올렸다. 아까부터 마르지 않는 샘처럼 접시가 비면 자꾸만 고기로 채워 넣는 주오였다.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배불러요.”

“그러면 이거 마셔. 술만 너무 마시지 말고.”

이번에는 콜라였다. 수호도 이번에는 기꺼이 주오가 건넨 잔을 받았다. 소주만 먹었더니 입안이 묘하게 썼다. 입안에 달콤하고 톡톡 튀는 상큼함이 퍼지자 한결 편해졌다.

주오는 잘 받아먹는 수호를 보며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꼭 아끼는 애완동물을 보는 주인이나,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는 아버지 같은 미소였다.

수호는 왼쪽 얼굴에서 느껴지는 주오의 포근한 시선이 껄끄러워 그저 조용히 콜라를 마셨다.

그렇게 술자리는 무난하게 계속 이어졌다.

그것이 문제였다.

사건·사고는 무난함 뒤에 갑작스럽게 생겨나는 법.

주오가 한순간 말을 잃고는 뻗어버렸다. 술을 마시다 갑자기 자리를 주섬주섬 치우는 주오를 보며 수호는 정말 깔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김주오는 테이블에 이마를 박고 엎어졌다.

수호는 놀라 평소보다 커진 눈으로 전조증상도 없이 갑자기 엎어진 주오를 바라봤다.

“……형?”

수호는 갑자기 쓰러진 주오의 모습에 당황하며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하지만 주오는 묵묵부답이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주오는 수호가 부르면 언제나 대답해 왔는데, 지금은 답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놀라 수호가 조심스럽게 주오의 어깨를 잡았다. 잠든 건가 싶어 그를 살며시 흔들었지만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반응 없는 주오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수호는 마주 앉아 있던 재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시선의 주인공인 재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술잔을 비우며 시끌벅적한 옆 테이블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감독님! 김주오 죽었어요.”

“뭐?!”

화기애애하게 직원들과 놀던 진형이 재인의 부름에 번뜩 정신을 차리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회식 분위기에 취해 주오가 술을 얼마나 마시는지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형이 급하게 자리를 정리하고 주오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그 뒤로 진형과 함께 옆 테이블에서 놀고 있던 은기가 다가와 미동조차 없이 엎어진 주오의 어깨를 잡았다.

“형, 형? 자요?”

조심스럽게 흔들던 은기의 손길이 거세져도 주오는 반응조차 없었다. 엎어져 있는 주오의 몸이 크게 흔들린 탓에 술잔이 떨어질 듯 테이블 끝에 아슬아슬 걸렸다. 수호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술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진형은 그럼에도 꿋꿋하게 엎어져 일어나지 않는 주오가 곤란스럽다는 듯 웃었다.

“하하, 거하게 취했나 본데? 한 잔만 먹겠다던 놈이 안 본 사이에 몇 잔을 더 마신 거야? 은기 너 안 말리고 뭐 했어?”

진형은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옆에 있던 은기를 나무랐다.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오자 은기가 도끼눈을 하고 진형을 바라봤다. 세상 억울한 얼굴을 한 은기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뭐 하긴요. 감독님이랑 술 마셨잖아요. 하, 이 형은 술도 못 마시면서 뭘 또 마셨대요. 어떻게 데리고 가라고.”

은기가 귀찮다는 듯 엎드린 주오의 넓은 등짝을 도끼눈으로 노려봤다. 하지만 그렇다고 잠든 사람이 일어날 리는 없었다. 역시나 주오는 미동 없이 그 자리 그대로 잠들어 있었고, 은기는 주오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오의 주변에 사람이 몰려 있는 것을 발견한 지한이 은기의 어깨너머로 얼굴을 쭉 내밀었다. 그러곤 엎어진 주오를 발견하고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레인 형 술 약하다더니 진짠가 보네요. 마시는 거 못 봤는데 언제 이렇게 마셨대요?”

해맑은 지한의 말에 은기가 눈가를 찡그리며 자신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있는 지한을 돌아봤다.

“너도 못 봤어? 너 아까 주오 형이랑 같은 테이블에 있었잖아.”

“아? 그렇긴 한데. 음…… 기억 안 나요. 마셨던가?”

“저랑 수호랑 있을 때 한두 잔 정도 더 마셨어요. 그 정도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은기랑 지한의 대화를 듣던 재인이 진형을 보며 말했다. 진형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다 이내 주오의 뒤통수를 보며 중얼거렸다.

“얘가 왜 그랬지. 알아서 술 조절하는 앤데.”

주오가 술을 못 마시기는 했지만, 술자리를 같이한 적 있는 사람들도 그 사실을 모를 만큼 조절을 잘하는 편이었다. 애초에 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술자리에 잘 참여하지도 않지만. 그런 애가 이렇게 엎어질 정도로 먹을 일이 뭐가 있을까 싶어 진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진형뿐이 아니었다. 주오가 술을 좋아하지 않고, 잘 마시지 못한다는 것을 은기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은기는 주오가 이렇게 잠들어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은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어서 눈가를 찡그렸다. 그러다 술잔을 곱게 들고 물끄러미 주오를 보고 있던 수호를 발견하곤 입을 열었다.

“술 먹다가 무슨 일 있었어? 형이 이렇게 취할 사람이 아닌데.”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자신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은기에게 수호가 건조한 음성으로 답했다. 수호는 왜 자신에게 저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수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기억을 곰곰이 되짚어봤다. 하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그냥 시시콜콜한 대화만 오갔을 뿐이었다.

문득 수호는 주오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것이 떠올랐다. 기분 나빠 보이던 게 착각이 아니었나.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 봐요.”

“뭐? 왜? 무슨 일인데.”

수호의 담백한 말에 은기가 놀라 다그치듯 수호에게 물었다. 수호는 번쩍이는 은기의 눈빛을 평온한 검은 눈으로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그건 모르겠어요. 그냥, 그래 보였어요.”

“그게 뭐야…….”

은기는 허무하다는 듯 눈가를 살짝 찡그리고는 이내 수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수호는 들고 있던 술잔을 안전해 보이는 곳에 올려두고 주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팔을 포개고 엎드려 있는 주오의 옆얼굴이 살짝 보였다.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이 완벽하게 반듯했다.

신기했다. 취해서 자는 모습도 참 그림 같았다.

그래도 평소와 다른 점이 있긴 했다. 늘 그려 넣은 듯하던 웃음이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1페이지만 있는 줄 알았던 화보가 2페이지까지였다는 걸 발견한 느낌이랄까. 근데 그게 무슨 느낌이지.

수호는 문득 자신이 무슨 느낌을 받은 건지 몰라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딱히 확 와닿는 게 없어서 생각을 멈췄다.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신기한 것 같았다.

수호는 회식은 이미 그른 분위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형은 주오를 다시 두어 번 흔들고는 미동 없는 그를 보며 혀를 찼다. 그리고 은기를 돌아봤다.

“은기야, 주오 좀 업어라.”

“감독님, 저 허리 부러져요.”

“젊은 놈이 그렇게 약해서 되겠냐. 빨리 주오 일으켜. 숙소에 눕혀놔야겠다.”

“하아…… 진짜 감독님이고 주오 형이고 둘 다 미워요.”

은기가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참혹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오를 부축할 사람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은기는 마지못해 주오의 팔을 들어 어깨에 둘렀다.

헬스광인 은기가 몸이 좋다고 한들, 190㎝가 넘는 술 취한 남자를 혼자 부축하기는 버거웠다. 자연스럽게 은기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입에선 끙끙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감독님, 도와주세요.”

“너는 운동을 그렇게 하면서 왜 힘을 못 써?”

“이러려고 운동하는 거 아니니까 못 쓰죠.”

이진형은 투덜거리는 조은기와 함께 늘어진 주오를 부축했다.

“우리는 주오를 일단 데려다줘야 할 것 같은데, 더 있을 사람들은 남아서 마저 즐기다 가세요.”

“데려다주고만 오시는 거면 다시 오세요! 아직 자정도 안 넘었는데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운걸요.”

사무국 직원이 진형을 붙잡았다. 진형도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웠는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형이 은기와 함께 주오를 데리고 나가자 그 상황을 지켜보던 수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수호 형 어디 가요?”

수호가 자리를 뜨는 모습을 발견한 지한이 큰 목소리로 그를 붙잡았다.

“아, 나도 이만 가볼까 해서. 졸리거든.”

“벌써요……?”

시계는 이제 오후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황당하다는 듯 시계와 수호를 번갈아 보는 지한의 뒤로 재인이 걸어왔다.

“피곤하면 들어가야지. 주오랑 같은 방이니까 수호 네가 주오 좀 봐줘. 그러면 내일 보자.”

“네, 내일 뵙겠습니다.”

수호는 다시 한번 자신을 붙잡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는 지한과 재인, 그리고 사무국 직원분들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인사를 마친 수호는 가게 입구를 빠져나가고 있는 진형과 은기를 향해 비소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가게를 빠져 나서자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술이 센 편이긴 하지만 수호도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후끈한 열기를 빼앗아 가는 바람에 수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원하다. 수호는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문지르며 앞서 택시를 잡고 있는 두 사람에게 걸어갔다. 이진형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호의 발걸음을 눈치채고는 뒤를 돌아봤다.

“어? 수호 왜 나왔어. 바람 쐬러?”

“아뇨. 저도 이만 들어가 보려고요.”

“그러니? 그래, 같이 가자. 얘가 취하면 가만히 자긴 하는데 그래도 혼자 두는 것보단 누구라도 같이 있는 게 좋겠다.”

진형과 수호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조은기의 한쪽 눈썹이 미묘하게 올라갔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이윽고 불안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야, 이수호. 혹시나 싶어서 그러는 건데 혹시 형이 헛소리하면 그냥 무시해.”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할 거라는 건지. 수호는 조은기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수호도 술 마신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줄 정도로 한가하진 않았다. 워낙 잠이 많기도 해서 숙소로 돌아가면 씻고 바로 침대로 기어 들어갈 참이었다. 그래서 조은기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진형과 은기는 잡힌 택시 안으로 주오를 밀어 넣었다. 조수석에 탄 진형 때문에 수호는 자연스럽게 뒷좌석으로 향했다. 그 안에는 이미 먼저 탄 은기와 주오가 앉아 있었다. 주오는 가운데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주오 옆에 조심히 자리를 잡고 앉은 수호가 문을 닫자 택시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회식 장소와 숙소가 그렇게 멀지 않았기에 택시는 큰길을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 앞에 도착했다.

수호가 먼저 내려 주오를 부축해 주려 하자 진형이 조수석에서 내려 수호를 말렸다.

“내가 할게. 주오가 생각보다 무거워서 힘들 거야.”

자연스럽게 뒤로 밀린 수호는 진형과 은기가 주오를 부축해 침대에 눕힐 때까지 그저 두 사람의 뒤를 조용히 따를 뿐이었다.

조은기는 주오를 침대에 눕히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짜 다시는 주오 형 부축 안 할 거예요.”

“나도 그러고 싶다.”

진형과 은기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며 침대에 곱게 누워 있는 주오를 보고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은기는 방 한쪽에 멀뚱히 서 있는 수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형이 기분 나빠 보였다고?”

“네, 그래 보였는데. 제 착각일 수도 있어요.”

“거참, 신기하네. 뭐가 그렇게 기분이 나빴을까.”

제라드 소속 선수들은 좋게 말하면 장난기가 많았고, 나쁘게 말하면 짓궂은 편이었다. 그런 애들이 온갖 난동을 부려도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는 게 주오였기에, 그가 기분 나빠 보였다는 게 진형은 신기할 뿐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언제나 기분이 좋을 수만은 없었기에 진형은 주오를 한번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러면 우리는 이만 가보마. 주오 잘 부탁한다.”

“안녕히 가세요.”

“너, 진짜 조심해야 된다. 꼭이야. 형이 뭐라고 하면 일단 그냥 안 된다고 해.”

방을 나서기 위해 수호의 앞을 지나던 은기가 심각한 얼굴로 헛소리를 해왔다. 수호는 이게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조은기는 굉장히 신기한 사람이었다. 주오도 그랬지만, 은기는 또 다른 의미로 신기했다. 늘 자신만 보면 의미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은기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의아함이 가득한 수호의 검은 눈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뭣도 모르는 수호에게 성을 내봤자 아무 의미 없었다. 조은기는 아무것도 모를 가엾은 수호에게 입을 열었다.

“됐다. 좋은 밤 보내라. 그리고 너랑 나랑 동갑인데 그냥 말 놔. 그럼 간다.”

“그래. 잘 가.”

“훨씬 듣기 편하네.”

조은기는 살며시 웃으며 방을 나섰다.

두 사람이 나가자 방에는 고요함만 남았다. 수호는 진형과 은기가 부축한 뒤로 변함없는 자세로 누워 있는 주오를 힐끔 바라봤다.

그래도 씻고 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수호는 그를 깨워볼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깨워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아 결국 포기했다.

애초에 그렇게 주오에게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수호는 조심스럽게 주오에게 다가가는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침대 중간에 누워 있는 탓에 그의 발이 침대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래도 양말은 벗겨주는 게 낫겠지.”

양말을 신고 자는 건 답답하니까. 수호는 조심스럽게 주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혹시나 주오가 깰까 수호의 행동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괜히 중간에 깨면 어색할 것 같았다.

호의였지만, 괜히 도둑질을 하는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수호는 쿵쿵거리는 심장 때문에 손이 떨리는 것 같아서 작게 숨을 내쉬고는 주오의 양말 한쪽을 잡았다.

천천히. 이제 내리기만 하면 됐다. 양말을 벗기면서도 주오가 깰까 힐끔힐끔 살피며 양말을 벗겨낸 수호가 그의 양말을 가지런하게 방 한쪽에 뒀다.

뭔가 뿌듯했다. 퀘스트에 성공한 것 같은 이 가벼운 느낌. 이상한 곳에서 성취감을 느낌 수호는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도 못하는 수호가 흥얼거려 봤자 괴상한 소리일 뿐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괴상한 허밍음 사이로 낮은 음성이 파고들었다.

“나도…… 악수. 왜…….”

“……?”

퀘스트를 끝내고 씻으러 들어가려 잠옷을 챙기던 수호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이 방에서 자신 빼고 소리를 낼 만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곤 고개를 돌렸다.

수호의 시선이 향한 곳엔 침대 밖으로 긴 다리를 빼놓고 잠든 주오가 있었다. 하지만 주오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숨소리만 내며 누워 있었다.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웃한 수호는 이내 고개를 돌려 주오가 정리해 놨던 옷더미 중에서 잠옷을 꺼내 들었다.

“왜…… 나는, 안 되는데.”

“응?”

이번엔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역시나 이 소리의 주인공은 주오가 맞았다.

수호는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주오가 눈을 뜨고 수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오와 시선이 맞닿은 수호는 눈을 끔뻑거렸다. 나한테 하는 말인가. 주오는 수호를 보고 있긴 했지만, 평소처럼 곧은 시선이 아닌 어딘가 멍한 시선이었다.

꿈속에라도 있는 것처럼 몽롱한 주오의 시선이 수호에게 박혀 떠나지 않았다.

“형, 깼으면 씻고 자요.”

“왜 나는 안 돼?”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맥락과 맞지 않은 대답에 수호는 물끄러미 주오를 바라봤다. 주정인가. 잠옷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난 수호를 주오의 시선이 좇았다.

“……이거 몇 개예요?”

주오의 앞에 선 수호가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펴서 흔들었다. 주오는 눈앞에서 살랑대는 수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덥석 잡아챘다.

“어…….”

침대에 누워서 몽롱한 눈을 깜빡이던 주오가 이렇게 재빠르게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수호는 얼떨결에 그에게 잡힌 손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제법 많이 불편했다.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는 가지런한 손이 뜨거웠다.

술자리에서도 지한에게 잡혔던 손이었지만, 그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지한의 체온은 이렇게 낯설고 기묘한 느낌이 아니었다.

수호는 쭈뼛 털이 서는 느낌에 손을 빼려고 힘을 줬다. 하지만 체격 차이에서 오는 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상대가 술 먹은 변태라면 더더욱 뿌리치기 힘들었다.

주오는 손안에 잡힌 수호의 손을 느슨하게 풀어진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봤다.

“손, 진짜 예쁘다. 수호는 손도 예쁘네.”

힘을 풀기라도 하면 뺏길 거라고 생각했는지 주오는 수호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수호는 닿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조심해야지. 그 생각을 하고 있는지 주오는 어딘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호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주오의 체온을 거북하다고 느끼지도 못했다.

수호는 주오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여전히 몽롱한 시선으로 수호의 손끝을 꼼꼼히 살피는 주오를 보며 수호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 명백하게 취한 상태였다. 빨리 잠이나 자지.

수호는 주오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을 다시 빼내려 했다. 살살 손을 흔들자 그대로 주오의 손이 따라붙었다.

“놔주세요.”

“미안, 닿는 거 싫어했지.”

하지만 주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을 놓지 못했다. 욕심 부리는 어린애처럼 수호를 붙잡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놔주세요.”

“나도, 인터넷 방송 할 줄 알아. 악수도 할 줄 아는데…….”

“네?”

정말 오늘 하루는 영문 소리를 너무 많이 듣는 것 같았다. 수호의 눈가가 불만스럽게 찡그려졌다. 하지만 그다음에 나온 주오의 말 때문에 수호는 주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게 됐다.

“나도 수호랑, 악수도 하고 싶고. 방송으로 사람들한테 수호랑 같이 있다고 자랑도 하고 싶어. 수호랑 끝까지 술도 마셔보고 싶고……. 수호랑 뭐든지 다 하고 싶어.”

수호는 정말 억울하고 슬프다는 듯 어딘지 모르게 울음 섞인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주오를 망연하게 내려다봤다.

어……. 이건 수호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세상 모든 게 서럽다는 듯 수호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웅얼거리는 주오에게 어떻게 반응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 회식 자리에서 지한이 켰던 방송과 악수 때문에 이러는 것 같긴 한데…….

수호는 당황스러웠다. 정말 당혹 그 자체였다.

그걸 못 해본 게 그렇게 서러웠어요?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주오는 서운해하고 있었다. 오늘 참 주오의 색다른 모습을 많이 보는 것 같았다.

수호는 물끄러미 주오를 내려다봤다. 투덜거리고 있지만, 그건 그냥 자신의 지금 감정을 말하고 있는 것뿐이고 수호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강요하고 있는 건 또 아니었다. 그냥 그러고 싶다고 솔직한 그의 심경을 말하는 것뿐. 덩치만 커서 찡얼거리는 게 참 웃겼다.

“마지막에 말씀하신 건 무리일 것 같네요.”

술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과 끝까지 마셔보겠다고 하는 건지. 수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김주오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부담스럽게 완벽한 사람은 아닐지도 몰랐다.

“……응? 수호야, 뭐라고 했어?”

주오는 멍한 머리 탓인지 수호가 작게 중얼거린 말이 들리지 않았다. 눈가를 찡그리며 다시 말해달라는 듯 자신을 보는 주오에게 수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술 깨고 다시 말해보세요. 그때 고민해 볼게요.”

“수호야, 뭐라고 하는지 안 들려.”

아주 중요한 기회를 놓치고 있는 김주오는 들리지 않는 소리에 답답한 듯 고개를 저었다. 수호는 제법 바보 같은 주오의 어깨를 한 손으로 밀어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그의 아래에 깔린 이불을 낑낑거리며 빼내곤 덮어주었다.

“그만 자요. 저 졸려요.”

“응, 자라는 거지? 수호도 잘 자. 꿈에서 또 보자.”

김주오는 힘 풀린 손을 살며시 흔들며 눈을 감았다. 수호는 그런 주오를 한동안 잠시 내려다보고는 이내 잠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면서 수호는 칭얼거리던 주오를 떠올렸다.

‘나도, 인터넷 방송 할 줄 알아, 악수도 할 줄 아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서러운 일이라고. 언제나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주오는 수호에게는 정말 예상할 수 없는 랜덤 아이템 박스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그건 어떤 아이템들이 나올지 나와 있기라도 하지, 김주오는 그런 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수호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조금은 재밌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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