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40)

* * *

[Chase All Star전 RAIN 김주오 ‘수호와 친해질 수 있도록 응원해주세요.’ SUHO와 친해지길 바라!]

오늘 베를린에서 개최되는 올스타전에 참가하는 CKR 선수들이 출국했다. 출국 전 제라드의 RAIN 김주오 선수와 주이의 SUHO 이수호 선수는 각각 올스타전에 임하는 각오와 소감을 밝혔다.

두 사람 모두 ALL STAR전이지만 우승을 목표로 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작년에서 북미에게 빼앗긴 우승컵을 가져오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RAIN 김주오는 이번 올스타전에서는 꼭 수호 선수와 친해지고 싶다는 각오를 밝혀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번 올스타전은 2인 3각이라는 새로운 모드를 필두로 여러 방식의 게임이 2주간 진행된다. 오늘을 기준으로 일주일 뒤에 열릴 올스타전에서 선수들의 활약을 기대해본다.

-e-sport 기자 김승태

오전에 한 인터뷰는 그날 오후 포털사이트 e-sport 기사 중 1위를 찍으며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기사에 첨부된 두 사람이 나란히 찍힌 사진에 폭발적인 반응이 일었다.

└ 이 형 진짜 나 너무 좋아한다니까.

└ 컨셉임.

└ 네가 뭘 안다고 컨셉이래.

└ 진짜 사진에서부터 김레인이 이수호 좋아하는 거 너무 보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이쯤 되면 수호도 받아줘야 되는 거 아니냐.

└ 진짜 보는 내가 다 난리법석 떨게 됔ㅋㅋㅋㅋㅋㅋㅋㅋ 김레인 응원한다.

└ 얘네 아직도냐…… 김레인 불쌍하네. 몇 년째냐.

└ 이수호 존나 따먹고 싶다.

└ 미친새낀가;;

└아니 근데 둘 사이에 저 거리는 뭐야? 수호 아직도 내외함?

└ 이제 암? 둘이 잘되려면 아직 멀었음.

└ 김레인 불쌍하다…….

└ 수호 취향 아닌가 보지.

└ 우리형 얼굴이 취향 아닌 사람 있냐. 남자인 나도 반하는데;;;

주오는 기사에 적힌 댓글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형 얼굴이 취향 아닌 사람 있냐. 남자인 나도 반하는데;;;]

주오도 본인이 잘난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외모를 가지고 잘난 체를 한 적도 없었고, 그걸 가지고 남에게 호감을 얻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현재는 외모로도 수호에게 호감을 사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오히려 수호는 주오의 외모를 부담스러워했다.

“외모가 통하는 상대면 얼마나 좋겠어.”

그렇지 않으니까 어려운 상대겠지만.

주오는 늘 자신을 피하며 뚱한 눈을 하는 수호를 떠올렸다. 하얀 얼굴과 길게 뻗은 눈가. 유독 까만 수호의 눈이 언젠가 자신을 애정 어린 눈으로 봐줬으면 했다. 주오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웃겨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수호를 봤을 때만 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그 멍한 검은 눈이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그냥 눈이 꼭 강아지 같다는 생각만 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수호에게 진득하게 빠져 있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동경이 사랑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수호는 프로 데뷔 전부터 이미 프로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이수호. 아이디부터 자신의 이름으로 지었던 수호는 아마추어 때 이미 각 팀에서 러브콜을 보낼 만큼 실력이 뛰어났다.

김주오도 몇 번 게임에서 만났던 적이 있기 때문에 수호를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잘하네’ 이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데뷔를 한 수호는 프로들 사이에서도 특출한 실력을 자랑했다. 컨트롤이 어려워 많은 사람이 사용하지 않는 캐릭터도 쉽게 사용하고, 4대1 상황이 나왔을 때도 피지컬로 이겨내는 장면을 종종 보여주었다.

아마추어 때 잘한다고 소문이 나도 막상 프로씬에서는 통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이수호는 오히려 데뷔 후에 더욱 빛을 발했다.

수호는 당시 세계 최고라고 인정받던 김주오조차 감탄할 만큼 놀라운 플레이를 보였다.

수호가 지금까지의 선수들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김주오는 수호의 경기를 기다렸고, 연습 경기가 잡혀 있지 않은 때라면 늘 생방으로 챙겨 봤다.

그렇게 매일을 수호에게 관심을 쏟은 결과 어느새 수호에 대한 애정이 생겨났고, 그 애정은 팬심을 넘어서 짝사랑으로 변해갔다.

4년. 어느새 그렇게 길어진 짝사랑의 기간을 이제는 끝을 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주오에게는 이제 시간이 없었다.

주오는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려던 손을 멈칫했다.

[이수호 존나 따먹고 싶다.]

주오는 저속한 발언을 한 댓글에 신고 버튼을 눌렀다.

* * *

베를린은 한국보다는 날씨가 따스했다. 따스한 기온에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저절로 펴졌다. 수호는 마음에 드는 온기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감독과 선수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숙소인 호텔로 향했다.

도착한 숙소는 게임사에서 신경 써서 준비한 듯 시설이 좋았다. 백색의 큰 샹들리에가 환하게 로비를 밝혔다.

“오오, 숙소 좋네요. 월드 챔피언십 할 때도 좋았는데.”

올스타전에 처음 참가하는 PEOPLE 이지한이 로비에 보이는 몇몇 외국 선수들과 손님들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 옆에 서 있던 재인이 같이 로비를 돌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 방은 어떻게 되는 거래?”

“형도 아직 못 들었어요? 저도 잘 모르는데…….”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수호도 이제 어떻게 하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호텔에 도착은 했지만 아직 어느 방에 묵는지, 몇 인실인지 얘기를 듣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 주오가 수호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수호야, 방 같이 쓸 사람 있어?”

“……아니요.”

수호는 어느새 다가와 기대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는 주오 때문에 놀라 어깨를 흠칫 굳혔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답하자 김주오의 눈빛이 어쩐지 한껏 더 반짝거렸다.

“그럼 나랑 쓸래?”

“싫은데요.”

“난 좋은데……. 수호, 너랑 같은 방 쓰고 싶은데.”

김주오가 시무룩해진 얼굴을 해 보였다. 수호는 이 형이 왜 이러냐는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주오는 야속한 수호의 눈빛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언제까지 저렇게 자신의 마음을 모를 수가 있을까 싶었다.

어김없이 뒤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조은기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분명 믿음직한 형이었는데 이수호 앞에만 서면 다른 사람이 되는 김주오를 볼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깊게 한숨을 내쉬는 조은기를 모르는 김주오는 수호를 바라봤다.

“제라드에서 같이 오신 선수 있잖아요. 그분이랑 쓰세요. 숙소 생활도 같이했으니까 편하실 거예요.”

“편한 건 싫어.”

김주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모난 곳 없는 입매가 시원하게 올라가자 그의 잘난 얼굴이 더욱 빛나 보였다. 수호는 그런 주오의 얼굴이 부담스러워 시선을 돌렸다.

“저는 편안한 게 좋아요.”

“어차피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써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조금이라도 오래 봤던 나랑 쓰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주오의 말이 맞았다. 낯을 많이 가리는 수호는 주이에서 혼자 올스타로 뽑히게 돼서 누구랑 같은 방을 써도 다른 팀의 사람과 룸메이트를 해야 했다. 하지만 다 불편하지만, 김주오는 특히 더 불편했기에 굳이 김주오랑 같은 방을 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게 수호의 마음이었다.

“그래도 싫어요.”

“잘해줄게.”

“아 좀, 형 적당히 해요!”

뭘 잘해줄 건데요. 조은기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덧붙여졌다.

은기는 더 놔두면 변태 능구렁이 아저씨처럼 이수호에게 치근댈 것만 같은 김주오를 말렸다. 이러다가 올스타전 기사보다 김주오, 이수호 성추행 파문으로 기사가 더 빨리 나갈 것 같았다.

“레인 형 진짜로 수호 많이 좋아하나 봐요.”

이수호와 김주오에게 관심을 두고 있던 건 조은기뿐만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참가한 이지한과 올스타전 붙박이 정재인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호와 주오가 워낙 유명인들인지라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건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저렇게 소문으로 듣던 김주오의 짝사랑이 실시간으로 벌어지니 사람들의 이목이 더욱 늘었다.

조은기는 김주오의 추태가 외국에서까지 까발려지는 느낌이라 창피함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김주오는 제라드였고, 제라드는 곧 김주오였다. 제라드에 속한 조은기가 민망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가 베를린으로 오기 전 김주오가 진지한 얼굴로 말하던 그 말이 떠올라 더욱 민망했다.

그런 조은기의 마음을 모르는 이지한은 순수하게 신기하다는 눈으로 수호와 주오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조은기는 그냥 못 들은 척, 못 본 척하기로 했다. 나는 몰라, 라는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조은기를 대신해서 정재인이 주오와 수호를 보고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엄청 좋아하지. 매년 저러는 것도 안 지겹나 몰라.”

“매년 저래요?”

“어, 매년 똑같은 레파토리. 같은 방 쓸래? 싫어요. 어디 놀러 갈래? 싫어요. 이런 식이야. 지한이 너는 처음 봐서 신기하긴 하겠다. 나도 처음에는 신기했어. 김레인이 저런 애였나 싶더라니까.”

“신기해요. 레인 형, 사람 좋은 건 영상이랑 얘기를 들어서는 알았는데 저렇게 음, 뭐라고 해야 하지. 아무튼, 저런 저돌적인 이미지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타입이 아니긴 한데. 이수호한테는 저래.”

“그런 거 보면 진짜 팬이긴 한가 봐요. 어느 정도는 과장이라고 생각했는데.”

“과장은 무슨. 기사가 점잖게 나가는 거지. 쟤 수호 되게 좋아해. 그러니까 조심해라.”

정재인이 웃으면서 이지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지한은 뭘 조심하라는 건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정재인을 바라봤다. 재인은 의문이 담긴 지한을 보고도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지내다 보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되겠지.”

“애들아, 키 가져왔는데 2인 1실이다. 한 명은 나랑 써야 하는데 어떻게 할래?”

주오랑 수호의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보고 있는 사람들 뒤로 이진형이 호텔 키를 들고 왔다. 조은기는 이진형을 보자마자 그에게로 다가가 앞에 섰다. 굳은 얼굴을 하고 한걸음에 다가온 조은기 때문에 이진형은 순간 멈칫했다.

“감독님.”

“왜, 무슨 할 말 있어?”

“꼭 이수호랑 같은 방 써주세요. 아니면 주오 형 좀 데리고 가주세요.”

“왜 그래?”

“주오 형이 미쳤어요.”

“무슨 소리야?”

이진형은 앞뒤 없는 조은기의 말이 무슨 소린지 몰라 눈가를 찡그리며 은기의 어깨너머를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뚱한 얼굴의 수호와 기대감 어린 얼굴의 주오가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진형은 다시 시선을 돌려 자신의 앞에 선 은기를 바라봤다.

“주오가 저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왜 그래?”

조은기가 왜 이러는지 상황 파악이 끝난 이진형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조은기는 그런 감독을 보고 속이 더욱 답답해졌다.

“그냥 둘이 찢어주세요. 부탁드려요.”

“주오가 수호만 챙겨서 질투라도 하는 거야? 은기 아직 애네, 애야.”

이진형은 조은기가 믿고 따르던 주오가 다른 팀인 수호만 챙기는 걸 서운해하는 것으로 인지했다.

조은기는 속이 더욱 답답해졌다. 왕만두 10개를 콜라 없이 먹은 것처럼 속이 아주 꽉 막혔다. 주오가 수호에게 무슨 마음을 가진 건지 멋대로 얘기할 수도 없어 환장할 것 같았다.

조은기의 마음도 모른 채 이진형은 은기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선수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아니면 가위바위보 할래? 그게 공평하겠다.”

중학생도 아니고 마음 가는 사람들끼리 쓰라고 해서 남은 한 명이 토라질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가위바위보가 공평한 방법이었다.

진형의 말이 끝나자 수호가 번쩍 손을 들었다.

“제가 감독님이랑 같은 방 써도 될까요?”

무심하게 흐르는 수호의 음성에 조은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와 반대로 수호의 곁에 서 있던 주오의 낯빛은 차게 식었다. 재인은 그런 상황을 보면서 웃었고, 지한은 아무것도 모른 채 지켜보고 있었다.

이진형은 수호가 이렇게 나올 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괜찮은데, 불편하지 않겠어?”

“저는 괜찮습니다.”

“감독님 잠깐만요. 이벤트전이라고 해도 같은 선수끼리 같은 방에서 친목을 도모해서 합을 맞추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주오는 무슨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에 임하는 것 같은 굳은 얼굴로 말해왔다.

이건 무슨 소리일까. 이진형은 주오의 얼굴을 보다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수호랑 같은 방 쓰고 싶다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답이었다. 제라드에서는 맏형이자 정신적 버팀목으로 늘 차분하고 후배들을 타이르는 주오인데 지금은 애 같았다.

그렇게나 수호랑 같은 방을 쓰고 싶을까. 이진형은 자신이 관리하는 주오가 저렇게나 원하는데 양보할까 싶었다.

그리고 그런 진형의 생각을 빠르게 눈치챈 조은기가 진형의 뒤에서 속삭였다.

“감독님, 그거 아니에요. 양보하시면 안 돼요.”

“너는 진짜 왜 그러는 거야?”

뒤에서 음산하게 울리는 중얼거림에 이진형은 뒤를 돌아보며 조은기를 다그쳤다. 조은기는 또 답답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였다.

“아니에요. 정말 그러시면 안 돼요. 감독님 그러지 말아주세요.”

“진짜 이해를 못 하겠네. 너 주오한테 불만 있어?”

김주오가 저렇게나 원하는데 조은기는 왜 반대를 하는 건가 싶었다. 조은기는 또 고개를 붕붕 저었다.

“전 주오 형이 좋아서 이러는 거예요.”

“은기야.”

조은기의 방해를 눈치챘는지 김주오가 나긋한 음성으로 조은기를 불렀다. 하지만 음성이 부드러울 뿐 주오의 눈빛은 전혀 부드럽지 않았다.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주오의 눈가가 둥글게 휘었다.

조은기는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은 주오의 눈빛에 움찔하고는 도움을 요청하듯 이진형을 바라봤다. 진형은 이 오묘한 상황이 뭘까 싶어 두 사람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잊혀진 수호가 빼꼼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면 저는 감독님이랑 같은 방 써도 되는 건가요?”

“어? 음…….”

진형은 어떻게 해야 할까 싶었다. 제라드의 최대 전력이자 주장인 주오의 편에 서야 하는 걸지, 아니면 떠오르는 신성인 조은기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지.

하지만 이진형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복잡한 걸 싫어했으며 참으로 공평한 사람이었다. 그가 내놓은 답은 아주 간단했다. 이진형은 하하 웃으며 답을 내놨다.

“이래저래 원하는 사람과 방을 쓰는 거에 대해서 불만이 생길 것 같으니까 그냥 제비뽑기하는 걸로 하자. 다들 불만 없지?”

조은기는 불만, 주오도 불만, 지한과 재인은 상관없음, 그리고 수호는 꺼림칙함. 각자의 마음은 이랬지만, 괜히 더 입을 열었다가 더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까 입을 다물었다. 그걸 불만 없는 것으로 인지한 이진형은 양복 재킷 안쪽에서 작은 메모지를 꺼내고는 한 장을 뜯어 공평하게 숫자를 써서 여섯 개로 나눠 찢었다.

“일부터 삼까지 숫자가 적혀 있는데 같은 숫자를 뽑은 사람끼리 같은 방을 쓰는 걸로 하자. 그러면 다들 뽑아 가라.”

거대한 풍채만큼 두툼한 이진형의 손 위로 조각나 접힌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진형은 먼저 그중에 가장 끝 쪽에 놓인 쪽지를 가져갔고, 펼쳐보니 ‘1’ 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나는 1번이다. 다음 사람 뽑아. 은기부터 뽑을래?”

이진형은 자신과 가장 가깝게 서 있던 조은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은기는 괜히 두근거리는 마음에 손바닥 위, 종잇조각들을 훑어보고는 한 개를 집어 들었다.

진형은 은기가 제비를 뽑자 수호와 주오에게 손을 들이밀었고, 둘은 차례차례 제비를 뽑았다.

지한과 재인까지 모두 제비를 뽑자 진형이 입을 열었다.

“자, 이제 펼쳐서 번호 확인해라.”

이진형의 말이 끝나지 이지한이 펼친 쪽지를 들어 흔들었다.

“저는 3번이에요.”

“저도요.”

지한과 재인이 똑같은 필체로 ‘3’이라고 적혀 있는 쪽지를 진형에게 건넸다. 이진형은 두 사람에게 방 카드키를 넘기며 말했다.

“내일부터 연습할 거니까 오늘 푹 쉬어라. 어디 구경 가고 싶으면 근처만 돌아보고. 올스타전 끝나고 한 주 정도 더 있다가 갈 거라서 그때 관광해도 되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면 내일 봬요.”

“그래, 내일 10시까지 호텔 옆에 경기장으로 오면 돼. 안에 연습실 따로 마련해 놨다니까 경기장 스태프한테 한국 지역 선수라고 하면 안내해 줄 거야.”

진형은 고개를 꾸벅이고 캐리어를 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지한과 재인의 뒷모습을 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남은 이들을 바라봤다. 은기와 주오, 그리고 수호.

이미 진형의 번호는 ‘1’이었으므로 확률은 이제 13이었다. 진형은 상황이 재밌어서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그래서 몇 번이야?”

수호가 진형에게 쪽지를 건넸다. 수호가 건넨 쪽지에 적힌 번호는 ‘2’. 이제 확률은 반반이었다. 주오의 눈빛이 번뜩였다.

아직 제비를 열어보지 않은 은기와 주오는 자신의 제비를 빤히 바라봤다. 서로가 2번이길 간절히 바라는 두 사람의 눈빛은 사뭇 달랐다. 주오는 설렘과 기대감, 은기는 불안함이었다.

조은기는 억울했다. 수호랑 같은 방을 쓰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주오가 수호는 어떤 눈으로 보는지 알게 된 상황에서 두 사람을 호텔 방에 단둘이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은기도 머리가 복잡했다. 어떤 누가 대한민국 땅에서 남자 둘이 사랑한다는데 바로 두 손 벌려 환영할 수 있는가.

은기는 초조한 마음으로 천천히 쪽지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절망했다.

은기의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주오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주오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그 운은 이 순간에 주오의 편을 들어주었다.

은기의 번호는 ‘1’.

절망한 은기를 옆에 두고 주오는 펴보지도 않은 제비를 이진형에게 건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카드키 주세요.”

“운은 참 좋아.”

“그러게요. 그러면 은기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은 무슨. 편히 쉬어라. 수호 너무 귀찮게 굴지 말고.”

“네, 그럼 가볼게요.”

주오는 재빠르게 진형에게서 1105라고 적힌 카드키를 받아 들고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의 눈가는 미묘하게 틀어져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이건 공정한 결과였다. 주오는 그래서 당당하게 수호에게 웃어 보일 수 있었다.

“귀찮게 안 하고, 잘해줄게.”

“……네.”

“가자.”

주오는 깃털같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수호는 어딘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진형은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다 여전히 울상인 조은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주오한테 불만 있으면 말로 해. 그런다고 주오가 싫어할 성격도 아니잖아.”

“불만 있는 거 아니라니까요…….”

“그럼 뭐가 문제야? 아니면 너도 수호랑 같은 방 쓰고 싶었어?”

“아니에요!”

“그럼 기분 풀어. 감독님이 얘기 다 들어줄게.”

“감독님은 모르셔도 돼요.”

“은기 너무하네.”

이진형이 조은기의 어깨에 팔을 감싸 토닥이며 걸음을 옮겼다. 조은기는 따라서 걸음을 옮기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하긴 좋아한다 뿐이지 같은 방을 쓴다고 뭐가 크게 달라질까 싶었다. 더군다나 수호는 주오를 불편해했으니 별일이야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하니 은기의 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 * *

“침대 어디 쓸래?”

얼떨결에 주오와 함께 방으로 올라와 방 한쪽에 캐리어를 두던 수호는 들려오는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싱글 침대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떨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 서서 주오가 수호를 향해 살포시 웃었다. 수호는 어느 쪽을 써도 상관없어 멀뚱한 눈으로 주오를 바라봤다.

“저는 상관없어요. 편하신 곳 쓰세요.”

“수호는 잠이 많은 편이야?”

다시 들려오는 음성에 짐을 풀어 대충 정리를 하려던 수호는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정리하고 싶었는데, 저런 질문은 왜 던지는 걸까.

수호는 질문의 의도가 뭘까 싶어 주오를 바라봤다. 하지만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맑은 눈으로 자신을 보는 주오의 잘난 얼굴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역시나 마주 보고 있기에는 부담스러운 얼굴이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마주 보던 수호가 말없이 다시 고개를 숙이는 건 이미 주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주오는 끈기 있게 수호가 다시 입을 열기를 웃으며 기다렸다.

하지만 눈을 다시 마주할 거라 예상한 것과 다르게 수호는 고개를 홱 돌리곤 짐을 풀기 시작했다.

“……많은 편이에요.”

“그러면 내가 바깥쪽에서 잘게. 나는 잠이 없는 편이라 괜히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다가 깨울 것 같으니까.”

주오가 그렇게 말을 하긴 했지만, 바깥쪽이든 안쪽이든 별 차이 없었다. 게임사에서 좋은 호텔을 제공해 주긴 했지만 침대와 침대 사이도 그렇게 멀지 않았고 객실 자체도 크지 않았다. 수호는 세심하다고 해야 할지 과한 배려라고 해야 할지 모를 주오의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어쨌거나 자신을 위한다는 건 맞으니까 고마워해야 했다.

“감사합니다.”

답을 하고 수호는 잠옷으로 가져온 추리닝 바지를 들던 손을 멈칫했다. 그런데 이게 감사해야 할 일인가. 문득 자신이 내놓은 답이 의아해 고개를 갸웃했지만 수호는 이내 생각을 접고 다시 바지를 곱게 접었다. 뭐 어쩐들 상관없는 것 같았다.

생각을 접어낸 수호는 열심히 캐리어 속 짐을 풀어 옷가지들을 정리했다.

참고로 수호는 손재주가 없었다. 즉, 정리라고 해봤자 정리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수호가 고심해서 바짓단을 붙잡고 양쪽을 맞추고 반으로 접고 있자 불쑥 뒤에서 호기심이 서린 친절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도와줄까?”

“……!”

수호는 바로 뒤에서 갑작스럽게 날아든 주오의 낮은 음성과 귀 뒤쪽을 스치는 숨결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수호는 유독 잘 놀라는 편이었다. 그는 매사에 긴장하는 법이 없어서 늘 멍하니 방심한 상태로 있곤 했다. 그래서 갑자기 큰 소리가 난다거나, 불쑥 누군가 튀어나오면 언제나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수호의 손끝에서 열심히 접고 있던 바지가 툭 떨어졌다. 하지만 수호는 그것도 모른 채 놀라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속으로 짧게 심호흡을 하고 난 수호는 허망한 눈으로 바지를 내려다봤다. 수호의 노력은 이미 무용지물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열심히 접은 건데. 왜 갑자기 말을 걸어서.

수호는 문득 울컥 올라오는 분노에 주오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뭔가 말을 꺼내려 했던 수호는 왼쪽 어깨 바로 뒤,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에 놓인 주오의 환한 얼굴에 다시 놀라 입을 합 다물었다.

그리고 놀란 건 주오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의 느릿느릿한 행동과 달리 빠르게 고개를 돌리는 수호로 인해 주오의 눈도 커졌다.

놀란 두 사람의 시선이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했다. 빙글빙글. 둘 사이에서 별이 도는 것만 같은 어색한 침묵에 둘이 나란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

“어…….”

수호는 늘 여유로운 얼굴을 하던 주오의 놀란 얼굴을 보자 자신이 과하게 놀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주오의 얼굴을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문득 그 사실을 깨달은 수호는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괜히 눈동자를 또로록 굴렸다. 그러다 주오의 턱 끝에 시선을 맞췄다.

주오는 혼란스럽게 흔들리던 수호의 눈동자가 한결 진정되자 동그랗게 떴던 눈을 반달처럼 휘어 웃었다.

귀여워. 하얀 흰자위와 대비되는 검은 눈동자가 예쁜 자갈 같았다. 동글동글 작은 자갈. 너무 예뻐서 꼭 쥐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게 만드는 빛깔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끌어안고 당장 뒹굴뒹굴 구르면서 눈가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수호가 놀라다 못해 무서워할 게 뻔해서 주오는 끓어오르는 욕구를 꾹 눌러 내렸다. 그리고 수호를 향해 유해하지 않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 놀랐나 보네. 뭐 도와줄 거 없을까 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수호도 한층 진정된 가슴에 고개를 돌리며 작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래도 도와줄게. 접는 거 보니까 그냥 돌돌 마는 것 같던데.”

수호가 짐을 정리하려고 했을 때부터 그를 지켜보고 있던 주오는 처음으로 수호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수호는 정리를 못했다. 옷을 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을 만큼 수호는 엉성한 모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집중한 얼굴로 꾸물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실실 웃던 주오였지만 저대로 그냥 두면 옷 정리만 한 시간을 할 것 같은 모습에 말을 걸었던 거였다. 그거에 수호가 그렇게 놀랄 거라고는 주오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주오는 다시 떠오르는 수호의 덜컥거리는 놀란 모습과 어쩐지 조금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던 하얀 얼굴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귀여워. 주오는 계속 생각나는 수호의 말간 얼굴을 떠올리며 실실 웃었다.

“옷 개는 거 많이 안 해봤어? 숙소 생활 하면서 많이 했을 텐데.”

수호도 이제는 노장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연차였다. 프로에서 4년.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니었다. 보통 팀원들과 숙소 생활을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다들 프로 자취생이 되는데, 수호는 아직 어수룩해 보였다.

수호는 자신과는 다르게 척척 반듯하게 옷을 개어나가는 주오의 손을 보며 괜찮다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그리고 주오의 옆에서 다시 꾸물거리며 옷을 접었다.

“보통은 청소해 주시는 아주머니들이 해주세요. 아니면 선우 형이나.”

“선우? 두유(DOYOU)?”

주오는 수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이 맞는지 다시 물었다. 수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옆으로 몸을 움직여 거리를 벌렸다. 갑자기 왜 자신이 이 사람과 이렇게 앉아서 옷을 개고 있는 건가 싶었다.

“선우랑 친한가 보네. 형이라고 하는 거 보니까.”

“같은 팀에 오래 있으니까요.”

“부럽네. 나도 수호랑 같은 팀 하고 싶고, 친해지고 싶은데.”

잠시 고개를 들어 어딘가 바라보는 주오의 눈가에 선우를 향한 부러움이 언뜻 비쳤다. 이내 주오가 시선을 내려 수호와 눈을 맞췄다. 수호는 다시 자신에게 향한 시선에 고개를 살며시 돌렸다.

주오는 그런 수호가 귀여운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불쑥 얼굴을 수호 앞으로 들이밀었다. 고개를 돌린 수호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게 다시금 시선이 마주쳤다. 주오는 눈가를 휘어 웃었다.

“나는 언제 수호한테 형이라고 불릴 수 있어? 아직이야?”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호칭이었다. 이미 수호는 친하지 않은 사람들도 그냥 형이라고 불렀다. 딱히 달리 부를 말이 없고, 그게 가장 편했다.

하지만 뭔가 주오에게는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수호도 자신도 몰라 그저 고개를 갸웃했다. 왜지? 순간 드는 의아함에 주오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가 거절의 의미로 이해했는지 아쉽다는 듯 말을 이었다.

“수호는 너무 어려워.”

투정을 뱉는 주오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수호는 그런 주오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그 소리를 듣고 싶어 하세요?”

“응? 그야, 듣고 싶으니까. 나는 너랑 친해지고 싶거든.”

주오는 아주 당연한 걸 뭘 묻냐는 듯 수호를 바라봤다. 수호는 그런 주오의 태도에 더욱 의아했다. 대체 자신의 뭐가 좋아서 친해지고 싶어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의아해하는 수호의 눈빛에 주오가 다 접은 옷을 겹겹이 쌓으며 말했다.

“내가 너 팬이잖아.”

별거 아닌 이유라는 듯 주오가 가볍게 답했다.

팬이기에 친해지고 싶다.

수호는 주오의 말에 시선을 내렸다. 주오가 자신을 많이 좋아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데뷔를 하고, 수호가 점점 프로씬에서 인정을 받던 어느 순간부터 주오가 수호에게 다가왔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이유였다. 팬이라고.

하지만 수호는 팬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주오가 처음이었고, 그래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무엇보다 주오를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부담감 때문에 더욱 그를 밀어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주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유독 본인에게 더 경계심을 세우는 수호를 기분 나빠 하지도 않았고, 계속 팬심을 드러냈다.

문득 한결같이 자신을 좋아해 주는 주오에게 너무 무심했던 게 아닌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수호는 주오의 손길로 정갈하게 개진 옷가지에 향했던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여전히 주오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뭘. 그냥 나는 그래서 수호를 좀 더 알고 싶고, 친해지고 싶다는 의미였어. 좋아하는 선수가 가까이 있으면 말 걸어보고 싶잖아.”

“그렇죠.”

“수호는 좋아하는 선수 없어?”

프로 선수들에게도 좋아하는 선수는 있었다. 프로 경기들을 보고 프로게이머라는 꿈을 꿈꾸게 된 사람들이 대개 그랬다.

하지만 수호는 게임 방송에 그렇게 큰 취미가 없었다. 그저 게임이 좋았고, 그러다 보니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그 때문에 프로팀 프론트에서 연락이 왔고 얼떨결에 테스트를 보고 프로가 됐다. 그래서 수호는 좋아하는 선수가 딱히 없었다.

하지만 프로를 잘 몰랐던 수호도 알고 있는 선수는 있었다. 너무 유명했던 사람이었기에 관심이 없던 수호도 알 수밖에 없었다.

“프로 경기에 관심이 없어서 좋아하는 선수는 딱히 없어요.”

“그래? 그럼 알고 있던 선수도 없었으려나?”

수호가 유일하게 알고 있던 선수는 RAIN이었다. 바로 지금 수호의 곁에 다소곳하게 앉아 짐 정리를 도와주는 남자, 김주오. 그가 수호가 유일하게 아는 선수였다.

데뷔하자마자 모든 대회 우승을 휩쓰는 것을 칭하는 로열로더. 김주오는 그 길을 처음으로 걸은 선수였다.

김주오는 피지컬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던 프로씬에서 기상천외한 전략으로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런 주오의 플레이는 프로씬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피지컬만이 아닌 게임을 보는 눈과 판단력이 좋은 선수을 영입하려는 팀들이 늘었다.

김주오는 잘하는 선수를 넘어 게임 씬에 변혁을 가져온 선수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그런 선수는 프로 경기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게임을 하는 사람이라면 알 수밖에 없었다.

“……형은 알고 있었어요.”

“수호가 알아줘서 참 기쁘…… 어?”

주오는 수호의 대답에 기분 좋다는 듯 웃음을 짓다 이내 수호가 자신을 부른 호칭을 뒤늦게 깨닫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토록 듣고 싶어 하던 호칭이었거늘 왜 이리 당황하는 걸까. 수호는 괜히 놀라는 주오 때문에 민망해져 눈동자를 또로록 굴려 시선을 돌렸다.

수호의 어색한 반응 때문에 정신을 차린 건지 주오가 수호의 앞으로 고개를 홱 들이밀며 물었다.

“수호야,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그치?”

“뭘 잘못 들어요.”

환하게 웃으며 기쁨을 감추려 하지 않는 주오 때문에 괜히 민망해져 수호가 괜히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민망함을 감추지 못한 수호의 눈가가 살며시 떨리는 것을 보며 주오가 다시 웃었다.

“참 좋다. 수호랑 가까워진 기분이야.”

“아니에요. 같은 방 쓰는데 언제까지고 저기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 이유라도 괜찮아. 한 달가량 같은 방 쓸 텐데 앞으로 잘 부탁해.”

주오가 여전히 시선을 돌리고 있는 수호에게 슬쩍 웃으며 말했다.

주오는 같이 머무는 한 달 동안 꼭 수호와 이런저런 일을 해서 돌아가게 되더라도 관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었다. 예감이 좋았다.

주오는 잠시 눈을 맞추다 다시 시선을 돌리는 수호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수호야, 나 너 많이 좋아해.”

“……감사합니다.”

뭐라고 답하기가 애매했다. 수호는 자신을 향해 품은 애정에 그저 또 고개를 꾸벅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 어리숙한 모습이 귀여워 주오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수호는 부담스럽게 잘난 얼굴이 더욱 부담스러워 움찔 떨었다.

하지만 왠지 기뻐하는 그를 피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수호는 그저 주오가 개어놓은 옷을 괜히 톡톡 두드렸다. 보송보송한 옷에서 향긋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기분 좋게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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