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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55화 (에필로그) (155/155)

00155  에필로그  =========================================================================

나는 몰랐다. 행성이 위성에게 절대적이듯, 위성도 행성에게 영향력을 떨친단 것을. 그리하여 달이 사라진 지구는 결코 이전 같을 수 없단 것을.

내가 정신을 차리기 전까진 꼬박 1주일이 걸렸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깨어나지 못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을. 그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기력이 나를 지배했다.

세상은 정지했고, 내 안에서 뭔가가 죽었다. 나를 이루던 그 중요한 무엇, 가장 깊은 곳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그것이 연소되어버린 듯이 모든 게 의미를 잃었다.

하루 만에 식음을 전폐하고 틀어박힌 날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무리도 아니다. 나 역시, 생이별해서 영영 볼 기약 없던 그들을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는 나 자신이 이해 안 되었으니. 이 현실 자체가 내겐 비현실적이었다.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떠나기 전과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정작 내가 변했다. 나를 이루는 일부가 재구성되어 완전히 변화했고 그런 내겐 도리어 예전 같은 모습, 예전 같은 눈빛의 가족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완벽하게 맞춰진 퍼즐에서 나 혼자 어긋난 조각인 것처럼.

극심한 거부감이 일었다. 뭔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게 나 자신인지, 이렇게 되기까지의 그 무엇인지, 둘 다인지…… 그냥 나는, 여기 이러고 있어선 안 됐다.

어째서 돌아오고 싶어 했었지? 이깟 게 뭐라고. 대기 중에 희박한 마력. 어떤 기적도 남아있지 않은 세상. 나는 이제 이 잿빛 속에서 살아가야한다. 영원히 오지 않을 새벽을 기다리며.

어느샌가 내 안엔 유사구멍이 자리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채워지지 않는 그 감각이 나를 좀먹는다. 그건 공허다.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수렁이다. 무엇으로도 채울 길 없는. 내가 대가로 치를 것이 침대 위를 뒹굴게 만드는 끔찍한 고통이라면, 적어도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을 테다.

차라리 잘 된 거라고, 언젠가 잊힐 거라고. 이게 맞는 거라고.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고. 수도 없는 위로의 말들이 스스로에게 건네졌다. 그러나 그 어떤 말로도 나는 나를 다독일 수 없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때. 그의 운명은 나인데. 많은 사람이 평생을 살아도 그 유일한 하나를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만났다. 냉정하게, 나를 위한 선택이라고 믿었던 그것이 실상 나를 위한 것이던가.

그는 악인이었으나 인간의 잣대로 댈 수 없는 존재였다. 인간이 아닌 그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뒤늦게 북받쳤다. 그와 함께하는 고통이 그를 잃은 고통보단 낫지 않았을까. 그가 변할 수 있단 건 꿈같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를 잃은 후엔 그 꿈조차 꿀 수가 없다. 모든 가능성은 소실되었고, 내 부정에 응답하듯 남은 것은 절망이었다.

잃은 것이 너무나 커서, 그건 달랠 수 없는 감정이라. 그 순간 발을 헛디딘 내가 죽도록 원망스러워서. 문득 숨이 막히고 눈물이 쏟아졌다. 도돌이표처럼 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되새기기를 반복한다.

시간은 고통을 잊게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들을 망각하기까진 얼마나 오래 걸릴까. 무뎌질 때까지 이 시간들을 견뎌내야 한다는 게 아득하기만 하다.

어느 순간, 거기에 머물러있는 것조차 숨이 막혔다. 허공을 응시하며 다시금 닫힌 균열이 열리길 바라는 기대감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난 1주일 만에 집을 나섰다.

비척거리며 움직이는 내게 가족 중 누군가가 어딜 가느냐고 물었다. 잠깐 바람 쐬러 나가겠다고 하자 코트를 입히고 핸드폰을 쥐어줬다. 정신과에 끌려가지 않은 게 용했건만, 사춘기를 심하게 앓는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문자며 전화가 그득했지만, 난 확인하지 않고 핸드폰을 말없이 외투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잘 다녀와. 너무 늦지 말고.”

모든 것이 꿈같다. 내가 발 딛고 선 이 세계가 어떻게 이토록 낯설 수 있을까. 발길이 한적한 곳을 향해 움직였다. 땅거미가 지는 시각이었다. 나는 텅 빈 공원에 앉아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끄트머리만 남은 주황빛 황혼이 서서히 서녘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붉게 물들었던 하늘은 어느덧 빛을 잃고 어둠에 잠겨든다. 희게 남아있던 월면이 차츰 선명해졌다.

뿌연 빛을 두른 달은 둥글었다. 젖어들듯 어슴푸레 흩뿌리는 빛이 시렸다. 달은 무언으로 누군가의 모습을 비췄다. 금빛의 그보단 암흑을 닮은 그가 내겐 친숙했기에, 기억 속의 그 역시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 내게 아로새겨진 기억 속의 그를 끄집어내 박제해두고 싶었다. 간혹 들여다보고 추억하는 것조차 고통이 될지라도, 그를 잊는 게 두려워서. 그쪽 세계에서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어버리는 것이.

나는 밤하늘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 빛을 어루만져 보고픈 충동. 세계와 세계는 실로 별과 별사이처럼 멀고도 멀다. 그때 불현듯, 하얀 궤적이 손끝을 스쳤다. 불꽃이 튀는 듯이 별이 떨어졌다. 찰나처럼 시야에 담긴 별의 흔적을 난 곧 놓쳐버렸다.

기이한 상실감. 움켜쥘 엄두도 내지 못한 빈 손바닥을 난 망연히 들여다봤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손은 단정하고 희었다. 내 안은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빈대도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뺨을 적시는 뜨거움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울었고, 다음날 완전히 사라진 듯하던 마력이 돌아왔단 걸 깨달았다.

마력은 옷장 속에 밀어넣은 붉은 로브와 함께 내게 남은 그 세계의 흔적이었다. 터질 듯이 치미는 감정에 얽혀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했던 나는 놀랍도록 평온해졌다. 여전히 뭔가를 하고픈 의욕은 나지 않는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라지만, 난 딱 반대였다. 내일 있을 죽음이 좀 더 찾아오기를 바라는 양 즐거움이며 욕망따윈 흔적도 없었다. 그저 싸늘하게 비었다. 그러나 조금씩, 나아졌던 것 같다.

며칠 후 엄마가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내일이 개학인데, 학교는 갈 거지?”

아마 그동안 방학이었나 보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 나간 것처럼 굴던 날 가족들이 내버려둔 게 이해가 되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건 내가 살아온 대로 살아가겠단 타성에 불과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학교는 여름의 열기가 가시지 않아 후끈하다. 난 어색하게 교복을 매만졌다. 고2, 새 학기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착 가라앉은 난 홀로 괴리되어 있는 듯했다. 학교를 다니며 또래의 친구들과 한 공간에 앉아 수업을 듣는, 십여 년을 해온 그것이 내겐 새삼 낯설었다.

이름도 얼굴도 흐릿해져 기억을 더듬어야했던 친구들이 날 맞았다. 말랐다. 무슨 일 있었냐. 어째서 잠수를 탔냐. 각기 힐난과 걱정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나는 미소로 답하며 말을 삼갔다. 다행히 내가 겪은 일들을 설명하지 않을 만큼은 제정신이었다.

수업은 지나치게 쉬웠다. 비약적으로 향상된 기억력, 사고력. 교과서를 몇 번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쏙쏙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예전 같았으면 탐냈을 능력인데 감흥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부쩍 조용해진 난 시냇물에 휩쓸려가는 나뭇잎처럼 이렇게 시간을 스쳐 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아힌아, 내일 봐. 힘내구!”

“응, 내일 봐.”

하교길. 나는 쾌활함을 꾸며낸 목소리로 늘 같이 하교하곤 하던 친구를 보냈다. 형식적으로 맺혔던 미소가 입가에서 스러진다. 나는 표정 없는 얼굴로 걸었다. 해질녘의 불그스름함에 젖어든 길은 끝으로 갈수록 깊은 어둠에 잠겼다. 내 앞에는 까마득히 멀고 깜깜한 길이 잔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삶도 죽음도 아닌 림보Limbo. 살아있는 한, 나는 그 길을 가야만 하겠지.

어쩐지 참을 수 없어져서, 마른 세수를 하며 숨을 들이켰다. 죽은 이를 따라 목숨을 끊는 건 어리석은 짓임을 안다. 나는 그런 선택은 하지 않을 테다. 그만치 모질지 못해서, 이 공허를 안고 그저 살아가겠지.

콘크리트가 깔린 바닥, 네모반듯하게 선 아파트, 듬성듬성 선 가로수. 제법 서늘해진 공기 속에서 고개를 숙인 채 오늘 아침에도 걸었던 길을 멍하니 걷고 있었다. 묘하게 사람이 없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우뚝 멈춰 섰다. 어깨에 맨 가방이 힘없이 뚝 떨어졌다. 그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렸다. 선연한 기운이 내 감각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기에. 믿기지 않는다. 내가 느끼는 이것이 진실일까. 나는 눈을 들었다.

저 멀리 선 인영이 보인다. 군데군데 켜지기 시작한 환한 조명이 숫제 먹혀들어가는 듯한 어둠. 그 어둠을 두르고 선 그는 보름달처럼 선명하다. 아파트 단지에서 보이는 신기루라니. 그러나 그 눈빛 그 얼굴. 내 기억이 그토록 세밀한 그림을 그려내는 게 가능한가. 나는 혼란에 빠졌다. 그가 다가와 내게 장미꽃다발을 내밀었다. 역시 이건 환각인 게 틀림없다. 장미라니, 이상하잖아. 난 손을 뻗어 꽃다발을 받아 안았다. 진한 향취가 확 풍겼다. 바스락거리는 촉감. 이상할 만치 생생하다. 너무도 생생해서……. 현실 같았다. 그럴 리 없는데.

“어떻게.”

미지근한 막이 서린 시야가 굴절된다. 한데 고여 일그러지다가 뚝 떨어진다. 앞이 트였다. 물기를 머금어 속삭였다.

“어떻게 여기 있죠.”

내가 떠나면 죽는다고 해놓고선.

“네가 나를 떠나지 않았으니, 내 생은 온전하다.”

그의 모호한 설명은 놀랍도록 충분했다. 나는 깨달았다. 그가 말한 떠남의 의미는. 그래, 나는 그를 끝끝내 마음에서 놓아버리지 못했다. 내게 주어진 마지막 선택의 순간에도, 그리고 지금도.

놀랍도록 모든 것이 빠르게 맞물리며 균형을 찾았다. 내 안 깊은 곳에 난 구멍이 조명처럼 터지는 환희로 메워진다. 아찔하다.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달려들듯이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마주 안는 손길은 차분하기만 하다. 예정되었던 운명에 다다른 양. 그것이 미치도록 싫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내 앞에 있었다. 영원히 잃은 줄 알았던 것이 다시금 내게. 뱃속이 뻐근하다.

사랑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도취. 고작 그런 감정일 리 없다. 고작 그런 게 나를 죽이고 살릴 리 없다. 빛이 돌아온 듯 회색이던 세계가 환한 색채를 덧입는다.

난 그의 품에 고개를 묻고 투정을 부리듯 물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세계를 넘나드는 건 내게도 쉽지 않은 일이니.”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에서 묘하게 다정함이 느껴졌다. 착각일까. 그것이 나와 같은 감정은 아닐지라도, 나는 그에게 의미이다. 그와 연결된 오로지 단 한 명의 인간이다. 하여 그는 세계를 넘어 내게로 왔다. 나는 눈을 맞추고, 눈앞에서 일렁이는 암흑을 향해 물었다.

“내 곁에 있을 건가요?”

“생이 다하는 날까지.”

누구의 생이냐고 물을 필요는 없다. 그가 죽으면 내 생도 의미를 잃고, 내가 죽으면 그도 죽는다. 지독하리 만치 절대적인 결속이다. 두렵긴커녕 벅찰 만큼 가득 채운다. 뱃속 깊숙이 그득그득 충만해진다.

어쩌면 나는, 이 세계에 재앙을 불러들인 걸지도 모른다. 그는 용이었다.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 그러나 운명이란 이름 아래, 나는 그의 족쇄가 되었다. 엘로힘은 내가 그를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다시 만난 그는 어딘가 미묘하게 달라진 듯도 하다. 미세한 감정 같은 것을 얼핏 머금은 얼굴. 나는 홀린 듯이 그를 응시했다. 어느덧 숨결이 얽혀들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깊게 입을 맞췄다. 마치 보통의 연인처럼. 흉내에 불과할 지라도,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남은 시간을 함께하다 보면 언젠가 그도 나를…….

희망은 앞선 부정보다 낫다는 것을 난 이제 안다. 갈 길은 태산 같이 멀고, 그는 또다시 나를 괴롭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리 현명한 사람이 아니다. 어리고 멋모르고, 때문에 감정이 휘둘리고 만다. 그럼에 불구하고 이 불가항력에 저항할 수 없기에―

고된 시간을 건너 나는 한때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거라 믿었던 그, 나의 마스터와 기꺼이 함께하기로 했다. 이 기적이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뭉그러진 꽃다발에서 현기증 날 만치 짙은 향이 났다.

============================ 작품 후기 ============================

결말은 장미도 나오고 나름 로맨틱(?)...

예정된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오랜 시간 써온 소설이라 감회가 새롭군요. 무엇보다 계약서에 기재된 원고 마감일입니다. (짝짝짝) 근데 넘기진 못하겠고....이제부터 손봐서 넘기고 외전도 쓰고 그래야지요(눈물)

사실 좀 더 스펙타클한 모험과 에피소드를 넣은 정말 판타지스러운 스토리를 생각했어요. 시온들도 좀 더 전형적으로 그리고 싶었고(불사를 손에 넣기 위해 마스터를 배반한 악인들로) 마스터도 좀 더 인간적이고 불신에 찌든 냉혈한 소시오패스 정도로 그리려고 했지만, 뭔가 초월적인 인상이 되어버렸죠. 주인공도 감정적으로 담백하고 쿨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가려고 했지만, 뭔가 어그러졌어요. 소설은 늘 쓰면서 생각하는데 마음대로 안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한 것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그 나름대로 그려낸 것 같아서 저는 만족합니다.

이걸 쓰면서 생각지도 않은 사건들도 많이 겪었고, 워낙 내용이 우중충하다보니 슬럼프도 심하게 와서(생각보다 전 밝은 소설이 맞더라고요!) 연재주기도 늦춰졌는데 그래도 끝까지 따라와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완결을 올림 모를까 다신 프리미엄 연재는 안하기로.....<-

이 소설은 제목이 바뀌어서 로크미디어에서 11월 출간 예정입니다. 종이책으로 먼저 나오고 이북으로도 나올 거예요. 차기작은 <페어리 레이디>, <성녀님의 폭군 교화법>이 되겠네요. 페어리 레이디는 전에 말씀드린 적 있지만, 타사 웹소설에서 연재중이고 종이책으로도 1,2권이 출간되어 있지요. 성녀님의 폭군 교화법도 또 다른 타사 웹소설에서 완결까지 연재됩니다. 둘 다 가급적 이번년 안에 매듭짓는 걸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고로 조아라에서 언젠가 다시 연재를 하게 될 것 같긴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네요. 잊고 계실 때쯤 스리슬쩍 나타날지도…….

쿠폰 후원해 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모두들 좋은 하루되시길!

덧. 잊을 뻔했네요. 혹시 소설에 관해서 궁금하신 것 있으시면 댓글 달아주세요. 나중에 블로그를 통해서든 스페셜 외전을 통해서든 답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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