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4 13. 선택 =========================================================================
심장이 두근거려 박동이 빠르게 뜀에도 차분하게, 엘리야의 나비를 따르던 그때처럼 조급할 것은 없었다. 마을에서 떨어진 으슥한 숲 쪽이었다. 발밑에서 잔디와 나뭇잎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밟혔다. 한동안 정신이 사로잡힌 것처럼 멍하니 걸었다. 더 깊고 깊은 숲 속으로.
그러다 문득, 무심코 시선을 든 난 내가 다다른 이곳이 내가 꿈에서 줄곧 보았던 광경과 유사하단 걸 깨달았다. 그 금빛 잔잔하고 나무가 무성한 아름다운 꿈속의 숲. 비록 그때와 같은 빛은 없었지만, 잎사귀의 모양이며 바람에 산들거리는 윤곽이 낯익었다. 저 앞, 갈라진 틈새로 비치는 파랗게 고인 샘까지도.
나는 전율에 잠겨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내 무의식은 이곳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세계가 나를 부르듯 내게도 내 세계로 귀환하고자하는 본능이 새겨져 있었기에. 향취처럼 진하게 스며드는 기운이 친숙했다. 가슴 속에 그리움이 벅차올랐다. 꿈속에서 내가 손가락을 담갔던 그 샘에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용이 내려온 니라야의 늪과는 비할 데 없이 작은 자취.
수면에 언뜻 비치는 풍경을 난 홀린듯이 응시했다. 평범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선 결코 평범하지 않은 현대식의 방. 누군가가 누웠다가 사라진 흔적만이 남은, 이불보가 구겨진 침대. 내가 있었던 자리. 마치 조금도 시간이 흐르지 않은 듯이 어둠에 잠겨있는 방안에서, 달빛이 맺힌 침대가 눈에 박혔다.
목줄을 매어 잡아당기는 듯이, 끌림이 지독히도 강렬했다. 나는 샘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발끝이 차가운 물에 잠겨들었다. 그 선연한 감촉이 이것이 꿈이 아님을 실감케 했다. 정말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막상 물 앞에 서자 쉽사리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토록 염원하던 게 눈앞에 있는데, 이상하리만치 망설여진다. 나는 망설임의 이유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미련이다. 어리석은 미련. 돌아가면 잊혀져 기억에 희미한 잔상으로만 남을, 그리고 언젠가 추억이 되어버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양자에서 선택하기로 결정한 건 이것이니 망설일 이윤 없었다. 명료하고, 돌이킬 수 없는 이유로 나는 돌아가야 했다.
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무겁게 짓눌리던 심장이 이내 아프도록 조여왔다. 애써 통증을 누르며 샘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찰나, 등 뒤에서 존재감이 실렸다. 무형의 힘이 뻗어오듯 그 기척이 날 사로잡았다. 그리고 매끄러운 음성.
“아힌.”
불안이 덩굴처럼 삽시간에 자라올랐다. 나는 서서히 뒤를 돌아봤다. 열 걸음 정도 떨어진 자리에 그가 서 있었다. 금빛이 사라진 그늘진 숲에서, 밤하늘에 뜬 달처럼 찬연하고 태양이라기엔 차가운 금빛을 머금은 채로. 내가 사라진다한들 그 빛이 가실까. 나는 말없이 홀로 완전한 그를 바라보았다. 돌아갈 곳이 코앞에 있는데 나를 막아설지도 모르는 그를 두고도, 그가 날 막을까 두려운 것보단 애가 탔다. 이제 그가 내 의지에 반할 수 없단 걸 알고 있기에 그런 걸지도 모른다.
“아르페로스.”
그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미동도 없이, 조각상처럼 날 바라보았다. 여전히 내 언령이 영향을 미치는지, 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못했다. 그 금안이 비춰내는 건 오직 나 하나. 그 특별함이 가슴이 사무친다. 배신감도 분노도, 그 어떤 감정도 백지인 양 느껴지지 않는 그는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기꺼이 매혹되어 그에게 목숨을 바칠 만큼.
……주저 없이 떠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나는 지금 놀랍도록 주저하고 있었다. 이별을 실감하자 떨림이 가시질 않는다. 아득하고, 소중한 것을 놓쳐 저 낭떠러지로 떨어뜨리는 듯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만치 사랑한 이였다. 인간도 아니고 나를 사랑하지도 않으며, 그저 원치 않는 운명으로 내게 얽혀진 존재. 그러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함께한 시간이 있었다. 그동안 그는 나를 번민과 혼란으로 몰아넣으며 진득이도 지배했다. 지난 생보다 그 시간이 내겐 더 강력하게 느껴졌다. 흡사 그라는 존재에 온통 잠겨든 듯이.
그러나 아무리 그가 내게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크다고 한들 내가 떠나온 세계와 비등할 리 없다. 그러니 나는 여기서 떠나야함을 알았다. 내게 허락된 건, 이별의 인사일지니.
“나는…….”
“네게 말할 것이 있다.”
간신히 나온 말을, 마스터가 가로챘다.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가슴이 터질 듯해서, 나는 그가 말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것은 위성의 운명. 나는 네게 귀속된 존재이니, 내 생은 너에게로 귀결한다. 그러므로―”
비현실적인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네가 떠난다면, 나는 죽게 되겠지.”
참으로 차분한 협박이다. 나는 망연히 그를 바라봤다. 죽음이란 그 단어가 마비된 이지를 넘어 섬뜩한 충격으로 느리게 닥쳤다. 밀도 높은 감각이 파도처럼 날 휩쓸었다. 심장이 까마득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너무도 선명한 소리라, 되물을 수 없었다. 되묻고 싶지 않았단 것에 가깝다.
“그 또한 내 운명이니.”
말을 맺은 그는 나를 고요하게 마주보았다. 그는 나를 설득하려 하거나 회유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내비치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는 양. 그것이 죽음이라도, 제 눈으로 끝까지 지켜볼 듯한 초연함. 그건 그의 시온들이 보였던 태도와 유사했다.
그러나 그 초연함은 내 것이 아니었다. 떨림이 더 커졌다.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듣지 않을 걸 그랬다.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 떠나갈 것을. 그러나 후회는 늦었고,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한 것은 진실. 나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저 형언할 수 없어, 뜨거운 눈물이 뺨을 갈랐다.
완고하고 철벽처럼 단단한 결정이 일시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내 안에서 선택이 종잇장처럼 뒤집혔다. 그건 강제에 가까운. 그만큼이나 저항할 수 없는―
그가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이 운명이라면, 이 또한 내 운명이었다.
내가 잃은 것들에 대한 그리움, 그 무게를 평생을 짊어져야할 것을 알면서도 나는,
마스터를 죽일 수 없었다. 그를 죽게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절대적인 법칙. 그가 죽는 것을 볼 바엔, 내가 죽는 게 나았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비정하고 냉혹하고 무심하여 밉고, 원망스럽고, 이해할 수 없이 날 고통스럽게 만들지라도,
그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그는 진실로 마스터, 내 심장의 주인이었다.
마탑에서 그의 손을 잡고 도망쳤을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정해져 있는 사실.
그러니까 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적으로 돌아선 상황에서 내가 마스터의 손을 놓을 수 없단 걸 알았을 때부터, 앞으로도 난 결코 그럴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아마 평생,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되겠지. 죽을 목숨을 살려준 데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자.
눈물은 멎었고 새롭고 참담한 결정이 가슴 속에서 돋아났다. 나는 손을 내려 주먹을 아프도록 굳게 틀어쥐었다. 다른 방향으로 남은 미련이 나를 그 자리에 붙박았다. 차가운 물속에 오래도록 머무른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이윽고 난 수정구슬 너머의 세계를 엿보듯 마지막으로 내가 포기한 세계를 돌아보려고 했다. 눈과 기억에 꼭꼭 새겨둘 셈으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굳어버린 다리가 휘청거렸다. 나는 거짓말처럼 완전히 균형을 잃었다.
철썩, 몸이 수면으로 무너지며 요란한 마찰음이 울려 퍼진다. 순식간에 옷이 젖어들며 얼굴까지 튄 물이 차갑다. 당황스러웠다. 나는 마스터 쪽을 쳐다보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강렬한 인력이 물귀신처럼 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제게 귀속된 일부를. 애써 일으킨 마력이 속절없이 스러져갔다. 소용돌이처럼 강력한 힘이었다.
마스터는 샘에 삼켜져가는 날 보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했다. 달빛 같은 금빛이 산란하듯 이지러졌다. 난 도와달라고, 그를 부르려 했다. 그러나 입안으로 밀려든 물이 말을 막았다. 목구멍까지 빽빽하게 들어찼다. 허덕이던 난 까마득한 추락감을 느꼈고―
다음 순간, 탄력 있는 바닥에 부딪혀 몸이 튕겼다. 물기는 어디로 갔는지 축축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무늬 없는 베이지색 천장. 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내 방, 내 침대 위였다. 놀랍도록 낯선. 마치, 악몽을 꾸고 일어난 듯이 변함없는 그 모습 그대로의. 어디에서건 마스터의 모습도, 저쪽 세계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벼락이 내려치는 듯한 혼돈. 공황에 빠진 채 내가 떨어진 텅 빈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젓던 난 불현듯 깨달았다. 나는 돌아왔고, 때문에 균열이 닫혔다는 것을. 전신이 경련하듯 떨렸다. 아아……. 흐느낌이 입밖을 비집고 새어나온다. 눈앞이 흐렸다. 미칠 듯한 상실감이 가슴을 메운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난 그를 잃었다. 아마도 영원히―
그리고 나는 간절하게 바라던 현실 속에 홀로 남겨졌다.
============================ 작품 후기 ============================
챕터 종료.
다음 편이 에필로그입니다. 한 편으로 끝날지는 알 수 없사옵니다.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오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사오나... 써지는 거 보고요.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