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3 13. 선택 =========================================================================
하도 스케일 큰 이야기라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나라도 아니고 세계를 옮겨 다니는 생물이라니. 하긴 내 세계에도 용에 관한 전설이 전해진다. 여러 나라에서 저마다 다른 형태로. 그런 걸 보면 내 세계에도 용이 있는 걸까. 난 의문을 더했다.
[오랜 세월은 내게 초자연적인 지식을 체득하게 해주었지. 거기엔 용에 대한 지식도 있어. 어디선가 태어난 용은 마력이 충만한 세계를 찾아와, 그곳에 둥지를 틀지. 머무르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아. 영원토록 머물 수 있고, 영영 떠나가기도 하지. 이번에 찾아든 그는 천 년이 넘는 긴 세월, 이 세계에 머물러 있었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이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는 영육을 분리하여 육신을 봉인하고 탑으로서 결계를 세웠지. 그것도 모자라 제 힘을 흩어놓고, 마력으로 제 영의 육신을 만들어 형상을 고정시킨 채 살아왔어. 그저 강력한 힘을 가진 인간 마법사로.]
그건 나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바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가 단순한 마법사는 아니었지. 왕은 마법적 재능을 가진 이들에게 계약이란 방법으로 마력을 부여하고, 그들을 통해 인세에 개입했어. 마탑의 손길이 닿지 않은 땅이라곤 없었지. 그는 그렇게 번거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제 수중에 놓았어. 뭔가를 빼앗거나 지배욕을 충족시키길 원한다면, 좀 더 간단한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음에도. 왜 그런 짓을 벌이는 건지 아무도 추측하지 못했지. 우리는 다만 침묵했어.]
“그 이유는, 바로 나였지.”
나는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게 ‘나’라는 데 주목한 반면 엘로힘은 그 역할에 주목했다.
[그는, 숨죽이며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자신을 다스릴 제약이 언젠가 나타나리란 걸 알았기에.]
“제약?”
[용에겐 제약이 있어.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도 생명이기에 살아 숨 쉬는 이상,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제약. 모든 것엔 인과가 따르기 마련이지.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에겐 함부로 그 힘을 행사할 수 없도록 족쇄가 채워지는 거야.]
그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번에 찾아온 용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 그는 자유롭고 온전했지. 어린용이라서 아직 제약이 걸리지 않았던 거야.]
그는 자신이 인간과 용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때문에 그는 뭔가에 얽매이는 것에 강렬한 거부감을 품었다. 그래서 언제고 찾아올 그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해 준비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인세에 개입하는 데 한정적이었던 건, 그게 그에게 제약을 부르지 않는 방식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년여 전, 또다시 세계의 흐름이 움직였어. 나는 그 작은 파문을 알아챘지. 그때는 그게 뭔지 알지 못했어. 하지만 널 본 순간, 난 바로 알 수 있었지. 드디어 변화가 시작되었단 것을.]
“…….”
[용은 무한한 힘의 주인이야. 세계를 부수지 않는다면 넌 그를 통해 무엇이든 가질 수 있어. 나는 인간의 탐욕을 알지만, 동시에 그게 인간의 전부가 아니란 것도 알아. 하지만 그를 떠나온 걸 보면, 네겐 그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게 있겠지. 어쩌면 그런 인간만이 용의 운명이 될 수 있는 건지도 몰라.]
내가 탐욕스럽게 그의 힘을 휘두를 인간이었다면, 나는 그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저 위에선 퍼즐을 맞추듯 나를 그에게 맞물린 조각으로 놓았다. 나는 하늘을 원망해야 하는 걸까. 거대한 힘 앞에서 나 자신의 무력함을 실감하는 건, 실로 뼈저린 일이었다.
[너는 네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거겠지?]
추측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엘로힘을 응시하며 난 짤막하게 말했다.
“그래, 난 돌아가고 싶어.”
담담하게 나온 말과는 달리, 간절함이 목 끝까지 치민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은 건 그 하나였다.
“잠깐, 다른 세계에서 오셨습니까?”
침묵하고 있던 뤼비에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 눈빛이 꼭, 내 피를 뽑아서 연구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이글거렸다. 난 정색하며 잘랐다.
“날 연구대상으로 삼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리고 다시 엘로힘을 돌아봤다.
“방법을 알아?”
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모른다면, 누구에게 물을 수 있을까. 세계를 넘나들 수 있는 방법을 알 만한 이가 달리 생각나지 않았다. 이윽고 엘로힘이 부리를 움직였다.
[모든 생명은 태어난 세계에 일부로서 귀속 돼. 너는 용의 운명이기에 거기에서 벗어나 이곳에 떨어졌지만, 네 세계는 여전히 너를 끌어당기고 있을 거야.]
“나는 차원의 틈을 통해서 이 세계에 왔어.”
정말 난데없이, 재앙이 닥치듯 일어난 일이었다. 차원의 균열에 끼어서 죽어가던 날 마스터가 꺼내주었지. 그래, 그가 나를 살렸다. 그 또한 운명의 흐름이었다는 것이 우습지만.
[먼 옛날, 용 아르페로스가 떨어진 자리엔 그 흔적이 남았지. 그것이 니라야의 늪. 그러니 네가 떨어진 그 어딘가에 자취가 남아있겠지. 차원의 틈은 경계에 난 상처 같은 거야. 낫기 전엔 인위로 닫을 수 없어. 이물질과 같은 네가 이곳 세계에 있으니, 그 세계의 인력으로 상처는 끊임없이 덧나겠지. 아마도, 그곳으로 가면 넌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돌아간다고. 그 희망찬 말에 전율이 흘렀다. 찌릿하다. 내가 겪은 모든 게 그 하나만 이뤄진다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나는 거기가 어디인지 몰라. 너는 알지 않아?”
눈을 떴을 때 내가 본 것은 어느 여관방. 그리고 마스터. 죽어가며 바르작거렸던 거긴 어디였을까.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차디찬 바닥의 기운밖에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건 필시 죽음의 감각이겠지.
[그거 유감이네. 용처럼 거대한 마력을 품은 존재가 온다면 모를 수 없겠지만, 네가 이세계로 온 건 아주 작은 파문에 불과했어.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어. 하지만 네가 근처에 이른다면, 자연히 알 게 되겠지.]
“근처란 말이지.”
얼마만큼 근처인진 모르겠지만, 이 세계는 결코 좁지 않다. 망망대해를 휘젓고 다녀야한다는 통보를 받은 듯 막막했다. 그나마 바다가 아닌 육지란 게 다행일까.
“저는 압니다.”
그때 뤼비에가 불쑥 나섰다. 무슨 수작을 부리나 싶어서, 나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일년여 전이라면 생각나는 게 있군요. 웬 작은 마을에 흑마법사가 나타난 적이 있었지요. 사람을 죽여서 마법사길드에서 우르르 몰려갔는데, 몰려간 마법사들이 도리어 떼죽음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그후로 마법사길드 쪽에서 추적을 포기한 듯하더군요. 아마 상대가 마탑이기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노골적으로 무력을 행사하는 건 마탑답지 않은 일이지만 말입니다. 그 덕분에 제게 쏠린 신경이 흩어져서 좀 편했습니다만, 아시는 사건입니까?”
그의 통찰이 놀라웠다. 그래, 그 마을. 여관 주인이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손님은 며칠 전에 마법사님이 처음 오셨을 때 못 뵌 거 같은데……. 그 이후로 방에서 나오신 적도 없고. 흠, 실례지만 외모를 보아하니 먼 곳에서 오신 듯한데?’
……그건 마스터가 처음 여관에 들어섰을 때는 혼자였단 뜻. 이동하여 나를 데리고 다시 여관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거처를 멀리 둘 필요는 없으니 그게 그 여관에서 먼 곳은 아니었겠지. 그 여관이 있는 마을. 거기만 알면―
난 득달같이 물었다.
“그 마을이 어디지?”
“그 마을이……. 뭐, 알려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뤼비에는 잠시 뜸을 들였다. 뭔가 있나? 난 살짝 긴장한 채 그가 입 열기를 기다렸다.
“피를 좀 뽑아주신다면요.”
뤼비에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고, 그건 내 분노를 자극하기에 족했다. 난 그를 한 대 후려칠까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선심 한 번 쓴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뤼비에는 바로 제 몸을 뒤져서 어디서인지 모를 곳에서 작은 호리병을 꺼냈다. 병이 너무 큰 거 아니냐고 내가 핀잔을 던지자, 뤼비에는 ‘그 정도는 상관없으시잖습니까.’라며 생명에 지장이 없단 이유로 내가 겪을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치부해버렸다. 결국 그는 단검으로 내 손을 째서 줄줄 쏟아지는 피를 받아낸 뒤, 보물이라도 다루듯 호리병을 품속으로 소중하게 밀어 넣었다. 난 회복마법을 써서 낫게 한 손을 이맛살을 찌푸린 채 들여다보았다. 뤼비에가 그제야 순순히 마을의 이름과 위치를 말해주었다. 엘로힘이 날개를 펼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내가 그리로 널 보내줄게. 그게 내 선물이자 보답이야.]
은혜 갚는 까치라더니, 새에게 은혜를 지우는 건 여러모로 좋은 일 같다고 난 되뇌었다. 타산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가슴엔 잔잔한 여운이 남았다. 엘로힘이 모든 진실을 말해주었기에 아르페로스가 그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모든 계획은 끝났고, 그는 더 이상 마탑의 주인이 아니었다. 남은 것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 운명― 나 하나뿐.
“정말 안녕이군요. 바라는 바를 이루시기를.”
목적을 달성한 뤼비에가 미묘한 아쉬움이 남은 얼굴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날 뜯어서 해부해 보고픈 눈빛이다. 난 환히 웃으며 그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으악 소리를 지르며 몸을 웅크리는 꼴에 아주 속이 시원하다. 한 번쯤 이래보고 싶었다. 아쉬움을 남기고 가는 건, 역시 아니겠지.
“이왕 흑마법사가 된 김에 욕심껏 잘 살아.”
난 숫제 어르신이라도 된 양 훈화를 던졌다. 뤼비에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예, 아힌님도 잘 사시길 바랍니다…….’라고 말을 맺었다. 엘로힘은 자리를 옮겨 내 어깨위로 날아 앉았다. 불새의 날개에서 서서히 불길처럼 마력이 피어올랐다. 그때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니라야의 늪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혹시…….”
살짝 머뭇거린 난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블레셋과 엘리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엘리야라는 자는 모르겠지만, 블레셋이란 자가 늪을 떠나는 걸 보았어.”
그걸로, 답이 되었다.
엘로힘의 마력이 내 몸을 휘감았다. 나는 안녕, 하고 중얼거렸고 동시에 따뜻한 기운이 전신에 번졌다. 언 몸을 녹여 기력을 전해주는 듯이.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평지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마을이 보인다. 난 불과 오백미터도 떨어져있지 않은 그 마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단 한 번도 여관 밖으로 나서본 일 없는데, 놀랍도록 기시감이 인다. 그래, 바로 이곳이다. 내가 처음으로 발을 들인 마을.
추억을 되새길 요량이 아니라면 굳이 저길 다시 방문할 필요는 없었다. 마을에 인접하자마자 투명한 실자락이 휘감아오듯 기묘한 인력이 나를 당겼다. 마력이라곤 하나 없었던 그때의 나와는 달리, 기감에 민감해진 지금 나는 나를 이끄는 힘을 인지할 수 있었다. 나는 그저 이끌리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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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막스를 넘어 클라이막스로!
이 소설에 완결이 임박하다니 감회가 새롭군요(감동)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