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2 13. 선택 =========================================================================
난 천장에 빽빽한 종유석과 거기서 툭툭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스름이 깔린 양 사방이 퍽 어두웠다. 군데군데 뚫린 천장에서 빛이 새어들지 않았다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동한 것까진 좋았는데, 장소가 좀 색다르다. 동굴이라니. 마법사 길드도 작살났겠다 뻔뻔한 얼굴로 어딘가 마을에 들어가있을 줄 알았는데. 흑마법사답게 굴에 처박혀서 연구라도 하는 건가? 니라야의 늪에서 그와 헤어진 지는 그리 오래지 않았으나, 뤼비에는 아마 멀찍이 도망갈 셈인 걸로 보였고 이동마법에 소모된 마력이 꽤 큰 걸 봐선 예상이 적중한 듯했다.
내가 온단 건 알았을 테지만, 그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고 싶었으므로 나는 느릿하게 이동했다. 목욕 중인 그의 모습을 보거나 하는 건 내게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축축하게 이끼 낀 바닥은 미끈하여 걷기 힘들었다. 난 마법으로 허공에 몸을 띄워 올렸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 것 같진 않은데…….
뤼비에의 기척이 느껴지는 쪽으로 향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종유석 기둥에 기대어 선 그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보였다. 내가 다가서자 뤼비에의 몸이 흠칫 떨렸다. 난 의아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뤼비에?”
“공교로운 상황이지만, 마침 잘 오셨습니다.”
뤼비에가 그 자세로 손등을 들어보였다. 후, 한숨을 내쉰 그가 몸을 일으켰다. 날 돌아보는 얼굴이 미묘하다. 촛불이라도 켠 듯이 그의 뒤가 밝아 역광이 졌다. 은은하나, 자연적이지는 않은……. 그제야 나는 그의 앞에서 퍼덕이는 작은 마력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일전에 접해본 적 있는 듯한― 기억을 더듬으며 난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엇이든 내게 위협이 되진 않았다. 그럼에도 두려움 없이, 그러나 신중하게 발을 움직였다. 뤼비에가 곤란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납치를 당했거든요. 이유를 좀 알고 싶군요.”
그의 어깨로 뭔가가 포르르 날아와서 앉았다. 나비라기엔 크고, 생명체 같지 않은 흐릿한 가벼움. 나는 불길처럼 일렁이는 붉은 새를 보며 단박에 기억 속에서 그 이름을 끄집어냈다.
“엘로힘?”
[오랜만이야. 아마도, 인간의 시간으로는?]
멋대로 남의 어깨에 주저앉아서 홰치는 모습이 태연자약하다. 난 그에게 반갑게 화답할 수 없었다. 엘로힘에게 딱히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단지 놈은 마법생물이었고, 때문에 마스터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경각심이 내 말투를 뾰족하게 만들었다.
“내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무슨 목적으로 나타난 거지?”
마지막 만남을 상기해보자면, 엘로힘은 그의 부화를 돕다 기절한 날 놔두고 도망친 괘씸한 녀석이지 않은가. 아주 이용할 대로 이용해먹었지. 얼어붙어 멸망해갈 기드온을 녹인 건, 그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 결과로서 초래된 일이 떠올리기도 싫은 것이었기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엘로힘의 날개가 다소곳이 자리를 잡았다.
[내가 별로 반갑지 않아? 난 반가운데, 왕비님.]
“누가―”
왕비란 거야? 화가 치밀어 내쏘려다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제 어깨에 앉은 새와 날 번갈아보는 뤼비에를 의식해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그 사이, 마스터와 접촉했던 걸까. 내 의심을 알아챈 듯 엘로힘이 말해왔다.
[나는 아득히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 왕보다도 더 오래, 이 세계에서. 그래서 느낄 수 있었지. 너는 결국, 그를 변화시켰구나.]
예측한 대로 되었단 그 말이 거슬려, 목울대가 쇳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입술을 달싹여 뱉어냈다.
“……그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여전히 무심하기에 잔혹하지. 더는 그에 관해 말하고 싶지 않았기에 난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어째서 뤼비에를 납치한 거야? 잡아먹으려는 건 아닐 테고.”
[농담은. 난 인간을 먹지 않아. 니라야의 늪은 내가 엿볼 수 있는 장소지. 모든 게 끝에 가까워졌고, 나는 네가 그를 찾아올 거란 걸 알 수 있었어.]
세월이 가져다준 통찰, 혹은 예지일까. 머리를 굴려보자니, 전쟁을 치러낸 듯 피로감이 몰려왔다. 많고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는 추측해보려던 시도를 중단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물었다.
“왜 나를 찾았어?”
[난 은혜를 잊지 않아. 그리고 넌 나를 도와줬지. 비록 그간 왕이 두려워 네게 접근하지 못했지만, 난 언제고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너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은혜라니. 설핏 웃음이 나왔다. 나는 너를 도운 게 잘한 일인지조차도 모르겠는데. 그 때문에 엘로힘의 탓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말이 날카롭게 나왔다.
“날 도울 정신이 있으면서 기드온에 남겨진 사람들은 왜 구하지 않았지? 그것도 그가 두려웠나?”
그들은 엘로힘을 믿고 도왔다. 그런데 그 결과가 기드온의 해동을 대가로 그들 스스로를 사르는 것이라니. 그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찾아온 봄을 만끽하기도 전에 내린 절망 같은 죽음. 고통은 없었을까. 무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복받쳤다. 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곧 엘로힘의 부리에서 흘러나온 것은, 예상지 못한 소리였다.
[그들은 죽지 않았어.]
“나는 분명히, 죽었다고 들었어.”
블레셋이 그리 말했었지. 난 의혹에 찬 시선을 보냈다. 엘로힘이 노래하듯이 부인했다.
[탑의 마법사들은 설산을 통째로 붕괴시켰어. 거기에 있었던 건 미약한 인간들뿐이니, 죽었다고 믿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
“네가 기드온의 사람들을 구했다면, 어째서 마탑에서 눈치 채지 못했지?”
엘로힘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날 얕보는 것 같아. 왕의 마력으로 구현되는 마탑의 마법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나는 마법생물이야. 다시 말해,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마법사지. 마법사 몇 명 속이는 건 일도 아니라고. 격차가 심한 상위의 마법사가 은밀히 마법을 펼치면 그보다 수준 낮은 마법사가 읽어내기 어렵다는 건 알 텐데.]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엘로힘이 내겐 퍽 무능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는 강력한 마법생물이다. 가뜩이나 그를 부화시키느라 마력을 쏟아 부어, 폭풍이라도 친듯이 대기가 온통 혼란한 장소. 시온도 아닌 마탑의 마법사들 정도야 그리 어렵잖게 속일 수 있었을 터. 게다가 내가 퍼부은 마력을 한몸에 받았으니 힘이 넘쳐나기도 하겠지.
지금은 희미하게 기척을 가렸지만, 나는 그 너머에 불길처럼 흐르는 강대한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한시름 놓았다. 엘로힘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를 위로하거나 변명하려고 거짓말할 이유도 없을 터였다.
[여하간 그들은 모두 안전해. 하나같이 봄이 찾아온 기드온에서 네게 감사하고 있지. 탑의 마법사가 사라졌으니 기드온이 영주의 폭정에서 벗어날 날도 머지않았어. 그건 인간의 일이지만.]
“다행이네. 하지만 넌 어떻게 행동할 수 있었던 거야? 그는 분명히.”
[눈치채셨겠지. 그러나 왕에겐 내가 인간들을 살려내건 말건,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을 거야.]
이후 시온들이 그를 배신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니, 나서서 뭘할 수도 없었으리라. 그때 검을 회수하라 나를 내보냈던 건,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온들에게 행동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나. 약해진 것처럼 위장하면서.
거기까지 떠올린 순간, 속이 끓었다. 차라리 미리 알아내어 징죄하는 쪽이 나았으리라. 제자란 이름으로 그들의 생과 의지를 저당잡곤, 도구 다루듯 손안에 놓고 이용한다. 그들과 짧은 기간 대척점에 서 있었음에도, 또한 내 입으로 그들을 비난한 적 있음에도 마음으론 도무지 그들을 탓하지 못했다. 나 역시 같은 상황에서 세월이 지나면 그들과 같아졌을 것이므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들은 영원히 도구였을 것이다. 그가 내리는 살해와 파괴에 따르면서.
그를 제어할 수 있단 것 외에 죽어간 시온들과 내가 얼마나 다른가? 마스터는, 아르페로스는 그 운명이란 걸 도려낼 수 있다면, 그리고 허락된다면 주저 없이 나를 살해하겠지. 더 이상 참담할 것도 없다. 난 뻑뻑해진 눈을 서서히 내리감았다 떴다. 한 차례 쏟아내서 비워진 눈물샘은 말라있었다.
“그래서 네가 어떤 식으로 내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데.”
[옛이야기를 들려줄까 해. 아마도 네가 알고 싶어 할 내용일 거야.]
난 새삼스레 힐끔 시선을 던졌다. 뤼비에가 신중한 얼굴로 대화를 귀담아듣고 있었다. 아주 생기가 도는, 흥미진진한 눈빛이다. 둘만 이야기를 나누기엔 좀 늦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납치된 그에게도 알 권리가 있지 않겠어? 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엘로힘이 나직하게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불꽃의 정에서 태어났어. 아주 미약한 생명에서 시작하여 점차 이지를 갖추어, 수천 년의 생을 살아왔지. 이 세계에 귀속된 존재로 그 흐름을 줄곧 지켜봐오면서.]
이 새가 그렇게나 오래 살았단 말인가. 난 새삼스러운 눈으로 눈앞의 자그마한 새를 내려다보았다. 말투도 그렇거니와 엘로힘에겐 어딘지 모르게 세월이 가져다주는 연륜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인간과는 달리, 흘러가는 세월에서 자유롭기 때문일까.
이어진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나타났어. 나타났다기보단, 하늘을 가르며 떨어졌다는 표현이 맞겠지. 그는 마치 유성 같았어.]
“유성이라고? 넌, 나한테도 그 말을 했었잖아.”
의미심장한 소릴 하고 떠나버린 그 때문에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고 곱씹어야만 했다.
[그래, 이 세계에 떨어진 최초의 유성은 네가 아니었어.]
내가 최초가 아니었다면, 그 전에는……. 묻지 않아도 답을 알 것 같았다.
[내게도 먼 옛날이었어. 창공을 가르고 온 천지를 울리며 황금빛 용이 이 세계에 나타났지. 그래, 니라야의 늪이라고 말해지는 바로 그 장소에.]
마수가 나타난 흔적이 남아, 그 잔존 마력만으로도 마력석이 산출되는 니라야의 늪. 그리고 봉인을 풀어낼 장소로 지정되었던 그곳. 왜 하필 거기였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래, 아르페로스 역시도 이 세계로 왔던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
[내 생을 통틀어 그보다 인상적인 광경은 본 적이 없어. 경계는 부서지고 세상은 온통 금빛이었지. 거기에 그 아름답고 강대한 존재가 날개를 펼치고 있었어. 이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는 어마어마한 마력을 품은 용.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어. 나아가 그의 앞에 경배를 바쳤지. 나뿐만 아니라 이세계의 모든 마법생물이 그랬어. 모두가 깨달은 거야.]
여운에 잠긴 엘로힘이 날개를 잘게 퍼덕였다.
[왕이 이 세계에 도래했다는 걸.]
다른 세계에서 온 지배자. 그의 모습을 실제로 본 나로선 엘로힘이 말한 광경을 그려낼 수 있었다. 그 생생한 영상이 나를 잠시 압도시켰다. 침묵하고 있던 뤼비에가 입을 열었다.
“그건 저도 고서에서 읽은 적이 있는 사건 같군요. 그때 발생한 마력 폭풍 탓에, 십 년이나 기상이변이 계속되었다고 역사상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물론 거기선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다고 했지만요.”
이야기 계속하시죠, 라며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용이란 게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내 세계엔 인간 외의 지능을 가진 무언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돌고래나 원숭이가 그나마 인정받는 종류였지만, 인간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란 평가를 받진 못했다. 그러니 그토록 대단한 어떤 생물이 존재할 수 있단 것 자체가 낯설게만 여겨졌다. 내 의문을 눈치챘는지 엘로힘이 설명을 보탰다.
[용은 초월적인 힘을 품은 존재야. 그들은 인간들이 말하는 신과 유사한 힘을 가졌지. 무한에 가까운 마력과 권능을 가진 그들은 한 세계에 오직 홀로만 머무를 수 있지. 한 세계에 오직 하나의 용. 이 세계는 언제나 용에게 복종을 바쳤어. 아득히 먼, 내가 태어나기도 전 과거에 이 세계엔 이미 용이 들었다 난 적이 있었어. 그때의 파급은 엄청났고, 때문에 이 세계는 새로운 용이 찾아왔단 것에 빠르게 순응했지. 이전에 뿌리에 각인된 것처럼.]
============================ 작품 후기 ============================
챕터제목이 의미심장하지요?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