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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51화 (151/155)

00151  12. 니라야의 늪  =========================================================================

그가 나를 지켜보는 건 아닌가 하고, 어렴풋이 느꼈던 때를 떠올렸다. 무심하게만 여겨졌던 그였으나, 위급할 때에 나를 마냥 버려두진 않았다. 꿈속에서조차 혼자가 아니었던 그 순간들.

칠흑 같은 밤에도 당신은 흡사 달처럼 날 내리비추고 있었다. 비록 그 무리가 검어, 내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지라도.

“너는 마탑을 벗어나고 싶어 했지. 네가 나를 배반하고 떠나갔다면,”

“…….”

“나를 얽어매던 구속도 약해졌겠지.”

이내 매끄럽게 떨어지는 가혹한 진실.

“그렇게 되면, 나는 너를 죽이려했다. 허나 너는 끝끝내 도망치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러했지. 그것이 네 선택.”

내가 선택한 거라고?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그래, 나는 결국 도망치지 못했다. 겁먹어서, 당신이 나를 죽일까 봐. 그리고 이제 보니 그게 아주 잘한 선택이었던 듯싶다. 내 생존 본능이 제대로 발목을 붙잡아서, 이제까지 내 숨이 붙어있는 모양이다.

귀를 막고 싶은, 그러나 간절히도 알고 싶었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네가 에스겔을 막아서 죽음을 앞둔 순간―”

“…….”

“내 의지는 사라지고, 나는 완벽하게 무력해졌다. 그리하여 깨달았다. 너를 살린 건 내 선택이라고 믿었건만, 그조차 실은 어쩔 수 없었음을.”

결국 운명에 손아귀에 사로잡힌 그는 나를 살렸다. 그러기 위해 봉인을 풀고, 오랫동안 감춰왔던 모습을 드러낸 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몽환적인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난 전율처럼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의 봉인이란 건 애초부터.

“애초부터 위기를 맞았던 적도 없었던 거지요? 시온의 배반도, 유귄 역시도, 그 모두가 당신의 안배였던 건가요?”

내가 공격당한 직후, 너무도 빠르게 봉인을 풀어냈다 생각했다. 그리 쉽사리 풀 수 있는 봉인이었다면, 처음부터 유명무실한 건 아니었을까. 강렬한 직감이었다. 단숨에 사고가 급진하게 나아갔다.

“그들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 나는 그 기회를 흘려준 것뿐이다. 유귄과의 계약은 이미 끝을 맺었다.”

차라리 부인하지. 거짓말을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양 무감하게 긍정한다. 가엾은 시온들. 끝의 끝까지 그의 의도 아래에서 놀아났구나. 물론, 그것이 마스터에게 어떤 감흥도 줄 리 없다. 그래, 당신이 운명이라고 말한 나 역시 마찬가지.

“……그게, 저를 보낼 수 없는 이유인가요. 내가 당신의 운명이라서.”

“그래.”

“그게 뭔데요? 그 운명이란 게요?”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한기가 맴도는 몸이 시리다. 흘러나온 음성이 싸늘하여 나조차 몸을 흠칫하게 만든다. 난 똑바로 그를 쳐다보았다. 말 그대로 운명적인 고백을 듣고도, 감동 따윈 씨알만큼도 없다. 아니, 어떤 의미론 지독히도 감동적이다. 이런 엿같은 상황은 정말, 태어나서 처음이거든. 운명이라니, 참 로맨틱하지.

“위성의 운명이라고 했지요.”

뭐든, 캐묻지 않고는 배길 도리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이해가 필요했다.

“그게 무슨 운명이기에, 그렇게까지 하면서 벗어나려고 하셨는데요?”

“종속.”

짤막한 답. 놀랍도록 친절해진 마스터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나는 영영 네게서 영향을 받겠지. 너는 내 약점이고 숨이고, 하나의 생이다.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되어버렸다, 고 들렸다. 거역할 수 없는 흐름에 사로잡힌 듯이.

“나는 인간과 용 사이에서 태어났다. 용은 혼혈이 불가하니, 온전한 용으로 태어났음에도 내겐 어딘가 인간인 부분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용으로서 나는 내 운명에 따라야 했지만, 한편으로 인간인 내 부분은 용납할 수 없었다. 언젠가 내게 절대적일 누군가가 존재하게 되리란 사실을.”

고요한 물음이 떨어진다.

“너라면 용납할 수 있겠나.”

냉정하게 그지없는 금안. 최후에는 그 용납할 수 없는 상황마저 받아들인. 그래서 그걸 내게도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그 눈빛.

“그래요, 그렇군요…….”

난 그의 손을 뿌리쳐 뒷걸음질 쳤다. 쏟아진 진실에 정신이 다 아찔하다. 어지럽고, 가슴이 욱신거린다. 통증이 번져나가 뱃속 깊은 곳까지 다 아파온다. 그래, 그렇겠지. 당신은.

사람을 언제까지 후벼 팔 건가. 날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셈이지? 날 조금이라도 좋아하긴 해? 사랑은커녕 마음도 없으면서, 그게 운명이기에, 그렇게 정해졌기에, 이제는 받아들이겠다고? 팔려간 노예가 순응하듯 그렇게.

머리가 뜨겁다. 아주, 넌덜머리가 났다.

누가 그런 걸 바라는데?

아무래도 좋다, 당신이 날 받아들인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리 말할 수 있는, 순진하고 풋풋한 사랑. 그건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고작 그런 거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날 사랑하지 않아도 당신만 있으면 된다는 소원따윈 빈 적도 없다.

아니, 새삼 이제와 당신이 사랑을 말한대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자리에 있기까지의 피의 무게를 안다. 당신이 에스겔과 란델을 죽였단 것도 알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잊고, 내가 돌아가고픈 세계마저 버리고 당신이 말한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내 사랑은 그렇게까지 지대하지 못하다. 그렇게 홀딱 반해 제정신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당신이 죽이라는 대로 죽이고, 하라는 대로 하고……. 꼭두각시처럼 살았을 터.

나는 한 순간도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을 위해서 죽을 순 있었다.

그게, 죽도록 후회가 되었다. 그 마음을 품었단 걸 아예 도려내고 싶었다. 내가 어떤 기분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할 당신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돌부리에 화를 낼 순 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깊이 상처받거나 감정에 휩싸이진 않겠지. 나는 그가 돌부리에 가깝단 걸 안다. 용이란 원래 그런 생물인지도 모르지. 그렇다곤 해도, 그는 내게 그냥 돌부리가 아니었다.

만약 처음부터 알았다면. 그가 용이란 걸 알았다면, 다른 종이기에 코끼리가 개미를 사랑할 수 없듯 결코 내게 마음 줄 수 없단 걸 알았다면.

그러나 그 ‘만약’은 그토록 의미 없는 것이다.

나는 웃었다.

“아르페로스.”

아이러니하게도, 끝끝내 알게 된 그 이름을 입 밖에 내어놓자 넘실거리는 힘의 물살이 고통을 잠재웠다. 뚜렷한 마력의 파장. 그에게서 비롯된 마력이 내 안을 충만하게 채우고 있었다. 이 강력하고 지고한 힘. 그의 존재감이 선명했다. 보이지 않는 실이 연결된 것처럼 뭔가가 그와 나 사이를 이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당신이 내게 이름을 숨기고, 무엇도 말하지 않으려했던 까닭을 알겠다. 또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나는 그에게 다가섰다. 바짝 붙어서 찬찬히 얼굴을 뜯어본다.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카락의 그가 눈에 선하여 달빛의 한 자락처럼 몽환적이고 화려한 금안과 금발의 그는 사뭇 낯설다. 자연이 균형을 이뤄낸 양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얼굴이다. 저 감정 없는 눈, 한 번도 다정해진 적 없는 저 눈이 날 안달 나게 했다. 한껏 고요한 겨울밤의 정적이며 발자국 하나 없는 순백의 눈밭에 매혹되듯이. 사람이 가질 종류의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그의 목뒤로 손을 감았다. 금빛 머리채가 손목에 휘감겼다. 발꿈치를 들어 올리자 기운 시선이 수평에 가까워졌다. 핏기를 띤 엷은 색의 유려한 입술.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먼저 입을 맞췄다. 촉촉하고 부드럽다. 가슴 안쪽이 뻐근해질 만큼, 달콤하게 조여든다. 사고로 먼저 입을 맞춘 적은 있었지만, 거기에 내 의지는 없었다. 그러니 이번엔 달랐다.

가까이서 시선이 맞춰진다. 나는 눈을 감지 않았고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돌발 행동에도 동요 한 점 없다. 거부하긴커녕 그저 지켜보듯이,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래, 나는 그를 가질 수 있었다. 내가 그를 세워놓고 연인놀이를 하더라도, 그 이상을 요구하더라도 들어주리란 확신이 일었다. 다만, 내게 필요하지 않은 확신.

난 그에게서 입술을 떼어냈다. 마스터, 아르페로스는 내가 자신을 사랑한단 걸 알고 있다. 사랑을 말했더라도 의심은 따르기 마련이나, 나와 연결된 그라면 자연히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저 이성적으로 얼마 전에 자신을 위해 목숨을 던진 내가 벌써부터 마음이 식진 않았을 거라고 판정한 걸 수 있겠지.

그건 퍽 옳았다. 마음을 죽일 순 없으니까. 그런데 내겐 사랑 말고도 따로 돌아가는 심장이 있는 모양이다. 당신에게 조금도 응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걸 보면.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에게서 떨어져 섰다.

위성의 운명. 위성은 행성 주위를 돌기 마련이니, 당신은 나를 분리해내 돌려보낼 수 없겠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그러나 그 강제력이 행성인 내게 적용되는 건 아닌 듯하다.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이 여전하다 못해 이토록 확고하니.

그리고 위성에게 행성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리라. 나는 그에게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알았다. 아니, 진작 알았어야 했다. 나는 그의 의지에 반하여, 마탑의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단 한 명이었으므로. 왜 눈치채지 못했던가.

“아르페로스, 나를 찾지 마세요.”

혀끝으로 또렷하게 발음하며 난 이동마법을 펼쳤다. 내 단호한 말이 강제력을 담고 그를 옭아매는 것이 느껴진다. 얼마간, 그는 나를 따르지 못하리라. 그게 얼마 동안 될진 모르겠지만, 언령의 파장이 제법 생생하다.

이번에야말로 도망치듯이 완성된 마법이 나를 휘감았다. 눈앞이 지워지고 공간을 건너뛰어 난 니라야의 늪을 벗어났다. 어딘지 모를 평원의 땅이 나를 맞았다. 진흙내가 아닌 푸릇한 향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광활한 지평선. 난 불현듯 이동해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마스터, 늪에 남겨져 있을 그의 모습이 잔상처럼 뇌리에 남았다. 난감하겠지. 내가 그를 묶어두고 이렇게 도망쳐버렸으니. 미안해할 것도 없건만, 마음이 무거웠다. 결국 약속을 어긴 건 그이니, 동정 받아야 할 건 내 쪽인데.

하, 소리 내어 웃자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져 내렸다. 기껏 매몰차게 떠나와 놓고 내 심지도 퍽 무른지 눈물이 났다. 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잠시 흐느꼈다. 울음은 모든 감정은 해소하게끔 한다. 손바닥이 흥건해지자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이대로 어디로 가야할까. 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스터가 돌려보내주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그 방법을 찾아내는 것, 한 때 계획했었지 않은가.

문득 날 도와줄 만한 이가 떠올랐다. 난 다급히 품에 손을 넣어 뒤적였다. 곧 반투명한 회색의 구슬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뚫어지게 그걸 들여다보며 고민했다. 과연 이게 옳은 선택일까. 그러나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무엇보다도 외로웠다. 적어도 나를 아는 누군가와 말을 섞고 싶었다. 아주 약간이라도, 온기를. 이제 난 마스터를 제재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난 손에 힘을 주어 구슬을 깼다. 구슬의 마력이 나를 인도했다. 나는 그 흐름대로 또다시 이동마법을 펼쳤다. 부디, 방법을 찾길 바라면서.

처음 나 스스로 한 이별이었다.

============================ 작품 후기 ============================

그렇게 순순히 잘될 거라고 생각들 하시다니.

절 너무 쉽게 보셨....

챕터종료입니다.

아마 아무리 길어도 160편 안에는 완결이 날 것 같네요.

오래 기다리셨을, <성녀님의 폭군 교화법>이 ㅂㅍ 정식연재관으로 이사가서 완결까지 정기적으로 연재됩니다. 월수목토 정기연재예요. 미리보기 방식의 무료연재고, 앱으로 보심 회원가입안하고도 선작가능하고 알림기능 있어서 업데이트할 때마다 알림이 뜹니당. 일러&친필사인 머그컵 이벤트도 하는데 자세한 건 제 블로그를 참조해주세요. 네이버에서 성녀님의 폭군 교화법 검색하면 제 블로그가 뜬답니당.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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