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0 12. 니라야의 늪 =========================================================================
그 말은 마치, 위협처럼 들렸다. 아니…… 반대인가. 결코 다정하게 들리지 않는 음성이었다. 의중을 알 수 없어 난 그를 살폈다. 그러나 읽을 수 있는 그 무엇도 그의 낯엔 드러나 있지 않았다. 다만 마스터는 손을 거두었다. 그 행동이 뜻하는 바는, 나를 강제하지 않겠다는 것.
“어째서요?”
왜 내 말대로 그만두는 거냐고? 얼빠진 질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스터에겐 그럴 이유가 없었다. 사랑한단 말이 바로 육체적 행위로 직결되는 것도 이상했지만, 마스터가 내 뜻을 존중하는 건 더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힘을 되찾은 그에게 나 따윈 손가락으로 눌러죽일 개미 정도에 불과한데.
아니, 애당초 왜 내게……. 성욕을 느꼈다기엔 흥분도 열기도 그 어떤 격동도 느껴지지 않는 눈이었다. 그러하기에 곤혹스럽다. 마스터와 난 연인사이가 아니었다. 내 고백은 의미 없는 말로, 공기 중에 흘러나간 채 모래알처럼 흩어져야 했다.
“너는 어째서 나를 사랑하지.”
민망하여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걸 이렇게 대놓고 물어 봐? 기뻐한다기보단, 흡사 탓하는 듯이 들려왔다. 내 마음이 마음대로 되나. 그러게 날 왜 구했느냐고 내쏘려다가 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누가 당신을 사랑하냐고, 안 사랑한다고 쏴버리고 싶은데 이미 한 번 더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가 되돌린 적 있는 나로선 또다시 부인하는 게 몹시 찔렸다.
마스터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내던졌다. 그만한 충동으로 이어질 만한 무게의 감정인지, 나조차도 회의적이었으나 그게 어떻게 비쳤을진 명확했다. 설마 그렇기에, 내게 응해주려고 했던 건가. 내가 그걸 원한다고 생각하기에. 어처구니가 없어 뒷골이 당겼다. 물론 마스터는 그런 착각을 할 만한 이였다. 나는 그 오류를 반드시 수정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제 감정은, 제 감정일 뿐이니 신경 쓰실 것 없어요.”
기대하지 않는다. 어떤 색을 띠건 마스터의 눈빛은 여전하다. 온기라곤 깃들지 않은 눈으로, 감정이 결여된 양 그저 사물처럼 바라본다. 그 눈빛을 보고, 어떤 기대감을 품을 수 있겠어. 새삼 참담함을 느끼진 않았다. 그렇기에 묻어두기로 했다. 그게 끄집어내져 보였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무엇도 바라지 않을 테다. 난 다짐하듯 되뇌었다.
“아니, 단지 그뿐이었다면―”
마스터의 눈빛에 기이한 빛이 감돌았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겠지.”
수수께끼 같은 말. 곱씹어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의문을 파헤치고 파헤쳐서 캐내고. 나는 거기에 지쳐있었다. 대신 물었다.
“무엇이 변했는데요?”
마스터가 몸을 일으킨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올린 난 그제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챘다. 바람 부는 초원, 스치는 바람에 풀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저편에 그림자를 드리운 탑의 몸체가 거대했다. 인적이라곤 느껴지지 않은 고요함. 시온도 아모스도 룻도 아무도 없었다. 죽거나 힘을 잃었거나. 그럼에도 떠났을 때와 다르지 않게 거성과 같은 위용으로 침묵에 잠겨 있는 탑은 영원히 그 모습일 것 같았다.
마스터의 입에서 단언이 떨어졌다.
“이제 내게 더 이상 이 탑은 필요가 없다.”
나는 그를 응시했다. 그의 권속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언정, 그것이 그가 탑을 세운 이유와 결부되는 건 아니었다.
“보아라.”
무엇을. 질문이 따르기도 전에 그가 움직였다. 내딛는 걸음과 이동한 거리가 달랐다. 마스터는 단박에 탑 근저에 다다라 멈춰 섰다. 아득하게 높은 검은 탑의 그림자 속에서 별이 떨어진 것처럼 금빛이 눈부셨다. 어둠에 삼켜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르는 듯이.
빛의 세기가 강해졌다. 이제는 마치 하늘에 박혀있는 것 같다. 암흑을 압살하는 빛이었다. 깊고 강대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파괴도 창조도 아닌, 그저 변화.
이지러지는듯하던 탑의 표면이 위에서부터 연기처럼 무너져 내렸다. 폭음은 없었다. 산등성이의 안개가 쓸려나가듯 가시적인 형상에서 흩어져 암흑의 입자로 화한다. 마스터의 모습은 어느덧 그 속으로 사라졌다. 난 홀린 듯이 그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 소리는 없으되 눈앞에서 펼쳐지는 초월적인 마법의 행사가 경이를 낳았다. 나는 이 탑이 어떻게 세워지는지 꿈속에서 목도한 바 있었다. 그 반대의 과정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건 새삼 놀랄 일이 못되었다. 그러나 그 생생함이 실로 압도적이다.
그리고 그 아래, 안개처럼 흩어진 어둠 속에 뭔가가 있었다. 자욱한 흑빛 안개가 중심부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탑으로부터 환원된 마력을 흡수하는 어떤 거대한 형체. 구름에 가려진 태양처럼 은은한 금빛이 어슴푸레 비친다. 저건…….
이윽고 그것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난 눈을 흡떴다.
그늘이 드리웠다. 위용이라 표현할 만한 거대한 몸체였다. 그저 태산 같다. 나는 개미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유선형의 날개가 하늘을 향해 뻗었다. 몸을 떨치듯 퍼덕임에 거센 돌풍이 인다. 물결처럼 빽빽이 자리한 비늘이 날붙이처럼 반짝였다. 기다란 목, 상아처럼 흰 이빨, 세로로 찢어진 동공. 완벽한 균형으로 빚어진 거대한 피조물. 온통 금빛이었다.
난 그와 유사한 모습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책이나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단 한 번도 직면하는 걸 상상해본 적 없는 존재.
“용……?”
마력을 모두 흡수한 그것이 내게로 고개를 숙였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하얀 이빨 너머로 공동 같은 목구멍이 언뜻 비쳤다. 코앞에서 숨결이 와 닿자 모골이 송연했다. 나 정돈 몇 번의 씹힘 만에 갈가리 찢겨져 그 뒤로 넘겨질 터였다. 난 그 최악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마스터의 위험성은 불변할 터였다. 기실 눈앞의 용이 마스터라고 생각하는 건, 퍽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으나 동시에 매치가 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분명한 건 마스터는 인간이 아니었다. 난 그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화산의 숨결 같은 것이 훅 끼쳤다. 마력이 열기처럼 흘러나오는 그 숨에 안면이 떨렸다.
“마스터.”
확인하듯 불러보았을 때, 용의 눈이 가늘게 좁혀 들었다. 우웅. 용에게서 새어나오는 빛이 일순 짙어졌다. 바람과 함께 눈앞의 거대한 형체가 작아지며 꺼지듯이 푹 가라앉았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달의 모양이 변한 듯 같은 색채로 형태만이 달라진 마스터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실감이 났다. 나는 인간이 아닌 마스터의 정체가 궁금했었다. 그리고 그 답을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놀란 건 사실이나, 마음 한편으론 기묘하리만치 차분했다. 충격의 연속이라 좀 내성이 생겨버린 걸까. 얕게 들썩이다가 제 자리를 찾아간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금빛이 한가득 시야를 채웠다. 밀어내기엔 멀고, 가까워지니 압박감이 실렸다. 뒷걸음치려는 내 어깨를 그가 붙잡았다. 그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불러보아라.”
“뭘요?”
“내 이름.”
언제, 말해준 적이 있었어? 난 긴장한 채로 눈을 굴렸다. 그래, 펠이라고 했지. 하지만 그게 정말로 마스터의 이름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르페로스.”
혼을 담고 있는 듯이, 그의 음성이 미끄러져 내게로 스며들었다. 저도 모르게 천천히 따라 읊조렸다.
“아르페로스…….”
그 순간, 덜컥 뭔가가 맞물렸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 열이 올랐다. 영혼에 사슬이 채워지듯 정체 모를 결속. 저 안 깊숙한 곳에서, 하나로 이어졌다. 마스터의 존재감이 돌연 선명해져 가슴이 철렁하다. 덫에 걸린 듯한 예감.
“제게, 뭘하신 거예요?”
어쩐지 불안해져 난 소리를 높였다.
“이게 뭔데요. 절 돌려보내주시기로 했잖아요!”
“나는 너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
차분하나 무섭도록 단호하다. 그가 말한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게 우리의 거래였잖아?
“약속― 약속 하셨잖아요!”
“네가 나를 돕기에 너를 돌려보내야 한다고 했지.”
마스터의 눈은 여전히 차가웠다. 초월적인 생명체답게, 지독히도 관조적이다. 소리쳐 매달려도 반응 없을 벽처럼.
“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내가 너를 다시금 살렸기에, 너를 돌려보내지 않기로 할 수 있겠지.”
“그게 말이 돼? 내가 원한 게 아니야! 이 세계에 떨어진 것도, 당신을 만난 것도!”
난 악을 쓰며 손을 들어올렸다. 미칠 것 같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멱살을 틀어쥐고 싶은데, 그럴 용긴 또 없다는 게 우습다. 허공에서 틀어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눈을 내리깐 마스터가 담담히 말했다.
“나 역시 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운명이니.”
“운명이라고요!”
내지른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돌아들어 날 후려치는 듯하다. 마스터의 눈빛이 일순 변했다.
“그래, 위성의 운명.”
유혼하게 물든 두 눈이 나를 사로잡는다. 몸에 힘이 빠졌다. 그의 손이 내 뺨을 움켜쥐었다. 마스터가 천천히 속삭였다.
“언젠가 네가 나타날 걸 알고 있어,탑을 세우고 마법사를 모아 이 세계를 손 안에 두고 예비했다.”
영영 그림자만 비칠 거라 여겼던 진실이 그로 하여금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수한 세월을 지나, 너를 처음 봤을 때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네가 나타났다는 것을.”
그의 눈 속에서 금빛이 일렁였다. 그건 단언컨대, 어떤 감정이었다. 두려움이나 위협감, 그와 닮고 그보다 희미한 것.
“너는 죽어가고 있었지. 곧 잦아들 것처럼 희미한 생명력이었다.”
“…….”
“죽게 내버려 두려고 했었다. 하지만 네가 날 붙잡았지. 나는 절실히 소원 빈 자에게 손 내밀지 않은 적이 없다.”
이토록 가까이서, 운명에 대해서 말하는 마스터는 어딘지 인간 같았다. 나는 숨죽이고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낯설고, 그렇기에 기이할 만큼 눈을 사로잡는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아마 내가 그마저도 지배할 수 있다고 자만했는지도 모르지.”
“왜 저를 살린 순간, 돌려보내지 않은 건데요? 제가 나타나는 걸 원치 않으셨다면서요.”
“너를 살린 이유와 마찬가지로, 아무 대가 없이 너를 풀어줄 순 없었다. 처음에는 그 이유였다. 어느 순간부터 뭔가가 나를 구속하고 있단 걸 깨닫기 전까지는.”
격랑이 일다 평온해진 눈빛. 내가 낯선 곳에서 마법을 배우려고 허덕이는 동안, 고요하기만 했던 그 안에서 어떤 파도가 치고 있었던가.
“침묵하던 운명이 움직여 언젠가부터 나를 얽어매고 있었고,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늦었다. 그 말의 울림이 무거웠다. 내 안에서 서서히 알 수 없는 감정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미약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미약함에서조차 나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기에―”
“…….”
“지켜보았다. 이미 흘러가기 시작한 운명에서 선택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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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편만에 남주이름 등장! 와아-(짝짝짝)
몹시 안써지고 졸립니다....
좋은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