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9 12. 니라야의 늪 =========================================================================
전율 속에서 내가 알던 이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시온이 죽었다. 마스터는 날 늪 위에 내려놓았다. 상극의 자력으로 띄워내듯 온통 금빛에 젖어 표면과 가까운 허공에 부유하는 육신은 어느덧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마력이 내게로 모여들어 복잡한 선으로 결계를 그려냈다. 그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내 육신을 바라본 뒤, 그대로 발길을 움직였다.
나는 이제 그가 어디로 향할지 알고 있었다. 내 의식이 이끌리듯 마스터를 좇았다. 그는 단 한 걸음 내딛는 것만으로 공간을 넘어 그를 위기에 직면케 했던 자리에 섰다. 그리고 그곳엔 두 명의 배신자가 있었다. 마스터의 모습을 보자마자 이동마법을 펼치려던 란델은 마스터의 가벼운 손짓에 종잇장처럼 나가떨어졌다.
나는 란델이,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당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피를 토하는 그의 모습에 에스겔의 마법에 직격당한 내 모습이 겹쳐진다. 마스터는 감흥 없는 얼굴로 쓰러져있는 엘리야를 응시했다.
파동에 의식을 차렸는지 란델의 마력에 휩싸여있던 엘리야가 옅은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그 모습…….”
모든 것을 한순간에 통찰해버린 눈동자에 빛이 감돌았다. 야음을 앞둔 황혼처럼 짙게 물든 그 눈에 공포감은 없다. 그러나 코앞까지 다다른 죽음에 대한 숙연함이 있었다. 그 역시, 그의 선택이 가져다준 결말 앞에 비굴해지지 않을 자였다. 엘리야가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의 가장 오랜 제자, 당신 손으로 거두시는군요.”
가장 오래도록 그의 곁을 지키고, 그를 배신한 제자를 앞에 두고도 마스터의 무표정한 낯에 드러난 감정은 없었다. 그대로 아로새겨진 조각인 양 완벽하다. 힘을 찾은 그는 아까의 균열이 거짓인 양 틈 없는 빙산 같았다. 그의 어둠에 빛이 씌워진다한들, 그의 본질은 결단코 변하지 않음을 증명하듯이.
“네 욕심이 과했다.”
짧은 한 마디. 마스터는 여지없이 손을 들었다. 금빛 마력이 피어오르는 손끝에 절대적인 죽음이 담겼다. 엘리야에게 이어져 있는 계약의 자락이 부스스 사그라지며 자취를 감추었다. 오랜 결속은 파훼되고, 계약을 어긴 이에게 대가가 치러질 터였다.
―엘리야.
나는 그 보랏빛 눈동자와 허공에서 시선을 마주쳤다. 기실 엘리야는 실체 없는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그 눈빛,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그를 죽여도, 그를 깨뜨릴 순 없으리라. 저를 따르는 자들의 염원을 위해 나섰고, 자비를 구하지 않는다. 물결에 비친 빛살같은 백금발이 여전히 휘광처럼 그를 휘감고 있었다. 매 저녁 유일한 황혼의 정경처럼 그 숭고하기까지 한 아름다움.
시린 조각이 내 안에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그의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순간들, 찰나처럼 나누었던 온기. 그것이 내게 보이지 않는 끈으로 남아 사슬을 채웠다. 아마 나는 그에게 매혹된 걸지도 모른다. 엘리야는 그 시간동안 내게 뭔가를 심었고, 그 때문에 난 에스겔에게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일이 그에게도 일어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현실감이 훅 뻗쳐왔다. 몸이 절로 움직여, 난 막아섰다. 무얼 어떻게 했는진 모른다. 나는 그저 마스터를 멈추고 싶었고, 그 마음이 간절하도록 강력했다. 그리하여 마스터는 우뚝 멈춰섰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리고 그 찰나의 멈춤을, 누군가는 놓치지 않았다. 눈앞이 단숨에 환해졌다. 압도적인 마력이 열화와 같은 기세로 뻗어 나왔다. 단 한 순간, 제 모든 생명을 불사르는 뒤를 생각하지 않은 마법. 그렇기에 강력하다. 마스터는 방어해야했고, 때문에 틈이 생겼다. 엘리야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지워진다. 그의 존재감을 더 이상 읽어낼 수 없었다. 이동마법인가.
마스터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내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한 쪽에서, 모든 마력을 쏟아낸 란델이 간신히 일으켜 세운 다리를 무너뜨렸다. 그는 웃고 있었다.
“제게 가치 있는 죽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입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그 생명을 불살라, 그가 선택한 주인을 구한다. 어차피 엘리야의 다음 차례가 그였다지만, 그 사실이 목숨 건 희생을 훼손할 만한 것은 아니리라. 그는 마침내 쓰러졌다. 란델의 동공에서 완전히 빛이 사라졌다. 티끌만한 생의 기운도 남지 않은 육신. 차마 눈을 뗄 수 없었다. 전신에 오한이 흐른다. 란델. 엘리야보다, 블레셋보다 그는 내게 가까이 있었다. 슬픔이라기엔 옅다. 그러나 섬뜩하고 참혹하다.
마스터는 잠시 그의 시신을 굽어보았다. 이내 손끝을 타고 마력이 흘렀다. 불에 타버린 양 늪에 잠겨들던 육신이 회색의 재로 사르르 무너져 내렸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그렇게…….
허공을 돌아든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그 고요한 금안과 마주한 난 움찔거렸다. 우연히 맞닿은 것이 아니다. 내가 거기 있는 걸 알고 있는 눈빛. 나는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기 있는 내가 실체가 아니듯, 소리 또한 나오지 않아 나는 입술만을 달싹였다. 무언가 깃든, 그러나 그 속엣 것을 내비치지 않는 금빛 시선. 최면에 걸린 양 마주보던 어느 순간, 바람 앞의 촛불처럼 의식이 꺼져들었다.
부드러운 촉감이 뺨을 간지럽힌다. 향긋한 풀잎같은 것……. 나는 몸을 뒤척였다. 눈을 뜨고 싶으면서도,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왠지 모르겠다. 하지만 호불호를 가릴 정도로 의식이 돌아왔단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몸이 안온했다. 아늑한 이불에 덮여있는 것처럼.
그러나 의식의 가닥이 암흑에 잠기기 전 광경을 되살려, 나는 몸서리치며 눈을 떴다. 환한 빛이 시야를 잠식한다. 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달빛처럼 조요한 시선이 짓누르는 듯 무거웠다. 늘 눈을 감고 곁에 있어도 눈길조차 주지 않던 그가 바로 옆에 가만히 자리한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햇살을 머금은 금색 속눈썹 아래 박힌 눈동자가 빛의 조각을 심어둔 양 찬란하다. 언제나 그러했지만, 금빛을 덧입은 그는 정말 사람 같지 않았다. 게다가 이 낯선 구도. 간지럽다 못해 거북할 지경이다.
난 부리나케 일어나 앉았다. 놀랄 만치 몸이 가뿐하다. 꼼짝 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꿈을 꾼 건 아닐 터였다. 그리고 내가 완전히 의식을 잃은 사이 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에스겔, 그리고 란델. 난 그들의 죽음을 스치듯이 짚어냈다. 엘리야는 안전할까.
그리고…… 블레셋. 그래, 마스터는 아직 블레셋이 살았단 걸 모른다. 내가 그의 죽음을 암시했으므로. 난 주먹을 쥐었다 펴며 눈치를 봤다. 나를 걱정해서 곁을 지키고 있었다기 보단, 뭔갈 추궁하려 한단 쪽이 더 가능성 있겠지.
“힘을…… 되찾으셨나요?”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반쯤 숙인 채로, 그에게 물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대놓고 마력을 흘려내곤 있지 않더라도, 자취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저릿할 만치 압박감이 있었다. 그 안에 대해를 품고 있는 듯 무시무시한 마력이었다.
마스터는 말없이 내게로 몸을 숙였다. 단박에 좁혀지는 거리감에 난 화들짝 놀랐다. 어깨를 감싸 쥐어 끌어당긴다. 뿌리쳐낼 수 있음에도, 그가 무얼 하려는 건지 몰라 난 멍하니 바라만 봤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시야에 금빛이 들어찼다. 그리고―
부드러운 촉감이 입술을 적신다. 나를 가둔 품이 넓었다. 마력을 불어넣으려는 건가. 당혹해 하면서도 경험을 빌어 생각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랐다. 말캉한 덩어리가 입안으로 흘러들어와 헤집었다. 치열을 스치고 혀를 휘어감는 주도적인 움직임. 살갗이 맞닿는 습기찬 소리가 색스러웠다. 마스터가 뭘하는 건지 눈치챈 순간,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난 그를 확 떠다밀며 소리쳤다.
“무슨 짓이에요!”
난 입술을 틀어막았다. 손바닥 안쪽이 축축하게 묻어났다. 귀가 후끈거리고 정신이 혼미하다. 맙소사!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야? 난 잠깐, 마스터가 제정신인지 의심했다. 그 의심은 지금 이게 현실인지까지 이어졌다.
밀려남도 잠시, 마스터는 다시금 내게로 몸을 기울여왔다. 바닥으로 쓰러지다시피 한 내 위로 무게가 실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머리가 돌아가질 않는다. 뻣뻣하게 굳어 있는 날 향해 드디어 마스터가 표정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가 무어라 말했지.”
내가 뭐라 말했느냐니? 하나의 기억이 쐐기처럼 박혔다. 나는 그에게…….
‘사랑하니까.’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스치듯한 고백. 죽음을 목도하자, 느슨해진 빗장 밖으로 진심이 흘러나왔다. 이후를 생각지 않고서. 꼭꼭 닫아걸고 부인하여 삭이고 얼려 가둬둔 내 마음. 어떤 절제도 생의 끝 앞에선 무효했다. 죽음을 예감했기에, 마지막이기에 말했다. 그건 다시 말해, 죽을 거 같지 않았다면 결코 마스터에게 고백하지 않았을 거란 소리다.
즉 고백한 이후로 마스터와 마주하게 된 이 상황 따윈 예상범위 밖이었다. 난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가 감히, 그에게 고백해서 혼이라도 내겠단 건가. 아니면…….
난 곧 답을 알 수 있었다. 마스터가 다시금 내게로 얼굴을 붙여 왔으므로. 당황스럽다 못해 극심한 혼란이 치달았다. 마스터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으나, 그의 행동엔 망설임도 부재했다. 부드럽게 입술을 훑고, 틈을 갈라 파고든다. 뒷머리가 바닥에 바짝 눌렸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지나친 혼란이 사고를 마비시켰다. 나는 겁에 질린 짐승처럼 그를 올려다보았다. 입술을 떼어낸 마스터가 속삭였다.
“네 입으로 나를 사랑한다 말했다.”
그것으로 모든 게 설명 되는가. 적어도 마스터의 태도는 그러했다. 내가 그를 거부한 게 그저 실수였다고 단정짓듯이 그는 멈추지 않았다. 마스터의 손이 헐겁게 열린 로브 틈으로 움직였다. 그가 뭘하려는지 이번만큼은 선연히도 알 수 있었다. 삽시간에 두려움이 몰아쳤다. 마스터가 원한다면, 막아설 자는 없다. 저항이 무의미한 상대였다. 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둬요!”
거칠게 그를 밀쳐내며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렸다. 손끝이 덜덜 떨린다. 마스터가 날 여자로 보는 상황을 상상으로나마 그려본 적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식인 것도 아니다. 마스터는 내가 사랑한다고 말한 게 몸을 바치겠단 뜻인 것처럼 굴고 있었다. 몰이해 위에 치욕감이 덮였다. 어떻게 죽음을 앞두고 한 고백을 그딴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취급을 당하고 있단 것 역시도!
물결처럼 밀려온 손끝이 어깨에 닿았다. 아주 억센 손길에 쥐어잡힌 양 난 가볍게 뒤돌려졌다. 어느새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감정을 헤아릴 수 없는 금빛 눈동자가 냉담하게 나를 직시한다.
“네가 날 거역할 때마다 네 손목을 부러뜨리고 강제로 따르도록 할 수 있었다.”
차가운 음성이 잇따랐다.
“이제까지 그렇게 하지 않음은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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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로맨스 비스무리한 부분까지 왔는데 엄청 안써지네용.
고비임 고비. 후...
좋은 주말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