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8 12. 니라야의 늪 =========================================================================
“유귄은 그의 일족들의 안위 앞에서 돌아섰고, 그녀에게 무엇을 약속했는지 모르나 당신에겐 이제 남은 것이 없습니다.”
숫제 이 이상 귀찮게 굴지 말라는 듯, 엘리야가 타일렀다. 우위에 선 자의 오만. 그의 눈은 모든 감정이 가신 양 다시금 말끔했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얽힌다. 극히 희소한 보석처럼 오묘한 보랏빛 눈동자가 심연을 비춰낸다. 그 설명할 길 없는 정적을 담담한 말문이 깼다.
“아니, 내게 남은 것이 있다.”
마스터의 손가락이 엘리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너는 내 첫 번째 시온이지.”
잡아 떨쳐내려는 것이 아닌, 도리어 붙잡는 듯이……. 새카만 눈에서 풍겨나는 불길함이 짙어졌다. 그 손으로부터 뻗어나온 금빛 광선이 일순 어둠을 삼켜낸 듯 점멸한다. 어쩌면 나만이 보았는지 모른다. 영혼을 빼앗긴 인형처럼 엘리야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에스겔과 란델이 멈칫했다. 그 나약하고 작은 손, 고작 그의 가슴께에 오는 소년의 손아귀를 엘리야는 뿌리쳐내지 못했다. 삽시간에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네가 내게 속했을 때부터, 네 모든 게 내 것인 것을.”
―그 영혼마저도.
마스터가 입을 달싹였다. 전신에 일렁이던 짙은 향취의 마력이 싹 걷혔다. 엘리야는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부력이 사라지고 진창 속에 그들이 잠기려는 찰나,
동시에 세 명이 움직였다. 다른 두 명이 목적한 대상은 나완 달랐다. 그러기에 엇비슷한 타이밍에 난 그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단숨에 낚아채고 스치듯이 달렸다. 그 잠깐, 의식 잃은 엘리야의 낯이 정지된 화면으로 박혔다. 시체와 같은 모습. 그가 숨을 쉬고 있던가. 난 품안의 여린 육신을 단단히 힘을 주어 붙들며, 엘리야의 상태가 어땠는지 떠올리려고 애썼다. 금빛 옷자락이 진흙에 채 젖기도 전에, 에스겔이 그 등을 받치고 포말 같은 백금발이 흐드러져 떨어져 내리고……. 란델이 그의 뺨을 짚었던가. 깨진 유리파편 같은 푸른 눈동자.
거기까지 상기해내기 무섭게 마스터가 속삭였다.
“멈춰.”
난 말 잘 듣는 어린이처럼 우뚝 섰다. 어느새 가빠진 숨을 골랐다. 난 이토록 심장이 뛰는데 내게서 벗어나 내려서는 그는 평온하기만 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어쩐지 그게 숨 막힐 만치 거슬렸다. 난 조급히 물었다.
“뭘 하신 거예요?”
“그가 내게 접촉하여 영혼을 잠재울 수 있었다.”
“잠재웠다는 건…… 죽진 않았다는 건가요?”
“그만한 일에 죽는다면 첫 번째 시온이라 할 수 없겠지.”
난 천천히 이마를 짚었다. 적나라하게 나는 엘리야의 생존을 바라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와 싸울 마음을 품었으면서 바보같이. 검을 만지작거리며 마음을 추스르던 난 불현듯 간과하고 있던 걸 깨달았다. 유귄이 배신했다면, 세 번째 조각은 갖춰지지 못한다. 그렇다면 마스터의 봉인은 어떻게……. 일순 아득해진다.
“이젠 어떻게 하죠?”
왜 여기서 멈추라고 한 걸까. 의문을 품은 채 쳐다보자 마스터가 손을 내밀었다.
“조각을 내게 다오.”
“하지만, 세 번째 조각은.”
“시간이 없다. 이대로 시도한다.”
머뭇거림을 허용치 않는 확고함. 난 입술을 깨물면서도, 그의 뜻에 응해 목걸이와 이어 검을 건넸다. 두 개의 무기를 잃고 나니 이젠 맨손이다. 내게서 그로, 중심축을 옮겨갔을 뿐 질척한 늪 위에 설 수 있게끔 우리를 휘어감은 마력은 여전하다. 마스터는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는 목걸이를 가뿐히 쥐고 내게서 몇 걸음 떨어져 섰다.
“그들이 곧 올 거예요.”
난 초조하게 중얼댔다. 엘리야 때문에 잠시 공황에 빠졌다곤 하나, 곧 다시 추적해오리란 건 기정사실이다. 마스터는 당연한 걸 말한다는 듯이, 턱을 들었다.
“네가 그들을 막아라.”
답하기도 전, 곧바로 의식이 시작되었다. 내리깔린 흰 눈꺼풀이 심연을 삼키고, 두 개의 조각이 그의 손에서 공명하기 시작한다. 검과 목걸이는 모래처럼 스러져 형체를 잃고 빛으로 화한다. 아름다운 순금빛. 그 빛살 속에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돌풍에 휘말린 듯 나부낀다. 그 작은 몸에 새겨진 수많은 마법진이 문신처럼 새파랗게 드러난다. 빛의 선을 죽죽 그어낸 듯 선명하다. 그것이 봉인.
그러나 완전하지 않다. 내겐 그것이 마치 균열이 인 그릇처럼 보였다. 온전히 몰두된 정신이 힘의 흐름을 한데 모은다. 각기 떨어져있던 두 개의 힘이 서서히 하나로 녹아들고, 대지의 기운이 물과 기름을 섞듯 그 힘을 둘러싸 화합을 돕는다.
그래, 유귄은 여기 없다. 그러나 여기 두 개의 조각. 그리고 이 늪, 이 대지 자체가……. 나는 비로소 마스터가 왜 이곳 니라야의 늪으로 오기로 결정했는지 깨달았다. 이곳이어야 했기에. 난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니라야의 늪이 어떻게 생겨났지? 그래, 란델이 말하기로는―
비틀린 차원의 틈을 비집고 이세계에서 온 마수가 죽어서 깃들었다고, 했지.
희미하게 되짚어가던 회상이 멈추었다. 강대한 마력의 결집체가 내게로 쇄도하고 있었다. 난 이전에 하던 것처럼, 무심코 손을 뻗어 가로막았다.
쾅! 눈앞이 새하얘진다. 엄청난 격통이 머리끝까지 마비시켰다. 난 신음도 내지 못하고 헐떡였다. 시야가 돌아왔으나, 눈에 보이는 건 없었다. 너무 아팠다. 난 달려오는 트럭에 치인 양 늪에 처박혀 있었다. 통증에 통증만이 이어진다. 난 팔을 움직였다. 엉망으로 꺾인 손이 처참하다. 그나마 마력을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손이 아니라 목이 꺾였을 것이다. 무자비한 공격이었다.
그제야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에, 에스겔…….”
쫓아왔나. 난 이를 악물었다. 검이 없는 나로선 마탑의 힘을 쓰지 못하는 시온을 잠시도 상대할 수 없다. 도대체 나더러 어떻게 막아서란 거야? 그대로 돌아봐 완전히 숨통을 끊어낼 수 있을 텐데도,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선 에스겔은 내 쪽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오롯이 선 그는 내 존재는 안중에도 없이 마스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비취색 눈동자에 한데 모여가는 금빛이 비친다. 아직 봉인을 푸는 과정이 끝나지 않았음은 명확하다.
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해보았다. 그러나 충격 탓에 뭔가 고장났는지 마력이 원활하게 돌지 않는다. 마비된 채 허덕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부유마법이 사라지자 납으로 된 추가 달린 양 몸이 서서히 아래로 빠져든다. 난 망연히 에스겔을 올려다보았다.
이대로 봉인을 풀도록 내버려둘 수 없음은 자명하다. 에스겔의 눈에 어떤 결심이 서렸다. 나는 그 결심이 어떤 것인지 곧 눈치챌 수 있었다.
자물쇠를 풀어낸 양 그에게서 마력이 흘러나온다. 그 기세가 자못 강렬하여 아지랑이처럼 뻗어가는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마법이었다. 봉인이고 뭐고, 통째로 부숴버릴 셈이다. 난 무력한 심정으로 완성되어가는 마법을 바라보았다. 나는 저걸 방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대로 지켜만 봐야하는가?
손가락이 꿈틀 움직였다. 절박감이 발끝부터 팽팽하게 곤두선 채 전기처럼 타고 오른다. 안 돼.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부정했다. 절박하도록 두려웠다. 흩어져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한 열기가 타는 듯이 인다. 그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걸―
마력은 소망에 감응한다. 하여 굳은 듯한 몸에 마력이 돌았다. 나는 늪에서 몸을 건져 올렸다. 에스겔의 마법은 완성되었고 내가 이 비루한 몸뚱이로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나는 공간을 뛰어넘어 몸을 던졌다. 결계가 바스라지고 온몸의 마력이 산산이 흩어진다. 등이 화끈하다. 전신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닥쳐왔다. 불현듯 시선이 닿았다. 호수처럼 깊고 고요한 눈이었다.
어째서. 그의 입모양이 그리 움직여 묻는 듯했다. 화답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 나는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뜨겁게 타오르다 얼어붙고 끝끝내 불씨를 숨기지 못한 마음을 내보인다.
―사랑하니까.
통속적인 한 마디. 내 입술의 달싹임이 그에게 제대로 전해졌는지 알 길 없다. 나는 이내 의식을 잃고 말았으므로.
……기절한 게 아니라면 죽었을 터이다. 그러나 눈꺼풀 아래 암흑에 잠겨든 다음 순간, 나는 환한 빛 속에 잠겨 있었다. 몽혼한 안개 같은, 흡사 밤에 뜬 달무리에 잠겨있는 듯한.
정지된 듯한 무의식 속에서 멍하니 상념이 흘렀다. 아마도 죽음은 정신의 영속을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신이 영혼을 거두어가기 전, 잠시라도 생을 정리할 시간이 주어지는 걸까.
에스겔에게 공격 당하더라도, 마스터는 죽지 않았으리라. 단지 그의 육체가 부숴졌을 뿐이겠지. 그러나 나는 죽는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움직여야만 했다. 과연 당신이 목숨을 걸고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인진 모르겠다. 그러나 삶을 재어보는 이성도 잊고 부나방처럼 뛰어들게 하는 이 강렬함엔 나 자신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썩 나쁜 죽음은 아니었다. 이것이 무의미하지 않음을 바랄 밖에.
나는 끝을 기다렸다. 죽음을 인지하자 체념은 빠르게 찾아들었다. 무얼 위해서 바르작거렸는지 무의미해지는 기분. 그러나 사방을 잠식한 은은한 빛이 내게로 좁혀들어 다시금 어둠이 덮쳤을 때, 의식이 급속도로 하강했다.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추락감이 섬뜩하다.
이어 내 앞에 어떤 영상이 펼쳐졌다. 유체이탈을 한 양 나는 허공에 떠서 어떤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쓰러져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흐려진 얼굴, 곱게 내리감긴 눈. 그건 나였다. 헌데 내 곁에 선 것은―
두 개의 조각은 온데간데없었다. 충만하여 완전하다. 만월의 달이 지상에 내린 양 지독한 마력. 교교한 빛을 품은 금발이 어른거린다. 몽환적일 만치 차갑고 투명한 금안. 만월의 달처럼 선명하다. 암흑을 벗어던지고 빛을 덮어쓴 양, 이제는 완전히 성체로 돌아온 비현실적인 미형의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떤 낯선 것을 바라보는 듯이, 미지를 관조하는 그 시선. 그러나 그 완벽한 낯엔 흐트러짐이 있었다. 일찍이 내가 본 적 없는 균열.
느릿하게 뻗은 손이 널브러진 내 몸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몸이 두 쪽 날 듯한 고통을 겪은 것에 비해, 죽음에 맞닿은 육신은 생각 외로 온전했다. 눈을 떠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내겐 그 몸으로 돌아갈 방도가 없었다. 나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마스터의 시선이 비껴 움직였다.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에스겔. 그가 나를 죽음에 몰아넣은 건 본의가 아닐 터였다. 그는 실패했다. 그리고 여기 서 있는 건 봉인을 푼 마스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도주하던가, 죽던가. 그리고 아무래도 전자의 선택지는 그에게 주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에스겔은 그 자리에 선 채로 못 박힌 듯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건 단언컨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주변에 가득한 금빛 마력이 사슬처럼 그를 허공에서 가두었다.
마스터는 날 안아든 채 미끄러지듯이 그에게 다가섰다. 결연함이 깃든 비취색 눈동자. 아마 내가 그의 공격 앞에 뛰어들었듯이, 그 역시도 망설이지 않았으리라. 때문에 후회는 없다. 마스터는 에스겔에게 손을 뻗으며 속삭였다.
“네게 준 모든 것을 회수한다.”
가볍게 내밀어진 손끝이 그의 얼굴에 닿았다. 은은한 빛에 희게 젖은 손은 눈부시게 창백하다. 우웅. 잔떨림이 일고, 뿌리로 양분을 빨아내듯 에스겔에게서 마력이 뽑혀 나온다. 흡사 영혼을 흡수하는 것 같은 모습. 에스겔은 제 죽음을 오연하게 목도했다. 오래된 육신을 지탱하는 마력이 모조리 빨려나가 재가 되어 부스러지는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 그 눈이 단 한 번도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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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슬....
말씀드렸듯이 이 소설은 데드엔드를 지향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__)-
좋은 하루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