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7 12. 니라야의 늪 =========================================================================
난 돌풍처럼 늪 위를 빠르게 스쳐 지났다. 도취할 듯한 속도, 강렬한 해방감이 전신을 휩싼다. 더는 감출 것도, 도망칠 것도 없다. 내 안에서 한동안 웅크리고 있던 마력이 날뛰면서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 내게서 풍겨나는 기운에 압도당한 괴물들이 본능적으로 길을 비켰다. 썰물처럼 물러난다.
나는 내가 접근하고 있단 걸 만천하에 알리며 늪의 중심부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의도한 바였다. 거기서 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알고 있었다. 봉인. 이전에 내게 방해를 받아 중단되었던 그 일이 다시 시작되고 있겠지.
마탑의 시온들은 어차피 마스터를 죽일 수 없단 걸 안다. 허깨비같은 존재로나마 살아남은 마스터는 오랜 세월을 소요할망정 그 언젠가 힘을 찾아 나타날 테니, 그 위험을 품고 싶을 리 없다. 당장 그를 어쩌기보단 봉인하여 마탑과 분리하는 게 그들이 바라는 바일 터였다.
불사의 마력. 영생을 가져다주는 마탑의 힘을 포기할 수 없는 그들이 당장 마스터를 해치진 않을 것이다. 그때와 같은 양상으로 나는 오늘도 그들을 막아서야만 했다.
안개는 도리어 중심부로 갈수록 옅어졌다.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에 닿자 증발되어버리듯 희미해지며 존재를 잃는다. 시야가 차츰 말끔해진다. 감각을 흐리는 안개가 잦아들자 나는 피부에 닿듯이 선연하게 느꼈다.
이 니라야에 늪에 녹아들어 있는 거대한 힘의 자취를. 용암이 흐른 곳에 남은 절리처럼 유성이 떨어져 영원히 흔적을 남긴 듯이. 여전히 지상에 영향력을 떨치는 그 힘은 늪의 중심부로 갈수록 진해졌다. 바란에서 느꼈던 것과 유사하나 다른, 근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방사능처럼 기나긴 세월을 영존하는 그 어떤 순간의 흔적.
그리고 그 금빛으로 물든 늪 위에 그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중력의 영향과 무관하게 끝간데 없이 빠져들 표면에 가볍게 올라선 채로. 신화 속 인물들처럼 하나같이 아름답고 하나같이 강력한 마력을 전신에 품고 있다. 에스겔, 란델, 엘리야. 그들은 지상에 드리워진 암흑을 영구히 지저에 봉인해버릴 빛의 사도처럼 보였다.
마스터를 가운데 두고 가두듯이 서 있던 그들이 일제히 내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알 수 없는 눈빛들. 분노라기엔 가볍고 담백하나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그들은 놀랍도록 낯설었다. 친밀하게 나누었던 대화들이 모두 없었던 것처럼. 비밀을 감추고 있었던 때와는 다른, 아예 갈라져 다른 길을 간 이들과 우연히 한 자리에서 만난 듯이. 그러나 그들과 내가 대척점에 서 있단 건, 부인할 수 없는 일이리라.
하나의 시선이 더해졌다. 그들 틈 사이에서, 검은 눈동자가 내게 똑바로 박혔다. 금빛으로 물든 늪 표면에 선을 그은 듯 생성된 마법진에 사지가 결박당한 채 앉아있는 마스터. 조금도 당황하거나 동요하는 기색이 없는, 고요한 눈빛이었다. 그에게 찾아오지 않을 죽음의 낫이 목전에 드리워도 마스터는 그토록 담담할 것이다.
나는 빠르게 눈에 보이는 상황을 파악했다. 헤어지기 전과 같은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은은히 깔린 세 명의 마력을 보건대 봉인을 이어가던 과정의 초입에서 내 접근을 느끼고 중단한 듯하다. 그렇단 얘긴 이 셋 모두가 자유롭단 것.
시온 셋이 상대라. 난 근거리에서 멈춰선 채 로브에 손을 넣어 바란에서 가져온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내겐 마스터가 준 힘이 두 개. 능히 도시를 멸할 힘이었다. 그러나 해일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압박감이 날 그 자리에 못 박았다. 가진 마력은 도구의 힘을 빌 수 있는 나보다 적을지언정 무수한 세월 동안 마법전의 경험을 쌓아온 마법사들. 감히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들이었다. 함부로 달려들 순 없어서, 난 틈을 찾아내려고 눈치를 살폈다.
“블레셋은?”
차분한 물음. 엘리야였다. 보랏빛 황혼의 눈동자가 나를 비춰낸다. 금빛 로브를 두르고 선 기막히게 아름답고 성스러웠다. 그의 앞에선 내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따윈 이기적인 욕망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내가 그에게 검을 들이댄다는 게, 가당한 일일까. 그의 마력은 매혹의 속성을 띄나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는 나라도 죄악감을 피할 길은 없었다. 내가 정당하듯 그들 역시도 정당하다. 이해하기에 망설임이 있다. 증오하지도 않는데 어째서 싸워야하는가. 그러니, 싸울 이유를 만들 수밖에. 나는 블레셋의 죽음을 암시하기로 했다.
“그는 저를 막지 못했죠.”
엘리야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우아한 낯이 내보인 동요에 가슴이 아릿하다. 사실 블레셋은 죽지 않았다고, 나도 모르게 고백해버릴 것 같다. 거짓을 간파당하지 않기 위해 난 얼굴을 굳혔다.
“그런 것 같구나. 그 힘, 마스터가 네게 준 건가.”
“그래요. 그리고 저는 마스터의 봉인을 풀 거예요.”
나는 다짐하듯 말했다. 그건 설득되지 않는 오롯한 결심. 나는 내 세계로 돌아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마스터와 거래했다. 그걸 위해서 뭐라도 감수해야 했다. 그것이 목숨을 걸고, 나와 함께했던 시온들을 상대하는 것일지라도. 내겐, 선택지가 그것밖에 없었으므로.
“안타깝구나. 네가 우리와 함께하기를 바랐건만.”
손에 쥔 검이 아득하게 무거웠다. 내가 과연 그들을 상대로 이 검을 휘두를 수 있을까. 그 증거로 난 선공을 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승리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 망설임이 바로 나였다. 그래, 뤼비에가 말했듯이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나였다. 앞서서 누군가를 해치고 목적을 달성하는 그 몰인정한 적극성은 내게 없다. 그러니 먼저 시작하는 건 그들이어야 했다.
그를 향해 겨누어진 검을 보고도, 엘리야는 웃었다.
“알다시피 마법사의 강함은 가진 바 마력의 양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단다.”
그래, 블레셋과도 정면으로 싸웠다면 이기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가진 마력은, 마탑의 것. 거기엔 상당한 격차가 있었다. 나는 블레셋과 요엘을 패퇴시키고 이 자리에 왔다. 그리고 당신들도 예외는 아니다.
엘리야의 보랏빛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걸 네게 보여주마.”
다음 순간, 한기가 흘렀다. 엘리야를 주시하는 사이 내 감각이 그들을 놓쳤다. 불현듯 하얀 손이 코앞에서 나타나 대기에서 맞부딪혔다. 쩡! 진공이 울려 고막이 얼얼했다. 내가 반응한 것이 아니라, 검의 마력이 나를 보호한 것이다. 에스겔. 코앞에서 마주친 비취색 눈동자가 서늘했다.
첫 공격에 대해 인지를 마치기도 전에 몰아치듯 뒤쪽에서 마력이 터져 나왔다. 쾅! 등 뒤를 직격한 마력에 난 앞으로 나가떨어졌다. 란델인가……. 난 바닥을 구르다시피 몸을 세웠다. 타격은 크지 않다. 원래대로라면 형체조차 남지 못했을 터. 하지만 몸을 휘감은 마력이 모든 충격을 최소화했다. 편할 만치 알아서 보호해준다.
자잘한 공격이 이어졌는지 쩌정, 쩡 유리 깨지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난 이를 악물었다. 마력의 구현속도가 인식의 범위를 초월한다. 나는 그들의 움직임을 볼 수조차 없었다. 격차라는 게 이런 건가. 상태를 가늠하듯 떨어져서 슥 선 란델의 푸른 눈과 시선을 마주치자 난 움찔했다. 호수 같은 온화함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새파랗게 언 눈빛. 가장된 다정함이나마 지워버리고 날 완전히 없애야할 적으로 규정한 그 간극이 빙하처럼 찼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지 못한다. 란델의 음성이 허공을 갈랐다.
“너는 우리를 택할 수 있었다.”
“틀렸어요. 제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처음부터요.”
마스터가 내게 나를 돌려보낼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자신뿐이라고 말했을 때부터, 내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그건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단 하나.
에스겔이 좌측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옆구리를 찔러오는 마력의 기세를 난 튕겨내듯 받아쳤다. 그러나 에스겔은 가볍게 피해낸다. 란델이 공격을 재개했다. 태풍에 휩쓸린 듯하다. 쉼 없이 몰아치는, 그러나 치명적이진 않은 공격들. 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리 마탑의 마력을 쓸 수 없다 쳐도 그들은 시온이다. 고작 이 정도 일 리가 없을 텐데?
―이건 마치 내 신경을 흐리려는 듯한.
그들의 목적이 다른 데 있단 게 눈에 보였다. 마스터! 날 공격하는 란델과 에스겔과는 달리, 엘리야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난 다급히 검의 마력을 이끌어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마력이 결계를 확장하여 그들을 내 주위에서 밀어낸다. 그 직후 난 바로 엘리야에게로 치달았다.
예상대로 마스터를 결박하던,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은 사라진 채였다. 부력을 잃고 늪에 빠져들려는 마스터를 엘리야가 붙들어 올렸다. 얼핏 보기엔 감싸안는 듯한 동작. 그러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저항할 수 없는 결박이었다. 엘리야의 손아귀에 붙들린 마스터를 보면서 난 멈칫거렸다. 봉인은 저지된 상태. 그러나 마스터는 엘리야의 손에 있었다. 그렇다면 난 뭘할 수 있지?
줄에 묶인 인형처럼 팽팽히 곤두선 공기가 날 붙잡았다. 엘리야의 희고 섬약한 손가락이 누군가의 목을 부러뜨리거나 목숨을 앗아가는 건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내 상상을 넘어서는 그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단 걸 인지하고 있었던 탓이다. 손아귀에 잔뜩 힘이 들어갔지만, 더 나아가지 못한 채 검이 정지된 상태로 허공에 고정되었다.
양 옆에 란델, 그리고 에스겔이 그려지듯 내려섰다. 포위된 듯한 압박감에 가뜩이나 예민해져있던 신경이 바짝 일어난다.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듯 막막함에 심장이 조였다.
정작 마스터는, 그를 배반한 제자의 품에 사로잡히고도 무표정한 낯이었다. 전연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양 새카맣게 물든 검은 눈은 공동에 고인 암흑 같다. 여유를 가장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무엇도 그를 위협할 수 없는 것처럼 동요가 부재하다. 그건 진정 불사자다웠다.
도리어 이를 악문 건 내 쪽. 그의 여유는 내게 닿지 못했다. 그 없인 내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 말을 명제처럼 되뇌면서 난 뻣뻣하게 긴장된 숨을 쉬었다. 그게 아니면 이 미칠듯한 두려움이 설명되지 않는다.
마스터의 음성이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이 봉인, 너희가 이정도 경지에 이르렀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감읍할 따름입니다, 마스터. 저희도 기대 이상을 보여드리고자 노력했지요.”
나긋하게 대꾸하며 엘리야는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그러니 오랫동안 당신을 따른 이 제자들에게 상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농을 던지듯 가벼운 투였으나 엘리야의 보랏빛 눈동자는 차가웠다. 그러나 그의 낯을 스치고 지나간 열기. 갈망, 증오, 원망, 회한, 염증……. 퇴색되어버린 그것이 부싯돌이 맞부딪혀 인 섬광처럼 찰나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 기나긴 세월도 그에게서 그 모든 걸 지워내진 못했다. 잔재는 여전히 불씨로 남아 그를 움직여 결국 이 자리에 있게 했다.
============================ 작품 후기 ============================
슬슬 클라이막스인지라 전개를 좀...음 고민을했는데 짱돌을 굴리다보니 어떻게든 돌파구가 나오긴 하더군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