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6 12. 니라야의 늪 =========================================================================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튀어오른 심장이 제 자리를 찾기도 전에, 난 다짜고짜 마법을 퍼부었다. 쾅!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파편이 비산한다. 괴물인 걸로 짐작되는 놈은 산산조각 난 채 늪으로 회귀했다. 역한 광경일 게 분명하나 안개가 짙어 그 끔찍한 사태를 볼 수 없단 게 천만다행이었다. 한계치까지 내달렸던 심장엔 근육통처럼 뻐근함이 남았다. 난 가슴을 어루만지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 뭐야. 놀랐잖아.”
괴물이라지만 딱히 공격하려는 의도가 아닐지도 모르는데 그대로 황천으로 보내버린 것 같아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곧 쓸데없는 고민이라는 걸 깨달았다. 떠올려보건대 튀어나온 기세가 결코 내게 호의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난 혀를 차며 혹시 파편이라도 튀었을까 싶어 옷깃을 툭툭 털었다. 놀란 마음이 완전히 가라앉은 건 아니었지만, 움직이지 못할 만큼 놀란 것도 아니었던 터라 다시 이동을 시작할 요량으로 발을 떼었다. 그 발이 늪 표면을 가볍게 누르는 찰나,
뒤에 누군가 서 있었다. 소리 없는 기척. 차가운 숨결이 목뒤에 닿았다. 전신의 피가 식어 떨어져 내리듯 오싹했다. 너무도 가까이, 모든 허점을 드러낸 듯 아찔하리만치 무력하게. 내게 방비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서늘한 속삭임.
“움직이면, 네 목숨은 장담하지 못해.”
“블레셋.”
익숙한 음성에 난 이를 악물었다. 그와 나의 격차를 드러내듯, 나는 블레셋의 접근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게 그가 여기에 있지? 날 추적한 건가. 그런 낌새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섬광처럼 하나의 생각이 궤적을 긋는다. 계속 쫓은 게 아니라 혹여 조금 전 내가 마법을 사용한 것 때문에 그가 날 찾아낼 수 있었던 거라면, 블레셋은 이전부터 니라야의 늪에 와있었단 게 된다.
“내가 여기 올 줄 알았던 거군요.”
짐작은 확신이 되어 입 밖으로 발해진다. 누군가 움켜쥔 듯 심장이 죄여온다. 절박하여 절망적이다. 내가 여기 올 줄 알았다면, 마스터가 여기 있단 것 역시 알고 있었으리라. 그리고 블레셋이 여기 있다면 다른 시온들은.
곧 잡힐 것 같았던 희망이 밟혀 으스러진 듯 충격이 몸을 마비시킨다. 그러면 마스터는. 마스터는……. 그를 걱정할 일따윈 이제 두 번 다시 없을 것 같았는데, 재만 남은 불씨에 확 불길이 인듯 뜨겁다. 속이 타들어가듯 홧홧하다. 그러나 함부로 움직일 순 없었다.
블레셋이 가볍게 팔로 내 목을 둘러 안았다. 금방이라도 꺾어 내 숨을 앗아가 버릴 듯이. 그리고 내겐 저항할 수단이 없다.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했다간 그가 나를 죽일 것이다. 그 섬뜩한 결론은 나를 마비시키기에 족했다. 난 팔과 함께 드리워진 블레셋의 새하얀 옷깃을 내려다보았다. 예견한대로, 이미 시온답게 냉혹한 결심을 끝마쳤는지 그의 태세는 견고했다. 블레셋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고했다.
“미루어졌던 일이 다시 시작되는 것뿐이야. 그리고 이번에는 빠져나가지 못할 거다.”
“어떻게 알았죠?”
마스터의 목적지가 여기란 것. 그게 추론할 수 있는 바던가? 나는 그 물음을 통해 깨달았다. 아니, 마스터의 목적지를 어림짐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알아낸 것이다. 마스터가 여기로 향할지 알고 있는 그 누군가를 통해서! 그리고 블레셋은 차분하게 내 깨달음을 확인시켜 줬다.
“마스터가 유귄을 불러들일 거란 건 짐작한 바였지. 우리는 모든 수단을 다해 유귄을 추적했다. 그리고 유귄에게 그의 일족과 마스터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지. 우리는 이곳에서 진작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널 그 마을에서 찾아낸 건, 그저.”
블레셋이 말을 골랐다.
“……네게 기회를 준 거야. 그리고 넌 기회를 걷어찼지.”
“난, 나는…….”
내가 실패할 거란 게, 이런 의미였나. 어째서 예견치 못했을까. 내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단 장밋빛 희망에 젖어 그의 경고를 흘려 넘겼던가. 꼼짝없이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짐승. 그게 딱 내 꼴이었다.
“기회를 걷어찼으면, 그걸로 끝 아닙니까?”
앞쪽에서 인영 하나가 느릿하게 다가왔다. 구름 위를 걷듯 푹푹 빠지는 늪에서 가볍게 거니는 발걸음. 빛 한 점 투과할 것 같지 않은 안개를 몸에 휘어 감고서도 그의 은발은 거미줄처럼 반짝거렸다. 나는 얼어붙은 듯이 그를 응시했다.
요엘. 섬세한 미형의 얼굴에 한기가 가득하다. 나는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안다. 이리스 라하느를 통해서 체감한 바 있었으므로. 살의. 그는 나를 죽이고 싶어한다. 내가 그를 패퇴시켰기에, 날 얕보던 그로선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었으리라.
“살려둘 이유가 있을까요. 그녀는 이미 한 번 우리를 방해했습니다.”
“그 결정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한다.”
“그러시다면야.”
요엘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꼼짝할 수 없는데 내게 살의를 품은 이를 눈앞에 두고선 기분이란 말할 것이 못되었다. 맹수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 같다. 그대로 심장을 꿰뚫을 것같이 새하얗게 빛나는 초승달 같은 손이 내 옷깃으로 다가왔다. 난 뒤로 몸을 물리고 싶었지만, 블레셋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도 무기는 회수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블레셋이 고개를 까닥였는지 공기가 움직였다. 요엘은 그대로 내 옷깃을 잡아 뜯듯이 벗겨 내렸다. 희롱하듯이 의도적으로 거칠게 구는 거다. 휘어진 눈매 사이로 차갑게 빛나는 눈동자에서 수치심을 주려는 의도가 읽혔다. 지독히도 자명하여 난 그를 노려봤다. 찢어진 겉옷 사이로 속에 받쳐 입은 붉은 로브가 드러난다. 그가 차지하지 못했던 시온의 로브. 요엘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불쾌감이 치솟았는지 그의 낯이 묘하게 어그러졌다. 요엘은 거침없이 손을 내 가슴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닿기도 전에 팔목을 잡아 채였다.
“뭐하는 짓이지?”
“수색하는 것뿐입니다만.”
“네 열등감은 알만 하지만, 부러 치욕을 주는 건 허락하지 않겠어.”
“아주 역성을 드시는군요. 그녀에게 반하기라도 하신 겁니까?”
요엘은 멸시하듯 날 훑어보며 비웃었으나, 블레셋은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 같은 시온이다. 그리고 너는 아니지.”
사실을 일러주는 듯한 투였다. 그러나 그 말은 요엘을 자극하기에 족했다. 그는 웃는 표정의 가면을 뒤집어쓴 듯이 스산하게 미소 지었다.
“마탑의 힘을 쓸 수 없는 지금, 시온과 아모스의 차이란 무의미합니다. 물론, 저는 그것을 증명할 용의가 있습니다만.”
숨을 고르듯 요엘이 눈을 감았다 떴다.
“……엘리야님이 바라지 않으실 테니, 기회가 닿는다면 후에 증명토록 하지요.”
말을 마치자마자 요엘은 사납게 블레셋의 손아귀를 뿌리쳤다. 그의 손이 내 로브 허리춤을 파고들어 그 안에서 목표한 것을 찾아냈다. 로브의 아공간 속에서 빼들린 검이 안개 속에서 검은 날을 드러냈다. 난 요엘이 가져간 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저걸 움켜쥐고 싶었다. 막대한 힘을 품은, 배움이 일천한 내가 시온을 상대할 수 있게 해주는 검. 이 목을 둘러싼 손만 없다면.
잔뜩 힘이 들어간 내 기색을 알아챈 요엘은 같잖다는 듯이 코웃음쳤다. 그의 손에서 검은 죽은 듯이 얌전하고, 또 아무런 힘도 없는 무기물처럼 보였다. 그러나 불현듯 나는 알았다.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 설명할 수 없이, 그건 단지 본능에 가까운―
나는 ‘허락된 자’였다. 그리고 오로지 이 세상 유일하게 나만이, 저 힘을 다룰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한 자가 검에 손을 대면, 그 결과는.
―배척.
명료하게 그 단어가 뇌리에 새겨진 동시에, 검의 날이 검게 물들었다. 빛조차 삼켜버리는 암흑. 그리고 그 이후에 찾아든 건 세상을 암전시키는 강렬한 빛이었다. 어둠을 말살하는 양 강렬하여, 망막조차 태워버릴 듯이. 무시무시한 마력의 폭풍이었다. 일순 새하얘진 시야가 돌아왔을 때, 난 내가 선 채로 기절한 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단 걸 깨달았다. 이끌리듯 손을 뻗어 눈앞에 둥둥 떠 있는 검을 잡아 쥐었다. 그 충만한 힘, 주인에게 복종하듯 손안에서 용솟음치는 마력을 죽인다. 모든 걸 해쳐도 나만은 해치지 않을. 그 사실이 선연하게 느껴져 낯설었다.
난 안개조차 날아가 버려 말끔해진 사위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요엘, 블레셋. 발을 내디디려던 난 검이 있던 자리 질척이는 늪에 떨어진 잿빛 천조각을 보았다. 타다 남은 재같이, 형체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그것.
등골에 소름이 기어올랐다. 손이 덜덜 떨렸다. 저게 요엘의 흔적이라면, 그렇다면 블레셋은. 나는 황급히 블레셋이 서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내 목을 감고 있던 촉감이 사라졌단 걸, 왜 바로 알아채지 못했지?
눈에 보이는 건 펼쳐진 늪뿐이라, 나는 마법을 펼쳤다. 날붙이로 헤집듯 혼란하게 긁어진 뇌리에 이성이 돌아왔다. 그가 무사하든 아니든 그의 행적을 알아야만 했다. 난 곧바로 블레셋의 마력의 자취를 찾아낼 수 있었다. 저 아래, 늪 밑바닥에서.
“블레셋?”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다. 전언을 보내봐도 응답은커녕 반응조차 없다. 의식을 잃었나. 나는 마력을 뻗어 늪을 파헤쳤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처럼 늪이 반으로 갈리며 입을 벌렸다. 나는 그 안에서 엉망진창이 된 채 널브러져 있는 블레셋을 건져 올렸다. 시체가 아닌지 의심이 드는, 활력이라곤 남아있지 않은 몸. 늘어진 형태를 보니 팔이나 다리, 아니면 둘 다 부러진 것 같다. 장기는 멀쩡한지 모르겠다. 시온의 로브에 공기를 공급하는 기능이라도 있는지 다행히 그에게선 미약하나마 호흡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마력의 폭풍을 피하려고 늪바닥으로 이동한 건가. 요엘은 시온과 아모스의 차이가 무의미하다고 말했지만, 블레셋은 살아남았고 그는 그렇지 못했다. 아니, 블레셋은 간격을 두고 있었기에 좀 더 여유를 벌었는지 모르겠다. 딱 그의 목숨을 건질 정도만. 모든 마력을 소진했는지,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은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언제고 회복할 것이다.
어쨌든 그는 살았다. 그것이 미약하나마 내게 안도를 불러일으켰다. 요엘은 한 번 죽었다고 생각한 이였고, 블레셋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블레셋은 비록 적이더라도, 죽지 않길 바라는 이. 아니, 어떤 시온인들 죽길 바라겠어. 그들에게 공감하면서도 결국 반대편에 선 내 처지가 우스웠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괴물에게 잡아먹힐지도. 블레셋을 걱정해줄 상황이 아니었지만, 나는 못내 작은 결계를 만들어 그의 몸 위에 덮어씌웠다. 부유와 은신, 가벼운 두 개의 기능만 있는 결계였다. 의식을 차리면 제 몸 정도는 건사할 수 있을 만한 자다. 당장 움직여서 방해하려고 들면 곤란하니 회복마법까지 써줄 필요는 없겠지.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언뜻 진흙 위에 피어난 흰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는 비정한 마탑에서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준 자였다. 조금 전만 해도 그는 나를 살리려 했다. 죽이는 것이 더 손쉬웠을 테고, 그랬다면 이런 꼴을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나는 블레셋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진흙에 젖은 금발에 손을 가져갔다. 마법을 사용하자 더럽혀진 머리며 얼굴이 말끔하게 깨끗해진다. 그것이 내가 보일 수 있는 마지막 성의였다. 빚을 졌든 그렇지 않든, 그는 나를 위해주고 존중해준 사람이었으므로. 그러나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되뇌었다. 내가 마스터와 얽힌 이상 불행을 초래한다면 그건 아카일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터. 깨어나면 부디 멀리 도망쳐서 살아남기를.
나는 그를 거기에 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서둘러야 한다. 내가 가는 곳에 다른 시온들이 있으리라. 그리고 마스터 역시도. 더 이상 감출 것이 없었기에 난 마법을 사용하여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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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가 된거 아니에요 ㅎㅎ
주말동안 즐기시라고(?) 저는 주말같은 거 없는 사람이니까요!
낮도 밤도 새벽도 없죠 살아있으면 글을 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