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5 12. 니라야의 늪 =========================================================================
삐그덕 거리며 마차가 멈춰섰다. 훈련된 말들이 착실히 달려주어서, 테론이 말한 것과 비슷한 시간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망설일 것 없이 바로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누구도 나를 막아서지 않았다.
야영지는 엉망진창이었다. 오두막 지붕이 반쯤 부서지고 윗쪽 벽이 허물어져 뻥 뚫린 구멍이 보였다. 이곳저곳에 혈흔이 남아있었다. 난 주변을 슥 돌아보았다. 괴물들 특유의 위협적인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걸보니 이미 물러난 것 같았다. 오두막 안쪽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져 난 가볍게 벽을 타넘고 안으로 들어섰다. 바스락 소리가 울려 퍼지자 안쪽에 누워있던 인영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누, 누구. 사냥꾼이오?”
“아니오. 당신 혼자인가요?”
“그렇소만.”
테론이 날 따라 벽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다른 이들은?”
“마법사님이 이 안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하기에 따랐소. 다른 이들은…… 나도 모르겠소.”
급박한 상황을 입증하듯 사내의 몸 이곳저곳엔 상처가 남아있었다. 난 나직이 물었다.
“마법사는 어느 방향으로 갔죠?”
“모르오. 같이 있던 아이가 사라져서 찾으러 간 것 같소.”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다. 난 입술을 깨물었다. 경계심 어린 태도로 주변을 돌아보던 사내들이 하나 둘씩 오두막으로 모여들었다. 마차에 있던 부상자가 오두막 안에 숨어있던 이와 상봉하는 걸 지켜보며 난 테론에게 약속한 돈을 건네었다.
“여기까지면 충분해요.”
뭔가를 묻고 싶은 듯한 눈이었지만, 오래도록 사냥꾼 생활을 해온 이답게 침묵으로 나를 배웅했다. 다시 오두막 밖으로 나온 나는 니라야의 늪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력석이 생산되는 곳답게 이 자욱한 마력. 가까워질수록 강력해져 피부가 찌릿할 지경이다. 이 안개 역시도, 단순히 늪 때문에 이렇듯 자욱한 건 아니리라.
뤼비에, 그리고 마스터. 상황이 아무래도 내 예상대로 흘러간 모양이었다. 난 잠시 머뭇거렸다. 늦은 밤, 안개가 더욱 짙어지는 방향, 괴물이 튀어나오는 장소. 이 모든 요건이 발길을 붙잡았다.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가기엔 나라도 망설여지는 스산함이 있었다. 어둠을 두려워하듯 본능적인 것.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저 멀리서, 오두막으로 걸어오는 인영이 있었다. 흐릿한 안개에 휩싸여 처음에 그는 마치 유령처럼 보였다. 등골이 오싹했다. 마침내 그가 시야에 들어왔을 때, 나는 그 이름을 불렀다.
“뤼비에.”
안개가 환각을 보여주는 건 아닐 테지. 그는 날 발견하자마자 미소를 띤 채 손을 들었다. 그를 보니 가슴 속에서 반가움이 차올랐다. 나도 몰랐던 갈증이 목구멍에 차있었단 걸 깨달았다. 그간 대화를 나눌 만한 이가 고팠던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아힌 님.”
흘낏 뒤를 돌아보니, 사내들은 오두막을 정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마스터는?”
“걱정이라기보단, 짐작하고 있는 표정이군요.”
나는 빠르게 그의 면면을 훑었다. 여유 넘치는 얼굴도, 읽기 어려운 눈빛도 여전하다. 전보다 조금 마른 듯했지만, 안색이 어둡진 않다. 딱히 마스터와의 여행길에 어려움을 겪은 기색은 없었다.
“늪으로 가신 건가.”
“예, 여러 녀석이 습격해서 정신이 팔린 사이 종적도 없이 사라지셨습니다. 괴물에게 당했다면 핏자국이라도 남아있었겠지요. 뒤를 쫓다가 도중에 돌아왔습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데 괴물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들어가는 건 자신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래.”
난 잠시 그의 등 너머로 시선을 주었다. 괴물들이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단 확신이 있기에, 그리로 갈 수 있었던 거겠지. 마스터는 니라야의 늪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침착해지자고 속으로 되뇌며 나는 숨을 들었다 놓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당신과 헤어진 뒤 저는 그분께로 갔습니다. 당신에게 문제가 생겼으니 먼저 출발해야겠다고 했지요. 더 묻지 않으시더군요. 후에 돌이켜보니 이상한 일이지만―”
뤼비에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달리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당신이 이곳에 당도할 걸 확신하는 눈치였습니다.”
추적자와 마주쳤다고 한들 내가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마탑의 힘을 쓸 수 없는 시온들에 비해 내겐 마검이 있으니까. 걱정따윌 해줄 사람도 아니지만, 묻지도 않았단 것에 입맛이 썼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도착한 거지?”
“지름길을 택했거든요. 그리고 그분은 한동안 죽은 듯이 잠드셨습니다. 이동에 문제될 게 없었지요.”
짐처럼 들쳐 업고 이동했단 건가. 잠든 채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마스터라……. 바란에서 회수한 힘이 마스터에게 변화를 가져다준 것 확실한 듯싶다. 난 속 모를 그 얼굴을 응시했다.
“당신은 왜 그를 도운 건데?”
“그저 선의였다고 한다면, 믿지 않으시겠지요?”
빙긋 웃는 얼굴이 제법 상큼하다. 다만 난 그 상큼함에 넘어갈 만큼 녹록하지 않았고, 그와는 서로 주저 없이 솔직해질 수 있는 관계였다.
“당연히.”
“물론, 쉽게 놓기 어려운 인연이긴 합니다만, 제 평탄치 않은 인생에서도 이런 경험은 또 있기 어려울 겁니다.”
“마법사길드에 쫓기는 것보다 더?”
“그건 예견된 일이었으나, 이 만남은 아니었죠. 여하간 저는 바라는 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선 들어주시기로 했지요. 뭐, 별로 어려운 건 아니었으니까요.”
“바라는 게 뭐였는데?”
“간단합니다. 제 생명에 위해를 끼치지 말아달라는 것. 아시다시피, 별로 저를 살려두려는 생각이 없으신 것 같아서요.”
……정말 현명하다고 해야 할까. 나 역시 마스터가 그를 살려둘 것같지 않다고 생각한 적 있지만, 그가 어느새 거기까지 파악했단 게 놀랍다. 뤼비에의 통찰력은 항상 인상적이었다. 다시 내 시선이 안개 쪽으로 옮겨졌다. 마스터가 거기 있단 게 확실해지자, 머뭇거림이 사라졌다. 한시라도 빨리 모든 일을 종결시키고픈 조바심이 들어찼다.
그 전에, 난 그에게 말해야만 했다.
“당신과는 이 이상 함께 갈 수 없어.”
“알고 있습니다.”
“몰래 따라와도 안 돼.”
“그럴 생각 없습니다. 믿어주시지요.”
미심쩍게 그를 바라본 난 혼잣말하듯 말했다.
“묶어둘까.”
“……안 그러셔도 됩니다. 정말 안 따라갈 거거든요. 저도 어디에서 멈추어야하는지는 압니다.”
“당신은 호기심 때문에 목숨 걸 수 있는 사람이지. 그 때문에 우리와 함께했던 것 아닌가.”
“호기심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이 날 움직였던 거죠.”
“내가?”
그에게서 유사처럼 빠르고 잔잔한 음색이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예, 당신의 모순이 나를 움직였습니다. 복종하지 않으면서 따르고 무엇도 감수할 수 있을 듯하면서도 연연하고 흔들리면서도 당신의 중심을 놓지 않는.”
한달음에 치고 오듯이, 공기에 무게가 실렸다. 아니, 이건……. 말의 무게다.
“사람은 때로 사람을 움직입니다. 마음을요. 저는 바람에 몸을 싣듯이 거기에 따랐습니다. 그건 아주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느낀 것에 비하자면 호기심이라는 표현은, 너무 얕지요.”
숨이 턱 막힌다. 홀로 싸워왔다고 믿었는데, 누군가가 그저 알아준 것처럼. 무엇도 주지 않아도, 그것만으로도 족할 때가 있다. 그게 바로 지금.
“바라던 것을 이룬다면 좋겠지만, 그게 쉬울 것 같진 않군요. 혹여 길을 헤맬 때 필요하다면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뤼비에는 품에 손을 집어넣어 뭔가를 꺼내들었다. 반투명한 회색의 구슬에선 희미하게 그의 마력이 느껴졌다. 거절하려고 했지만 미묘한 아쉬움이 목에 걸렸다. 그는 아카일과는 달리 제 일신의 안위를 좀 더 생각할 것이다. 난 구슬을 받아들면서 삐죽거렸다.
“당신이 내게 당연히 도움이 될 것처럼 말하네.”
“그 점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
뤼비에는 빙긋 웃었고, 나는 마지막까지 얄미운 것도 여전하다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돌아선 것은 그가 먼저였다.
“부디 하시려는 일이 순조롭기를.”
깔끔한 이별을 택한 쪽은 그였고, 미련을 남긴 건 내 쪽이었다. 결국 이렇게 하나씩 멀어져 간다. 몇 걸음 걸어간 것뿐인데 짙은 안개가 뤼비에의 뒷모습과 나 사이의 간극을 메웠다. 포말이 인 물밑으로 사라져가는 듯이, 그가 순식간에 흐려졌다. 나는 그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 눈을 떼었다. 그리고 오두막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니라야의 늪으로 향하는 방향이기도 했다.
안개가 한층 자욱해진다. 열이 없다 뿐이지 화재가 난 건물로 걸어 들어가는 양 주변이 온통 뿌얬다. 폐부 깊숙이 밀려드는 습기에 숨이 다 막혔다. 괴물들이 아무리 굶주렸다고 한들 이런 안개를 넘어서 야영지까지 왔다면, 거기에 인위의 힘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보긴 어렵다.
“마스터.”
나는 들리질 않을 걸 알면서도 입안에서 굴리듯이 발음했다. 펠. 펠이라고 했지. 난 몇 번 입 밖에 내보지 않은 그 이름에 갑자기 신경이 쏠렸다. 그건 정말로 당신의 이름일까. 가장을 위해 툭 던지듯이 뱉어낸 그 이름이. 그 이름과 더불어 지난 날 꿈속에서 보았던 광경이 생생히 떠올랐다.
칠흑 같은 밤을 적시는 만월의 빛처럼 그 차갑고 시린 금발. 새벽에 깃드는 날빛인 양 그 눈부시던 모습. 이윽고 암흑에 먹혀버린 그것이 단지 꿈일 순 없었다. 당신의 운명이 무엇이기에 당신을 움직였는가. 그건 인력보다 더 강력하고 절대적인 힘.
나는 마스터가 열망 없는 자일거라 여겼다. 그러한 강함을 지니고도 공동에 자리잡고 똬리를 튼 뱀처럼 고요하게 머물러 있었기에. 그러나 멈춰있던 시계가 초침을 움직이듯, 그는 이제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걸 빼앗겼으나 실지로 무엇도 빼앗기지 않은 그가. 나는 그의 운명이 이 모든 흐름에 관여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고여 있는 둑을 허물어, 그 흐름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나였다.
힘을 되찾은 당신은 과연 그 흐름을 돌이키듯 봉인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고민하는 찰나, 발밑이 푹 파였다. 순식간에 발목까지 축축하고 질척한 감촉에 잠겼다. 간담이 서늘해진 난 본능적으로 발끝에 마력을 실었다. 가벼운 부유감과 함께 발이 건져 올려졌다.
“늪이구나.”
점점 땅이 물러지고 있다고 느꼈지만, 이렇게 갑자기 빠져들 줄은 몰랐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늪이 시작되나보다. 니라야의 늪은 지도상으론 바란의 열 배가 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꽤 넓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난 어디로 가야할지 알 것 같았다. 사위에 피어오른 안개만큼이나 농밀한 마력이 이 진득한 늪 전체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간단한 부유마법 정도는 사용해도 티 나지 않을 만큼.
그리고 아마도 마력이 가장 짙어지는 곳에서 마스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건 필시 늪의 중심부. 마법사인 내게 마력의 근원으로 향해가는 건 손에 잡힐 듯이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아까와 같은 괴물들이, 저 늪 어디서든 솟아올라 덮쳐들 수 있었기에.
발을 털어낸 내가 막 늪으로 발을 떼려는 순간, 예감을 가시화하는 양 옆쪽에서 뭔가가 터질듯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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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와 모험이 가득한 판타지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공모전하고싶다... 공모전... 왜 이렇게 끝내지 못한 계약이 켜켜이 쌓여있는 거죠
신작을 팔 수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