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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44화 (144/155)

00144  12. 니라야의 늪  =========================================================================

늪에 거의 가까워졌다. 나는 삐그덕거리는 마차의 울림 속에서 머리 위 후드를 끌어당겨 더 깊이 눌러썼다. 얇은 후드가 가죽이라도 되는 양 무겁게 실린다. 습도 탓이다. 니라야의 늪에 악명을 더하는 건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이 안개였다. 마차로 새어 들어오는 안개의 입자가 창백한 손길처럼 내게로 휘감겼다. 뺨에 물기가 묻어난다.

마차에는 마부를 포함하여 나 외에도 일곱 명의 남자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무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난 구석에서 몸을 웅크렸다. 괴물 따위가 날 어쩌지 못한단 걸 알면서도, 치미는 긴장감은 피할 길이 없다.

끝이 목전에 있었다. 아카일을 떠난 뒤 때때로 일던 상념은 그 ‘끝’을 생각하면 먼지처럼 흐려지고 만다. 나는 그 순간이 어떨지 조금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미지는 언제나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마스터, 이제 곧.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여기로 오기까지 나는 아무런 문제도 겪지 않았다. 사람과 마을을 피해서 숲 속과 산길을 걷는 그림자처럼 조용한 이동. 소리 없는 진공을 걷듯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가 마치 폭풍 전의 그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형체 없는 무언가가 나를 죄여온다. 오로지 내 눈에만 보이는 괴물처럼, 그건 그 구석진 자리에 있었다. 단번에 몸집을 부풀려 일어날지 아니면 그대로 사그라질지 알 수 없으나, 고독처럼 덩그러니.

……아직 나를 잠식하진 못했다. 정신은 또렷하게 깨여있는 터였다. 나는 유리날처럼 명료한 이지로 지금 상황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 마차에 올라앉기까지의 상황에 대해서.

얼마 전 난 니라야의 늪에서 가장 가까이 있단 마을에 당도했다. 밤늦게 담을 타넘는 비밀스러운 입성이었다. 또다시 마주치면 안 될 이들과 조우하게 될까봐 두려웠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나흘 간 온 마을을 탐색한 결과, 그 마을에 마스터가 있지 않단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너무 빨리 온 걸까. 아니면…….

뤼비에는 수완이 좋다. 아무리 어린아이 한 명을 달고 있다곤 하나 내가 며칠 간 지체한 적도 있으니 나보다 빨리 출발한 그들이라면, 조금 더 일찍 도착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미 마을을 떠났을지도. 비슷한 시기에 도착했더라도 엇갈렸을 가능성을 무시할 순 없었다. 마냥 마을에서 기다리고만 있는 것도 초조한 일이었기에 난 결정을 내렸다. 니라야의 늪으로 향하기로.

그러나 마법도 쓰지 않고 맨몸으로 헤집기엔 작지 않은 지역이었다. 마스터와 뤼비에가 먼저 그리로 향했다고 한들 그들도 묵을 만한 장소가 필요할 터. 뤼비에라고 해도 수면 중에 습격당하면 도리가 없고, 방심하면 죽을 수 있다. 그들이 안전하게 머물 만한 장소가 저 안개 싸인 늪 인근 어디에 있을까……. 내겐 니라야의 늪에 대해 잘 아는 이가 필요했다. 지도도 없는 그곳을 헤집고 다닐 때 나를 안내할 만한 길잡이. 그리고 난 어렵지 않게 그들을 발견해냈다.

―사냥꾼들.

마탑에서 주기적으로 소탕한다지만, 니라야의 늪 인근에는 종종 위협적인 괴물들이 출몰하여 사람을 해쳤다. 그 괴물들의 몸에서 나는 부산물은 상당한 값어치를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이곳 니라야의 늪엔 실력 좋은 사냥꾼들이 몰려들었다. 물론, 위험한 일이다. 아주.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벌이가 된다면 뛰어드는 이들은 항상 있기 마련이니까.

식당 귀퉁이에 앉아 오랜만에 식사를 즐기던 도중, 난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걸 들었다. 한 무리의 건장한 사내들이 모여 늪에서 있을 사냥에 대해서 상의하고 있었다. 저들과 함께하면 되겠구나. 난 벌떡 일어나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거래가 이루어졌다.

어리고 제 몸 지킬 힘도 없어 보이는 내가 아무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일행에 끼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으로 실력을 증명해보일 수 없었던 난 그들을 간단한 방법으로 설득했다. 바로 돈으로. 견습 마법사인데 니라야의 늪이란 미지의 장소를 연구차 탐색하고 싶다며 적당한 이유를 붙이자 곧장 승낙이 떨어졌다. 귀족 영애나 유복한 집안의 아가씨 정도로 날 바라보는 시선이 제법 색달랐다.

호기심도 잠깐, 사냥꾼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하는 자들답게 다소 사무적으로 나를 대했고 나는 그들이 일러주는 정보를 귀담아 들었다. 대개는 단독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그들을 따르라는 것이다. 그나마도 니라야의 늪에 가까워지면서 모두 말수가 적어졌다. 내겐 퍽 익숙한 침묵이었다.

―히히힝!

덜컹. 달리던 마차가 흔들리며 급속도로 멈췄다. 난 볼썽사납게 바닥에 몸을 부딪쳤다. 무안하게도 쓰러진 건 나뿐. 단련된 사냥꾼들은 균형을 잘 잡았다. 마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습격, 습격을…….”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사냥꾼 두 명이 서로에게 눈짓하며 마차문을 박차고 나섰다. 나는 철창이 드리워진 마부쪽 창을 통해 바깥을 엿보았다. 안개 속에서도 시야를 확보하는 건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력이 다한듯 한 남자가 맥없이 쓰러져 있었다. 마부가 내려서서 그를 일으켰다. 전신이 피로 젖은 남자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내려선 이들은 남자를 들어올리고 마부석에 올렸다. 그리고 쓰러진 상처에 약초를 붙이고 붕대를 감아 매었다. 피를 흘리고 지쳤다 뿐이지 다행히 생명이 위중해보이지는 않았다. 뺨을 툭툭 치니 남자가 눈을 떴다. 눈빛에 이지가 돌아오기 무섭게 질문이 쏟아졌다.

“습격을 당했다고? 몇 마리나 왔지?”

“어느 야영지지? 여기서 가까운 라잔인가.”

“그, 그래. 맞아. 수는 세 마리. 라잔……. 안개가 유독 짙었는데 소리도 없이 덮쳐들었어.”

“야영지엔 몇 명이 있었는데?”

“대부분 마을로 돌아간 참이라 사람이 적었어. 총 여섯 명, 전투인원 네 명……. 정찰 나간 한 명이 이미 당했기에 역부족이란 걸 알고 다들 도망쳤어. 몇 명이 살아남았을지…….”

그가 탄식을 토해내는 순간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전투인원이 네 명이라면 나머지 두 명은 누구인가요.”

눈총이 쏟아졌지만 굴하지 않고 난 남자에게 다가섰다. 남자는 사냥꾼 무리에 낀 낯선 여자를 보고 움찔거렸지만, 곧 느릿하게 답했다.

“젊은 청년과 아이……. 청년은 연구차 방문한 마법사라는데 어떻게 되었는지는 보지 못했어.”

“아는 사이인가?”

“라잔이 어디죠?”

동시에 질문이 떨어졌다. 사냥꾼들의 대장인 테론이었다. 나는 똑바로 눈을 마주한 채 다시금 물었다.

“아마도요. 라잔이 어디죠?”

“여기서 마차로 반시간. 멀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갈 수 없다. 적어도 동이 트면.”

“방향만 알려주세요.”

“단독행동은 곤란해.”

“값은 지금 치르죠. 더 이상 안내는 필요 없어요.”

“놈들이 아직도 거기에 있다면 이 짙은 안개 속에서 아가씬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죽어.”

“……한 놈은 여기에 있군요.”

중얼대기 무섭게 말이 울음을 내지르며 앞발굽을 쳐들었다. 히히힝!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차가 뒤흔들린다. 나는 즉시 마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마부가 재빨리 말의 눈을 가렸다. 진정시키기 위함이다. 나는 정면을 쳐다보았다. 뒤를 쫓은 건가. 여유롭게, 어차피 곧 제 뱃속으로 들어갈 사냥감이 지쳐 쓰러지길 기다리며.

안개 속에서 붉은 광채가 어른거린다. 족히 코끼리만한 몸집. 서서히 괴물의 모습이 드러나자 난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이라칼을 본 적이 없었더라면 압도당하고도 남았으리라. 가로 세로로 부풀리고 좀 더 흉악스러운 껍데기를 갖춘 퓨마와 같은 형상. 놈의 이빨은 창날보다 두꺼웠다. 그리고 누군지 모를 이의 피와 타액으로 흠씬 젖어 있었다.

“이봐, 미쳤나? 들어가 있어!”

검을 쥔 채 사내들이 뒤따라 마차에서 내려섰다. 난 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오랜만에 검손잡이의 단단한 감촉이 닿았다. 나는 이 검을 몇 번이나 사용했다. 그러나 여전히 검에선 마르지 않는 샘처럼 무한한 힘이 느껴진다. 스스로 생명을 품은 듯이.

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내가 이 녀석을 잡으면, 라잔으로 안내해주세요.”

“뭐, 그게 무슨―”

어깨를 잡아 뒤로 내돌리려는 손길을 난 앞으로 뛰쳐나가는 것으로 뿌리쳐냈다. 놈에게 시간을 줄 필요는 없었다. 단순무식한 방법이면 어떤가. 빠른 결론을 얻어낼 수 있다면야.

코앞까지 치달은 날 보고 놈은 앞발을 휘둘렀다. 건장한 남자라도 그 앞발에 맞으면 트럭에 치인 양 저 멀리 날아갔으리라. 하지만 내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난 바로 공처럼 뛰어오르며 검을 뽑아들었다. 매끈한 검은 날이 허공에서 번뜩였다. 놈이 위로 시선을 옮기기도 전에, 난 공중에서 자세를 바꾸어 검 끝을 내리찍었다.

―콰직!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검이 일직선으로 놈의 이마에 틀어박혔다. 충격에 팔이 제법 얼얼하다. 난 이맛살을 찌푸렸다. 머리가 작살처럼 꿰뚫린 놈은 그 어떤 저항도 하지 못했다. 괴물은 찰나 후 무너져내려 옆으로 무거운 몸을 뉘였다. 털썩.

나는 깔리지 않도록 조금 움직여 바닥에 착지했다. 딱딱한 껍질 탓에 피가 튀진 않았다. 검은 여전히 내 손안에 있었다. 반 뼘 이상 박힌 검날을 뽑아내기 위해서 난 손에 한껏 힘을 주어야만 했다.

간단한 산수를 풀어내듯이 신속하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멍하니 서서 바라만 보던 사내들이 그제야 내게로 다가왔다. 난 대수롭지 않은 투로 내뱉었다.

“시체는 마음대로 처리하세요.”

괴물의 테론이 무겁게 중얼거렸다.

“견습 마법사 따위가 아니었군…….”

“좀 실력 있는 견습마법사라고 해두죠.”

검을 툭툭 털어내자 묽은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제 스스로 불순물을 배제하는 듯이 매끈해진 검을 난 다시 검집에 꽂아 품에 넣었다. 사내들이 괴물의 시체를 손질하는 걸 흘낏 보며 나는 마치 약속을 한 것처럼 말했고,

“자, 이제 라잔으로 갈까요?”

그들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는 곧 다시 출발했다. 공으로 건진 수확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냥꾼들은 조금 들뜬 기색이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내 눈치를 보는지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난 아까 앉은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은 채, 부상을 입은 남자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괴물이 처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빠져들었고, 나는 그를 붙잡아 질문을 퍼붓고픈 마음을 한껏 억눌러야만 했다. 당장 마을로 옮겨갈 순 없으니 그의 다른 동료들이 라잔을 다시 방문할 때까지 이 일행과 함께해야할 터였다.

“긴장 늦추지 마. 아직 두 마리가 남았어.”

테론이 사냥꾼들을 향해 단단히 일렀다. 이제 곧 라잔에 도착할 것이라 여겨질 즈음이었다. 내 존재를 믿고 느슨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한 말이리라. 경고해둔 그가 내게로 다가와 앉았다. 낮은 음성이 질문을 쏟아낸다.

“샤자한이 정체 모를 마법사들과 협약을 맺고 늪을 관리케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소. 그들의 일원이오?”

“아니오. 저런 괴물이 이 근처에서 흔한가요?”

테론은 내 말이 미심쩍은지 고개를 젓다가 답했다.

“……아니, 원래라면 외곽의 야영지에는 잘 출몰하지 않소. 늪에 가까이 가야 한두 마리 나타나지. 괴물이 가장 들끓을 시기에나 이 근처까지 오는데 이상한 일이지.”

예외적인 피습이라.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마스터는 이라칼에게 그리했듯이 괴물을 부릴 수 있다. 의도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러나 뭘 의도하여? 답은 빠르게 산출되었다.

뤼비에가 더 이상 필요 없어져서, 그를 떼어놓으려고.

괴물 한둘 정도 상대한다고 뤼비에가 죽진 않겠지만, 그 틈을 타서 마스터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게 나의 추론이었고, 나는 그것을 곧 확인하게 될 예정이었다.

============================ 작품 후기 ============================

검은 달무리에 잠기다 <--로 거의 결정이 났어요.

이 소설도 머지않아 매듭지어질 듯하네요!

주말 잘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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