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3 11. 접근 =========================================================================
“그대가 곤경에 처했단 걸 알고 있어.”
그의 음성이 무거운 음절로, 긁듯이 파고든다. 미약하게 섞인 염려. 이토록 가까이 서니 나는 그가 날 걱정하고 있단 걸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호박색 눈동자에 담긴 감정의 색에 호흡이 조인다. 그 색이 내가 그에 대해 느끼는 감정보다 확연히 짙다. 당신에게 새겨질 만큼 자취를 남겼던가. 그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것.
“알고 계셔도, 모른 척 해주세요.”
“어째서.”
“당신에게 해가 될 테니까요.”
나와 엮이지 않는 게 좋다. 그러하기에 당신과 거리를 두고 있단 걸 알잖은가. 하지만 알면서도 그는 구명의 은혜를 구실로 나를 놓질 않는다. 그 놓지 않음에 갑갑하면서도, 누구 하나 나를 생각해주는 이 있단 것에 다잡은 마음도 조금 물러지고 만다.
쉽사리 속내를 드러내는 자는 아니나, 나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 내가 특별하다면 그 의미는…….
―그가 나를 여자로 보고 있단 것.
부인하려곤 애써보았지만, 둔하다 한들 눈 먼 것은 아니니. 안다. 알고 있다. 그리하여 내가 당신을 배반하지 않았단 것에 당신이 느낀 안도와 내가 기대지 않음에 드는 조바심까지도. 그 때문에 이리스 라하느가 나를 증오하고, 그가 내게 어떤 마음을 품었든 결과가 정해져있단 것까지도.
“저는 그저 인사를 하러 온 거예요.”
당신의 목숨을 구한 건 나인데, 이 기묘한 부채감은 무얼까. 내가 주지 않을 마음을 그에게서 받고 있어서? 그러나 그 또한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 마음은 이미 빼앗겨 무참히 짓밟혔다. 내겐 더는 누군가를 담을 여력이 없다.
“당신은 샤자한의 왕이고, 이미 죽을 뻔했어요. 더 이상 스스로를 위험하게 하지 말아요.”
한층 부드러워진 투로 난 나직이 말했다. 그 어떤 감정으로 나를 돕기 전에 현실을 자각하라는 듯이.
“……그대는 늘 나를 무력한 어린아이처럼 취급하는군.”
“마탑은 이제껏 당신에게 재해였죠. 저 역시 마탑의 일원이에요.”
재해는 인간의 손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 그가 왕이라고 해도, 밀려오는 폭풍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건―”
왕은 뭔가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는 얕은 침묵으로 심중에 자리한 말을 가라앉히는 듯이 보였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그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내가 그대를 모른 척하길 바라는 건, 내가 위험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대가 짐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인가.”
“둘 다, 겠지요. 그러니 이젠.”
저를 보내주세요. 나는 허락을 구하듯 속삭였다. 마음을 돌려줄 수 없다면 자존심이라도 채워줄 셈으로. 내 얄팍한 수를 꿰뚫어보았는지 그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어디로 갈 건지도 말 할 수 없는 건가.”
“네.”
“정말 꼿꼿한 여자로군.”
왕의 손이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온기를 전하듯 따뜻한 손길이었다. 사륵거리며 적금발이 뺨을 스치고, 부드러운 입맞춤이 이마에 닿았다. 날선 신경은 누그러졌으나 몸이 묘하게 경직되었다. 그가 내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신을 믿지 않아. 하지만 그대에게 그 가호가 닿기를.”
“……당신에게도요.”
고맙고 미안하고……. 그리고 말로 표현 못할 감정의 잔재. 지금 이 순간에 피어난 걸까. 그의 눈 속에서 내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운이 가라앉기도 전에,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얼음을 파헤치는 듯한 음성. 아주 잠시, 잊고 있던 그녀가 어느덧 등 뒤로 서 있었다. 퍼뜩 돌아본 난 그 서슬 퍼런 기세에 곧장 왕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특별히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찔끔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왕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니 바람이라고 말하는 것도 좀 아닌 거 같지만, 어쨌든 이리스 라하느는 그의 약혼녀이지 않은가.
“이리스 라하느, 이 무슨 무례지?”
이별의 순간을 망친 그녀의 행동이 몹시 언짢은 듯 왕의 낯빛에 노기가 서렸다. 이리스 라하느의 눈은 새파랬다. 배신감과 분노가 넘실거리는 눈이었다. 그녀는 물러나지 않았다.
“저 계집이 폐하의 눈을 흐렸어요! 고작 저런 보잘 것 없는 여자에게 현혹되어선!”
“말을 삼가라! 내가 그녀를 어떻게 대하든 그대에겐 그런 말할 자격이 없다.”
“전하의 약혼녀인 제게, 자격이 없다고요?”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그 순간 왕에게서 결심이 엿보였다. 이미 결정해두고 있던 것이 그의 입을 통해 기정사실화 된다.
“그대를 단 한 번도 왕비가 될 만한 이라 여겨본 적 없다. 하여 그대에게 이름뿐인 약혼녀 자리 외엔 무엇도 줄 생각이 없다.”
“이름뿐인…… 약혼녀라고요?”
새하얗게 질린 채 뇌까리는 이리스 라하느는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했다. 그녀 안에서 까드득까드득 절망이란 어둠이 기어오르는 듯이. 그녀가 충격을 받았든 내 알바 아니지만, 치정싸움을 목격하고 있는 게 편하진 않다. 이리스 라하느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겠지요. 헌데 제게 이리 진실을 말씀해주시고도 그녀에겐 말씀해주시지 않을 건가요? 바란에서 누굴 만났는지!”
바란에서? 시선이 왕에게로 돌아갔다. 반역자를 쫓는 와중에 지진이 일어, 필경 위태로웠을 상황. 누구를 만났단 거지? 그것도 나와 관계가 있는……. 추론의 끝은 내리꽂히는 창날처럼 내게로 닥쳐왔다. 내가 입 밖에 내기 전 이리스 라하느가 먼저 답을 토해냈다.
“란델.”
등골에 소름이 치달렸다. 란델이 바란에?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만한 마력의 여파라면 시온들이 우릴 찾아낼 수 있으리라 예상했으니. 그래서 그를 만났던가. 그리고 아마 만남만으로 끝이 아니었을 터였다. 나는 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가 말했지요. 저 여자가 탑을 배신하고 도주했으니, 혹시 그녀를 보게 된다면 자신에게 연락을 취하라고요.”
“이리스!”
“단지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아무 대가 없이 샤자한에서 손을 떼겠다고도, 했지요.”
“네가 그걸 어떻게.”
냉정함이 가신 왕의 얼굴에 곤혹이 서렸다. 란델의 온화한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가 그 얼굴로, 어떤 투로 속삭였을지 그리듯이 선명하다. 선악과를 먹으라 뱀이 유혹하듯 위협적이고 설득력 있는 그 음성. 아카일과 내가 만난 적 있단 걸, 그가 과연 눈치채지 못했을까. 어떤 진실도 꿰뚫어볼 듯한 그의 투명한 눈이 떠오른다. 한기가 몸을 휩쌌다.
“마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길 염원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리고 그의 말대로 하시는 것이, 샤자한을 위한 길이에요!”
적어도 그녀에게는, 나를 여기서 치워버리는 것이 샤자한을 위하는 것보다 중요하단 것만은 분명하다. 충격과 함께 솟구친 놀람도 잠시, 나는 잠잠한 눈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카일.”
내가 왕을 믿는 이유는 명료했다. 그가 나를 넘길 생각이었다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듯이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리스 라하느가 그걸 폭로하지도 않았으리라.
“감히 네가, 누구의 이름을 불러!”
폭발할 듯한 외침이 쩌렁하게 고막을 울렸다. 난 낯을 찌푸렸다. 비명처럼 외친 그녀가 전광석화처럼 몸을 움직였다. 나를 공격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방 한구석에 놓인 협탁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든 그녀가 보란 듯이 그것을 쳐들었다. 무얼 하려는지 몰라, 제지할 겨를이 없었다.
“이리스, 그걸 내려놔!”
왕이 다가서며 외치자 그녀는 구슬 쥔 손을 감추며 뒷걸음질 쳤다. 무슨 말도 통하지 않을 시퍼런 눈이었다.
“폐하께서 하시지 않겠다면, 제가 하겠어요!”
그녀에게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마력이 느껴졌다. 마력을 불어넣어 호출하는 방식인가. 생각할 틈도 없이, 난 손을 뻗었다. 단순하고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손을 잘라놓더라도 당장 그녀를 막아내야겠단.
왕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옆쪽에서 불길이 인다 싶더니, 화염 같은 기운을 실고 마력이 내쏘아졌다. 거의 동시였다. 내 손에서 뻗어진 마력과 비스듬하게 충돌한 그것은 곧 궤도를 바꾸었다. 그와 나 둘 모두 마력을 조절할 만한 여유따윈 없었다. 이미 발사된 마법은 회수가 불가능했다. 순식간에 궤도를 비튼 마법이 이리스 라하느를 덮쳐들었다.
―커억.
신음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시야를 가리는 붉은 기운이 가시고, 내가 목도할 수 있었던 것은―
목이 반쯤 타들어간 이리스 라하느의 모습.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매캐한 연기에 휘감긴 그녀는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털썩. 부릅떠진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맥박도, 호흡도 모두 멎어버렸다. 절명.
마력을 불어넣는 데 집중하느라 방어할 겨를이 없었던 걸까. 나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또르르. 바닥에 떨어진 구슬은 변함없는 원형 그대로 방바닥을 굴러 벽에서 멈추었다.
난 불현듯 깨달았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충격 이전에, 막아냈단 안도가 앞서 나를 점령하고 있었단 것을. 그래 마땅한 여자였다. 하지만 그런 내 자신을 깨닫는 건 얼어붙을 듯이 섬뜩했다. 난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변명을 해야 할까. 그녀를 죽일 의도가 아니었다고. 그와 나 모두, 실수를 범한 거라고.
그러나 난 놀랍게도, 그늘진 얼굴로 선 왕에게서 내 것과 유사한 감정을 발견했다. 왕의 눈에 비친 것은 안도였다. 제 것이었던, 그러나 진절머리 나던 그것을 마침내 떼어놓은 양. 끈덕지게 달라붙던 누군가에서 드디어 벗어난 듯이. 그 강렬한 해방감에 비하자면 후회나 자책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 사실에 전율이 일면서도, 이해가 되었다. 내가 왕에게 가깝기 때문이 아니라, 만약 나였더라도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기에……. 이리스 라하느의 죽음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뒤늦게야 내게로 시선을 주었다. 흡사 내 존재를 일순 잊어버렸던 것처럼.
“괜찮……아요?”
그는 필경 내 목소리, 내 눈빛에서 이해를 읽어냈으리라. 그러나 왕의 얼굴은 무참히 일그러졌다. 그의 눈빛에 떠오른 것은 배덕감이었다. 그는 바로 선 왕이었고, 제가 충성스러운 부하이자 약혼녀였던 이의 죽음에 안도하고 있단 사실을 납득하지 못할 이였다. 그러니 내 이해심조차 용납하지 못할 터.
“가.”
왕이 신음하듯 토해냈다.
“아카일…….”
이런 식으로, 끝나길 바란 건 아니었다. 왕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괴로움에 젖은 그 모습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난 잠시 머뭇거렸다. 나는 절로 뻗어가는 손을 애써 모아 쥐었다. 얄팍한 자제심 때문이 아니라, 그가 원치 않을 것이기에.
왕이 다시금 말했다.
“가 봐.”
원망은 없다. 그러나 떨쳐내려는 듯이, 내 쪽을 보지 않는다. 한때의 기분이 아니다. 혼란때문에 잠시 나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에게서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변질되었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에게서 난 가까이해선 안 될, 죄악감의 증표였다. 왕은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었고, 그 감정은 필경 그를 갉아먹겠지. 그래, 내가 예언한대로 나는 그에게 해가 될 존재였다.
“……건강하시길 빌어요.”
무의미한 인삿말만을 남기며, 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눈에 담았다. 그외의 어떤 말도, 내겐 허락되지 않았다. 당신의 탓이 아니라며, 혹은 미안하다고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 그는 그 모두를 원치 않을 것이기에. 난 이를 악물었다. 말한 마디로 녹일 수 없는 철벽같은 강경함. 닫힌 마음을 적나라하게 내비치는 왕의 모습이 망막에 새겨진다.
―아카일.
나는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미약한 상실감이 가슴께에 차오른다. 난 도망치듯 등을 돌렸다. 아마도 이것이, 나의 최선이리라.
문을 열고 빠져나와 곧장 거기를 벗어났다. 내딛던 걸음이 빨라져 곧 어디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죽어 쓰러진 이리스 라하느. 약혼녀의 죽음을 우뚝 선 채 바라보는 왕. 그 비극적인 광경은 아마 영영 잊히지 않겠지. 내가 그를 초래했다.
난 자리에 멈춰 선 채, 얼굴을 감쌌다. 숨이 가빠온다. 시계 초침이 느리게 똑딱이는 듯한 감각. 달팽이가 기어가듯 피부에 닿는 모든 감각이 지체된다. 둔중하고 더디다.
그러나 그건 아주 잠시. 가야할 곳이 있었기에 더는 멈춰서 있을 수 없었다. 정지한 걸음은 다시 시작되었고,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악녀사망....
이소설은 절대 베드엔딩이나 데드엔드로 가고있는 게 아닙니당.
오해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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