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2 11. 접근 =========================================================================
도시로 가지 않고 저 강을 건너려면 밤에 몰래 배를 훔쳐 타든가 헤엄을 쳐야할 텐데 그 무엇도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다른 여행자들과 섞여서 배편을 이용하는 쪽이 나을 것이다. 난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우연찮게 마스터를 만날 수 있다고, 희망을 조금 품기도 했다. 가는 곳은 뻔한데 여태껏 마주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정작 내가 마주하게 된 건 다른 인물이었다.
저녁 무렵, 사람들 틈에 섞여서 배에 탄 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강을 건너서 선착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배 주변을 병사들이 에워쌌다. 훈련받은 듯한 움직임, 딱딱하게 굳은 얼굴. 말이 통할 것 같지 않다.
“신분증을 보여라!”
여행자인 내게 신분증이 있을 턱이 있겠는가. 난 잠시 이대로 강으로 뛰어들어야 하나 고민했다. 정신계 마법은 잘 쓸 줄도 모르거니와 소란 없이 어떻게 해보기엔 상대가 너무 많았다. 뇌물을 먹이는 것도 상대가 소수일 때 이야기다. 나와 배를 같이 탄 이들도 마찬가지로 동요한 듯 수런거렸다.
“아니, 왜 하필 오늘 신분증을 검사하는 거야?”
“그럴 기간도 아닌데 높으신 분이라도 행차하셨나.”
“재수도 더럽게 없지, 하필 딱 오늘인가.”
“자네도 없나?”
“자네도?”
난 불평을 터뜨리며 대화를 나누는 행상인들에게 슬쩍 물었다.
“저어, 저. 신분증을 잃어버렸는데 제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감옥으로 끌려가겠지. 일단은 그게 원칙이라고."
“감옥으로 끌려가면 어떻게 되는데요?”
“상황에 따라 다르지. 신분을 보증할 수 있는 이가 있거나 별 문제 없으면 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고, 아니면 높으신 분이 떠나고 나서 풀어줄 수도 있고. 원래 신분증 검사에 까다로운 도시가 아닌데 말이야. 치안이 잘 되어있어서, 요 근래 좀도둑밖엔 없었다고!”
난 혀를 찼다. 그냥 강을 헤엄쳐서 건널걸 그랬나. 간만에 편하게 오려고 했더니 또 이런 일이 생긴다. 나는 옆 눈길로 강을 보면서 고심했다. 실제로 저쪽에서 뒤가 구려보이는 몇 명은 강에 뛰어들 태세였다.
“엄한 생각은 하지 말게, 아가씨. 아가씨는 눈에 띄어서 탈 때부터 선원들이 다 새겨두는 눈치였다고. 도주하는 것도 어렵거니와 현상수배라도 걸리면 곤란해질 거야.”
“그래, 신분증 없는 건 별다른 죄가 아니지만, 여기서 도주하다가 잡히면 그건 중죄라고.”
내가 잡힐 것 같진 않았지만, 제법 설득력 있었다. 내 존재를 만방에 알리게 되는 건 곤란하다. 난 즉각 도주를 포기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몇 명은 기어이 강으로 뛰어들었고, 곧 병사들 쪽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화살을 쏴라!”
인상을 찌푸리는 내게 상인 한 명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봤지?”
누군가가 화살을 맞았는지 물 위로 떠올랐다. 곧 그물이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난 그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화살세례가 내게 위협적인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맨몸으로 화살을 맞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상황을 무마하려면 육체적 능력 하나만 가지고는 될 것 같지 않았다. 적어도, 컴컴한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건 피하고 싶은 바였으니.
나는 순순히 병사 앞에 서서 신분증을 잃어버렸다고 답했고, 나와 말을 섞은 상인 몇 명과 함께 손목에 줄을 묶인 채 감옥으로 인도당할 처지에 놓였다. 다행히 나는 얄팍한 붉은 로브를 속에 대충 구겨 넣어서 받쳐 입고 그 안에 모든 짐을 넣어둔 채였다. 그 위에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기에 빈손으로 보여, 짐을 압수당할 염려는 없었다.
“어서 따라와!”
위협적으로 윽박지르긴 했으나, 그리 거칠진 않았다. 적어도 특별히 날 표적으로 삼는 것 같진 않다. 병사들은 제 임무만 수행한다는 착실한 태도로 이 신분이 불분명한 자들을 감옥으로 이끌었다. 난 가늠해보았다.
이대로 감옥으로 끌려가서 기회를 노리는 편이 나을까. 아니면 가는 길에 슬쩍 도주하는 게 나을까. 이깟 밧줄 끊는 건 내게 숨 쉬듯이 쉬운 일이다. 일단 육지에 발을 들였으니 이 도시에 머물 이유도 없고.
어차피 샤자한의 늪으로 가서 마스터와 합류하면 모든 게 끝이다. 결심한 난 밧줄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 불쑥 저쪽에서 어떤 남자가 나타나 병사들 앞에 섰다. 병사들은 그에게 즉각 예를 표하며 두런두런 말을 나누었다. 대충 이들은 누구냐, 어디로 데려가느냐. 그 정도의 상황 체크를 하는 걸로 보였다.
난 지루하게 발을 굴렀다. 다시금 고민하고 있었다. 남몰래 감옥에서 빠져나가는 게 그나마 조용한 방법이긴 한데, 병사들이 신경을 빼앗긴 이 기회를 틈타 도망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데 저 남자. 난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본듯한 얼굴이다. 그리고 내가 어디서 보았다고 말할 만한 이는 극히 드물었다. 바로 떠올리지 않아 눈을 끔뻑이던 난 그가 누구인지, 조금 후에야 알아차렸다. 내 시선을 느낀 듯 그의 눈이 바로 내게로 꽂혔기 때문에.
맙소사, 그가 어떻게 여기에 있지? 달리 말을 나눠본 사이는 아니었다. 그저 스치듯이 본― 그러나 그로서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남자는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와 지시했다.
“밧줄을 풀어주어라.”
양손의 자유를 얻은 난 남자를 응시했다. 놀람도 잠시, 그간 풍파를 많이 겪어서인지 내 머리는 침착하고도 신속하게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병사들이 다시 죄인들을 이끌어 이동하기 시작하자, 난 나직이 물었다.
“당신은 왕의 호위 아니야? 어떻게 여기에 있지.”
“제가 있는 곳이, 왕께서 계신 곳이지요.”
놀랄 법도 한데, 동요가 담기지 않은 차분한 음성이었다. 짐작한 바였다. 왕이 방문하고 있다면 신분 증명에 철저해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추측이 사실이 되자 놀란 건 내 쪽이었다.
“왕이, 어째서 이곳에?”
어떻게 이곳에, 라고 묻는 쪽이 나았을까. 육로로 도달하기엔 바란에서 꽤 먼 위치다. 물론, 그는 마법사이고 마법사를 동원할 수도 있으니 좀 더 시간을 단축할 방법이 있겠지. 바란에서는 무사히 빠져나왔나. 그러나 안도할 기분이 아니었다. 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너무도 공교롭다. 이런 상황에서, 이 시점에서 만나지 않기를 바랐던 상대. 만들어진 듯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불안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공무상의 볼일이 있어 방문하신 겁니다. 당신을 왕께로 인도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난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결코 권유가 아니었다.
“저는 보고를 올려야 하고, 왕께선 당신을 만나길 원하실 겁니다.”
이리스 샤하느와는 달리 충실한 종인 양 말하는 것에 감정은 묻어나지 않았지만, 확고함이 느껴졌다.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날 끌고 가려고들 것이다. 왕의 측근과 소란을 벌이느니 얼굴 한 번 마주하고 조용히 떠나도록 해달라고 하는 게 낫겠지. 내게 믿음이란 단어는 희미한 것이었지만, 나는 왕을 알았다. 이제 와서 새삼 날 붙들려고 하진 않을 터였다.
나는 순순히 남자를 따라갔다. 우리가 향한 곳은 이 도시 내에서 가장 번듯하고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관광할 여유가 없었기에, 혼란한 마음만 가라앉히고 왕에게 할 말을 고르면서 걷던 와중에도 그 하나만은 눈에 들어왔다. 붉은 지붕과 정교한 모양새의 첨탑들, 하나하나 각기 마른 조각이 새겨진 기둥들. 격조있는 아름다운 저택의 모습에 눈이 번쩍 뜨였다. 과연 왕이 머물만한 장소였다.
문지기를 통과하여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인지 얼마 안 되어, 나는 곧 또 한 명의 아는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번엔 누군지 고심해서 떠올려야할 필요 없는, 결코 잊히지 않는 그녀를.
“저 계집이 왜 이곳에 있지?”
문 앞에서 호위를 서고 있던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눈에 불을 켰다. 물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녀는 나를 싫어하니까.
“왕의 손님이십니다. 이리스 샤하느.”
“하여 예를 갖추라고? 저 계집의 감언이설로 우리가 바란에서 무슨 꼴을 당했는지 생각해야지!”
무슨 꼴을 당했기에? 심드렁하게 생각하다가 자세히 보니 그녀의 한쪽 팔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니 저리 호위를 서고 있는 것이겠지만, 험난했던 상황이 읽히는 것 같아 난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런 주제에 잘도 내뺀 모양이야. 저리 멀쩡한 꼴을 보라고!”
“이만 비켜주시지요.”
왕에게 미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그녀에겐 없었다. 게다가 그녀와 얘기하는 건 시간낭비, 서로 감정이 나쁜 판에 좋은 꼴 볼 건 없다. 내 눈짓을 본 남자가 이리스 라하느를 제치고 서서 문을 두드렸다.
이후 안에서 허가가 떨어지고, 문이 열렸다. 이리스 라하느는 사납게 눈을 번뜩이면서도 나를 가로막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달려드는 대신 얼음장처럼 차가운 미소를 띠고 속삭였다.
“두고 봐. 넌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까.”
난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방 안은 환했고, 일순 그 빛이 안구를 쪼는 듯했다. 따갑다. 난 무표정하게 얼굴을 굳혔다. 이제 난 왕 앞에 서 있었다. 눈부신 적금발의 아카일. 샤자한의 왕. 그리고 내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 조각처럼 의자에 걸터앉은 그는 내게 시선을 주었다. 이채가 스치는 묘하게 가라앉은 눈빛. 이전에 바란에서 마주했을 때완 또 달랐다. 내게 가진 호감이 완전히 사라진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는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걸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친근히 인사를 나눌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바란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등뒤로 문이 닫히자 말을 고르던 것도 잊고, 난 질문을 던졌다.
“지진이 있었지. 건물이 붕괴하고 사람이 많이 죽었다.”
“……당신은?”
“보다시피.”
그는 손을 들어보였다. 말끔한 얼굴, 생채기 하나 없는 손은 날 안심하게 하기에 족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그렇지 못했다. 예기를 띠고, 나를 뚫어져라 보는 눈빛이 흡사 내 안을 들여다보려는 것 같았다. 내가 진실로 어떤 사람인지 다시금 파악해보려는 것처럼.
내게 실망했나. 당신이 증오하던 마탑의 사람들처럼, 내 목적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해한 것처럼, 그리 생각되어서?
그러나 그가 내게 실망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미 끝난 인연이라고 자각하고 있었기에. 좀 더 그가 끝을 받아들이기 쉽도록.
“그거면 되었어요.”
“변명은.”
“당신이 위험해질 수 있단 건 예상하지 못했어요.”
호위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왕이니까. 딱 그 정도로 생각할 만한 뉘앙스였다. 그외 바란의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단 것처럼. 왕이 오해를 품고 있더라도, 내겐 그 오해를 해소할 의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반감을 사서도 안 되었기에, 난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일부러 말을 안 한 건 아니었어요. 나도 어쩔 수 없었죠.”
“그대는 왜 혼자인 거지.”
“그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말해두지만, 난 당신을 찾아온 게 아니에요. 이곳에 당신이 있는 지도 몰랐어요. 우연히 마주친 당신의 부하가 날 이곳으로 데려왔지요.”
혹여 내가 당신을 이용하려고 찾았단 오해는 접어두었으면 좋겠단 뜻으로 굳이 덧붙였다. 실제로 난 그에게 바라는 바가 없었다.
“내겐 용건이 없단 말인가.”
“불쾌하실지 몰라도, 그래요.”
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보다 낮은 위치에 있었던 시선이 훌쩍 위로 올라왔다. 그는 내게로 성큼 다가섰다. 세발자국. 딱 그 정도 거리였다. 이토록 가까이에서 시선을 마주하니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스터의 위압감만큼은 아니나 능히 누군가를 짓누를 만한 존재감이었다.
============================ 작품 후기 ============================
계약서도 오가고 교정도 보고....이제 안정을 찾았습니다!
성녀님의 폭군 교화법은 자세한 건 머지 않아 공지 올리겠지만, 출판 계약을 맺었어요. 종이책+이북으로 출간할 계획입니다.
<페어리 레이디> 1,2권이 예판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알라딘에서 예약판매를 진행중이고 yes24와 교보문고 인터파크 등등에서도 조만간 예판이 열릴 것 같아요.
초판 한정 저자 사인본(친필을 시도했으나 복불복으로 불쾌감을 안겨드릴 수 있기에 인쇄로... 악필이라 죄송합니다)+일러스트 엽서를 포함한 2종류의 엽서가 증정되옵니다. 혹시 구입하실 분들은 초판일 때 덤을 함께 받아가소서. 소장가치가 있도록 저도 출판사에서도 전체적으로 공을 많이 들였어요~ 제목글씨도 예쁘고 반딱반딱하게 박이 박혀서 나갑니당.
검은 달무리, 금빛 숲은 올해 내로 출판 예정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