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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41화 (141/155)

00141  11. 접근  =========================================================================

불현듯 발이 멈춰졌다. 나는 빽빽한 잎사귀 너머 보이지 않는 달을 응시했다. 웃기는 일이지, 이럴 때조차……. 기껏 얻은 자유. 그러나 의식의 끝에서 그를 떨쳐낼 수 없음은 명료하다. 마스터는 얼마나 깊이 내게 새겨진 걸까.

그가 없는 삶, 그가 없었던 삶조차 이렇듯 까마득한데 과거를 통해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그려내는 건 희미해진 글씨를 되살리는 것과 같다. 웃고 떠드는, 평범한 학생이었던 나.

그를 사랑하지 않아도, 그림자처럼 스며든 그 모든 걸 떨쳐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난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다.

“니라야의 늪.”

나는 블레셋의 말과 그의 눈빛을 떠올렸다. 바로 몇 시간 전, 내 앞에 선 그의 모습이 당장에라도 그려낼 수 있을 것처럼 선명하다.

‘넌 어차피 실패할 테니까.’

그는 확신이었다. 나는 모르나 블레셋이 아는 영역에서 내려진 확신. 그의 예언과 내가 꾸었던 그때의 꿈. 나는 그 접점을 찾아낼 수 없었다. 블레셋이 나를 순순히 놓아 보내지는 않았을 터, 함정이 도사릴 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발길은 무겁기만 하다. 눈앞의 시야는 칠흑 같은 밤에 에워싸여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도 암흑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혹여 빛이 기다리고 있다면 내가 지나온 곳이 아니라 앞으로 가야 할 곳에 있으리라.

나 홀로 서둘러봐야 소용없단 생각을 한 건 그 후로 두어 시간쯤 흐른 뒤였다. 아무리 마력이 넘쳐나는 몸이라도 휴식이 필요치 않은 건 아니라 편편한 돌 위에 앉아 나무에 등을 기대던 것도 잠시, 얼핏 잠들었던 것 같다. 추적자가 따를까 불안한 마음 탓에 품에 있는 검손잡이를 움켜쥔 채로.

그렇듯 맞이한 잠은 달았다. 한순간에 수면의 늪에 빨려들었다. 아득한 몰입감에 시간이 정지된 듯하다. 눈을 뜨기 전 난 어떤 풍경을 예견했다. 이제까지 떨어져 있다고 한들 그게 완전한 단절이라고 보긴 어려웠고, 또 얼마간 힘을 찾았으니 꿈속에서 마주하지 않을까.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외떨어진 불안을 떨칠 순 없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목도한 건 다른 풍경이었다. 흙냄새가 물씬 끼쳐왔다. 바닥에 무릎이 닿았다. 맨땅이라기엔 푹신한 감각. 난 고개를 들었다.

옅은 초록으로 덮인 초원. 모나게 솟은 것 없이 완만한 지평선으로 수렴하는 대지는 광활하여 하늘과 시야를 양분한다. 바닥에 손을 딛고 몸을 일으켰다. 환하고 말끔하여 이 세상 같지가 않은 풍경, 낮과 밤을 가름하는 선상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너무도 눈부셔 일순, 태양이 아닌가 했다. 그러나 태양이 둘일 수는 없는 법이다. 사위는 온통 환했고 구름 너머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을 머금듯, 혹은 비춰내듯 아름다우나 창백한 순금의 머리카락. 잔잔하게 쏟아지는 폭포수 같은 그것에 난 눈을 빼앗겼다.

고요한 뒷모습. 그자는 지평선을 향해 서 있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으나, 내가 볼 수 있는 건 그 반짝거리는 금발과 검은 로브뿐. 마법사인가. 그러나 모든 마력을 갈무리한 듯 잠잠하기만 한 기척. 보고 있지 않다면 그가 거기에 서 있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그것이 뜻하는 바는― 저자는 틀림없이 나보다 더 강한 마법사라는 것.

“저기.”

나는 미동도 없이 선 그를 향해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꿈에 불과하다는 걸 혼몽한 감각으로 깨달아, 거리낌 없었다. 저자를 돌려세워 얼굴을 보고 싶다. 결말을 확인하려고 성급히 책장을 넘기듯, 다급한 마음. 그러나 거리가 멀었다. 나는 손을 거두어 그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부름에 화답하듯 그가 천천히 이쪽으로 돌아섰다. 서서히 드러난 그 얼굴을 담는 순간, 숨이 멈추었다. 범상치 않은 이일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 얼굴은,

“……마스터.”

난 탄식하듯 토해냈다.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이목구비. 그러나 섬세하고 고상하여, 신이 빚어낸 듯이 완벽하다. 빛과 어둠 대척점에 놓인 양 그토록 다른 색채인데, 흑을 백으로 바꾸어 그대로 찍어낸 듯이 그 형상만큼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금발이 성자의 후광처럼 드리웠다. 그 때문일까? 같으나 달랐다.

그가 마스터일 리 없다. 난 얼어붙은 채 되뇌었다. 마스터가 그런 눈을 할 수 있을 리 없었으므로. 분명히, 사람의 것 같지 않은 눈동자였다. 황혼 끝자락과 여명의 첫 줄기를 그러모아 놓은 듯이 오묘하여 경이로운 금안. 그러나 화염 같다. 타는 듯한 눈이었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을 녹여낼 만치 뜨거운, 범접할 수 없는 분노가 그 안에 고여 용암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아니, 나라는 존재를 아예 인지하지 못한 양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입가가 조금 휘어졌다. 흡사 조소하는 듯이.

“운명이라.”

매끄럽게 떨어지는 그 음성. 나는 몸을 떨었다. 그 역시도 마스터의 것과 꼭 같은―

그러나 마스터가 그런 표정을 보일 수 있던가. 눈앞의 그는 비현실적인 존재처럼 느껴지는 건 같았으나, 살아있는 양 생생했다. 감정을 느낄 줄 아는 생물처럼. 그의 시선이 내 뒤에 머물고 있었다. 지나치게 가까이 있었던 탓일까. 감각이 마비된 듯 꿈틀거리는 광대한 마력을 그제야 느꼈다. 나는 불현듯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 무언가 있었다. 시각으로 보고 있되 인지에 닿지 않아, 사고가 멎어버린 것 같다. 보았으되 무언지 알 수 없었다. 흡사 금기를 차단당하듯이. 그리하여 내게 허락되지 않은 것. 눈멀 듯한 밝음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찰나.

검은 벽면이 지저로부터 솟아올랐다. 근원으로부터 비롯하여 모습을 갖출 것을 허락받은 양 뿌리에서 양껏 양분을 빨아들이고 자라나 하늘을 향해 몸을 내뻗는다. 순식간에 형태를 갖추어, 몸체를 생성하고 구조물을 이룬다. 벽돌 하나하나 쌓는 것이 아닌, 밑에서부터 물감으로 그려내듯 만들어지는 것. 창조가 아닌 힘의 구현이며, 마력이 물질로서 형을 입는 과정. 본질적인 변화.

나는 퍼뜩, 내가 보고 있는 광경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 익숙한 모습. 그건― 마탑이었다. 나는 마탑이 어떻게 건설되었는지 보고 만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난 입술을 깨물었다. 까마득한 과거에 홀로 끼어든 시간의 미아처럼 이 모든 게 극히 낯설었다.

천 년, 그 이상의 세월이 지난 과거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혼란에 빠져든 나는 그자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그는―

마스터. 나는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었다. 빛의 자락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며 그의 전신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 마력의 물결이 거세어 몰아치는 돌풍이 눈에 보일만치. 그러나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어진 일이었다. 바람은 잦아들었고 나부끼던 머리카락도, 옷깃도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제아무리 찬란하던 빛도, 원천을 잃으면 여전할 수 없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생겨난 것은 어둠. 눈부신 금발이 끝에서부터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희게 새어버리는 것과 유사하게, 완전히 검어진 그 머리카락. 태양처럼 환한 금빛 눈동자가 암흑에 삼켜진다. 흡사 천사가 타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양 눈앞에서 일어난 기이한 변화에 전율이 인다.

뭔가가 뚝 떨어져 부딪히듯 둔중한 울림. 충격이 나를 점령한다. 이제 내 앞에 마스터가 서 있었다. 그래, 그는 마스터였다. 증오도 분노도 그 모든 감정을 도려낸 검은 눈은 폐허를 닮았다. 오로지 공허만을 안고 살아가는 지금처럼. 일순 휩쓴 화염이 완전히 가신 눈빛. 그 안에서, 뭔가를 비워낸 듯이. 그리하여 그는 의도대로 그 자신의 운명에서 멀어졌다. 그 변화가 너무도 명백하여, 난 파르라니 굳었다.

내가 본 건, 마스터의 과거였다. 또한 기억이었다. 이걸 내가 어떻게 볼 수 있었던 걸까. 그가 이런 걸 내게 보여줄 리 없다. 도리어 그라면 꽁꽁 숨기어두었을, 그런…….

거기까지 짚어내었을 때, 공기가 바뀌었다. 같은 자리에 있되 시공간을 비껴있던 난 장벽이 사라짐을 느꼈다. 현재와 과거의 교차였다.

“마스터.”

당황한 채 그를 부른 순간 마스터의 눈이 검어졌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배제. 이젠 또렷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눈빛. 마스터는 나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의 무의식에 침범한 나를! 어디 있느냐는 물음은 목 안으로 삼켜졌다. 내 존재를 이곳에서 몰아내는 게 가장 큰 목적인 양 거센 단절감에 의식이 흐려졌다. 나는 더 이상 무엇도 엿볼 수 없었다.

“헉.”

숨을 몰아쉬며 난 튕기듯이 자리에 일어섰다. 머리가 얼얼하다. 숲의 그늘에 에워싸여 있을망정 확연히 밝아진 대기. 낮이었다. 품 안에서 검이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또다시 검의 마력을 움직였던가. 난 소스라치게 놀라, 검에서 손을 떼어냈다. 밀도 높은 숲 속에선 마력의 흐름을 읽어내긴 어려우니 그리 문제 될 것 같진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마력을 움직이는 건 위험한 일이다. 그보다…….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찰나지만 접촉했는데, 가타부타 말도 없이 밀어내버렸다. 그의 기억 속을 파고들었으니, 눈치챈 이상 밀어낼 법하다. 하지만 이미 봐버린 것, 어쩌겠는가.

“어디 있는지 말해줘야 할 것 아냐.”

지금 그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예측지 못한 상황이라 당황해버렸던 걸까. 당황이란 단어, 마스터완 어울리지 않지만……. 난 굳어버린 몸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안전하다. 적어도 무의식에 빠져들어 날 쳐낼 수 있을 만큼은. 뤼비에와 함께이니 나보다 상황이 더 여유로울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김없이 목적지로 향하고 있을 터였다.

깜빡 잠을 잔다는 게 너무 오랜 시간을 지체한 것 같다. 아마도 정오에 가까운 시각. 나는 몸을 툭툭 털어내며 걸음을 재촉했다. 마스터의 옛 모습이 뇌리를 스쳤으나, 고개를 흔들어 떨쳐냈다. 답을 찾아내고자 하는 소망이 그의 과거를 보여줬을지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마스터가 마탑을 세웠단 건 진작 알고 있었잖아.

그러나 유의미한 것이 있다면―

마스터가 원치 않아도, 내가 그를 엿볼 수 있단 것. 그의 힘을 쓸 수 있단 것. 다른 시온들에게 불가한 그게 오로지 내게만 허락되었단 것…….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모두가 나를 예외라고, 특별하다고 말했지. 그건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기 때문일까.

추리를 이어가며 난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숲이 끝날 때쯤 하나의 실마리라도 붙잡을 수 있길 바라면서.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샤자한이다. 지도상으론 틀림없이. 감회가 새로웠다. 그 후로 내겐 어떤 꿈도 허락되지 않았고, 난 말하는 법을 잊을 만치 며칠이고 인적 드문 곳을 걷고 걸었다. 그리고 드디어 샤자한의 국토에 발을 딛고 있었다.

놀랄 만치 인연 깊은 나라다. 노예로 납치되질 않나 왕과 인연을 맺질 않나, 온갖 일을 다 겪었지. 그리고 또다시 발을 들였다.

난 아카일을 떠올리곤 잠깐 죄책감에 잠겼다. 경황이 없어 그의 안위를 생각지 못했지만, 무사하겠지? 바란이 붕괴 직전까지 갔으니 아마도 강도 높은 지진이 지상을 덮쳤을 듯하지만, 그는 목숨을 걸고 그를 지킬만한 수하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다쳤더라도, 목숨은 보전했겠지. 외려 그 소란이 그가 목적을 달성하고 바란을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을지 모르겠다.

“저길 들려야 할까?”

난 강 건너로 보이는 꽤 큰 도시를 앞두고 고민해 보았다. 그간 안전을 기하여 마을 여러 군데를 목전에서 지나쳤다. 작은 마을일수록 내게 이목이 쏠릴 가능성이 컸기에, 또 다른 시온과 마주칠까 두려워 쭉 사람을 피했었다.

그러나 점점 길이 넓어지고 오가는 이들이 늘어 붉은 로브를 걸치지 않는다면 나쯤은 그리 눈에 띄지 않게 되어버렸다. 혼자 여행하는 젊은 여자. 흔한 건 아니지만, 바쁜 여행길에 주목할 만큼 드문 케이스인 건 아니니까.

============================ 작품 후기 ============================

페어리 레이디 소장본 작업에 들어가써요 내달중 출판 예정이에요 'ㅅ'

일단 1,2권만.... 뒷권은 겨울에나 나올듯.

표지가 파릇푸릇하와요. 초판 특전 일러스트도 있구.

일단 교정본을 받아야....

이거 제목은 아직 고민중인데 바꾸려는 이유는 내용(주제)와 더 부합하기 때문이기도 해요. '검은 달무리'가 중요한 거거든요.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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