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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40화 (140/155)

00140  11. 접근  =========================================================================

“마스터는 거짓말을 하시지 않아요. 그러니 제게 약속한 건, 지키실 테지요.”

그러자 질문의 양상이 달라졌다.

“너는 그가 두렵지 않은가. 그가 무슨 짓을 해왔는지 알고서도.”

어떻게 그와 함께할 수 있느냐고, 어떻게 인세의 재앙이자 그토록 위협적인 자에게 본신의 힘을 되돌려주려고 할 수 있느냐는……. 당위적인 의문.

“물론, 두렵죠. 하지만 두려움이란 것에도 익숙해져서요. 마스터가 무슨 짓을 해왔든, 그게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무슨 짓들보다 더한 건 아니겠지요.”

어차피 마스터는 언젠가 힘을 되찾는다. 난 그걸 알았고 그 언젠가 일어날 일을 앞당겨서 내가 돌아갈 수 있다면, 그 후로 어떻게 되든 아무래도 좋았다. 현재로썬 그 이기심이 너무도 강렬하다. 그렇기에 당신의 어떤 말도 나를 설득할 수는 없다.

나는 확고함을 내보였고, 그건 블레셋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단단했다. 그렇기에 회유가 실패로 돌아간 이상, 이젠 그가 선택해야 할 차례였다.

“……후회하게 될 거다.”

차가운 표정으로 블레셋은 짤막하게, 그 말을 토해냈다. 물러가기 전 악역의 대사처럼. 그것은 유보. 후회란 건 미래에 느낄 감정이지, 당장 느낄 만한 뉘앙스는 아니니까. 그리하여 내가 제대로 받아들인 거라면, 그는…….

“나와 싸울 생각이 없나요?”

여기서 날 제압하여 마스터의 위치를 실토하게 만들 생각은 하지 않는 건가. 내가 아무리 의지가 단단하다지만, 고문을 당하면서 끝까지 입 다물고 있을 자신은 없다. 내가 독립투사도 아니고 매 앞에 장사 없는 법이니.

“그럴 필요 없어, 지금은. 넌 어차피 실패할 테니까.”

나만치나 그의 확신은 단단했다. 무언가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내게 섬뜩한 예감으로 자리잡혔다. 블레셋은 녹음 깊은 눈으로 날 담았다. 드러냈던 무언가를 감추어낸 듯 바람 없는 숲 같은 시선. 때문에 공정하여, 더 이상 호의를 기대하기 힘든.

그래, 호의. 블레셋이 내게 미미하게 드러냈던 그것. 때문에 지금 나를 공격하지 않게 만드는 것. 나를 설득하려고 든 근간. 나는 아주 잠깐 그를 성추행범 취급한 데에 가책을 느꼈다. 그러나 곧 지워버렸다. 가책 없는 쪽이 훗날 언제고 그와 마주 서야할 때에, 더 유리할 터였다. 아마 그땐 정말로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내가 살건, 그가 죽건.

유리처럼 투명해진 눈빛으로, 블레셋이 완전히 감정을 배제한 채 선언했다.

“다음에 나를 보게 될 때는, 이 같은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아.”

어떤 인사도 더 필요하지 않았다. 전신에서 마력이 뻗어 나와 바람결이 휘도는 양 블레셋의 전신을 타고 돈다. 이동마법. 내게 물러나는 척 해두고 동료를 소집하러 가는 걸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가 어떤 의도를 품고 있건, 나로선 블레셋을 제지할 수 없었다. 나보다 강자가 싸움을 미루자고 말했는데, 내가 굳이 시작할 건 없지 않겠는가.

자리를 충분히 오래 비웠다. 마스터가 제자리에 멀쩡히 있을지, 불안감도 있었다. 내가 블레셋과 대화를 나눈 사이에 마탑 쪽 누군가가 탐색에 나섰을지도 모르고. 블레셋이 은밀한 수단으로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했다면, 내가 아무리 그에게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한들 꼭 눈치챘으리란 보장은 없다.

난 여관을 앞두고 바로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이 주위로 짙은 안개가 드리웠다가 거두어진 양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길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방금 일어난 대화는 목격하지 못한 것처럼.

알 수 없는 무력감이 발목을 휘어 감았다. 바다 건너 저 먼 곳에서 서서히 몰려오는 태풍을 바라만 보고 서 있듯, 짓누르는 듯한 두려움. 내가 앞으로 닥쳐올 그 거센 파도에 맞설 수 있을까.

깨달음은 항상 나를 괴롭힌다. 내가 블레셋을 공격하지 못한 건 힘의 차이 때문이 아닌, 그 힘의 차이를 상기하라고 강조하는 내 안의 속삭임 때문이니. 만약 그를 공격하는 게 낫단 데 저울이 기울지라도 나는 그 속삭임에 더 마음이 쏠렸으리라.

왜냐하면, 내게 그것이 더욱 손쉽고 안일한 선택이기에. 싸움을 피하고 이 바람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겁에 질린 쥐새끼 같은 수동성.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이 내게 자리할 리 없다. 그저 난, 두려웠기에. 닥쳐오지 않은 그 무엇을 먼저 모질게 결정하여 행동할 수 없었으므로.

난 각오가 되어있질 않았다. 그리고 아마 다음에도…… 각오란 걸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블레셋은, 나와 맞서는 데 나를 향한 정체 모를 호감과 부채가 그리 큰 장애가 되진 않겠지. 각오가 되어있고 아니고를 떠나서 마탑의 시온으로 살아온 그대로, 그는 모든 걸 배제하고 의무에 따르리라.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손이 저릿했다. 타인의 선택 앞에서 대응만을 고민하는 건 얼마나 무력한 기분인지. 그러나 그건 내가 이 세계에 던져질 때부터 그랬다. 느닷없이 항해를 시작하여 운명의 격류에 휩쓸리는 양 나는 거기서 버텨야만 했다. 그래도 위태로울망정 뒤집히진 않은 돛단배처럼 나는 이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이리라. 그 끝에 목적한 곳에 이른다는, 단 하나 희망을 품은 채로.

누군가 나를 쫓는 건 아닌지 빠르게 이동하면서 감지해내려고 애썼다. 결국 떠난 듯이 보이던 블레셋 혹은 그 누군가도 날 미행하고 있지 않단 걸 확신하고 나서야 난 돌아갈 수 있었다. 확신엔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꼬박 한 시간을 채워서야 떠난 자리에 이르렀다. 마스터가 있을 바로 거기에. 워낙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데 익숙한 이라 들킬 거란 염려는 품지 않은 터였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설수록 불길한 예감이 나를 잠식한다. 인기척이라곤 없이, 죽은 듯이 고요한 수풀만 바람결에 흔들렸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수풀을 헤쳤다.

“마스터?”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머리가 아찔했다. 혼자 어디로 가진 않았을 텐데. 무력이 가해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혹여 블레셋의 마법을 감지했나. 그래서 자리를 뜬 건가. 일순 하얗게 질려버릴 만큼 놀랐지만 난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수풀 안쪽으로 몸을 들이미니 무언가 보였다.

나뭇가지에 얽힌 하얀 쪽지. 난 손을 뻗어 그것을 펴들고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렸다. 쓰여 있는 내용은 간단했다.

―먼저 가 있겠습니다.

마스터답지 않은 전언이다. 마스터의 필체는 알지 못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런 말투로 메시지를 남길 타입은 아니니. 나는 어렵지 않게 또 한 사람, 이 위치를 아는 자를 떠올려냈다. 뤼비에. 떠난 게 아니라 이리로 되돌아왔던가? 어째서. 내가 그더러 떠나라고 했을 땐 납득하는 듯이 보였는데.

하지만 그라면 나와의 대화와는 별개로 마스터와 뭔가 거래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영생이나 힘 같은 것을 약속받았을지도 모르고……. 그가 마스터를 납치한 건 아닐까. 하지만 뤼비에는 마스터가 진정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 어떤 힘을 가졌는지도. 바란에서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그가 마스터를 강제할 거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가늠할 수 없는 미지 앞에서 사람은 신중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나를 따돌리려고 함께 떠난 척한 건 아니겠지.

목적지를 알고 있으니 이제 난 그들을 뒤따라야 했다. 떠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을 터, 엇갈리지 않는다면 곧 따라잡을 수 있다. 하지만 목적지까지 마주치지 못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겠지.

적어도 마스터의 안전은 확보되었기에 난 한시름 놓은 채 빈 수풀을 들여다보았다. 그 텅 빈 자리. 이제는 혼자였다. 곧 다시 만나게 되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막막하리만치 홀로…….

“나보단 뤼비에가 도움이 되겠지.”

난 애써 긍정적으로 중얼거렸다. 나보다야 그가 더 능숙한 여행자이니. 어찌 보면 짐은 그가 떠맡았는데, 도리어 짐이 얹힌 듯 어깨가 무거웠다. 이 덩그러니 놓인 기분. 나는 이것이 두려워 마스터를 떠나지 못했는지도 몰라. 난 가슴에 휘도는 공허한 바람을 내몰며 고개를 쳐들었다. 차라리 이편이 낫다. 잠시라도 마스터와 떨어져 있는 것이 내겐 이로웠으니.

이 일이 어떻게 매듭지어지든, 나는 니라야의 늪으로 향해야겠지. 그리 긴 여정이 될 것 같지는 않으니 그동안 별일 없기를 바랄밖에. 난 품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고, 니라야의 늪으로 향하는 긴 여정을 지도 위에 한 줄로 그었다. 산맥과 강을 넘는 간단한 노선. 아무리 험난한 산행도 내겐 그닥 장애가 되지 않으므로, 갈 길은 뻔했다. 아마도 뤼비에의 행로 역시 내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그러나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난 내가 그들과 완전히 엇갈렸단 걸 인정해야 했다. 추적에 재능이 없는 난 조금이라도 남았을 그들의 흔적을 찾아내는 게 불가했으므로 애초에 포기한 터였다. 순전히 지도에 그었던 최단거리대로 길을 주파했다.

하지만 뤼비에는 나와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신경을 곤두세워 주변을 읽어내려고 애썼음에도 걷는 내내 그들의 기척이 조금도 잡히지 않았다. 아마 같은 길을 선택하지 않은 듯싶다.

“내가 배신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겠지.”

마스터는 바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을 때, 내게 이후 샤자한으로 향할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건 내게 모든 걸 다 말하는 게 이롭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 한편으론 일리 있는 것이었다. 우연히 마주한 블레셋이 날 그리 순순히 보내주지 않았다면, 더불어 날 굴복시켜 겁박했다면 내가 끝까지 마스터의 목적지를 말하지 않을 거라곤 장담하기 어려웠다. 바란에서 일이 잘 해결될지도 미지수인데, 차라리 말하지 않는 쪽이 나았으리라.

하지만 마스터가 딱히 뤼비에를 믿는 것도 아닐진대, 그와 함께하게 된 연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라면 마스터의 비위를 맞추는 데 딱히 어려움을 느끼진 않겠지만, 마스터는 함께 여행하기에 편한 상대도 아니었다. 상전인 양 행세하여 골치 썩이진 않는 상대라도 그 고요하고 위압적인 분위기는 익히 그를 겪어온 내게도 때때로 낯선 것이다.

그들 간에 무슨 대화가 오갔을지, 잘 상상이 되질 않았다. 사실 갈 길을 재촉하는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처럼 상념에 잠기는 일뿐이다. 그러나 어차피 갈피를 잡지 못하는, 단서 없는 추리로 겉도는 것에 불과한. 뤼비에의 통찰력이 부러웠지만, 그건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쉼 없이 걸었다. 내가 먼저 도착하게 되리란 걸 알면서도 전혀 발길을 늦추는 일 없이. 조용하고 쓸쓸한, 산책처럼 느껴졌다. 이 혼자된 시간이 유효한 건지, 몸이며 머릿속을 야금야금 갉아먹던 삿된 것들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향초를 피워낸 듯 개운함이 나를 채웠다. 새벽 공기가 밀려든 양 빈 가슴이 상쾌했다. 비워내어 정화하고 다시금 회복시킨다. 일련의 과정은 나를 번민하게 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끔 했다.

홀로 지나는 숲은 어느덧 검어졌다. 어스름이 내리자 그늘진 밝음도 순식간에 사그라지고 이내 인간의 눈으로 꿰뚫어볼 수 없는 죽음 같은 암흑이 내렸다. 마법사인 내게는 해당하지 않는 일이다. 난 사방이 어두컴컴한 와중에도 구애받지 않고 걸었다. 돌부리와 나무뿌리를 쉽사리 넘나들며, 한 번도 휘청거리지 않고.

맹수조차 본능으로 나를 알아본 것일까. 야들야들한 인간 여자이니 한 번쯤 먹잇감으로 노려봤음 직한데 이 길에서 나를 위협하는 것이라곤 없었다.

스산하나 그 스산함조차 어둠과 밤, 자연에서 느끼는 위협일 뿐. 인세에서 벗어난 숲이었다. 머리 위를 온통 메우는 무성한 나무가 밤하늘에 흩뿌려진 빛들을 모조리 흡수하는 건지, 그 한 자락 닿질 않는다. 폐부 깊숙이 밀려드는 숲의 공기. 싸늘하게 속이 아렸다.

그토록 오래 달 아래 있었는데, 정작 그 달빛이 내게론 닿지 않으니 기이한 일이었다. 언제나 내리비치고 있지만, 이 어둠이 결국 나를 감싸 안고 있듯이.

============================ 작품 후기 ============================

이거 제목이 출판시엔 바뀌게될 것 같아요.

연재는 이대로 하겠지만, <검은 달무리에 젖다>로 출간될듯.

일정은 10월로 예정되어있는데 몬가 일이 또 들어와서(...)

일단 이번 달엔 요거에 집중해야지요 'ㅅ'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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