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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39화 (139/155)

00139  11. 접근  =========================================================================

“아힌.”

부인하고 싶은, 제 정체를 똑똑히 알리는 그 음성. 나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마법사에게 마법사임을 숨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때문에 그가 이 근거리에서 나를 몰라볼 가능성 따윈 없었다.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나 상대를 확인함과 동시에 내 입에서 튀어나온 건 다른 이름이었다.

“뤼비에.”

―도망쳐.

구태여 덧붙일 것 없이, 뤼비에는 내 확고한 부름에서 의도를 읽어낼 수 있었으리라. 그 뒤에 가려진 표백되어버릴 듯한 공포도. 그 역시도, 자신이 이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것이니. 뤼비에는 군말 없이 발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저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앞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얼어서 깨어져버릴 것처럼 새파란 고요.

볼품없는 마을 여관을 퇴색된 배경으로 만들어버리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마법사가 거기 서 있었다. 화사하게 반짝이는 순금의 머리카락과 녹보석의 찬연한 눈동자. 순수와 매혹이 모조리 담긴 섬세한 얼굴. 블레셋.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가 천사일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현재 실로 죽음의 천사를 목도한 듯 얼어붙어 있었다.

“이걸 우연이라고 해야 하나?”

다행히 그는 뤼비에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여유가 철철 묻어나오는 태도로 삐딱하게 선 블레셋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수천 갈래의 벼락이 머리를 내리치는 와중에도, 나는 최대한 담담하려고 노력했다. 언젠가, 이런 일이 닥치리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건 아니었으므로.

“남자와 동행한 거야? 너도 꽤 대담해졌는데.”

그새 애인이라도 만든 건가. 되도 않는 소릴 삐죽하게 중얼댄 블레셋이 내게 성큼 다가섰다. 공격과 방어, 나는 그 두 가지 무엇도 선택하지 못한 채, 아니 그 무엇도 단숨에 선택해야 할 잠시의 유예 속에서 그가 내게로 다가서는 걸 바라만 보았다.

그가 적의를 비추었다면, 조금 더 빠르게 결정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를 내가 먼저 공격하는 건, 예측을 뛰어넘어 효과적일진 몰라도 지독하게 대담한 짓이었다. 나는 그가 나보다 강한 마법사라는, 그 단순한 힘의 격차를 인지하고 있었다. 블레셋의 이 여유 역시, 그걸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떨리는 성대를 가다듬으며, 나는 최대한 차분히 물었다. 포식자를 앞둔 토끼처럼 온 신경이 경계신호를 발한다. 잔뜩 긴장한 턱이 당겼다. 그리고 블레셋은 내 위장을 순순히 보아 넘길 이가 못되었다. 그는 코앞까지 다가서 내게 고개를 숙이곤 눈을 가늘게 떴다.

“놀랐나 봐. 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들리는데.”

희롱하는 듯이 느껴지는 그 탐색에, 난 몸서리치듯 그에게서 물러났다.

“그렇게 질색하는 표정 보이면 내가 기분이 나쁘지.”

블레셋이 불쾌한 낯으로 쏘아붙였다. 그는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잠깐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한숨을 내쉬더니,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한테 발견된 게 다행인 줄 알아.”

다행이라고? 뭐가. 나는 질문을 삼켰고, 블레셋은 간격을 유지한 채 질문을 던졌다.

“그는 어디 있지?”

마치 내가 그에게 협조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듯이, 그리 묻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닐 터였다. 마스터가 있는 곳을 발설한다고 해서 블레셋이 날 살려둘 거라고 순진하게 예단한다면 너무도 안일한 것이다. 그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날 대하더라도, 그건 위장에 불과할 뿐이니.

“답할 수 없어요.”

마스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걸렸으나, 그 정도면 아주 근거리가 아니면 감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숲 속이라면 더더욱. 역시 마스터를 놔두고 오길 잘했다. 혹시 다 같이 여관으로 오다가 마주치기라도 했다면 짐이 있는 그땐 지금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았을 것이다.

난 가늠해보았다. 여기서 내가, 블레셋을 따돌리고 도망칠 수 있을까. 상대하는 게 아니라, 도주하는 것뿐이라면. 상아처럼 흰 턱을 치켜든 블레셋이 단정적으로 뱉어냈다.

“네가 마스터와 헤어졌을 리 없지. 그가 지금 상황에서 널 놓아줄 리도 없겠고.”

“그 무엇도 강제는 아니었어요.”

날 휘둘려 다니는 어리숙한 계집애 취급하는 건 사양이다. 마스터에겐 나를 강제할 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나와 거래를 했을 뿐이고, 그게 절대적인 조건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 블레셋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강제가 아니면, 차고 넘치는 동정심 때문인가?”

“……동정심이 아니라, 도리지요. 은혜고요. 제가 어떻게 마탑에 들어왔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죽기 직전의 나를 구해줬던 건 마스터였고, 그 후로 어떤 일이 일어났든 끝날 운명이었던 내 생을 이어붙여준 것 역시도 마스터였다. 부인하고 싶었을지라도, 나는 그 사실을 단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내 말은 분명히, 블레셋 안의 무언가를 자극한 듯했다.

“왜, 우리를 아예 후안무치한 배신자들이라고 말하지그래? 그가 그렇게 속삭이기라도 하든? 기껏 은혜를 베풀어 제자로 삼았는데, 우리가 감히 마탑의 힘을 탐내서 그를 배신한 거라고.”

비틀린 투로 쏘아붙이는 기세가 사납다. 압도할 만치 강력해진 마력이 온몸을 짓눌렀다. 나는 슬며시 품으로 손을 밀어 넣어, 검 손잡이를 쥐었다. 피할 수 없다면, 최선을 다할밖에. 그러나 무엇을 예비하고 있든, 난 티 내지 않으며 반박했다.

“마스터는 제게 변명하지 않는 분이세요.”

편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실이니. 마스터는 내게 저들이 악한 것이라 말한 적이 없다. 불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를 도덕의 잣대에 올려놓지 않는 자이기에. 그에게 자신의 제자들이 왜 자신을 배신했는지, 그 동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배신했단 그 사실 자체, 일어난 결과, 그걸 어떻게 돌이켜야 할지가 중요할 뿐.

그러나 그 사실을, 블레셋이 안다면 결코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나조차도 이리 아릿하게 느끼는데.

“너는 무엇도 할 수 없어. 내가 너를 찾아냈듯, 다른 시온들도 그럴 수 있고 결과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다. 그저 좀 지체되었을 뿐이지.”

회유로 돌아선 듯 나긋해진 음성이 불길한 예언을 실어 날랐다. 나는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블레셋이 모르는 걸 마스터는 알고 있었고, 그는 현재로썬 그걸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이였기에. 마탑의 힘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시온들에겐 기대할 수 없는 것.

“그런 말로는 저를 흔들지 못해요.”

일전에 요엘을 물리친 전적도 있으니 블레셋이 내가 가진 힘을 위협적으로 여겨서, 마탑의 마력을 쓸 수 없는 지금 싸움을 회피하려고 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 터. 나 역시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은 같았으나, 동시에 블레셋과 거래할 생각은 없었다.

“네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랬었다. 그리하여 내가 그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는지, 오래도록 살아온 시온들이, 전례를 본 적이 있는 그들이 전혀 모르지는 않았으리라. 얼마 전이었다면, 나는 그 질문에 몸 둘 바를 몰랐을 것이다. 거짓되거나 가장하기 어려운 마음이었으므로. 하지만 그 마음도 이제는, 다 싹 얼어붙지 않았던가. 언 표피를 어루만지듯 난 차갑고 매끈한 내 안의 한구석을 짚어보았다. 답은 어렵지 않게 났다.

“아니요.”

이제는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한때는 그랬을지 몰라도, 더는 아니었다. 나는 그 마음을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블레셋은 여전히 나를 완전히 적으로 취급한다기엔 모호한 태도를 유지한 채 말했다.

“넌 정말 멍청하구나. 난 이해가 가지 않아. 마스터가 네게 잘해준 적도 없는데 왜 그리 몸 바쳐 충성하는 거지?”

그 말엔 좀, 반론의 여지가 있었다.

“그러는 블레셋은 제게 잘해준 적이 있기나 해요? 마스터는 내 목숨이라도 구해줬지.”

“뭐라고.”

그가 날 도와준 적은 있지만, 그건 내 목숨을 노렸던 걸 되갚은 거니 별로 쳐줄 건 못되었다. 사실 다 상환이 되었다고 보기에도 어렵고. 게다가……. 나는 뒤끝 있게 묻어두고 있었던 사실을 끄집어냈다.

“남의 가슴이나 만졌으면서.”

“내가 언제!”

“제가 엘로힘을 부화시키고 기절했을 때요.”

나는 주저 없이 적시했다. 깨어났을 때, 분명히 내 가슴에 손을 얹고 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블레셋은 허가 찔린 듯 얼굴을 구겼다.

“그건 널 도우려고…… 아니, 애초에 내가 네 납작한 가슴에 흥미가 있을 리 없잖아?”

본인의 눈이 그리 낮지 않음을 강력히 주장해오는 태도에, 난 담담하게 화답했다.

“지금 본인의 발언을 되짚어보시죠.”

성희롱 수준인데? 잘해주는 것과는 어딜 봐도 거리가 멀잖아. 만담처럼 이루어진 대화와는 달리 난 제법 진지했다. 진지하게 불쾌했다. 곤경에 빠진 블레셋은 날 노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달래듯이, 뼈 깊은 말을 토해냈다.

“네가 아무리 헌신을 바친다고 한들, 되돌려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네 존재와 그를 배신한 우리의 존재의 무게가 다르지 않음을 모르겠어? 그에게 너는 고작 그 정도의 존재다. 유용한 도구, 소모품, 그걸 알면서도 충성을 다 바치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면 생채기를 낼 만큼 잔인한 진실. 그러나 나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제게 중요한 건, 마스터가 제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거예요. 또 제게 힘을 주었지요. 지금의 제 모든 것을 마스터가 주었는데 그에게 어떠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기까지 하는 것은 과욕 아닌가요?”

일견 합리적이나 나 자신마저도 납득하지 못하는 지적.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기에. 뻔뻔스럽게도 바란 적이 있었다. 나만은 다르기를. 그런 욕심이 없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내가 살아온 삶은, 이 세계의 것과 달라서 나란 사람은 순순히 새 세계에 맞춰서 굴종하기엔 부서질망정 굽히지 못하여. 그래서 나는 부서지기보단 버리는 것을 택했기에―

“……아니, 너는 모른다. 평생을 섬겨야 하는 자에게 길거리의 먼지만도 못하게 여겨지는 고통을, 그런 자에게 영원토록 종속되어야만 하는 절망을.”

다만 지나온 세월이 달라 내가 그들에게 온전히 공감하지 못하는 것 역시도, 사실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요.”

당신들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나는 적어도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 당신도 내게 이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야 했다. 녹보석 같은 눈을 바라보며, 나는 찬찬히 말했다.

“바라는 것이 있어요. 목숨을 걸 만큼, 바라는 거요. 마스터가 그걸 이뤄주시기로 했죠.”

그가 마스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의 담백한 부정과 달리, 이번의 내 목소리엔 열기가 스며 있었다. 진정 원하기 때문에. 실로 그것이 내 전부였다. 내 모든 것이 있는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 그에게 내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선 안 되었다. 아니, 누구에게도. 그걸 털어놓는다면, 내 원을 이뤄줄 순 없어도 훼방을 놓을 수도 있겠지. 때문에 나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없었다.

블레셋의 낯이 확연하게 굳었다. 차갑고 신중한 눈빛.

“너는 그가 힘을 되찾고도 네 소원을 그대로 이루어줄 거라고, 장담하나?”

말을 바꾸어, 남은 유일한 시온을 제거하려고 할 수 있겠지. 그가 힘을 준 이들이 그 힘을 바탕으로 그를 배신했으니까. 블레셋이 새겨 넣는 의혹에 난 고개를 저었다.

“마스터는 거짓말을 하시지 않아요. 그러니 제게 약속한 건, 지키실 테지요.”

============================ 작품 후기 ============================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별로 만나자마자 박터지게 싸우는 건 아님당....은 보장할 수 없지만.

블레셋에 거신 모님은 닭다리를 지키신듯(...)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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