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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38화 (138/155)

00138  11. 접근  =========================================================================

그건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라. 왜 하필, 샤자한인가. 왜 하필……. 그건 이전에 말한 것과 어긋났다. 마스터는 샤자한이 아니라 바란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걸 샤자한에 대한 배제로 받아들였지만 마스터는 그저, ‘우선은’ 바란에 가야 한다고 말한 것이었을까.

불길한 기분이 얼룩진다. 공교롭게도 샤자한의 왕은 내게 빚을 남겨두겠다고 했고, 나는 알았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 빚에 연연할 마음은 없었다. 샤자한의 왕은 그가 죽을 뻔했단 사실을 모를 것이나, 나는 알고 있었기에. 그 일어났을지 모르는 일에 대한 가책이 나를 갉아먹었다. 그건 분명히, 내가 그에게 가져다줄 수 있었던 가능성이었으므로.

왕은 내가 마탑에 쫓기고 있단 사실을 모른다. 뤼비에와 헤어지고자 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그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빠르게 동요를 가라앉힌 난 나직이 말했다.

“샤자한에는 마탑에서 파견된 룻이 있을 텐데요. 그 때문에 위험하다고…….”

“그들도 파동을 감지했을 터, 바란으로 향했을 것이다.”

명쾌한 답변. 확실히 니라야의 늪 토벌이 끝난 시점에서 룻이 무한정 거기 머물고 있을 이유는 없다. 애초부터 유인하는 걸 염두에 두었던 걸까. 나를 믿지 못해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말하는 것을 미루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가야할 곳이, 샤자한의 어디인가요?”

그래, 샤자한에 간다고 해서 굳이 왕을 만나라는 법은 없지. 꼭 왕도를 들려야 하는 것도 아닐 테고. 그리고 이번만큼은 내 바람에 충실하게, 답이 떨어졌다.

“니라야의 늪.”

“네? 거긴.”

잠시 혼란이 일었다. 어떤 마을이거나 특정한 장소일 거라고 생각했지 니라야의 늪이라니. 게다가 룻이 샤자한에 있지 않다면 니라야의 늪이 딱히 위험지대는 아닐 테지만, 장담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니라야의 늪에는 일단 괴물이 출몰하니까. 어떤 식으로든, 마법을 쓸 일이 생길 수 있겠지.

“니라야의 늪으로 가려면…….”

난 대략적인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뤼비에는 우리가 바란에서 남서쪽으로 이동했을 거라고 말했다. 바란은 샤자한의 동남쪽, 니라야의 늪은 샤자한의 서쪽에 있으니 그럭저럭 가까워진 상태. 그러나 샤자한의 크기를 생각하면, 우리가 샤자한의 영토를 가로질러야 한다는 건 변치 않는 일이다.

“우선, 여기가 어디인지 확실히 알아야겠군요.”

이라칼을 만나서 다행이었다. 그와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그에게서 그럭저럭 여행 요령을 배웠고 그때보다 마스터도 체력이 늘었으니까 둘만의 여행이라고 해도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마탑의 추적이 가까워진 지금, 그들을 피하는 것보다 더한 어려움은 없겠지만.

마스터와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곧 돌아온 뤼비에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숲도 이제 끝이 보이고 있었기에, 뤼비에와의 이별도 한달음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드디어 인적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양 빽빽하게 우거져있던 나무들도 간격이 조금씩 벌어졌고, 군데군데 잘려나간 나무밑동이 눈에 띄었다. 아주 가까이는 아니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오가는 인기척도 느껴졌다. 그러나 되도록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아야 했기에 우리는 부러 그들을 피해서 이동했다.

오후 무렵, 드디어 마을이 목전까지 가까워졌다. 언뜻 색색의 지붕 옹기종기 모여있는 게 보였다. 불어오는 바람 따라 부산한 움직임과 넘쳐흐르는 생기가 전해진다. 작은 시골 마을. 저기서 여행 준비를 해야겠지. 앞으로는 거의 야영을 할 거고 일정도 고단할 테니 구할 수 있는 건 다 구해가야 했다.

걷는 것보단 역시 뭔가를 타는 게 낫겠지. 말이라……. 나야 어떻게든 탄다고 쳐도, 마스터가 말을 탈 줄 아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잠자리도 필요하니 수레도 구해보는 게 좋겠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내게 뤼비에가 불쑥 말을 걸었다.

“제가 마을의 동태를 살피고 오겠습니다.”

“그래.”

난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르니 그가 한 번 둘러보고 마을에 다 같이 발을 들이는 게 날 것 같단 판단이었다. 뤼비에는 흔쾌히 떠났고, 나와 마스터는 눈에 띄지 않는 덤불 근처에 앉아,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앞으로의 여정을 그려보며 무료함을 삭이던 한 시간…… 두 시간. 기다리는 시간이 차츰 길어지자 난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늦게 오는데? 마을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 마을 쪽을 기웃거리던 것도 잠시, 언뜻 보기에도 평온하기만 한 분위기에 불안해진 마음은 곧 불신으로 뒤바뀐다.

내가 너무 섣불리, 그를 보내주었던 건 아닌가. 뤼비에는 내 편이 아니다. 그가 내게 어떤 말을 속삭였을지라도. 다정한 한 마디로 내 마음을 사고, 혹하게 하여 의심을 불식시킨다. 그리고 마을에 이르렀을 때 떠나가 우리의 소재를 알려주는 걸 조건으로 마탑에 거래를 건다. 그가 말한 게 진심인지, 진심을 가장한 연기인지 나로서는 알지 못하나 능히 그리할 수 있는 자였다.

그는 흑마법사잖아. 그가 어떤 사람임을 연기했건, 나는 그가 말해준 내용만을 들었을 뿐 실제로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지탄받아 마땅한 짓도 감수하는 그 열망은 얕볼만한 것이 아니었다.

싹튼 의심은 순식간에 불길처럼 번져나간다. 실상 누군가를 의심하는 건 내게 그토록 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줄곧 뒤통수를 맞아왔었기 때문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도 여기서 불안에 사로잡힌 채 기다리고만 있는 것보단 나으리라.

“그가 너무 늦는군요. 마을에 가봐야겠어요.”

몸에서 풍기는 미미한 마력. 일반인은 모를 것이나 마법사라면 감지할 만하겠지. 혹시 모르니 마스터까지 동반하기보단 나 혼자 움직이는 게 나을 터였다. 이 인근은 마을 주변이라 어차피 위험한 일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아주 아이도 아니니 제 몸 안전쯤 챙길 수 있겠지.

마스터는 날 보던 눈을 그대로 내리감았고,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마스터는 그간 뤼비에와 내가 어떤 상의를 나누든 개입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렇고, 뤼비에가 식량을 구하러 나설 때도 전혀 터치하지 않았다. 그건 뤼비에를 믿고 있단 느낌과는 달랐다. 마치 이제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마탑에 흔적이 드러나는 걸 저지하고자 마을 주민을 몰살하자고 말한 자다. 봉인을 푸는 것을 앞두고라도 방심하지 않을 사람이건만, 이 놓아버린 듯한 담담함은……. 그 점이 기이하긴 했으나, 마스터가 관여하지 않는 쪽이 심적으로는 더 편한 터였다. 급한 건 내가 아니니 뭔가 생각이 있겠지.

나는 바로 자리를 떴다. 숲을 지나는 동안 충실하게 보온역할을 해주었던 붉은 로브를 접어 넣고 마을 입구로 다가섰다. 경비를 서던 청년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물어왔다.

“처음 보는 아가씨인데, 어디서 오셨죠?”

“오면서 흘린 게 있어서 다시 갔다 왔어요. 일행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고단한 척 미간을 찌푸리며 마스터가 준 목걸이를 들어 보이자, 실상 그의 질문엔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청년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는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면서 친근하게 덧붙였다.

“불편한 거 있으면 얼마든지 이야기하십시오!”

종일 여기를 지키고 서진 않을 테니 아마 그가 근무하지 않는 시간에 들어왔나 하고 편하게 생각한 것 같다. 태연하게 안으로 들어서려던 난 그가 뤼비에를 봤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서 불쑥 물었다.

“혹시, 이런 사람 못 보셨나요?”

외양을 조금 바꾸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말투가 차분하고 조금 마른 체격의 청년이라고 대강 덧붙이기 무섭게, 그가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봤죠. 봤고 말고요. 그런 사람이 한 명 있었죠. 일행이신가요?”

“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아시나요? 좀 헷갈려서요.”

“일행분이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은 못 봤습니다만, 여관을 찾으시더군요. 길을 따라 쭉 들어가시면 되는데…….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고마워요.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에, 그럼!”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청년을 다급히 거절한 난 멈추었던 발길을 움직였다. 그래, 마을에 들어서긴 했단 말이지. 뭔가 일이 있어서 늦은 걸지도 모르겠다. 흥미가 돌면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성미 같으니.

이제껏 이곳저곳 여관을 전전한 탓에 아마 이 작은 마을에서 하나뿐일 여관이 어디에 위치해 있을진 짐작이 되었다. 가는 길에 혹시나 싶어 수배전단이 붙을 만한 위치를 살펴보았지만, 험상궂은 얼굴이 나열된 자리에 우리 일행의 얼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날 쳐다보는 것도 호기심 어린 시선에 불과할 뿐 딱히 경계심이 어려 있진 않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되는 것도 이제 내겐 퍽 익숙한 일이었다. 긴장을 놓지 않으며 나는 대로를 따라서 쭉 걸었다. 줄줄이 가게를 지나 십여 분쯤 지났을 때, 마을의 건물 중 가장 큼지막한 편에 속하는 3층 건물이 보였다. 침대 그림이 그려진 간판이 달린 걸로 보아선 제대로 찾았다. 금방 문 앞에 다다른 난 별생각 없이 여관에 들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뒤에서 누군가가 날 불렀다.

“아힌 님?”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그 자리엔 어김없이 뤼비에가 서 있었다.

“혼자 오신 겁니까.”

“그래, 왜 이렇게 늦은 거야? 기다리다가 못해 찾으러 왔다고.”

여유로운 표정의 그와 마주한 순간, 의심은 씻기고 슬며시 짜증이 솟아올랐다. 뤼비에는 태연자약하게 손에 쥔 물건을 들어올렸다.

“뭐, 사정이 있었습니다. 지도를 구해보려고 했는데, 잡화점엔 없고 이 마을에 가끔 들리는 상인이 가지고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마침 곧 들를 예정이라기에 이것저것 물을 겸해서 좀 기다렸습니다. 예상보다는 조금 오래 기다려야했지만요.”

그는 내게 지도 하나를 내밀어 쥐여 주었다. 품에 넣으려는 찰나 그가 손을 내밀었다.

“공짜는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까 사정이 그리 넉넉지 않다고 했지. 뭔가 강매 당하는 기분이 든 난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런 면에서 칼 같은 건 퍽 뤼비에다운 일이었다. 금화 하나를 꺼내주자 뤼비에가 냉큼 받아서 품에 넣었다. 난 지도를 품에 넣으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 특별히 이상한 건 없었지?”

“예, 며칠 머무르다가 떠나도 될 겁니다. 그분을 모셔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근데 여관으로 가서 방을 잡아두려던 거 아니었어?”

나는 여관 쪽으로 손짓해보였다. 그러나 뤼비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는 저쪽에서 아힌 님의 뒷모습을 보고 따라왔을 뿐입니다. 이런 시골에선 방이야 항상 있을 테고, 따로 선택지는 없을 듯한데요.”

“어? 마을 경비가 분명히…….”

누군가가 여관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고 했는데. 후드를 눌러쓴 마른 체격의 청년……. 의아해하는 나를 향해 뤼비에가 딱 잘라 말했다.

“제가 들어올 땐 경비가 졸고 있더군요. 그는 저를 보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도, 마을에 들어선 다른 여행자가 또 있었던 모양이다. 우연히도 비슷한 시간에.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예감이 스쳤다. 기우일지도 모르나, 나는 이 예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불시에 물밑에서 솟아난 괴물이 덮쳐오듯 강력했다. 뤼비에에게 일단 자리를 뜨자고 말할 참이었다.

삐그덕, 뒤에서 문이 열렸다. 훅 끼쳐온 바람이 향을 실어 나른다. 언젠가 맡아본 적 있는, 서늘한 한 자락의― 동시에 난 테두리를 매만지듯 그 기척의 정체를 그려냈다. 어떤 형태로 서서, 어떻게 호흡하고, 어떤 눈으로 나를……. 또한 그 강대한 마력, 이리도 가까이에!

전신에서 피가 스멀스멀 빠져나가는 듯했다. 나는 결코, 몰라볼 수 없었다. 마침내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힌.”

============================ 작품 후기 ============================

두두두두둥!!!

누굴까요?

조아라에서 로판컨테스트라는 걸 하는데.... 로맨스판타지라는 장르도 생기고 참 감회가 새롭네요.

아, 저는 참여안해요.

좋은 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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