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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37화 (137/155)

00137  11. 접근  =========================================================================

괴괴한 어둠이 괴여 있는 숲이었다. 무성한 나뭇잎이 하늘을 가리고, 인적 드물어 짐승의 울음이 간헐적으로 귓전을 울리는 곳. 예전의 나였다면 필경 두려움에 떨었을, 숨 막힐 만치 짙은 어둠 속에서 우리는 잠시 발길을 멈추고 있었다.

속도를 내어 쉼 없이 걸은 덕에 평원을 지나 밤이 될 무렵 우리는 이 숲에 이르렀다. 뤼비에가 ‘조금 쉬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까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정적 속에서 나는 다만 걸었다. 그저 타성적으로 걷는다는 이 단순한 행위에 모든 신경을 쏟아 부었다. 기실 그 집중은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그 모든 불편하고 복잡한 상념에서 한시나마 벗어나기 위해서.

뤼비에가 꺼낸 듯한 작은 마법구에서 나온 빛이 은은하게 발밑을 적신다. 간신히 시야를 확보할 만한 밝기다.

한 차례 태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머리가 맑았다. 그러나 맑다는 건 물결을 흐리는 그 무엇도 미치지 않는 정지된 수면이라는 것. 수 없이 뻗어나가야 할 생각은 갈래길의 입구에서 뱅뱅 돌며 뇌가 멎어버린 양 어디로도 흘러가지 않는다. 고인 듯이 진득한 괴로움이 낮은 강도로 점멸한다. 존재하나 배가되지 않기에 견딜 수 있다.

믿음과 기대를 배신당하는 건, 익히 겪어왔던 일. 새삼 이러는 것도 우스운 일이건만,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한순간의 충격으로 몰아낼 수 없다. 당신이 내 안의 무언가를 부수었음은 자명하다.

나뭇등걸에 걸터앉아, 나는 막연히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납작한 돌 위에 앉아 명상하듯 가만히 눈을 내리감고 있는 이 아름다운 소년을. 이전보다 자라난 그는 아이와 어른의 중간 태를 입고 있다. 일견 소녀처럼 보이는 호리호리한 골격, 중성적인 모호함. 불변한 것은 그 아름다움. 빚어낸 인형보다 더 정교하고, 섬세하며, 그 어느 곳 하나 모난 데가 없다. 완벽한 칠흑색 눈동자와 심연으로 빨려드는 듯한 존재감.

그것이 원래의 형이 아니라도, 인간의 모습을 취한 마스터는 그의 사악함만큼이나 아름답다. 차가운 쇠붙이로 만들어진 그의 심장은 나약하거나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상 따윈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그에겐 단 한 번의 열기도 그어지지 못했으리라. 때문에 그가 사람일 리 없다. 그리고 얼음은 녹일 수 있어도 사람이 아닌 것에 마음을 불어넣는 건 불가하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사람이길 바랐기에, 그 바람을 뿌리칠 수 없기에 어리석었다. 그러나 난 아무래도, 그리 단단한 이는 못 되었던 듯하다. 모루에 올려놓고 힘껏 두드리다 보면 그 모양이 변하듯, 연달아 내리쳐진 충격이 마침내 나를 변화시킨 걸까.

당신은, 내가 곁에 없어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남지 못하겠지. 그것이 새삼 가슴 아프지는 않았다. 도리어 후련하다. 끊어내야만 하는 미련의 고리를, 이젠 정말로 끊어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이제 마력이 느껴지는군요.”

문득, 뤼비에가 입을 열었다. 마법사라면 자연히 느낄 만한 것이었다. 균열이 인 그릇에서 물이 새듯, 옅은 마력이 마스터의 몸 주위를 안개처럼 감돌고 있었다. 이전까지, 마스터에게서 전연 느껴지지 않았던 그 마력이.

내가 바로 곁에서 마력을 행사했기에, 그 파동이 그의 봉인에 영향을 미쳤던 걸까. 그래서 그의 모습이 변한 걸까? 뒤늦게 의문이 찾아들었다. 뤼비에는 마스터를 직시하던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어디로 가실 계획이십니까.”

……다음 계획은, 세 번째 조각을 찾아 마스터의 봉인을 푸는 것. 세 번째 조각은 유귄이 가지고 있으니 그와 합류해야겠지. 그러나 마탑에서도 종적을 파악하지 못한 그와 어떻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 나는 힐끔 마스터를 보았다. 그건 마스터와 이야기를 나누어봐야 할 터였다. 나는 몇 번 마주친 것을 제외하곤 유귄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이전에 할 일이 있었다.

“우선 숲을 가로지르지요.”

딱히 답을 내지 않는 내게 뤼비에가 먼저 말을 던졌다. 그는 가벼운 투로, 수목의 종류와 이동마법의 방향으로 추론해낸 대략적인 이곳의 위치에 관해서 설명했다. 추적을 뿌리치기 위해선 숲을 지나며 자취를 흐리게 하는 게 낫단 것도. 난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고, 새벽이 되자 앞장선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도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우리는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근처에 있는 허름한 오두막을 찾아냈다. 먼지 쌓인 안쪽에서 잡동사니를 몰아내자 그럭저럭 세 사람이 쉴 공간이 나왔다. 어차피 오래 걸었으니,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비가 조금 잦아든 틈에 뤼비에는 불을 피우는 건 곤란하니 뗄 것은 그렇다 치고, 먹을 건 없을까 인근을 둘러보겠다고 나섰다. 고강한 마법사는 인체마저도 강인하다곤 하나 바란에서 마법을 많이 사용한 터, 뭐라도 먹긴 해야 할 거였다. 마력이 조금쯤 돌아왔으나 그래봐야 미미한 수준인 마스터도 먹고 쉬지 않으면 체력이 바닥날 건 분명했다.

그러나 시계가 분명치 않은 숲 속에서 그 혼자 뭔가 구해오는 건 힘겨울 것이다. 게다가 나는 마스터가 없는 곳에서 뤼비에와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마스터, 잠깐 계시겠어요? 저도 식량을 좀 구해볼게요.”

이전이었다면 아무리 마력이 조금 회복되었고 오두막이 허름한 것치곤 벽면이 꽤 튼튼한 듯하다지만, 마스터를 홀로 두고 나가지는 못했을 텐데. 그를 놔두고 가겠단 말이 놀랍도록 쉽사리 흘러나왔다. 싸늘해진 마음이 내게 어떤 염려도 남기지 않는 걸까. 마스터는 살짝 고개를 까닥였고, 난 곧바로 오두막을 박차고 나와 뤼비에를 찾았다. 그리 시차를 두지 않고 따라나섰기에 곧 그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뤼비에!”

“예, 함께 가시겠습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하는 그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던 듯하여 조금 긴장이 되었다. 침을 삼킨 난 어떤 식으로 서두를 꺼낼지 고민했다. 내가 고민하는 와중에도 그는 처음의 목적에 충실하여 버섯이며 야생 고구마 같은 것을 캐냈다. 다행히 육포가 조금 있다니, 곁들여 먹으면 좋을 것이다.

멀거니 뤼비에의 행동을 보고만 있던 난, 그가 이제 다 된 것 같다고 말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저, 나 할 말이 있는데.”

“저도 있습니다.”

바로 딱 잘라 치고 들어오자, 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뭐야, 할 말이 있다고? 뤼비에는 내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침묵만이 이어져서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단 것을.

“제가 먼저 말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뤼비에는 어떤 말을 할지 가늠하는 듯했다. 아니, 할 말은 분명하되 어떤 식으로 표현할지 고민하고 있단 게 맞으리라. 그리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을 듣는 순간,

“당신은 옳은 일을 했습니다.”

……실로 의외의 말이라 순간 말문이 막혔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도통 알 길이 없다.

“무슨 소리지, 그건?”

“당신은 바란의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그게 옳았다고, 저는 말씀드리는 겁니다.”

“……왜 그런 말을 해. 당신은―”

정작 그는, 어떻게도 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수긍했으면서. 마스터에게 동조했으면서. 불현듯 깨달았다. 나는 그걸 동조라고 느꼈던 걸까. 원망이나 비난이 튀어나올 것 같아, 난 입술을 깨물었다. 뤼비에는 나를 바라보며 그 침착한 눈빛 그대로,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 할 수 없는 일, 제가 외면한 일을 했다고 해서 당신의 옳음을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

“자신의 안위보다 타인의 생명을 생각하는 이타심은 어떤 말로도 훼손당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제 알량한 죄책감을 불식시키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당신의 행동이 저를 감동시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당신…….”

“예측건대, 수없이 부딪치며 닳고 부정당했을 것이나 그래도 당신은, 당신 그대로 오롯하군요. 분명히 당신은 마탑과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만, 그것이 당신을 낮출 수 없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상하지. 내가 몸담은 곳은 마탑인 데, 나를 지지해주는 건 탑 밖의 사람들이란 게. 그는 순전히 말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지만, 그의 의도가 어찌하든 위로로 느껴지는 건 사실이니. 나는 애써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잘라내야 할 한때의 인연 앞에서, 의존하듯 눈물을 보이는 건 나를 약하게 할 뿐이라. 나는 약해져서도 무너져서도 안 되기에.

어차피, 곧 헤어질 인연이었다. 심호흡하며 감정을 추스른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 떠나.”

궁금한 게 많을 테지만, 말해줄 수 있는 건 달리 없다. 이미 그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드러냈다. 그래서 모든 힘을 찾았을 때, 마스터가 그를 살려둘지조차도 모르겠다. 내가 떠난 후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이라도 도망칠 기회를 주는 게 낫겠지.

필요에 의해서 그와 함께했던 건 사실. 확실히 뤼비에는 유용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함께하는 게 편하겠지만, 나는 더 이상 누군가를 위험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혹여 우리에 대한 호기심에, 그가 알고서 감수할지라도.

“당신들을 추적하는 건 마탑이겠지요.”

그건 물음이 아닌, 확신.

“마탑의 추적이라면 가히 위협적이겠군요. 당신의 걱정은 이해할 만합니다. 제 안위 역시도 소중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으니.”

깔끔하게 납득한 듯하면서도, 그는 웃음기 섞어 쾌활하게 말했다.

“당장은 이 숲을 벗어나고 다음 마을에서 헤어지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낯선 나라, 향방을 정하는데 그만한 길잡이가 있다면 확실히 도움이 되겠지. 나 역시 거기까지 거절하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정이 좀 들었나 보다. 미미하게나마 아쉬움이 드는 걸 보면. 그는 내게 호의적이었다. 그리고 내게 호의적인 이들을 멀리해야 하는 건 씁쓸한 일이었다.

오두막으로 돌아오고 나서, 나는 마스터에게 유귄에 대해서 물을 기회를 골랐다. 기실 난 이제껏 마스터와의 대화를 기피하고 있었다. 또다시 부딪쳤다간 내가 도저히 참아내지 못할지 몰랐기에, 파국을 피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묻지 않고 걸음만 이어갔다.

그러나 어떤 기분을 느끼건 간에, 나를 돌려보낼 단서와 능력을 쥐고 있는 건 오로지 마스터뿐이었다. 그것은 마스터에게 있어서 가장 확고한 무기이기도 했다. 그러하기에 나로선 그 어떤 것이든, 견뎌내야 한다. 이제는 거의 진정된 듯하니 흥분하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

서너 밤이 지나고, 이 숲도 슬슬 끝에 다다를 무렵 또다시 뤼비에가 먹을 것을 찾으러 떠났을 때, 나는 망설임을 끝내고 대화를 시도했다.

“유귄이 세 번째 조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에게 얘기해놓으신 게 있나요? 어디서, 어떻게 만나야 할지에 대해서요.”“그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지 안다. 그가 찾아올 것이다.”

“언제요? 구체적으로 시기가…….”

“그 스스로 짐작해야 할 터, 바란의 결계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유귄 또한 움직이겠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데요?”

마스터는 잠시 대답을 미룬 채 나를 응시했다. 흡사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 검은 유리에 빛이 비치듯, 옅은 광채가 어른거리는 눈이었다. 그는 잠시 후 짤막하게 토해냈다.

“샤자한으로.”

============================ 작품 후기 ============================

킨뿌뿌님 서평 감사합니다!

페어리 레이디 런칭일자가 미뤄졌어요 8월이라고해요. 그래서 그동안 검달을 좀더 쓰기로...

이번 장에서도 쓰고싶은 장면이 있어요 ㅎㅎ

ㅎㅎㅎ...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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