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6 10. 바란 =========================================================================
아마도 마스터는, 지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초월적인 무언가. 가장 강력한 마법사이며, 동시에 마법생물들의 왕이라 불리는. 그러나 불완전하기에 배반당하여 봉인되었고, 지금 이 자리에 옛 힘을 되찾으러 왔다.
그의 불완전함이 스스로의 힘을 나누어 마탑을 세움으로써 초래된 건지 알 수 없는 노릇. 아니, 도리어 진즉 발견된 불완전함을 보완하려다 이렇듯 흘러오게 된 것이, 사리에 맞는 것이리라. 의도보다는 필연으로 행동하는 이이니. 이라칼은 본능으로 마스터가 자신의 왕임을 알아봤지만, 인간이며 이세계의 사람인 내게 그런 본능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고력 하나만을 가지고 마스터의 정체를 알아내기엔, 내 앎 역시도 미흡했다.
불가사의를 품고서 마스터는 느릿하게 구를 향해 다가갔다. 그 작은 어둠이 구와 맞닿은 그때, 이 세계에 존재하던 작은 태양이 대기에 먹혀졌다. 불시에 빗줄기가 불씨를 꺼버린 듯 잦아든 빛. 금색으로 물든 사위가 일순 무채색으로 변모한다. 동시에 작은 형체가 마스터의 손 위로 다소곳이 올라앉았다.
마스터가 내게로 돌아선 순간, 나는 그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펜던트. 그 작은 몸체에 마력을 한가득 품은. 마법적 문양이 돋을새김 된 주먹만 한 펜던트에는 목에 걸 수 있도록 긴 줄이 달려 있었다. 회수한다지만, 어차피 마스터로서는 현재 흡수할 수 없는 힘. 내 검이 그러하듯 형태를 갖추게 하여 거둔 것이리라. 그러나 무기체에 형태를 부여하는 그 구현은 허공에서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실로 이적을 보는 듯하였다.
“네가 보관하거라.”
나는 반쯤 홀린 상태로 펜던트를 받아들었다. 애초에 내게 줄 생각이었는지 목에 거니 딱 적당한 길이로 떨어졌다. 이걸로 된 건가? 이제 나가서 이라칼과 합류하기만 하면.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고 안도하는 찰나였다.
“이건.”
일순 발밑이 흔들렸다. 진동이 전파되어, 땅속까지 흔드는 듯이. 가상의 하늘에 균열이 일었다. 파삭. 파사삭. 단단한 과자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잿빛으로 변한 나뭇가지가 부스러졌다. 재가 되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스러진 입자마다 공기 중에 녹아들며 사라져 간다. 그것은 소멸.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마력으로 형상을 유지하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래, 이곳은 마치― 몽환의 미로 같았다.
그렇다면 결과 역시 동일하리라.
“빠져나간다.”
마스터는 지시하듯 뤼비에를 향해 고갯짓했다. 어느덧 다가선 그가 눈을 찌푸리며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붕괴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으므로, 유적은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때문에 말을 나눌 여유가 약간은 있었다. 그러나 정작 뤼비에의 의도는 이 특별한 경험을 만끽하며 여유를 즐기는 데 있지 않았다.
“유적을 지탱하는 마력이 거두어졌으니 이곳은 붕괴하겠군요. 그러면―”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 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지면 아래 공동이 생기면, 어떻게 되지.”
물음엔 물음으로. 별생각 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난 순식간에 답을 떠올려냈다. 싱크홀. 꽉 채워 지탱하던 마력이 사라졌으니, 이 느짓한 붕괴가 급물살을 타면 공동은 단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지면에 있던 것들이 그 자리를 채우겠지. 그리고 이 유적의 크기가 작지 않다면 그 영향력은―
섬뜩한 기분이 치달았다. 너무도 큰 것을 놓치고 있었다. 그 자각이 아찔하여, 손이 떨린다. 그야말로 재앙이다. 나는 왕 덕분에 결계가 사라지면 바란이 전쟁을 겪을 것을 알았다. 거기까지 예비했다. 그러나 이 바란 자체가 붕괴한다면―
그 모든 건 헛된 일이지 않겠어?
“이 유적은, 바란 전역에 걸쳐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스터는 고요히 반문했다. 무시하지 않고 응답하는 것마저도 친절하게 느껴지는 자다. 네가 그것을 막을 수 있는가. 혹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 그리 묻는 듯한 눈이었다. 아니, 마스터가 진정 그 말을 하고 싶은 건 그가 아니라 나이이라. 뤼비에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스쳤다. 체념 섞인, 씁쓸한.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이루어질 희생이라면 감내한다. 이미 막을 수 없는 일. 지독하리만치 이성적으로 한계를 인지하고, 받아들인다. 그게 어떻게 그리 칼로 자르듯 간단하게, 가능해지는가. 뤼비에는 나보다 더 마탑의 마법사다웠다.
그리고 포기할 줄 아는 현명한 그와는 달리, 나는 현명하지 못해서. 그리고 뭔가를 더 할 수 있어서―
난 펜던트에 손을 가져갔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깨닫는 건 본능과 같았다.
“아힌.”
경고하는 시선이 차갑다.
“마력을 쓰는 것을 금한다 말했다.”
나는 얼어붙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취하든 그렇지 않든, 당신은 역시 끔찍하다. 인간도 아니고 뭔지도 모를 존재에게 동정심을 기대하는 건 무의미한 짓. 타인에 대한 존중을 배제한 체 휘둘러지는 힘은 그토록 악한 것이다. 난데없이 도시가 붕괴하는 재앙, 거기에 희생될 사람들, 그 처참한 광경이 눈에 선한데 나보고 알고도 모른 척하라고?
……당신에게 새삼 배신감을 느끼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내가 무엇에 연연하는지 알면서도, 내가 어찌 느끼든 아무래도 상관없었겠지. 당신은 나와 협상을 끝냈고, 돌아가기 위해선 내가 당신을 버릴 수 없단 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 한 도시의 멀쩡한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일지라도, 내겐 아니었다. 내겐 그 목숨의 무게를 짊어질 비정함이 없었다. 비록 그것이 나를 위험하게 하더라도. 그조차 감수하는 것이 나의 최선.
어차피 사실을 안 시점에서 선택은 정해져 있었기에, 난 망설임 없이 펜던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속은 부글부글 끓는데 머리는 신경이 마비된 듯 차가웠다.
“아힌.”
마스터의 목소리에 서리가 맺혔다. 자신에게 거역하는 것을 용납지 않는 마스터다. 부름에 화답하듯 난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이 힘은 그의 것이나, 마스터에겐 날 막을 힘이 없었다. 그러니―
이미 해본 적 있는 일이기에, 두 번째는 쉬웠다. 주인의 의사에 반하여 펜던트의 마력이 물밀 듯이 내게로 밀려들었다. 뤼비에가 말했듯, 주인이 정해진 힘. 그러나 나는 그 주인 된 자의 권속이며 익히 다루어본 속성의 힘이니. 어, 그런데?
불현듯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달랐다. 어째서 나는 허락 없이도 이 힘을 쓸 수 있는 거지? 심지어, 마스터가 금지했는데도 불구하고. 누구도, 마스터를 봉인한 마탑의 시온들―나와 비할 데 없이 고강한 마법사인 그들조차도 불가능한 일일진대.
밀려드는 마력의 기세가 노도와 같아 버거웠기에, 의혹은 단숨에 불식되었다. 더 이상 뇌리에 무엇도 담아낼 수 없었다. 그저 깨닫는다. 마스터가 이 형체 없는 힘에 형체를 부여했듯, 나는 이 환상 같은 세계를 실체로 바꾸어낼 수 있으리라. 마법은 의지를 따르니, 이전의 황금 숲을 그대로 그려낼 만치 섬세한 조정이 불가하더라도.
부서지던 세계가 순식간에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흐르던 용암이 굳어버리듯 급진한 변화. 바란이라는 한 도시의 무게를 견뎌낼 만큼 튼튼하게, 빈틈없이 메꿔진 지반처럼. 나의 바람은 명확했고, 명확했기에 마법의 행사는 어김없이 이루어졌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힘. 나는 새로운 세계의 구성을 전신으로 느꼈다.
어느 순간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이만한 마력을 발해본 건 오랜만이라, 몸이 욱신거린다. 뜨겁게 달아오른 펜던트에서 손을 떼어낸 난 내가 한 일의 결과물을 감상했다. 잿빛의 동굴 안에 들어선 듯 아까의 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래위 전부가 다 회색이었다. 군데군데 굵직한 기둥이 들어서서 천장을 지탱하고 있었다. 역시 내가 도시 출신이라서 인가. 이건 꼭 시멘트 같군. 좀 더 보기 좋게 만들었다면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이게 내 상상력의 한계인 듯싶다.
“이곳을 떠나야 한다.”
나직한 울림이 들려와 난 고개를 움직였다. 이전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어라? 열 살배기에 불과했던 마스터가 다섯 살쯤 더 먹은, 훌쩍 커진 모습으로 거기 서 있었다. 어린애에서 청소년이 된 정도의 변화.
내가 한 일이 뭔가 영향을 미쳤던 걸까. 놀라움은 아주 미미했다. 기실 한 차례 충격을 겪어낸 가슴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기에 그리 동요하지 않은 것이리라.
질책보다 용무가 우선. 내가 그의 명을 거역했음에도, 마스터의 차분함은 변치 않았다. 그리고 그의 명을 거역한 나 역시도,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뤼비에.”
“예.”
경이 어린 시선으로 내가 만든 세계를 관찰하던 뤼비에가 재빨리 부름에 응답했다. 지체 않고 떠나야 한다. 내 눈짓에 그가 내게로 붙어섰다.
“바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지.”
마스터가 무엇을 우려하고 있는지 안다. 지금은 이라칼과의 합류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왕과 다시 만나길 바라지 않는 것과 유사한 이유로, 이라칼과 멀어지는 게 더 바람직하기도 하고.
“잠시만.”
뤼비에가 주문을 읊조렸다. 워낙 대기에 마력이 충만한 탓에 마법이 완성되는 속도는 빨랐다. 뤼비에의 마력이 바람처럼 불어와 발밑부터 머리까지 쓸고 지나갔다. 저항하지 않고 그 마법에 몸을 실었다. 돌풍이 인 자리가 깨끗해져 먼지조차 남지 않듯, 우리가 떠난 자리에 아무 흔적도 남지 않길 바라면서.
이름 모를 평원, 작달막한 초목 사이에 선 나는 보이지 않는 바란 쪽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떠나온 방향을 감지하는 데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뚜렷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파동. 그 흔적. 이걸 몰라볼 마법사가 있을까?
그토록 마력의 밀도가 높은 곳이니, 이동마법의 자취를 추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단서를 주었으니 위험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높아졌다.
“네 어리석음이 그들을 여기에 이르게 할지도 모른다.”
마스터가 그 검은 눈으로 나를 질책했다. 난 굳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격한 끓음은 싹 가라앉고, 빙하처럼 가슴이 시렸다. 내 안에서, 뭔가가 무너져 내린 듯했다. 이 무너짐을 겪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나는 도무지 참지 못해, 내 뜻대로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마모되다 보면 결국 사라져버리듯 무너져 내림에도 끝이 있었던 걸까.
이젠 정말, 보답 받지 못할 마음 따위, 버릴 수 있는 기분이다. 내 안에 냉기가 스며든 듯이 간절하도록 날 사로잡았던 그 마음이 더는 뜨겁지 않았다. 도리어 공허했다.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내 음성이 낯설도록 메마르게 고막을 울린다. 마스터와 결부되어 수없는 단상이 뇌리를 스친다. 아카일에게 협조를 구하며 일부나마 진실을 드러낸 걸 내버려둔 까닭은, 어차피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을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은 마스터이니, 이보다 깔끔한 방법이 어디 있었겠어. 내게 협력한 대가가 죽음이라니.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지만, 그게 이루어질 수 있었단 생각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역하다. 치미는 들끓음. 내게 있는 뜨거움이란 이제 이런 것뿐이다.
“우선 자리를 피하지요.”
대치를 깬 것은 뤼비에 쪽이었다. 알 수 없는 눈빛. 본 것만으로도 무수히 많은 가정을 세울 수 있는 그이니 우리의 짧은 대화를 통해 뭔가를 읽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을 노릇. 그는 다만 짧게 덧붙였다.
“저 역시, 쫓기는 몸이니까요.”
마탑의 마법사가 왜 쫓기는지, 그는 굳이 묻지 않았고 나 역시 설명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공조가 이루어져,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이동을 시작했다.
이라칼과 헤어지고, 이제 단 세 명. 더욱 단출한 일행이 되어버렸다. 목숨을 위협할 만한 추적자를 둔 도망자들. 사연은 다르나 닮은 데가 있는 처지였다. 어디까지 함께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으로썬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도.
바란에서의 여정은 그렇듯 끝이 났다.
============================ 작품 후기 ============================
챕터종료.
저한테 뭘 기대하셨....이런 걸 쓰려고 했었지요 ㅎㅎ
아 또 쓰고싶은 장면이 있어요. 아마도 머지 않아...
자주 와서 놀라셨지요?
죽을 때가 된건 아니고 출판사에서 쪼고있어서...(?!)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