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4 10. 바란 =========================================================================
“이리와, 펠.”
엉망이 될 뻔한 표정을 추스르며 난 누나인 척 마스터를 잡아당겼다. 이조차 무례한 일이었지만, 마스터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하다. 순순히 끌려온 마스터를 등 뒤로 감춘 난 조금 전 있었던 대화를 마스터가 들었다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서 고뇌했다.
적어도 내가 마스터를 짐이라고 표현한 건 들었을 거 같다. 하지만 남매관계인 척하고 있으니 동생에 대해서 그 정도는 투덜댈 수 있지 않으려나? 난 곧 그 고민이 퍽 쓸모없단 걸 깨달았다. 섣불리 그에게 도움을 구한 게 더 질책받을 만할 터였다.
그러니까, 무례가 아니라 왕에게 도움을 구했단 자체가 문제. 또 그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눈 것도 문제. 하지만 그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왕의 협조를 구할 수 있다면, 그 문제는 문제가 아니게 된다. 마스터는 그렇게 상쇄할 것이다.
“이제 대답해주세요.”
난 요구했고 왕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대의 말대로, 바란이 존속하는 것이 샤자한의 대의와 부합하는 듯하군. 또한, 나로서도 빠르게 이 일을 해결하고 싶은 터. 그대가 반역자의 행선지를 알려준다면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겠지.”
“그러면…….”
“단,”
또 무슨 사족이 붙어? 난 슬쩍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는 엄연히 샤자한을 위함이다. 그러니.”
빚은, 그대로 남겨두겠다고, 그 뜻인가. 굳은 의지를 담은 눈이었다. 그것이 그의 호의였고, 난 받아들여야 한단 걸 깨달았다. 내겐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구태여 입 밖에 내지 않음은, 나 스스로 낸 긍정을 듣고 싶기에. 평생 당신을 나처럼 뿌리치려는 이도 몇 없었을 것이다. 돌아가야 한다는, 단 한 점의 목표에 몰두하여 양옆이 흐려진 양 곁눈질 하지 못했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나는 눈앞의 이 연을 뿌리칠 수 없었다.
“……알겠어요.”
속삭이다시피 한 작은 답에 그가 다짐시키듯 물었다.
“정말인가.”
“그래요, 정말이에요. 알겠다고요.”
나는 경고했고, 내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그에겐 아마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놓치기 싫은 뭔가가 내게 있는 모양이다. 그는 왕이니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 만한 자였다. 그러니 선택은 그의 몫이다.
후에 어떻게 되든 나는 그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심산이었다. 완전치는 못할지라도. 저주받은 존재라도 된 양 가는 곳마다 재앙이 밀어닥치긴 하지만, 그 무엇도 내가 뜻한 바는 아니었으니까. 아마 목표한 대로, 모든 일이 끝맺어져 마스터가 나를 돌려보내 준다면― 그건 그대로 족하겠지. 부러 빚을 해소하려고 기회를 만들지는 않을 셈이었다.
“그래.”
내 속내가 어떠하건 원하는 대답을 얻어낸 그는 시원하게 웃었다. 그 입가에 맺힌 미소에서 만족감을 엿본 난, 이유를 알 수 없게 민망해졌다. 이 잘난, 왕씩이나 되시는 분을 내가 밀어내도 되는 걸까 싶기도 하고. 왕은 넌지시 물었다.
“그러면 거사는 언제쯤?”
“오래 기다릴 수 없어요. 오늘 밤이 좋겠어요. 어두운 시각에 당신의 힘이라면, 더 가시적인 효과도 있을 거고요.”
불의 마력. 눈이 마주치자, 그의 입꼬리가 더 깊어졌다.
“부하들을 소집하지.”
그리하여 앞으로 세 시간 후, 그의 방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하기로 결론이 났다. 바란에 들어온 마법사들이 회복되기 전, 그들이 아직 혼란한 상황일 때 일을 치러야 하기에 더 지체하기 힘들었다. 유적의 힘을 앗고, 바로 바란을 떠나간다. 계획대로 된다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우리 일행 내에서도 이견은 있었다.
“그건 불가합니다.”
왕과 그 일행을 엘딘 사르베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었으면 한다는 말에 뤼비에가 정색했다. 뺀질거리는 그답지 않게 부드러운 투였으나 단호함이 맺혀있었다.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틈 없는 거절이다. 말을 꺼내자마자 거절부터 당하니 반감이 솟았다.
“안내만 하고 합류하면 되잖아.”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해 합류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을, 저로서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선 곤란합니다. 바란의 유적을 탐색하는 건 제 오랜 염원이기도 하니까요. 부디 저와의 약속을 상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난 그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고 깨달았다. 내가 이자를 믿지 않는 이상으로 이자 역시도 내게 믿음이 없구나. 그걸 실감하는 건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어쨌든, 우리가 서로 간의 필요에 의해서 일행이 된 건 사실이었으니까. 내심 그를 따돌릴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기에 나는 치미는 말을 삼켰다. 사실 그 역시 우리와 멀어지는 게 나을 터였다. 마탑의 표적이 되는 건 마법사 길드의 공적이 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니. 그의 거절엔 일리가 있었지만, 대책은 필요했다.
“당신이 아니면, 누가 그들을 엘딘 사르베타에게로 안내하지? 당신 말만 듣고 그쪽으로 가서 소란을 일으키는 걸 그들이 납득할 리 없잖아?”
“이라칼이 안내할 겁니다. 제가 그에게 엘딘 사르베타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으니까요. 그의 생김새도 마법으로 보여드렸지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하며 상큼하게 웃는 낯짝을 마주하며 난 할 말이 없어졌다. 역시나 계획적인 성격의 그답다.
“그래, 그랬지. 그래서였군?”
이라칼은 불퉁하게 말꼬리를 올리긴 했으나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인간들은 내가 맡겠어. 어차피 유적에 들어서더라도 다시 빠져나가야 하잖아? 그때까지 소란을 계속 피워야 할 것 아닌가.”
아예 내친김에 본체로 돌아가서 난동을 피워보려는 기색이었다. 아무리 마법사 길드원들이 죄 부상을 당했다지만, 일단 수적 우세다. 바란 사람들도 있고. 나는 이라칼과 그들의 실력을 정비교하기 어려웠다. 무사할 수 있을까. 요만큼이라도 걱정이 되긴 된다.
“괜찮겠어?”
“그 정도쯤이야. 몸 상태도 온전하지 못한 마법사들인데.”
이라칼은 내가 자길 못 미더워한다고 느꼈는지 콧바람 소리를 냈다.
“합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저자가 표식을 남겨주면 되지 않겠어? 작은 흔적이라도 찾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건 문제없습니다.”
뤼비에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마스터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머뭇거렸던 이유는 물론, 일이 이렇게 진행되어가는 것에 마스터가 일언반구도 비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무슨 짓이냐, 뭘 믿고 인간에게 도움을 구하느냐. 이런 식의 질타라도 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스터는 그저 내가 어떻게 하든 무심히 지켜보고만 있었고, 그 고인 물처럼 밀도 높은 침묵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뜻대로.”
짤막하게 말한 마스터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 순순함은 이상한 느낌을 주었지만, 마스터가 내 의사를 존중해주기로 한 거라면 내게도 나쁠 건 없었다. 그렇게 우리 일행 내부에서의 상의는 끝났고 약속된 시간, 한자리에 모인 뒤 밤이 되면 일을 벌일 셈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창가에 걸터앉아있던 이라칼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건 무슨 일이지.”
의자에 기대앉아있던 뤼비에도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있나 봅니다.”
말하지 않아도, 조심스럽게 여관 주위를 에워싸는 기척들이 감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설마 왕이…… 배신한 건가? 그러나 난 창밖 너머 소리를 죽이고 접근하는 병사들 틈바구니에서 이미 본 적 있는 얼굴을 찾아냈다. 그 종업원. 왕을 무척 경계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던.
그렇다면, 배신은 아니다. 그게 날 단숨에 안도로 끌어내렸다.
“내려가 보지. 우선 합류해야 할 것 같아.”
아래층에 있는 그쪽도 이 기척들을 눈치챘을 것이다. 저 종업원이 뭔가 엿들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는데……. 물론 왕의 외양 자체가 워낙 수상쩍은 데가 있으니 뭐든 이유를 가져다 붙일 수 있으리라. 다행히 언뜻 보기에도 병사의 수는 많지 않았다.
급히 1층으로 내려와 약속한 장소에 도달하기 무섭게, 일제히 시선이 쏟아졌다. 소수 정예만을 데려온 듯 이리스 라하느를 포함한 고작 여섯 명. 왕을 포함하면 일곱 명이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그만치 강렬했으므로. 이거면 충분하겠어. 나는 만족감을 느꼈지만, 그들은 날 미심쩍은 듯이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어린애를 동반한 우리 일행을.
그중에서도 이리스 라하느는 노골적인 적의를 담아 날 노려보고 있었다. 저 여자 뇌 속엔 날 경계하겠단 마음만 들어차서, 내가 그녀를 편들었단 사실이 그대로 잊힌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리스 라하느는 내게 거의 제정신이 아닌 여자 정도로 평가되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배은망덕함에 대해서 새삼 분개할 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바깥에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이유가 짐작 가시나요?”
“나도 그걸 알고 싶군. 누군가 꼬리를 잡혔나?”
“만전을 기했으니 저희는 아닙니다. 아마도 저들이.”
딱 잘라 말하며, 이리스 라하느가 날카롭게 표적을 우리 일행에게로 돌렸다. 나는 능숙하게 받아쳤다.
“여관 종업원이 당신들 일행을 수상하게 여겼을지도 모르지요. 마법사 길드 일로 민감해져 있을 시기니까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 어떻게 할 생각이지?”
“어떻게 하시겠어요?”
난 결정권을 떠넘겼다. 어차피 선택지는 적었으므로. 아니, 기실 하나였다. 저렇게 우르르 몰려온 이상 저 병사들이 말만으로 물러갈 거라곤 생각하기 어렵다. 적어도 연행하려고 들 것이고, 밤까지 기다려서 일을 치기로 정했다고 치자. 거기에 응해서 끌려가는 모습이 혹시 엘딘 사르베타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그는 당연히 왕을 알아볼 테고, 보자마자 내뺄 테니까.
낮이라 시선을 피할 순 없다고 해도, 뭐 일을 벌이지 못할 것도 없겠지. 그리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동시에 그 역시 떠올린 모양이었다. 비록 왕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으나 난 확신했다.
저벅저벅.
부산한 발소리가 문을 젖히고 들어오고, 긴장감이 고조되어갔다. 그의 부하들이 한둘 씩 검에 손을 가져갔다.
덜컥. 노크 없이 다짜고짜 문이 열리고, 어떤 과정도 없이 번뜩이는 창날이 들이밀어졌다. 체포가 아닌, 처결까지 예비하고 온 모습에 선택은 유일무이해졌다. 그리고 이미 결정하고 있던 왕은, 망설이지 않았다.
쾅!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화염이 수평으로 날아가 막 위협조의 말을 꺼내려던 병사들을 날려버렸다. 그 뒤로 기겁한 얼굴의 종업원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뛰어나가는 그를 아무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가 불씨가 되었던, 이제 상관없어졌다. 일은 시작되었고, 나아갈 뿐. 왕의 음성이 묵직하게 떨어졌다.
“제압하는 선에서 그치라.”
그건 참으로 그다운 명령. 그의 명대로 그의 충실한 수하들은 검등으로 병사들을 쳐내며 순식간에 때려눕혔다. 너무도 격차가 나는 상대 앞에 몰려온 병사들은 수적 우위를 앞세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허수아비처럼 무너진 그들은 다행히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 이라칼이 기다렸다는 듯이 왕에게 다가서자 난 빠르게 외쳤다.
“이라칼이 그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줄 거예요!”
“그대는?”
“이대로 출발해야겠죠.”
대꾸하며 급히 마스터를 안아든 난 찰나처럼 그를 쳐다보았다. 인이 박일 듯, 강렬한 빛을 띤 호박색 눈. 어떤 의미로든, 나를 믿어주는 사람. 다시 만나지 않길 바라기도 하지만, 또 다시 만나길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무엇도 내 뜻대로 되진 않겠지.
“……뜻하는 바를 이루길.”
낮은 속삭임을 흘려들으며 난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돌아나갔다. 드디어 유적으로 향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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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은 장면이 임박해있군요. 어서 써졌으면.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