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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33화 (133/155)

00133  10. 바란  =========================================================================

“무엇이 위험하다는 거죠?”

물음을 내뱉자마자, 나는 그 위험이 내게 해당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내가 아니라면, 위험한 쪽은. 내가 놓치고 있던, 아니 실제로는 부러 거기까지 고려치 않으려고 흘려 넘겼던 사실이 그의 입을 통해 발해졌다.

“권리의 문제라기보단, 결과의 문제다. 바란이 독립국의 자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그 유적의 힘이 바란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만약, 그대가 유적의 힘을 거둬간다면 이 바란은 머지않아 전화에 휩싸일 수 있어. 마법사길드에서도 그들에게 다수의 사상자를 안겨준 바란을 가만히 놔둘지도 의문. 비록 그게 바란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왕은 신중하게 말을 맺었다.

“나는 그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군.”

충고하듯, 혹은 비난하듯 그 어떤 의도를 품었는지 알 길 없는 담담한 눈빛. 그가 내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내 속에서 뭔가가 뒤틀렸다. 그리 잘난 척, 착한 척해놓고 결국 바란이 어떻게 되든 생각해보지 않은 안일함을, 너도 제본위대로 무심하기 짝이 없는 마탑의 그들과 마찬가지 아니냐고 정면으로 지적당한 듯이.

그리고 내겐 찔리는 게 있었다. 부인할 수 없이, 나는 유적에서 힘을 거둔 그 이후까지 생각지 않았다. 도리어 이 순간에도,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바란이 어떻게 되든 모른 척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내 운명도 어찌 흘러갈지 알지 못하는데, 이렇듯 몰린 상황에서도 내가 남이 입을 피해를 모두 고려하여, 나를 제약해야 하나?

그래, 내 사정 따위 그가 알 리 없다고 해도 그는 마치 내가 바란의 운명을 손에 쥐고,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굴었다. 내가 잃을 그 무엇도 타인이 입은 그것보다 크지 않을 것처럼. 그건 참기 어려운 단정이었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그러나 그 소수가 나라면, 또 희생을 누가 치를지 정하는 게 나라면, 어찌 다수의 손을 들어 가부를 판단할 수 있나.

그러나 왕의 시각에서 그리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었기에, 그에게 분노를 드러내는 건 부당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무엇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내 편에 선 듯하나 결코 내 편이 될 수 없는 자였으므로. 정작 나에 대해서 무엇도 알지 못하는 이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겠어.

나는 성난 마음을 가라앉히며 비웃듯 물었다.

“샤자한은, 바란을 탐내지 않는다는 듯이 들리는군요?”

“나는 정복에 야욕이 없다. 샤자한은 확장을 꿈꾸지 않아.”

“그건 야욕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거죠. 샤자한이 아니라도 그 누구든 방어능력을 잃은 바란을 침략하려고 들 테니까.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는 것보단 샤자한이 손에 넣는 게 낫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적어도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아. 나는 지리적 요충지에 자리한 바란이라는 국가가 존속되는 편이 분쟁을 막기 위해선 낫다고 본다. 이제껏 바란은 각국의 국경을 틀어막은 채 전쟁을 억제하고 있었지.”

나보다 더 이상적인 왕이라니. 당신도 참 피곤하게 사네. 하지만 그의 생각이 어떻든, 이 바란에 미칠 영향이 어떻든지 간에 양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고 추적자가 찾아올지 모르는 이때, 한시라도 빨리 마스터에게 제힘을 되찾아주어야 한다. 그래야 나 역시도 내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니.

유적의 힘은 애초에 마스터의 것. 그 예기치 못한 파급효과 때문에 이토록 위중한 때에 그 힘을 회수하지 못한다는 건, 타협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진실도 드러내지 않고 그를 설득하려면……. 그렇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당신은 왕. 당신의 뜻이 샤자한의 대의라면 샤자한이 바란을 도우면 되겠군요.”

나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렇게 바란의 안위가 신경 쓰인다면, 그가 도우면 될 게 아닌가. 가진 거라곤 이 몸뚱이 하나뿐인 나 같은 마법사에게 뭘 바랄 게 아니라.

“이 바란이 문제없이 존속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일을 치려는 사람치곤, 잘도 떠넘기는데.”

“뻔뻔스럽다고 생각해도 좋아요. 확실히, 바란이 어떻게 되든 곧 떠날 저와는 무관한 일이에요. 물론 바란에 문제가 없게끔 하는 쪽이 제 양심에 위안을 줄 수는 있겠죠. 하지만 당신에겐 달라요. 당신이 말했듯이 이건 어떤 면에선 샤자한에게 이로운 일이니까요. 대의와 실익을 능력껏 챙길 수 있지 않겠어요?”

“많이 똑똑해졌군?”

눈을 가늘게 뜬 그가 말꼬리를 올렸다. 마치 이전에는 똑똑하지 않았다는 뜻 같아서 좀 거슬렸다. 뭐, 내가 유달리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야. 난 인상을 쓰는 대신 환하게 웃었다.

“정 뭐하면, 그걸로 채무를 탕감하시던가요. 그 정도면, 왕의 목숨값 대신이라고 할 만하겠죠. 자그마치 한 국가의 명운이 걸린 일이니.”

어쨌든, 바란 사람 중 누구의 의견도 구하지 않고 이 대화를 통해 바란의 운명이 정해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것이지만, 이제 선택은 그의 몫이었다. 나는 내 말대로 그가 움직여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 이상으로 왕은 고지식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왕은 선뜻 승낙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택한 건 다른 화제였다.

“그 또한 불쾌하군.”

“또 뭐가요?”

참 불쾌한 것도 많지. 또 뭔가 싶어서 난 한 번 들어보겠다는 태도로 팔짱을 꼈다. 이 왕은 뭐 하나 허투루 넘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내 빚을 그대가 임의로, 쉽사리 해소할 수 있는 듯 취급하는 것이.”

“…….”

“그대는 내 호의를 짐처럼 느끼는 것으로 보여, 틀린가?”

보이는 게 아니라 사실인 데……. 이렇게 딱 꼬집어오면 뭐라 할 말이 없다.

“뭐 때문에 그대에게 유리하지 않은 이유로 빚을 탕감하려고 하지?”

“그건.”

그 빚이 당연히 당신에겐 중요할 테지만, 내겐 별 상관없는 것이니까.

“그대는 나에게 연을 남겨두고 싶지 않은 것처럼 구는군. 샤자한과 마탑의 계약이 이어지는 한, 그대와 내가 만날 일이 영 없는 건 아닌데 말이야.”

그러니까, 섭섭하다는 건가. 친구들과 말다툼할 때 느꼈던 익숙한 감정이 떠오른다. 그건 퍽 그답지 않았다. 쿨하지 못하다고 해야 하나. 나야말로 의아하다. 왜 당신이 내게 그렇듯 의미를 두는지. 내가 그의 목숨을 구해줬다지만, 단순히 그 이유라고 보기엔 보상을 말하는 그는 덜 일방적이고 사사롭다. 내가 그의 입장에선 상당히 독특한 유형의 인간이라서일까? 아니면, 마탑의 마법사답지 못해서? 특별하다는 건 희소한 만큼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어떤 의미이든, 응해주긴 어려웠다.

“……저와 만날 일이 영 없길 바라야 할 거예요. 당신은 나와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어요.”

“장담컨대 내가 마탑과 이야기할 일이 있다면, 탑의 그 누구보다도 그대가 나을 텐데. 적어도 그대라면 대화로 풀어가려는 시도라도 할 터이니.”

그래, 그 온화한 란델도 마탑 밖에서는 위압적이고 일방적이지.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내가 말하려는 뜻은 명백히 어긋났다.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설명하기 어렵군요.”

난 입을 닫았다. 다분히 방어적으로 보일 터였다. 그러나 침묵을 이어갈 순 없었다. 그의 답을 들어야 했기에 난 곧 눈을 치켜떴다.

“내 소원으로 치던, 그렇게 하지 않던 그건 당신 뜻대로 해요. 하지만 내 일에 협조할 건지 대답은 해주세요.”

말로는 그가 협조 안 해도 어쩔 수 없이 물러날 것처럼 누그러진 투였지만, 실제 그렇지는 않았다. 있는 대로 다 떠벌려놓고 뭘 믿고 이대로 놔두겠어? 기본적인 신뢰가 있다 한들 위험을 보상할 만큼 단단하진 않다. 혹여 그가 훼방을 놓을 것처럼 보이면, 나도 나 나름대로 대응을 해야겠지. 모두 기절시켜서 방에 가둬놓을까? 머릿속에서 지극히 범죄적인 발상이 구체적으로 피어올랐다. 난 재촉하듯 발을 얕게 굴렀다.

“초조해 보이는군.”

“내 상황이, 그리 여유롭진 못해서요.”

우는소리를 하는 쪽이 더 먹힐까? 난 부러 피곤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보았으니 알겠지만, 내겐 짐이 있고요.”

어린 동생 간수하기가 힘겹다고 하소연이라도 해볼 참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래, 짐.”

그의 시선이 나를 비껴갔다. 무언가 색다른 것을 본 양 이채가 피어난 눈빛. 거의 소리 나지 않는 작은 기척. 대화에 신경을 빼앗긴 채 놓치고 있었던 그것이 지각의 범주에 들어오자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 살결 위로 개미가 기어가듯 신경이 곤두섰다. 난 얼어붙은 양 뻣뻣한 동작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마…….”

마스터. 가까스로 입에 밴 호칭을 다 발음하기 전 파기시킨 난 갈무리하듯 입술을 깨물었다. 가만히 그 자리에 선 마스터는, 읽을 수 없이 무표정했다. 죽은 새처럼 검고 인형처럼 생동감 없다.

어디서부터 들은 거지? 모든 걸 다 까놓고 이야기한 건 아니었건만, 그에게 도움을 구한단 자체가 마스터에게 허락받은 사안이 아니었기에 지레 찔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왕과 지나치게 가까운 사이로 보였을까 봐 속이 탔다. 마스터는 내가 사리분별 못 하고 협력을 구한답시고 입 싸게 굴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내겐 항상 마스터에게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숨 쉬고 있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게 옳은 이유던 그렇지 않던 마스터에게서 부정당하는 건 내게 피하고 싶은 일이라는 소리다.

내가 탁자에 손을 짚는 동시에, 나보다 더 빠르게 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귓전을 스치고, 바람이 일만치 곧바로 일어선 그는 망설임 없이 마스터를 향해 성큼 걸어나갔다. 그가 마스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하고 있었던 난 선불 맞은 듯이 놀랐다.

뭐하려는 거지? 막아서야 할까, 마법으로 그를 강제해야 할까. 짧은 고뇌가 천 개의 벼락이 한순간에 날 강타한 듯한 혼란 속에서 번뜩였다. 그러나 너무 많은 생각은 날 머뭇거리게 하기에 족했다. 어느새 마스터 앞에 다가선 그가 몸을 숙였다. 적대적이지 않은 몸짓이 간신히 내 마력의 발현을 막았다. 왕은 단번에 허리를 잡아올려 마스터를 안아 들었다.

그래, 안아 들었다. 안아 들다니, 누구를?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질 않았다. 턱이 빠질 듯이 입을 벌리던 난 재빨리 다물었다. 내가 반쯤 공황에 휩싸여있는 데 반해 그는 태연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마스터를 안아 든 채 눈을 맞추었다. 그저 어른이 귀여운 아이를 안아보듯. 소름이 돋을 만치 어색한 광경에 충격에 휩싸인 난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비틀거렸다.

원래라면 그러한 접촉을 허용할 리 없는 마스터였지만, 지금 마스터에겐 사내의 손길을 뿌리칠 힘이 없었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고요한 눈. 그것이 오만한 불쾌감으로 변모하는 건 순식간에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아이인 척 입을 다물라는 충고가 있었다지만, 마스터에겐 내 말을 들어야 할 의무가 없었다.

마스터를 안은 채 나를 돌아본 왕이 내게서 경악한 기색을 읽어내었는지 불쾌한 투로 말했다.

“왜 그리 놀란 눈이지. 내가 아이를 해치기라도 할 것 같나? 아이를 좋아한다고 말했잖나.”

“그랬지요. 그런데 그 애는…….”

그 아이가 사실 아이가 아니니까 그렇지! 진실을 말할 수 없기에, 난 다른 핑계를 지어냈다.

“다른 사람의 손길을 좋아하지 않아요. 낯을 많이 가리거든요. 그러니 내려놓으시는 게 좋겠어요.”

쑥스러워한다고 말할까 하다가, 아무리 보아도 마스터가 내성적으로 보이진 않았기에 말을 바꾸었다. 내성적이라기보단, 배타적이라는 표현이 맞을 터였다. 내 권유는 차분했고, 왕은 마스터를 바닥에 내려주며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예쁜 아이인데.”

그러면서 슬쩍 마스터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이 내 안에 격한 아우성을 불러일으켰다. 맙소사!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 작품 후기 ============================

연재는 간간이 지속되구요. 7월안에 페어리 레이디를 마무리짓고 8월부터 검달을 달리려고 계획중이에요. 음 완결까지... 그렇게 많이 남진 않은 듯도 하지만 많이 남은 듯도 하고.... 아마 궁금해하시던 가장 중요한 비밀은 다음이나 다다음챕터에서 밝혀질 것 같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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