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2 10. 바란 =========================================================================
“동생이라던 그 아이…… 아주 인상적이더군.”
“뭐가 인상적이라는 거죠?”
뭔가를 눈치챈 건 아닐까? 본능적으로 원수를 알아봤을 수 있잖아. 난 슬쩍 왕의 표정을 살폈다. 세세히 훑었지만 일체 그런 기색은 드러내지 않은 채로 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대와는 닮지 않았어.”
“……네.”
난 순식간에 기분이 나빠졌다. 마스터와 닮지 않았다는 말이 기분 나빴던 게 아니다. 실제 혈연관계도 아닌 마스터와 내가 닮았다곤 생각하지 않으니까. 단순히 그 말의 뉘앙스가 나를 무시하는 뜻을 품고 있는 듯해서……. 이쪽 세계에 와서 괜스레 자격지심만 늘었다.
“아주 예쁜 아이더군.”
가볍게 미소 지은 그가 내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왕은 마스터에게 호감마저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예쁘고 귀여운 아이는 호감을 사기 쉬운 법이지. 그러나 그는 몰라도 난 마스터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거북스러운 기분이 가슴을 긁었다. 나는 찜찜함을 감추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
“아이를 좋아하시나 봐요.”
“아아, 그런 편이지.”
불현듯 이리스 라하느와 그가 어떻게 된 건지 묻고 싶어졌다. 그 두 사람의 뒤틀린 관계는 내게도 상당히 인상적인 것이었기에. 앉으라는 그의 손짓에 따라 의자에 몸을 실으며 질문을 꺼냈다.
“그동안 혼인식을 치르셨나요?”
왕이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그대와 내가 마지막으로 마주한 지 그리 오랜 시일이 지나지 않았건만, 국혼이 그리 짧은 새 치러질 일 같은가?”
“그건 뭐, 그렇지요.”
더군다나 왕비와 이런 곳에 반역자를 잡으러 같이 오지는 않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또한 분명히 말하건대 난 그녀가 왕비의 자리에 적합한 이라고 생각지 않아.”
“그것도 그렇네요.”
괜히 물었나. 정색하는 게 내 말이 거슬린 듯 싶다. 그를 불쾌하게 하는 건 내게 유리하지 않은 일이었다.
“헌데 그대는 내가 그녀와 어찌 혼인할 거라고……. 아니다.”
뭔가 말하다가 모호하게 입을 닫는 왕을 난 똑바로 주시했다. 사실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들이밀어야 할 용건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바빴으므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는데요.”
차분하게 넌지시 이야기하려던 계획과는 다르게 정말 단도직입적으로, 나조차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왕이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도움?”
“잊지 않으셨다면……. 절 도와주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요?”
새대가리도 아닌데 설마 그새 까먹진 않았겠지. 난 강조하며 눈에 힘을 주었다. 다행히 기억하고 있긴 한 모양인지 왕이 미간을 모았다.
“그랬지. 휴가 중인 그대가 내게 도움을 청할 일이 무언진 모르겠지만.”
“제게도 사정이 있어요. 그러니 제게 도움을 주실 의향이 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는 그에게 시선을 박아 넣은 채 또박또박 물었다.
“제가 바라는 대로 해주실 수 있어요?”
애처로운 척 매달린다거나 하는 건 성격상 무리였다. 자세한 사정을 말할 수 없는 게 가장 큰 문제. 왕으로선 마스터의 복귀를 바랄 리가 없으니 진실을 알게 되면 훼방 놓지 않을까. 그가 품은 원한을 생각해보면 당장 마스터를 공격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임무인가.”
왕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탑의 마법사가 도움을 청할 임무라는 게 상상이 되지 않는군.”
여전히 그의 의식 속에서 마탑은 장벽 없는 초월적, 초법적 집단인가 보다. 그건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과 거리가 먼일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다시피 난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죠. 당신에게도 크게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거예요.”
샤자한의 왕이 이곳 바란에서 붙잡힌다면, 어떻게 될까? 바란 측에서 그를 어떻게 하긴 어려울 것이다. 샤자한은 바로 인접한 강대국이고, 그에겐 명분이 있었다. 엘딘 사르베타, 샤자한의 반역자를 처결하겠단 명분. 타국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이 필요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내게 목숨 빚이 있었다. 그 빚을 해소하는 게 간단하다면 도리어 그에겐 모욕이 될 것이다.
“내게 바라는 게 뭐지?”
짧은 계산을 마친 그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나는 그를 마주한 채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자, 이제 던질 때가 되었지.
“엘딘 사르베타를 가급적 소란스럽게 처결해주셨으면 한다는 거예요.”
놀란 듯 확장되는 동공을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난 차분하게 덧붙였다.
“물론, 그가 죽건 살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소란의 크기가 중요한 거지요. 모든 바란의 이목이 당신들에게 쏠릴 만큼, 나는 그 정도를 원해요.”
“생각보다는 손쉬운 부탁이군. 헌데―”
그의 호박색 눈이 이채를 띠었다.
“엘딘 사르베타, 그 이름이 바로 나올 줄은 몰랐건만.”
“그건…….”
“내가 중차대한 일로 이 바란을 친히 방문했다는 건 짐작하기 어렵지 않지. 허나 ‘엘딘 사르베타’라고 내 목적을 특정하는 건, 그대는 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단 거로군?”
“…….”
“그럼에도 내겐 침묵했단 말이지.”
화가 난 듯, 모호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심장이 따끔거렸다. 아니, 솔직히 자기랑 내가 뭔 사이도 아니고 곤란하면 숨길 수도 있지 않나. 그래, 숨길 수 있지! 그런데 막상 지적해오니 찔렸다. 나도 모르는 어떤 과거 속에서 그와 비밀스러운 사정을 공유할 만한 친분을 쌓았나 보다.
“사정이 있어요.”
난 변명하듯 둘러대었다.
“알다시피 난 중요한 임무를 앞두고 있죠. 그런데 그 상황에서 샤자한과 엮이는 건 곤란하게 느껴졌어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죠.”
그리고 생각을 마쳤고, 찾아와서 내 입으로 말했잖아.
“지금 말했으니 문제가 될 건 없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는 내 생각대로 사리분명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정색한 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문제가 되지. 내 기분의 문제야.”
“……뭐, 그런.”
기분 나쁠 일일 수는 있는데, 어쩔 수 없다고 설명하지 않았나? 난 반박할 셈이었다. 하지만 왕이 먼저 말을 이었다.
“물론,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난 그대의 부탁을 들어줄 용의가 있어.”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린다.
“단, 그대가 내가 주목을 끄는 그 시간 동안 뭘 할 건지, 사실대로 털어놓기만 한다면.”
“……그건 좀 곤란한데요. 게다가 왜 그렇게 조건부죠? 그쪽에서 먼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면서요.”
치사하잖아. 눈을 부라리자 왕이 피식 웃었다.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그런 부탁으로 그대에게 진 빚을 탕감하진 않을 거다. 그러니 빚은 그대로 두는 것으로 하지.”
“네?”
“대신 그대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진실이 필요하다는 거다.”
빚은 내버려두고, 뭘 할 건지 고백하라고? 일반적으론 나쁘지 않을 제안일 터. 그러나 내겐 아니었다. 또다시 이자를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 없는데 빚을 지워놔서 뭐하게. 지금도 란델의 손길이 샤자한을 향해 뻗어있을까 봐 불안하기만 한데. 단박에 부정적인 쪽으로 사고가 기울었다.
“빚 탕감하고 그냥 말 안 하는 걸로 하면?”
“이만 가보도록.”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정말로. 나는 잠깐 고심했다. 호박색 눈동자는 진지했고, 그 의지 맺힌 단단함을 목도하니 경계심이 누그러지는 것도 있었다. 아카일은 왕이었고 그런 지위에 있는 사람은 대개 이유 모르고 타의에 따라 행동하는 데 익숙지 않았다. 또한 샤자한과 바란이 친분이 두텁진 않더라도, 그의 입장에선 바란에 해를 끼치고 싶진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아카일이라면 그러했다.
마음이 좀 기울긴 하는데, 확신이 필요했다. 난 엄숙한 투로 물었다.
“당신이 방해하거나, 비밀을 누설하거나 하면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무슨 왕이 그렇게 맹세를 남발해요?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리스도 없애지 못하는 그대가 누군가를 해칠 일을 벌이지는 않겠지.”
“……그 확신에 응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나조차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데, 나를 좋은 사람으로 확신하고 있는 누군가를 마주한다는 건 묘한 기분이었다. 마탑에서는 도리어 비정한 이가 되라며 선의를 깔아뭉개지 않던가. 마탑에서의 생활, 그리고 그 대표 인물인 마스터와 함께하는 동안 나는 내내 깎아내려지고 회의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한 부정 속에서 살아가다 이 한 번 마주한 긍정이 놀랍도록 힘이 되었다. 그가 준 지지가 내 입을 열렸다.
“제 목적은 바란의 유적에 잠입하는 거예요.”
그 한마디를 들은 것만으로도, 짐작 가는 게 있는 모양이다. 그는 느릿하게 턱을 짚었다.
“바란의 유적에는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정체 모를 힘이 깃들어 있다고 하지. 마법사 길드에서도 연구하고 싶어서 혈안이 된 것으로 안다.”
진중한 음성이 추측을 실어 날랐다.
“나는 마탑이 그 유적과 무관하진 않을 거라는 가설을 떠올린 적이 있지. 입증할 기회가 없었지만.”
“당신 추측대로 바란의 유적은 마탑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나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전 그 유적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숨어들면 되잖나.”
“일행이 좀 많아서 이대로는 곤란하네요.”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렇다손 쳐도, 유적에 발 들이는 데 왜 소란이 필요하지? 그대가 그대로 유적으로 걸어 들어간다고 해도, 아무도 막지 못할 텐데. 소란을 피워서 신경을 돌린 뒤 숨어드는 건 그대들의 방식이 아니야.”
언제나 당당하게 패기 있게. 꼭 그렇진 않지만, 마탑의 방식이 아니긴 하지. 난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어…… 어린 동생이 보기에 폭력적이라서?”
“그 아이도 임무에 동반하는 건가.”
그런 어린아이를 위험한 임무에? 흡사 비난하는 듯이 들렸다. 하지만 아동학대라는 말이 어울릴 상대가 아니다.
“네, 뭐 이를테면 현장실습이죠. 그 아이도 슬슬 마탑인으로서 일을 배워나가야 하니까요.”
쫓겨다니면서 변명만 늘었다. 꽤 그럴듯하게 둘러댔다고 자부하는데, 그냥 넘어가는 줄 알았던 왕이 핵심을 찌르고 들었다.
“거기엔 내가 관여할 수 없겠지. 허나 그대가 그 유적에 잠입하여 뭘 할 건지는 알아야겠어. 단순한 조사 목적은 아닐 것 같군.”
여기서 거짓말을 해야 할까. 난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찰나의 망설임만으로도, 그의 눈빛이 변했단 걸 감지할 수 있었다. 그와 맞서는 상황을 피해야 했기에, 난 짤막하게 답했다.
“회수요.”
“유적의 힘을, 회수하겠단 소린가?”
“네, 그래요. 회수한 힘을 어디에 쓸 건진 말할 수 없어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고요.”
“그러면 유적은 어떻게 되는 거지?”
“모든 힘을 잃겠죠.”
깊이 생각해볼 것도 없이, 간단한 결론이다. 그저 평범한, 미지의 힘 따윈 품고 있지 않은 내 세계에 존재할 법한 고대의 유적으로 되돌아가는 것. 왕의 눈이 엄격하게 변모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대는 바란의 유적이 힘을 잃는다는 그 의미가 무언지 아나?”
“무상으로 사용하고 있던 힘이에요. 거두어간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어요. 그건 원래 마탑의 것이니까요.”
나는 항변했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의 입장에선 그렇겠지. 허나 위험한 계획이로군.”
============================ 작품 후기 ============================
오랜만이에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검은 달무리, 금빛 숲>출판 계약을 맺었어요. 올 하반기 완결 후 출판 예정입니다.
종이책+이북 모두요. 일단 마감일이 9월중에 잡혀있어요(...) <페어리 레이디> 완결내는 즉시 달려봐야지요.
문제는....아직 해결이 안되었지만요. 병 걸리고 그런건 아니고 간단히 말해서, 통수를 맞았어요 ㅎㅎ괜찮아요 덕분에 멘탈은 튼튼해졌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