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달무리 금빛 숲-131화 (131/155)

00131  10. 바란  =========================================================================

<최하단 공지 필독>

“어떻게 생긴 자이지?”

뤼비에는 그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난처한 눈빛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뻔뻔스럽고 계산적인 그에겐 그조차 연기인 게 분명할 터였다. 그는 곤란한 듯이 반문했다.

“중년 여자였습니다만, 뭔가 잘못된 거라도?”

실토하지 않으면 단박에 목줄을 죌듯하던 왕 앞에서 뤼비에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모양 좋은 눈썹을 찌푸린 채 그를 보던 왕은 이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마법사인가.”

내 입장에서는 그리 크지 않은 차이이나 굳이 따지자면, 뤼비에보다는 왕이 강력한 마법사라고 할 만할 것이다. 저보다 높은 경지의 마법사에게 마법사인 걸 숨기기는 어렵다.

“두어 시간 전, 마법사 색출이 중단되기 전까지 적발되지 않고 이 바란에 들어설 수 없었을 텐데. 그 이전에 온 건가.”

직시하며 쏟아지는 물음에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내 태도에 다른 걸 깨달았는지 눈을 빛냈다.

“아니군, 그대들은 색출하는 대로 걸려줄 만한 이들이 아니지. 허면 그대들이 이 소란과 연관이 있는 건가.”

“그건 비약이군요.”

나는 그렇듯 얼버무렸다. 머릿속은 쌩쌩 돌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기 어려웠다. 이들이 임무를 속행하여 반역자를 처단하고 샤자한으로 돌아가는 건 되도록 늦춰져야만 했다. 그 와중에 이리스 라하느가 샤자한에 접촉을 할 만한 방도도 차단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바란 측에 감히 샤자한의 왕씩이나 되는 이들의 일행이 숨어들었다고 밀고해야 하나? 그러면 샤자한 일행들은 일신을 구속당할 테지만, 그 과정에서 왕 쪽에서 별로 의리를 지킬 것 없이 내 정체를 까발린다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 곤란하다.

이틀에서 사흘, 목적한 바를 달성하려면 고작 그 정도. 그거면 충분한 데, 힘으로 돌파하는 외의 방법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마법사길드에서 곧 바란에 들어설 것 같다더군.”

왕이 팁을 주듯 냉담하게 던졌다.

“휴가 중에 소란을 겪고 싶지 않다면, 그들을 피하도록.”

왕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 일행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쭉 훑었다. 그 시선이 마스터에게서 유독 길게 머물러 나는 슬며시 불안해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저쪽 테이블로 자리해서 앉았다. 독살스러운 눈으로 날 노려보던 이리스 라하느 역시도 왕을 따라갔다.

난 곧장 뤼비에와 마스터에게 눈짓하여 방으로 올라왔다. 적어도 그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은 생각할 여유를 번 셈이었다.

난 방에 들어서자마자 뤼비에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뤼비에, 왜 쓸데없이 그자 이야기를 꺼낸 거야!”

왕으로선 엘딘 사르베타를 반드시 잡고 싶을 터, 실오라기 같은 단서라도 붙잡고 싶겠지.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들과 얽힐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은 그대로 넘어가긴 했을지언정 의심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인근에 엘딘 사르베타가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

그건 사실이었으나 나는 왕에게 별로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미안하지만 이쪽 일이 먼저라고. 그는 내게 도움을 줄 생각이 있는 듯하지만, 난 그에게 별로 필요한 바가 없다.

“엄밀히 말해선 꺼낸 게 아닙니다. 건드려본 것이지요.”

“당신의 그 알량한 호기심 충족을 위해서? 섣불리 행동하지 마. 그는 둔한 사람이 아니야. 괜히 얽혔다간 골치 아파져.”

“아시는 사이인 듯한데, 좀 더 그들의 활용 가치를 고려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유적에 잠입하는 데 그들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얼굴이 음험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뤼비에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건 아니건 그와 우리는 유적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면에서 목적이 같다. 목적이 일치하는 한 뤼비에의 말은 유용하니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난 낯을 찌푸렸다.

“어떻게?”

“그전에, 그자는 샤자한의 왕입니까?”

하고 많은 샤자한 사람 중에서 왕을 언급하다니. 던진다고 말하기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 놀랄 것도 없이 나는 역시나 간파해냈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카일은 왕이었고, 그 외형이며 분위기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고귀한 출신일 것임은 한눈에 알 수 있을 터, 거기서 범위를 더 좁히는 건 뤼비에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리라.

“왕이 이런 곳까지 행차하다니…… 아마 반역자를 쫓고 있는 것이겠지요.”

일전에 엘딘 사르베타를 샤자한의 반역자라고 말해주었으니 자연스러운 추리였다. 나는 재촉하듯 물었다.

“반역자의 행선지를 알려주고 왕이 우리를 돕게끔 하자는 거야?”

“왕의 일행이 소란을 일으키게 해야지요. 아주 시끄럽고, 떠들썩해서 중앙부처의 경계가 흐려질 만큼 큰 소란 말입니다.”

“그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생각일 테지. 군대를 이끌고 온 것도 아니고, 소수 호위만 데리고 왔다면- 애초에 조용히 처결하려는 거야.”

“확실히 반역자를 내놓으라고 바란을 침략하는 건 무리일 테니 군대를 동원하지는 않을 테지요. 저 고대 유적이 온전한 한은, 바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반역자가 있었다는 건 국내 정세가 불안하단 뜻일 텐데, 얼마간 자리를 비우는 것이 그의 한계일 겁니다.”

“그래서 조심스러울 게 분명한 왕이 소란을 피우게 할 방도는?”

“빠르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왕은 소란을 감수할 수도 있겠지요. 더군다나 그와는, 안면이 있는 사이 아닙니까? 그는 당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뺨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가 말한 호감이 내가 떠올린 호감이 아닐진대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 짤막하고 불친절한 대화에서 나로서는 옅은 반가움 외엔 느낄 수 없었지만 뤼비에라면 나보단 더 잘 왕의 감정을 읽어냈을 거고 나는 그걸 간과할 수 없었다.

왕이 뭐, 나를 좋아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 잘난 남자에게 호감을 받는다는 건 묘한 일이었다. 뤼비에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제의했다.

“미인계는 어떻습니까.”

“무슨 헛소리야!”

워낙 발칵 소리를 내지른 탓에 새된 음성이 방안을 울렸다. 내 귀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이리스 라하느의 미모를 매일같이 마주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 왕이 새삼 내 미인계에 넘어갈 리 있겠어? 그런 것도 하고 싶지 않을뿐더러 나는 미인도 아니다. 그래, 미인도 아니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뤼비에가 손사래를 쳤다.

“농담입니다. 그렇게 정색하지 않으셔도…….”

“효과가 날지 의문이 드는 방법이로군.”

듣고만 있던 마스터가 슬며시 덧붙이자, 현실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왠지 열이 올랐다.

“아, 저도 알아요! 안다고요! 그럼 다른 방법 있어요?”

“다른 방법 없다면 하시겠단 말씀입니까. 솔직히 저는 아주, 먹히지 않을 것 같진 않은데요.”

뤼비에의 얼굴엔 기묘한 확신이 서려 있어서 날 헷갈리게 했다. 그 왕이 나한테 넘어올 거라고, 자기비하가 아니라 정말 이해가 안 간다. 나는 반박하는 대신 냉랭히 지적했다.

“왕 옆에 여자 봤지? 금발 미인. 그 여자가 왕의 약혼녀야. 어설프게 건드렸다간 날 죽이려고 들 게 뻔해. 괜히 소란만 난다고.”

난 단호히 선언했다.

“그러니 그건 절대 안 돼.”

이 여관에 체류하면서 이리스 라하느를 감시하고 샤자한에 있는 마탑의 인원에게 우리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도록 막아야 하고……. 빨리 목적을 이루고 바란을 떠나야 하는데 아직 유적지에 접근할 만한 방법을 모른다. 순식간에 골치 아파졌다.

대화가 답보 상태에 머무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드디어 이라칼이 돌아왔다. 밤을 꼴딱 샌 그는 마법생물이라서 이 하루 고생한 게 별로 힘겹지 않을 텐데도 어쩐지 초췌한 모습이었다. 이라칼은 여전히 공손한 태도로 이 방의 다른 인간들-나와 뤼비에-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스터에게 가서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다녀왔습니다.”

“왜 이리 오래 걸린 거야?”

순수한 의문으로 내가 팔짱을 끼고 묻자 이라칼이 고개를 짜증스레 내저었다.

“아으으 정말 지루했어. 경비원 교대시간을 파악하느라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고.”

“잠입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말문이 턱 막혔다. 이라칼은 머리를 긁적이며 설명했다.

“내가 지켜보고 있던 사이에 경비가 더 강화되었어. 거의 틈이 없던데? 나 혼자라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여럿이 잠입하는 건 확실히 무리지. 세어본 바로는 적어도 여섯 명은 매수를 해야 아무 탈 없이 들어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내부가 어떻게 되어 있는 지까진 파악하기 힘들었어. 슬쩍 들어가 볼 셈이었는데, 그럴 틈이 안 나더군.”

사전답사랍시고 들어섰다가 괜히 들켰다간 경계심만 돋웠을 테니 몸놀림이 날랜 이라칼로서도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유적지의 입구가 열리면 마력이 움직일 터, 누군가는 눈치챌 겁니다. 그러니 경비원들을 매수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될 공산이 큽니다.”

“혹여 경비병들이 돈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후한이 두렵긴 하겠지. 여섯이나 매수할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고. 그러면 어떻게 하지?”

산 넘어 산이라더니 뭐 하나 쉽지가 않다. 지금쯤 식사를 마칠 샤자한의 일행의 모습이 뇌리에 그려졌다. 입을 막아야 하는데, 어쩌지?

죽여서 입을 막으라고, 마스터도 이번만큼은 종용하지 않았다. 마법을 사용해선 안 된다. 하지만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제압할 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왕과 이리스 라하느, 그 둘은 샤자한에서 온 이들의 일부에 불과하니.

어찌할까, 고민은 길어졌다. 그러다 문득, 먼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언젠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맹세라 할만치 힘이 깃든 눈이었다. 나는 그의 목숨을 구했다. 그러니 한 번쯤, 정당하게 대가를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오로지 내게만 이로운 것이라도, 그도 한 번은 나를 제대로 도와줘야 하지 않나.

휴가 운운했던 걸 던져버리고, 유적 잠입에 대해서 논의해볼까 생각했다. 우리가 쫓기고 있단 것도 말하지 말고, 그저 소란만 일으켜서 중앙부처의 경계만 흐트러트려 달라고. 실제로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미인계가 아니더라도 난 그를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우리 일행 중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단 밤새 고생한 뤼비에와 이라칼에게 휴식을 취하라 말해둔 난 신속하게 방을 빠져나왔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그와 이리스 라하느를 떼어놓고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적어도 입단속은 해두어야 할 터였다.

방을 나서서 일 층에 내려서기 무섭게, 문 너머로 사라지는 금발이 보였다. 이리스 라하느? 그녀에 대해서 경계심이 야생동물의 그것처럼 생생히 살아있는지라 척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나가고 있나. 금방 돌아올 건가. 나는 그녀의 뒤를 쫓을까 하다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고 바로 왕을 찾았다. 감에 따른 것인데 운이 꽤 좋았다.

식사를 마친 왕은 아직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식당에 앉아 창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외형은 다시 후드에 가려서 꼭꼭 숨겨진 채였으나, 반듯한 콧날과 턱선이 후드의 그늘 속에서 언뜻 드러나 종업원 아가씨의 시선을 불렀다. 노예상에서도 가장 눈에 띄었던 남자다. 조금이라도 얼굴을 드러냈다간 화를 부르겠지.

예를 들어, 그를 힐끔대는 여종업원의 남편이라던가. 아마 그는 이 여관에 요즘 들어 유난히 많아진 잘생긴 여행자들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눈을 부라리던 그는 그래도 가만히 있는 여행자에게 시비를 걸긴 어려운 듯했다. 나는 왕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그녀는 어쩌고 혼자 있어요?”

“잠시 인근을 둘러보러 나갔다.”

내가 오는 것을 알았던 양 시선을 주지 않고도 놀람 없는 음성이었다. 나는 이어진 그의 말에 몸을 굳혔다.

“동생이라던 그 아이…… 아주 인상적이더군.”

============================ 작품 후기 ============================

유적까지 가는 게 문제라서, 아힌뿐만 아니라 저도 고민을 좀 했네요.

얼개는 있는데 짜여있지 않아서. 여행복이 터졌는지 내일또 여행을 가니까 가서 담편을 써봐야겠어요...

단편집 <봄, 여섯 가지에 피다>가 오늘자로 리디북스랑 북큐브에 나왔어요.

제목 그대로 여섯 명이 함께한 단편선이에요. 저말고 다른 다섯 작가도 조아라에서 활동하시거나 활동하셨던 분들이죠. 예를 들어 빈껍데기 소녀의 해랑님이라거나.

단편집 그냥 재미삼아 낸 건데 지인강매용이 되어가고 있어요(...)

영업하는 게 왤케 재밌죠.... 제게 영업사원의 기질이.

좋은 하루 되세요!

----

여기다가 남깁니다. 개인사정으로 굉장히 복잡한 문제가 발생해서 당분간 연재되지 않습니다. 일반란에 페어리레이디를 출판할 예정이라고 공지를 올렸는데 그것도 손을 못대고 있어요....

새편 써서 공지까지 남기려고 했는데 그럴 여력이 없어서 일단 후기로 남겨둡니다.

공지에도 올려둘 테니 확인해주세요. 해결하는데로 돌아올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