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0 10. 바란 =========================================================================
결국 뤼비에와 이라칼은 그 밤 내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라칼이야 탐색에 집중하고 있을 테고, 뤼비에는 성격대로 뭔가 흥밋거리를 찾아 거기에 몰두하고 있을지도 모를 노릇. 또한 정보를 획득할 만한 좋은 기회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닐까 하여 아침에 일어나자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내가 뭘 어쩔 수 있는가.
어쨌거나 마스터의 곁을 지켜야 하는 건 내게 남겨진 몫이었다. 애당초 침입이라는 걸 계획해본 일이 없는 나로선, 그런 면에서의 탐색에서 뭘 알아내야 하는지 무지하다시피 했다.
아침이 될 무렵 설핏 들었던 잠에서 깨어난 난 마음 편하게 몸을 일으켰다. 햇빛을 완전히 가리다시피 하는 차광 커튼을 걷어내니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어둑어둑한 방안을 적셨다. 인위의 빛과는 다른, 따사로운 찬연함을 담고 있는 그 빛살.
눈이 시려와 눈꺼풀을 몇 번 여닫은 난 뒤를 돌았다. 그리 시끄럽게 소리 내진 않았지만, 내가 일어나는 통에 마스터도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다. 나는 그를 보며 웃었다.
“일어나셨어요?”
앓던 이가 빠진 양 가장 큰 고민이 해소되고 애정이 솟구치니 온몸에 활력을 부어넣은 듯했다. 세상이 장밋빛인 양 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져나고 기분이 들떴다. 나는 바로 마스터에게 다가가 그가 일어나는 걸 도와주었다. 그동안 줄곧 갈등을 겪느라 쌀쌀하고, 의무적이거나 거리를 두었던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내 달라진 행동에 마스터는 의문을 제기할 만큼 섬세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침대에서 벗어나 바닥에 발을 디뎠다. 세수를 하시겠냐고 물어볼까 했지만, 보통은 자고 일어나면 반지르르 기름이 돌기 마련인데 그의 얼굴은 잠들기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난 바로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식사하러 내려가시겠어요?”
언젠가부터 마스터의 끼니를 챙기는 게 무척 중요해졌다. 나야 먹지 않아도 상관없는 이상한 인간이 되어버렸지만……. 마스터는 이제 배곯고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쓰러질지도 모르는 연약한 인간 어린아이인걸.
그 점에 불만스러울 만치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나이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장담컨대 나는 어제보다 백배 이상 친절하고 관대해졌다.
식당에 다다르자마자 마스터를 앉혀놓고, 나는 성심성의껏 영양을 생각해서 식단을 골랐다. 아침이고 점심이고 저녁이고 딱히 음식을 가린다거나 소화에 차질을 빚는다거나 하는 일 없이 마스터는 주면 주는 대로 먹는 타입이었다. 맛을 느낄 수 있을지는 의문이나 그래도 이왕이면 맛있는 걸 먹으라고 이 식당에서 가장 잘 나가는 메뉴를 주문했다. 완자를 둥둥 띄운 탕 같은 건데, 주변 사람들이 다 그걸 시키고 있더라고.
배가 고프진 않으나 의욕이 샘솟은 탓인지 식욕이 당겨, 생각보다 많이 시키게 되었다. 나는 우유와 함께 먼저 나온 빵을 잘게 잘라 마스터에게 밀어주며 다정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드세요.”
작게 권하자 마스터는 빵에 손을 가져갔다. 내가 잘라준 빵을 꼭꼭 씹어 삼키는 모습이 기특하기만 하다. 어쨌든 날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한 것만으로도 마스터의 사소한 몸짓마저도 내겐 후광 필터를 씌운 듯이 보였다. 고깃집에서 열성적으로 고기를 굽는 신입 사원처럼 나는 바지런히 그의 식사를 챙겨주었다.
잘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보살핌이었다. 마스터가 원할 진 알 수 없지만.
우리 사이에선 드물게 화목한 식사를 마쳐갈 무렵, 여관 입구 쪽에서 음성이 들렸다. 내용까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침부터 새 손님이 들었나 보다. 바로 이곳 식당으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도 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마스터가 식사를 거의 마쳐가고 있으니 곧 도로 올라갈 참이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난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스터의 등 너머로 들어서는 새로운 손님의 모습을 본 순간 누군가가 뒤통수를 후려갈긴 듯했다. 비현실감이 밀물처럼 밀려와, 충격으로 머릿속을 퉁 일깨웠다.
나는 어찌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달싹였다. 황급히 구멍에 숨는 쥐처럼 고개를 숙여서 날 감출 겨를도 없었다. 날것 그대로 놓여졌다. 호박색 동공이 날 발견한 순간 크게 뜨였다가 빠르게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날카로운 기미를 띠고 날 훑는 그 눈은 여전히 놀람을 담고 있었지만, 나보다는 빠르게 이성을 찾았다.
머리 위까지 씌운 후드가 손길을 따라 그의 등 뒤로 내려앉았다. 나풀거리며 어깨에 놓이는 찬란한 붉은 금발. 태양처럼 빛을 잃지 않는 사내였다. 그는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직한 저음.
“아힌.”
샤자한의 왕 아카일이 이곳에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의 만남에 난 눈을 깜빡거렸다. 누군가가 인위로 만들어놓은 듯한 상황 앞에 말을 잊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우연이 있을 리 없다. 이 넓은 바란에서, 하필 이 여관에서.
“당황하는 얼굴이로군.”
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나와는 달리 그는 완전히 느긋함을 되찾았다. 그 느긋함이 내게 전염되어 나 역시도 이내 침착해졌다. 일순 세차게 뛰어올랐던 심장이 안정을 기했다. 난 최대한 덤덤하게 물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죠?”
“그건 내가 할 말이로군. 이곳 바란은 샤자한과 가깝지.”
“하지만 이곳은 샤자한이 아니고, 당신은 샤자한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당신, 왕이잖아? 못 본 새 왕 자리에서 내쫓겼을 리는 없고,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단 하루도 지나지 않은 일이니, 벌써 잊을 리 없지 않은가.
엘딘 사르베타, 샤자한의 반역자. 그의 행로에 대해서 캐어내다 보니, 이곳 바란에 이르렀을지 모른다. 게다가 지금 바란은 혼란하여 탐문하기엔 적기였다. 하지만 마법사인 그가 어떻게 바란에 발을 들일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의문을 입 밖에 내기도 전에, 왕의 시선이 나를 넘었다. 난 몸이 굳어버리는 걸 느꼈다. 마스터와 나를 진지한 눈초리로 훑는 그를 보면서 난 아찔해졌다.
그는 내가 마탑의 시온임을 안다. 그렇단 건 내가 마스터라고 부를 이가 누구라는 걸 안다는 소리다. 그는 마탑을 증오했다. 하물며 마탑의 수장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마스터가 탑의 수장이고 힘을 잃었다는 걸 안다면 당장 달려들어서 죽이려 들고도 남을 만한 자다.
그러나 그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뜬금없는 소리를 뱉어냈다.
“아들?”
“아니야!”
내 나이가 몇인데 이만한 아들이 있어! 마음에서 우러나는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고 발칵 화를 내자, 왕이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렇겠지. 그대들에게 가족이 있단 소리를 들어본 적 없어.”
“알려진 게 없으니 들어본 적 없겠지요. 이제 알아둬요. 내 동생이에요.”
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둘러대었다. 별로 익숙해지지 않은 거짓말치고는 꽤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여긴 어쩐 일로?”
“휴가 나왔어요.”
뻔뻔해져야만 한다. 난감한 상황이긴 했지만, 아직 수습할 여지가 있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그를 떼어놓는 게 좋다. 그래, 뤼비에가 돌아오기 전에.
“나는 임무 때문에 당신을 만났었고, 휴가 나온 지금 별로 임무를 떠올리고 싶지 않네요. 미안하지만 이만 가주시겠어요?”
난 냉정하다시피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이 세계에서 드문 아는 사람을 만났으니 반가운 기분이 요만큼이나마 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와 한가롭게 해후의 기쁨을 나눌만한 상황이 못 되었다.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래, 동생과 휴가를 즐기겠다고.”
왕의 얼굴이 미심쩍어졌다. 하지만 그도 반역자를 쫓고 있는 상황이니 시간을 끌면서 담소를 나눌 만큼 여유롭진 못할 터였다.
“뭐, 좋아. 정히 그렇다면-”
할 일을 상기한 듯 왕이 흔쾌하게 작별을 고하려던 때였다.
“여기 계셨군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이건 말도 안 하고 생각만 했는데 왔다. 공교롭게도 바로 이 순간에.
나는 애써 동요하려는 얼굴 근육을 굳혔다. 그러나 어색한 표정이었음이 분명하다. 뤼비에의 눈빛에 의혹이 스쳤다. 그는 가뿐한 걸음으로 바로 왕을 지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 와중에 그의 시선이 왕의 전신을 스캔하듯이 훑었다. 날카로운 관찰력을 지닌 자이니, 어쩌면 그의 정체를 추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불안감이 피어올라 나를 휘어 감았다.
“아시는 분입니까?”
내 앞에 다다른 뤼비에가 여상하게 물었다. 그러나 그는 짧은 관찰을 끝내고 이제는 꿰뚫어보듯이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깊은 흥미를 담은 채 이채가 도는 눈빛이 심히 부담스러웠다. 그보다 부담스러운 사실은 뤼비에가 무언가 의심스러운 소리를 지껄이기 전에 내가 그의 입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갈 거야.”
나는 단호하게 끊었다. 그러나 왕은 순순히 내 의도에 응해주지 않았다.
“임무 중이 아니라면서, 이 자는 뭐지?”
“임무 중이 아니라고요?”
눈치가 없는 게 아닐 텐데 뤼비에는 즐기는 듯이 말을 받았다. 난 뤼비에에게 눈빛으로 위협이란 단어를 박아 넣으며 또박또박 발음했다.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요.”
왕의 시선이 뤼비에와 나, 마스터를 동시에 담았다. 그는 무언가 가늠하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아카일 님, 방을 잡아두었습-”
가녀린 음성이 공중을 울렸다. 우리 쪽에 주목하고 있던 몇 안 되는 식당 안 사람들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오래된 악몽이 기어 나오는 듯 소름이 다 끼쳤다.
과연 시선을 모을 만한 미모였다. 적의를 담은 그 새파란 눈동자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왕의 뒤쪽에서 그녀는 마침내 식당에 들어섰다.
이리스 라하느. 마스터 못지않게 내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절대 잊지 못할 여인의 이름이었다. 그래, 왕이 혼자일 리 없지. 그녀를 목도한 순간 나는 모든 게 다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단단히 꼬여버린 기분이다.
이리스 라하느가 날 발견한 이상 그녀가 왕과 내가 한 도시, 한 여관 안에 숨 쉬고 있는 걸 그대로 보아 넘길 리 없다. 반역자의 일이 더 중한 왕이 그녀의 투정에 일일이 응할 것 같진 않으니 그녀는 휴가 중인 나를 치워버리기 위해서 샤자한에 연락을 취할지도 몰랐다. 그들이 바란을 떠날 수 없다면, 내가 바란을 떠나게 해야 하니까!
샤자한에는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가 있고, 나는 만에 하나라도 나에 대한 정보가 그자에게 전달될 가능성을 간과하기 힘들었다. 이리스 라하느는 극단적인 여자이니 어떻게든 나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마스터가 내 아들이라고 인정해버릴 걸 그랬나? 상대가 유부녀라면 저 여자도 좀…… 아니, 그런 걸 신경 쓸 만한 여자가 아니었지. 지금으로써 고려해볼 만한 건,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이리스 라하느와 왕을 납치 감금해두는 것일 텐데.
도덕심이 상당히 무뎌진 난 급작스럽게 그 계획에 기울었다. 그리하여 물었다.
“호위를 줄줄이 끌고 오셨나 보죠.”
“아아, 일이 있어서.”
반응을 보아하니 호위가 더 있나 보다. 하긴 반역자를 찾아내는 일이니 만전을 기해야겠지. 나는 내심 혀를 찼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뤼비에가 옆에서 불쑥 입을 열었다.
“발음과 옷 태를 보니 샤자한 사람이로군요. 그러고 보니 이 근방에서 샤자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다짜고짜 그런 말을 꺼낼 줄 몰라, 난 그대로 얼어버렸다. 왕의 표정이 삼엄하게 굳었다. 그는 뤼비에의 어깨를 잡아채며 다그쳤다.
“어떻게 생긴 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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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쇼에서 포르쉐는 빛이 납니다.
현대물을 써야해....나 대신 등장인물을 포르쉐에 태울 테다!
는 꿈.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