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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29화 (129/155)

00129  10. 바란  =========================================================================

지시를 기다리는 충견처럼 듣고만 있던 이라칼은 마냥 흑마법사를 믿을 수만은 없으니 자신도 중심가 쪽을 둘러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스터가 승낙을 표하자 곧장 창문을 열고 날렵하게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의 적극성이 별다른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헌데 이라칼은 여태까지 마스터를 경호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가 자리를 비웠단 건, 즉-

내가 마스터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일급 경호대상도 아니고 내 방도 가까운데 굳이 곁에 붙어있을 이유는 없겠지만……. 뤼비에가 이미 마스터가 있는 방에 몰래 숨어든 전적이 있기에 또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세상엔 별일이 다 있으니,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노릇.

회의 비스름한 대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다시 침대에 몸을 묻은 마스터는 피로해 보였다. 유적의 힘을 움직였기 때문인지 이전보다 마력의 양이 미묘하게 증가한 듯하긴 한데, 그렇다고 해도 육신을 강화할만한 정도는 아니리라.

침대는 넓었고 마스터가 중앙에 눕고도 자리가 많이 남았다. 나는 천천히 마스터의 왼편에 앉았다. 그에게 가까이 가는 걸 꺼렸건만, 눈을 감은 마스터는 놀랍도록 유순해 보여서 내가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게끔 했다.

이세계로 온 후로 많은 시간을 그와 단둘이 지내었다. 그럼에도 그와 함께라는 건 익숙한 듯 낯설다. 나는 모로 누워 마스터 쪽으로 고개를 향한 채 물었다.

“마스터는 언제까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하나요.”

곱게 내리 감겼던 눈이 다시 심연을 담았다. 흑요석처럼 검은 반구에서 나는 희미한 빛에 물든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빛을 머금은 나는 그의 눈 속에서 잿빛이었다. 내가 그에게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의미인지 읽을 수 없는 온전한 무채색.

“이건…… 마스터 같지가 않아요.”

내 말이 투정으로 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로 투정이다. 나는 마스터가 손에 잡히면 부서질 인형처럼 작은 모습인 게 어색했다. 그의 모습이 내게 알량한 보호심을 끄집어내었다. 그에게 모질어질 수 없는 게 그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싫었다. 실은 마스터가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흔드는 것이 싫었다. 마스터는 나로 인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기에.

마스터는 근원이었고 나는 그 매달린 추의 끝단이었다. 첫 시작부터, 그렇게 되었다. 거기에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재난을 당한 사람처럼 불가항력으로.

“너는 나를 두려워하지.”

마스터는 고요히 말했다. 반문이 아닌 확신이라. 호흡이 빨려드는 것 같은 감각. 지독한 흡인력으로 검은 눈이 나를 옭아매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전의 모습을 찾기를 바라나.”

“혹시 지금이 좋으세요?”

난 자못 미심쩍게 물었다. 실용적인 이유로 보자면 업혀 다니면 그만이고 조그마니까 큰 몸보다 중력의 영향도 덜 받을 거고 보호를 받는 것도 주목받지 않게 정당화될 수 있다. 어린아이니까.

“인간의 형을 입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내게 유의미하지 않다.”

어떤 형태를 취하든 그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에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이 들렸다. 그렇다면 당신의 본질이란 건 대체 뭐지? 신인가, 악마인가. 어쩌면…….

“바란의 마력을 되찾으면, 그다음은 뭐죠?”

“유귄과 접촉한다. 그가 가진 것이 세 번째. 세 개의 조각 그것으로-”

마스터의 눈빛이 일순 기이한 색채를 띠었다. 지저로부터 스멀스멀 올라온 짙은 어둠이 새카맣게 피어올라 물든 눈.

“파훼는 완성된다.”

봉인의 파훼. 그것은 즉, 마스터의 부활. 기쁨이 일기는커녕 지독스레 불길한 광경이 내게로 밀려들었다. 재앙이 몸을 떨치고 일어나 세상을 향해 짙은 암운을 드리우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생생하게 치닫는 감각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망설였다.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물을 수 있는 때가 있다면 지금 이 순간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되면…….”

입이 바짝 말라온다.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의 대답을 들을까 봐. 마스터에게 기대를 품는 것도, 그가 기대를 배반하는 것도 너무도 당연하게 겪었던 일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소모적으로 나를 갉아먹고 파헤쳐서 견디지 못하게끔 나를 몰아대었다. 나는 그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가 준 기대이지 않은가.

“저를 돌려보내 주실 수 있나요?”

입 밖으로 낸 물음은 도리어 나를 파고드는 듯했다. 그 무게감이.

“제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요.”

당신이 이 세계에 무엇을 두고 있는지 알지 못해, 차마 동등한 무게로 비유할 수 없다. 하지만 간절함이 솟구쳐, 내 표정에도 드러났음이 분명하다. 정말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절박하게 심장을 조였다.

나는 이세계에서 무엇도 가지고 있지 못한데, 심지어 내 마음에 들어온 당신마저도 가질 수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어야만 하지? 짝사랑의 대상만이 존재하는 세계와 내 모든 것을 키워냈던 세계는 결코 비등점에 설 수 없다. 마스터를 갈망할지언정 나는 그가 곁에 없단 걸 견뎌낼 수 있으리라. 정작 그 마스터는 내게 의미를 두지 않음을 알기에.

뿌리를 잃은 나무가 된 듯한 느낌. 내가 머무는 이유를 주기엔 이곳에서 닿은 연들은 부질없을 정도로 미미한 것이었다. 나를 존재하게 하고 내가 있을 자리를 마련해주는 건 단지 필요만이 아니었다. 애정.

내가 설 자리가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애정으로 이루어진. 그런데 이곳엔 그게 존재하지 않는다. 마스터는 항상 이 자리에 있을 것이지만, 그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대지와 같아서 누군가가 뿌리박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나누어줄 마음도, 누군가를 곁에 둘 애정도 없다. 집이라는 게 단지 주거의 의미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곳에 와서 깨달았다.

눈시울이 후끈거렸다. 어쩔 도리가 없는 무기력함과 설움. 해소할 길 없는 공허가 가슴을 휘돌았다. 이 와중에도 여기서 울면 먹힐 만한 타이밍인가 재는 걸 보면, 나도 꽤 계산적이 된 것일 테지. 그런데 생각할 것도 없이 눈물이 먹힐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앞에서 찔찔거렸다간 낮추어보기만 할 것 같아서 난 눈물을 꾹 눌러 참았다.

아무 답도 들려오지 않아, 난 되는대로 내뱉었다.

“다른 시온들은 마스터를 배신했어요.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죠. 그러니까 제게 그 대가를 주셔야 해요. 그게 탑의 방침이잖아요. 아무 대가 없이 도움을 주지 않는 것.”

“…….”

“그래요, 마스터는 저를 구해주셨지요. 하지만 다른 시온들도 비슷한 상황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들도 평생 종속된 채 사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마스터를 배신했어요. 자유를 위해서.”

말을 하다 보니 논리가 맞춰나가지는 듯해서, 나는 정리하듯 말을 이었다.

“배신하지 않은 단 한 명인 제겐 대가를 바랄만한 자격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 저를 돌려보내 주세요.”

남들이 다 뒤통수를 때리는 데 나 혼자 안 그러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거 아닌가? 그리고 날 돌려보내 주는 거, 어려울 순 있지만 그 결과로 마스터가 잃는 건 없잖아. 바라는 건 단 하나뿐인데…….

마스터의 마음을, 바라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내가 가질 수 있을 만한 게 아니고 또 요구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바란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려고 한다고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 마음은, 평생 묻어두는 걸로 하자.

내 당돌한 요구가 다 말해지고 나서야 마스터는 답변했다.

“너를 돌려보내는 것이, 녹록한 일일 거라고 생각하나.”

답변이라기보단 물음이다. 차원의 벽을 넘어, 돌아왔던 곳으로 가는 것. 내가 아는 마법지식 상으론-물론 내가 아는 건 마스터가 심어준 지식일 뿐이니 그가 전달할 때 배제했다면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만- 막막한 일이었다. 어떤 식으로 시도해야 할지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쉽진 않겠지. 그러나 마스터는 불가능하다면 불가능하다고 말했을 자다. 내게 거짓말할 필요가 없었던 첫 순간에조차도 마스터는 나를 돌려보낼 수 있단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게 아주 어려운 일인가요? 제가 도울 수 있어요. 그러니 그렇게 해주세요.”

그리고 난 조급스레 마스터를 붙잡았다. 두려움 따윈 잊고 그 검은 눈을 직시했다. 내 생에 그처럼 의지를 품고 누군가를 바라봤던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약속해주세요. 힘을 되찾으면 저를 돌려보내 주겠다고.”

강요였다. 심지어 나는 마스터를 대하면서 가장 건방진 태세로 그가 거절한다면 어떤 식으로 가만있지 않겠노라고 결심을 다지고 있었다. 돌려보내 달라고 약속 안 하면 안 돕겠다고, 강짜라도 부려볼 참이다.

“그러지.”

흔쾌히 떨어진 긍정에 잠시 아연해 있던 난 조금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손에서 스륵 힘이 빠졌다. 기쁨이 밀려오다가 알 수 없는 찜찜함에 내리눌리고 다시 치솟다가 또 어딘가에서 막혔다. 들을 수 있으리라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난 곧 의심스레 물었다.

“정말이죠? 정말 저를 돌려보내 주실 거죠? 거짓말 아니죠?”

“내가 거짓을 말한 적 있던가.”

없……나? 없는 듯하다. 나는 내가 한 말에서 마스터가 이용할 만한 맹점을 찾아내려고 고심했다. 그래, 이거.

“그럼 힘을 되찾은 직후에, 혹은 그로부터 한 달 내에 저를 제 세계로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너무 구체적으로 정해서 마스터에게 반감을 사지 않을까, 그가 자신이 한 말을 철회할까 힐끔 눈치를 봤지만 그는 단조로운 투로 답할 뿐이었다.

“나는 네게 대가를 치를 용의가 있다. 그 대가가 남아있는 한 그럴 것이다.”

이건 또 뭐람. 흔쾌히 그렇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조건을 달듯 그도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현재로썬 내가 마스터에게 빚을 질 만한 일이 더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반대라면 모를까.

오케이, 콜. 나는 내 식대로 내뱉는 대신, 좀 더 격조 있게 말했다.

“그래요, 그럼 이 약속은 유효한 거예요.”

결론짓듯 말하며 나는 활짝 웃었다. 얼굴 근육이 당겨지는 게 느껴진다. 세상에, 세상에, 드디어 돌아갈 수 있어! 아직 갈 길은 멀었지만 그걸 이뤄줄 수 있는 사람에게 약조를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반 이상, 나아간 느낌. 모래밭을 헤집는 것보단 훨씬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신이 나서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무안하도록 무감정하게 바라본 마스터는 다시 눈을 감았다. 휴식을 취하겠단 의지가 느껴지는 동작이다. 그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도 곱고 예쁘게만 보였다. 물론 원래도 아름다운 외형이긴 하나, 감정적으로 마스터가 이렇듯 후광이 비치듯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 처음이다. 억눌러왔던 애정이 샘솟아 심지어 그를 끌어안을 뻔했다. 다행히 내게 자제력이 남아있으니 망정이지. 난 힘을 주어 뻗어 나가려던 손을 내리눌렀다.

나는 이제부턴 사활을 걸고 마스터의 봉인을 풀어줘야만 했다. 물론 여태까지 사활을 걸지 않았다고 말하기엔 내가 감수한 위험이 크나, 열의가 없었던 건 사실이다. 어쩔 수 없이 타성에 젖어, 뭐 그런 거였지. 그를 도왔던 마음이 어설프고 갈피를 몰랐다면 이제는 뭐든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확고하게 의지에 찼다.

그래, 시온이 어떻게 되건 알 게 뭐야.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차피 이곳 세계의 일이지 내 세계의 일도 아닌데. 남의 사정에 일일이 신경 쓸 수는 없잖아. 오로지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명제 아래 모든 건 비정하게 합리화되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들뜨던 가슴은 차차 가라앉았고 나는 곧 마스터를 따르듯 눈을 감았다. 일단은 바란이다. 뤼비에와 이라칼이 돌아오면 그때 계획을 짜보자.

모든 것이 머지않은 듯이 느껴졌다. 실로 꿈을 꾸듯 가까웠다.

============================ 작품 후기 ============================

생각대로 잘될까요? ㅋㅋㅋ

저 여행 5월에나 가용 아직 안갑니당. 예약을 3월에 한거예요. 미리미리해야지 동유럽은 5월부터 성수기에 접어들어서 숙소잡기도 힘들더라고요. 4월에도 이처럼 종종 출몰할듯!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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