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8 10. 바란 =========================================================================
“왜 그래?”
입에 대본 술맛이 무척 마음에 들던 참에 잘 구워진 등갈비까지 나와 막 손을 대려던 참이었다. 술을 마시면서도 아예 귀를 닫아놓은 건 아니었는지 술잔을 비우고 한 잔을 더 주문하던 그의 낯빛이 변했다. 심각한 기색이 완연하여 느긋하게 풀어져있던 내게도 짐짓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새로 들어온 이가 말하기를, 마법사길드가 바란에 입성할 것 같다고 합니다.”
“마법사길드가? 아깐 마법사를 색출해낸다더니.”
“그랬지요. 그런데 바란에서는 다른 걱정이 드나 봅니다.”
“다른 걱정?”
나도 모르게 뤼비에를 향해 몸이 기울었다. 그는 슬쩍 눈썹을 치켜들었다.
“바란으로선 마법사길드와 척을 지는 것도 부담이 크지요. 게다가 마법사길드에게 그들을 공격한 게 자신들의 뜻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건, 유적을 통제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니까요. 추측일 뿐입니다만, 바란에서도 자신들도 통제할 수 없는 바란의 유적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이김에 마법사길드에게 유적에 대한 조사권을 허락할 듯합니다.
마법사길드란 일반적으로 마법에 대해서 가장 박학하다고 말해지는 집단입니다. 그들을 불러들여 기존에 허락하지 않았던 유적 조사를 허용하는 것으로 갈등을 묻고 걱정거리도 해소하는 건 바란으로서는 이 사태를 해결할 만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일 겁니다.”
“그것만으로 마법사길드가 납득할까?”
“마법사길드는 지금 갈등을 빚을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마법사들의 회복에 힘써야지요. 그들이 건재하지 못하면 길드의 위상이 무너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마법사길드가 바란으로 들어온다는 건 좀 문제가 있지 않아?”
표면적으로 부상자를 치료한다는 도의에 응한다고 할 순 있겠지만, 실상 바란 내에서 마법사길드가 자신들의 공적과 마주하게 된다면 가만있지 않을 테고, 그러면 필연적으로 갈등을 빚게 된다. 그걸 꼬집는 말이었다.
“바란에서도 거기까지 허용하진 않을 겁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기치가 있으니, 유적 조사도 감시할 테고 바란 내에서의 마법사용도 엄격히 규제할 테지요. 물론 그렇다고 한들 제가 위험에 노출되는 건 사실입니다.”
그리 말하면서도 뤼비에는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는 일, 마법사길드에 앞서 유적에 잠입해야겠지요. 그들도 바로 오늘 당장 유적조사에 나서진 않을 테니까요.”
그들도 몸을 좀 추스르고 바란과의 협의를 통해서 유적에 발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 생각되었기에 나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돌아가는 대로 마스터와 상의를 해볼까. 위기를 잘 넘기고 바란에 들어서 술 한 모금 마셨다고 느슨해져도 될 만큼, 편한 여행길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내려놓을 수 없는 현실의 무게 앞에선 끊임없이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여기 온 목적도 정보를 듣기 위함이니.
식욕이 싹 사라져 등갈비는 뤼비에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도 중요한 계획을 앞두고 식욕이 일지 않는 모양인지 음식에 거의 손대지 않았다. 아깝네, 좀. 먹음직스러운 등갈비와 빈 잔을 아쉽게 바라본 나는 이만 자리를 뜨자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허공을 헤집던 시선이 저편에 앉아있는 어떤 사람에게 닿았다. 아마 뤼비에가 정보를 얻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는 사내 여럿이 앉아있는 탁자였다. 어딘가 낯익은 사내를 발견한 난 눈을 부릅떴다. 언뜻 잡힌 안면이 확대되듯 들어온다.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쑥 올라와 고개를 내밀었다.
-엘딘 사르베타.
나는 기어코 그 이름을 떠올려냈다. 내가 그를 잊지 않은 건,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잘 잊히지 않을 기억을 내게 안겨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려워할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와 마주치는 건 좋은 생각 같지 않았다. 그래, 아니지.
그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 날 발견할까 봐, 난 몸을 낮추어 뤼비에를 잡아끌었다.
“저기, 저자는 무슨 대화를 나누었지? 금발에 잘생긴 남자.”
좋은 기억을 가지지 못한 그를 잘생겼다고 표현하는 건 그리 내키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게 엘딘 사르베타를 표현할 가장 명확한 표현이기는 했다.
“주로 맞장구를 치면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헌데 왜 그러십니까?”
전형적인 귀족으로 보이는 그가 이런 술집에서 말을 섞고 있는 건 심히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는 꽤 잘 녹아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보를 얻기 위함인가? 신분을 숨기고 있나? 그래, 그는 샤자한의 반역자이니 아무리 여기가 바란이라지만 스스로를 드러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가 엘딘 사르베타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마법사였고, 그의 존재를 인지하자마자 내 감각이 그가 마법사임을 예리하게 읽어냈다.
난 답변하는 대신 말했다.
“나가자.”
의문이 서린 표정이었으나 뤼비에는 눈치 빠르게 물음을 뒤로 미루었다. 그는 여상한 태도로 종업원을 불러 음식값을 치른 뒤, 앞서 나가는 내 뒤를 조용히 따랐다. 엘딘 사르베타가 있는 곳에선 그의 뒷모습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술집 밖으로 몸을 뺀 난 골목으로 돌아들었다. 뤼비에가 바짝 따라왔다. 난 그를 향해 혼잣말하듯이 물었다.
“저자가 왜 여기에 있지?”
“그가 누구인데요.”
말해도 좋을지 잠시 고심하다가 난 내뱉었다.
“샤자한의 반역자. 도망쳤다는 소리를 들은 게 마지막이었는데, 바란으로 숨어든 것 같아.”
샤자한의 옆 나라이고 이전에 지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니 그가 바란으로 숨어들었다고 해서 이상하지는 않다. 다만 그를 처음 본 순간 꺼림칙한 것이 있었다. 그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강렬한.
“그도 마법사인데 마법사길드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샤자한은 좀 다릅니다. 그곳의 마법사들은 길드에 소속되지 않지요. 물론 교류를 하긴 합니다만 반역자라면 길드와도 연이 끊겼을 겁니다. 마법사길드는 정치 문제에 있어서 중립을 표방하니까요.”
그래, 마법사길드가 문제가 아니다. 엘딘 사르베타, 저자는.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란델과 연이 있었다. 이미 끊긴 연일지라도. 나는 란델이 그를 이용해서 샤자한의 왕을 갈아치우려고 한다고, 추측한 적 있었고 아마도 그 추측은 실제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샤자한의 왕과 내가 상당히 돈독한 관계라는 걸 알고 있는 란델이라면 엘딘 사르베타를 이용하려고 들 수 있었다.
마탑의 손길이 닿아있는 이와 이렇듯 가까이 있다는 건, 몹시도 찜찜한 일이었다. 등골에 오싹 소름이 인다. 얄밉기 짝이 없는 요엘을 공격할 순 있었지만, 내게 호의를 베풀어준 란델이나 다른 시온들을 상대로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다정다감하다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들일지라도, 짧게나마 싹튼 정이 있었다. 그들과 대적하는 내 모습을 그리는 건 지독히 가슴 서늘한 일이었다.
내가 먼저 걸음을 옮겼고, 뤼비에가 뒤따랐다. 나는 자꾸만 가라앉는 기분을 추스르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확실히, 당장 내일이라도 유적에 잠입해서 목적을 달성하고 떠나는 편이 좋다. 더는 누구와도 마주쳐서는 안 되겠지. 이런 대도시에선 언제 어떤 식으로는 마탑 관련자들과 마주치게 될 수 있으니까.
그리 오래지 않아 우리는 전원 마스터의 방에 소집된 듯 모여 있었다. 침대에 누워있던 마스터는 상체만 일으켜 우리를 맞았다. 잠에 들었다가 깨도 눈을 감았다 뜬 것처럼 변함없는 모습이다. 눈곱도 묻어나지 않는 그 단정함이 정말 인형인 듯 사람 같지 않았다. 여차하면 인형 옷을 입고 사람 아닌 척 연기해도 괜찮을지도.
엉뚱한 생각을 하는 내게 마스터는 본론을 직설했다. 엘딘 사르베타의 이야기를 배제한 채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막 유적으로 가는 방법을 말해달라고 재촉하던 차였다.
“유적으로 가는 입구는 바란 중앙에 있다.”
“바란 중심가에는 의회를 비롯한 바란의 정부기관이 위치해 있습니다만.”
뤼비에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곤혹스러운 소리를 내었다. 마스터의 답변은 가볍게 떨어졌다.
“그곳일 테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그러나 그건 내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바란의 정부기관이 밀집한 지역이라면 방비가 철저할 테고, 어쩌면 마법사길드에서도 그 주변에 머물지 모른다. 그럼 그 마법사길드에서 유적에 몰래 침투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경계가 더 철저해질 테고.
뭐가 이래? 산 넘어 산이라고 A난이도의 퀘스트를 해결했더니 곧장 S난이도의 퀘스트가 떨어진 격이었다.
“다른 입구는 없어요? 개구멍이라든가. 마탑에서 나가는 방법도 여럿이잖아요. 만약을 대비해서 뭔가 비상로가 있지 않겠어요? 그 하나밖에 길이 없을 것 같지는 않은데.”
유적이 지하에 있다면 또다시 땅굴을 파서라도 접근하면 되는 거 아닌가?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 그러나 마스터의 대답은 절망적이리만치 단호했다.
“그 하나뿐이다.”
그러면서 제일이 아니라는 듯 무심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나는 만약을 대비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중앙에 위치한 단 하나의 입구를 이용하지 못할 경우를 상정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 외의 길은 없다. 길을 새로 내는 것도 불가하다.”
없고 불가하고 너무도 한계를 턱턱 명시해주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현재를 사는 분이로군. 만약을 대비할 필요가 없었다니. 그래, 마스터도 자신이 몰락할 거라곤 상상도 하기 어려웠겠지. 마스터를 통해서 단 한 가지라도 만약을 대비할 방법을 두고 살아야한다는 것을 절절이 깨달으며 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거길 어떻게 들어가겠단 거예요? 정면돌파요?”
힘으로 정면돌파라,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안 될 것도 없긴 한데 문제는 엘딘 사르베타다. 그가 란델의 호퍼라면 어떤 식으로든 징표가 남았을 것이고 그를 통해서 란델이 바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이건 뤼비에가 없는 자리에서 후에 이야기할 일이고.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선에서, 방법을 찾아야겠지.”
얄밉도록 차분하게 과제를 던져주니,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나는 투덜거리는 대신 뤼비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중심가를 좀 살펴주겠어? 잠입할 수 있을지 견적이라도 봐야 할 듯한데.”
“그러지요.”
뤼비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쉴 틈도 없이 부려 먹는 게 좀 미안했지만, 일단 그를 빼고 이야기해야만 했다.
흔쾌히 승낙한 뤼비에가 떠나자마자 나는 마스터에게 엘딘 사르베타의 존재에 대해서 빠르게 설명했다. 탑의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란델이 스쳐지나간 옛 호퍼에게 관심을 둘까하는 건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또 간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임무를 맡아나간 곳은 몇 되지 않고 탑에서는 추적자의 관점으로 나와 엮인 인연들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일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가 여기에 있다면 마탑의 시선이 바란에 이를 수 있다.”
마스터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샤자한과는 엮이지 않는 편이 좋겠지요. 일단 유적 안으로 들어가면, 마스터가 유적을 다스릴 수 있는 건가요?”
이후 출입할 수 없게 입구 막는다든가, 우리를 대신해서 마법사길드를 상대한다든가 하는 것. 그 정도도 안 된다면 곤란하다.
“그래, 그러나 유적의 힘을 회수한 직후에 바로 유적을 빠져나와야 할 것이다.”
그렇겠지. 회수한 유적은 힘을 잃을 테니까. 아마 거기선, 유적의 힘을 빌어 공간도약을 펼치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 와중에 마탑에서 눈치채지 못하기만을 바라야지.
============================ 작품 후기 ============================
내일 중에 한 편이나 두 편 또 올라와용.
단편집은 수정까지 다 끝났고 완전히 넘겨서 출간일자만 잡히면 돼요. 4월 십몇일쯤으로 예상하는데 나오면 블로그에 공지하고 여기다가도 말할 거예요. 6명이 연합해서 내는 단편집이에요. 제껀 동양풍 잔잔 로맨스라능.
동유럽으로 여행갈건데 호텔 예약이....벌써 좋은덴 다 차서 방찾느라 고생했네요; 그래도 나흘에 걸쳐서 모든 예약을 끝내씁니다. 유로가 싸서 여행할 맛이 나네용.
유로환율 요새 최저수준이니까 바꿔놓으시면 좋을듯.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