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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27화 (127/155)

00127  10. 바란  =========================================================================

방문을 두드린 후,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말한 난 뤼비에를 따라 나섰다. 그 모습을 보고 뤼비에가 꼭 부모님에게 허락받고 외출하는 어린애 같다고 웃는 게 좀 거슬리긴 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너무 마스터에게 종속된 것처럼 느껴지기는 한 마스터는 일단 내 스승이고 또한 보호자였었다. 그래, 였었지. 지금은 반대의 입장이 되긴 했지만.

“발을 조심하시지요.”

뤼비에가 슬쩍 달라붙어 친한 체하길래 왜 이러나했는데, 이쪽을 향해 왠지 눈을 부라리고 있는 사내가 시선에 들어왔다. 과연, 대단히 키도 크고 우락부락한 사내다. 성격도 다혈질로 보이고. 뤼비에가 굳이 연기를 할 만도 하겠어. 저런 사람과 시비가 걸렸다간 마법을 쓰지 않고는 상대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다시 말해 나도 그렇지만 뤼비에도 눈에 띄는 마법 사용을 삼가야 한단 거다. 뤼비에의 경우 적어도 바란에서 마법사를 색출하는 이유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혹은 알아낸 이후에도. 그 사실은 이 야밤에 밖으로 나가는데 위험을 담보하고 있단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뤼비에가 하도 당당했기에, 나 역시도 자연히 그리 긴장감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곧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술집에 들어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밤과 낮이 구별이 되지 않는 빛의 도시이니 술집을 찾아든 주객들은 다들 지금이 늦은 시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듯했다. 밤이 깊었는데 주변은 왁자지껄 시끄러웠고, 목청을 높이지 않으면 서로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최대한 구석진 곳에 앉은 난 메뉴판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어른들 있는 자리에서 한두 잔 얻어마신 것 빼곤 마셔본 적은 없지만, 술 종류가 뭐가 있는지 대충은 들어본 적 있다. 물론 내 세계의 경우에 한해서. 여기라고 크게 다를까?

내가 고민하는 걸 느꼈는지, 뤼비에가 또 묘하게 기분 나쁜 특유의 미소를 떠올렸다.

“술을 별로 즐기시지 않나보군요.”

“탑에는 술이 없는걸.”

없나? 엘리야와 적색의 와인은 꽤 잘 어울리는 것이니 어쩐지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아 유리잔을 드는 그 우아한 모습은 눈에 그려지듯 선한 것이었다. 그를 떠올리면서도 그리 씁쓸하다거나 아릿하다는 종류의 감상이 들지 않는 나 스스로가 조금 놀랍게 느껴졌다. 하긴, 정이 들었다지만 그리 오래 묵지 않은 감정이다. 상처를 줄 만큼 뿌리를 깊이 박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으니.

“단 걸 좋아하십니까?”

턱을 괴고 고심하는데 뤼비에가 선택에 도움을 줄 요량인지 물어왔다. 단맛이라. 사실 난 술맛을 잘 모른다. 하지만 과실주가 맛있다는 건 알고 있지. 다니까. 그래서 난 냉큼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이어진 가볍고 상큼한 걸 좋아하느냐, 농후하고 진한 걸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난 주저 없이 전자를 택했다. 피식 웃은 그는 종업원을 불러 말했다.

“여기 치나 작은 걸로 두 잔.”

“치나?”

“바란 특산 와인의 고유명칭입니다. 가볍고 산뜻하지요. 여기서 안주는 뭐가 많이 팔리지?”

“구운 등갈비를 많이들 찾으세요.”

내 또래의 소녀는 싹싹하게 대꾸했고, 뤼비에는 내게 어떠냐는 듯 시선을 던졌다.

“그걸로 하지.”

바로 답한 난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와인이라……. 아마도 마스터에게 전달받은 지식은 내가 모르는 고유어에는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이런 식으로 고유어가 막 튀어나오면 내가 그 뜻을 해석할 수 없단 걸 새삼 깨달았다. 그렇다 쳐도 마법이란 건, 정말 놀라운 거 아닌가. 배울 필요 없이 말이 통하게 되니까.

내가 처한 불행이 더 크기에 별로 달갑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특별한 행운에 대해서 곱씹어보고 있는 사이, 뤼비에는 주변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애초에 정보를 얻기 위해 주점을 찾은 셈이니, 그는 목적에 충실히 하고 있는 바이다.

뤼비에에게서 미미한 마력 발동이 느껴졌기에 난 그가 마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눈치채었다. 들키면 곤란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골렘을 통해서야만 마법사를 색출해낼 수 있으니 이런 조그만 마법구현 정도는 알아채는 이가 없겠다 싶었다.

청각을 확장시켜 주변의 잡음을 정제하여 정보로 환원하는 듯하던 그는 어느 순간 미간을 모았다. 불쾌감을 느끼거나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잔잔하게 고여 있던 눈이 생기가 스미는 듯 이채를 머금었다. 흥미를 느끼고 있단 뜻이니, 그 모습은 내 흥미를 자극하기에도 족했다.

그러나 종업원이 부지런히 실어나른 술이 테이블에 탁 놓이자 난 일단 거기에 주목했다.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건, 정말 처음 있는 일이다. 나는 나름 모범생이었다고.

물컵만한 유리잔에 찰랑찰랑 고인 황금빛 액체가 왠지 모르게 탐스러웠다. 와인이라며, 화이트 와인인가? 보글보글 거품이 일고 있어서 탄산이 함유된 듯하다. 특별히 향긋한 내음이 난다거나 하진 않은데 그 모습이 유혹적이라 맛이 궁금해졌다. 뤼비에는 와인이 나왔는지 대화에 신경을 쏟느라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기에 고민하던 난 잔을 들어 입에 대보았다.

톡 쏘는 감각이 바로 혀를 자극한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상당히 맛이 괜찮았다. 그리 달지는 않지만, 산뜻하게 달았다. 입안에서 싸하게 퍼져나가는 청량감이 꼭 탄산음료를 마시는 느낌이다. 알코올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니 도수는 꽤 있는 듯한데, 그리 술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도 그리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했다.

근데 이거 짠, 하고 잔을 부딪치는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이미 마셔버려서, 좀 애매하네. 한국인다운 편견으로 잠시 고민하던 난 여전히 정보수집에 열중하고 있는 뤼비에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좋은 이야기라도 있어?”

“아아- 알고 싶은 내용이 마침 딱 들려오더군요.”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모습이 답을 쉽게 찾아서 기분 좋은 듯이 보였다.

“그러면 내게도 말해주었으면 좋겠네.”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뤼비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바란에는 마법사를 탐지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거리낌 없이 마법을 사용해서 정보를 수집하면 될 텐데 왜 굳이 자기한테 물어보느냐는 뜻이었다. 따져 묻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의문이라, 더욱 말이 막힌다.

그래, 바란에는 없겠지. 하지만 시온은? 탑의 마력을 잃었다고 해서 그들이 아주 약화되어서 우리에게 손 놓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그들은 우리를 추적하기 위해 뭔가를 논의하고 있었고, 여전히 유귄이 그들의 감시 아래에 있다. 마력을 사용하면 조금이라도 흔적이 남기 마련이고 마탑의 마력은 그 속성이 독특하다. 마스터의 말이 아니더라도 당연히 마법을 펼치는 데는 조심스러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뤼비에가 우리가 쫓기고 있단 걸 알 턱이 없다. 알지 못하는 편이 좋고. 그는 본인의 지식욕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를 기꺼이 마탑에 팔아넘길 수도 있는, 어쩐지 그런 인상이었다. 반대로 그걸 볼모로 우릴 협박해서 원하는 걸 얻어내려고도 할 수 있고 말이다. 방심하게끔 친근하게 구는 태도에 넘어가서 마음을 놓아버리면 곤란하다. 인상은 나쁘지 않은데 실상은 선함과는 거리가 멀어 필히 경계해야 할 자니까. 이를테면 뒤통수 유망자라는 거지.

“이번 임무에서는 마법 사용을 자제하고 되도록 은밀히 행동하라는 지령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전부터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긴 합니다만, 글쎄.”

“글쎄는 무슨 글쎄야. 그래서 뭐래?”

예리하도록 짚어낸 뤼비에는 내가 정색해보이자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화제를 바꾸었다.

“제가 들은 이야기는 그겁니다. 어째서 바란에서 마법사를 색출하고 있었는지요.”

“왜래?”

“간단히 말해, 마법사길드를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저쪽에 한 명, 바란의 고위직에 부모를 둔 입 싼 남자가 앉아 있어서 유용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군요.”

“마법사길드는 여력이 없을 텐데. 어제 그 일로 사상자가 많이 났을 테니까.”

“예, 마법사길드 측에서 감추기는 감추었다지만 그 광경을 목도한 이가 많은지라. 바란 쪽에서 발사된 마력이 워낙 갑작스럽고 강력하여, 다수의 마법사가 결계를 쳤다지만 그 반동을 다 막아낼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사상자나 마법을 잃은 자도 여럿이었고 대다수가 중경상을 입었다고 하지요. 그래도 반수 이상은 회복 가능할 것으로 추측되더군요.”

뤼비에는 그 사실을 조금 아쉽게 여기는 눈치였다. 어쨌거나 한때 자신이 몸담고 있던 단체에 대해서 별로 정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법사길드에서는 바란 측에서 일방적으로 자신들을 공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그건 사실이지요. 바란의 의지가 개입된 건 아닙니다만.”

범인은 마스터인데 애꿎은 바란만 어찌 된 건지 영문을 몰라 상황을 알아보고 있을 것이다. 이라칼이 힘을 써서 통로 입구를 묻어두기는 했지만, 발각될 가능성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바란에서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김에 근접해있는 그들을 싹 정리해버리는 쪽이 후환이 남지 않고 유리하겠습니다만, 보통은 마법사는 범인류적인 재산이니까요. 그렇게까진 않겠죠.”

……역시 이자, 마탑에 소속되는 게 적성에 맞을 것 같단 말이지. 난 약간 꺼리듯 그를 바라보았고 뤼비에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유적의 힘이든 뭐든 자신들에게 속한 힘이 마법사길드를 공격한 건 사실이라, 바란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불리한 입지에 놓였습니다. 마법사길드는 가까운 국가들이 꽤 많은 편이고, 이 기회에 그들에게 빚을 지워두려는 이들도 있겠지요. 바란 같은 풍요로운 소국은 탐내는 이들도 많으니 좋은 기회가 될 테고요.”

“파장이 크네.”

내가 어찌할 수 있었던 건 아닌데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진다. 꼭 전화戰禍를 불러오는 재앙의 증표라도 된 듯싶다. 내가 가는 곳마다 뭔가 난리통을 치르니.

“바란에서는 장기간 마법사길드가 국경에 체류하여 결계가 과민반응했다고 가닥을 잡고 있더군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마법사길드를 공격했다기에 그 유적의 힘은, 이제껏 누구도 마음대로 다루지 못했으니까요.”

“마법사길드가 바란에 보상을 요구하나?”

“보상을 해야겠지요. 성의껏. 그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러면서도 마법사길드가 하도 강경하게 나오니 경계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색출은 그래서 시행된 거고요. 고위 마법사가 들어와 문제라도 일으키면 곤란하니까요.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지만. 그리고 저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뭔데?”

“이 소란을 틈타 잠입했는지 모를 흑마법사를 색출하는 것이지요. 그를 마법사길드에 잡아 바친다면, 그들도 조금 누그러지지 않겠습니까?”

뤼비에의 눈이 빛을 발했다. 아주 날카로운, 간파의 빛이었다.

“물론 그건 바란이 추구하는 대외적인 지침과 상당히 어긋납니다만, 비밀리에 행하면 못할 것도 없지요. 말을 맞추고 마법사길드 측에서는 자기들이 잡았다고 공표하면 될 일이니까요.”

“그럼 당신, 위험한 거잖아.”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하지만 뤼비에는 현실적이고 비관적인 가능성을 충분히 염두에 둔 이치고는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그는 바로 그 까닭을 말했다.

“크게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추측건대 바란에겐 마법사를 색출할 만한 방법이 없거나 있더라도 조악하니까요. 골렘을 통한 탐지가 먹히지 않는다면,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을 듯하군요. 그걸 도울만한 바란에 있는 소수의 흑마법사들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아마 바란에 협조하지도 않을 겁니다. 게다가 저 역시 백 년 천 년 이곳에 머무를 생각도 없고요.”

“백 년 천 년 살 수는 있고?”

내가 넌지시 꼬집자 그는 피식 웃으며 잔을 들어올렸다.

“소득을 얻었으니 이젠 술이나 마시지요.”

그러나 곧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뤼비에의 표정이 굳어졌다.

============================ 작품 후기 ============================

이번달이 얼마 안남아서 짧은 시간에 여러편이 올라올 것같군요 이거시 마감효과....

5월에는 좀 길게 여행을 갈 것 같아요. 계획을 짜느라 골치가 아픕니다. 기대도 되지만요. 근데 노트북은 가져갈거니까 아무래도 연재는 지금이랑 차이가 나지 않을....

해외가면 왜 소설이 잘써지죠. 이상한 일이야(경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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