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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26화 (126/155)

00126  10. 바란  =========================================================================

바란의 입구에 다다르니 낮에 찾아든 듯했다. 도시의 번화가를 연상케 하는 휘요한 빛에 눈이 부셨다. 밤 깊은 시각임에도 형광등을 밝혀놓은 것처럼 이 도시는 온통 밝았다. 그건 곳곳에 세워져 있는 등뿐만이 아니라, 도시 중앙에서 빛을 내리비치는 거대한 원형의 구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은 흡사 인공 태양.

물론 실제의 태양과는 달랐다.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으면 시력에 이상이 올만치 환하기는 하되, 훅 끼치는 뜨거움은 없었다. 열기를 내뿜지 않는 차가운 빛. 그러나 형체 없이 홀로그램처럼 도시 저 높은 상공에 떠 있다. 그 모습은 진실로 경이였다. 내 세계에서라고 한들, 저런 것을 만들어 띄우고 유지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일 것 같진 않다.

“작은 태양이로군요. 저만한 빛의 구를 유지하려면 얼마만큼의 마력이 소요될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뤼비에가 감탄에 찬 소리를 내었다. 평소엔 태연한 척, 어지간해선 아무것도 아닌 척 굴었던 이라칼도 이번만큼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가 아무리 어른인 양 어떤 상황에도 익숙한 것처럼 굴어도 그게 나름대로 마스터에게 자기가 믿음직스럽다는 걸 어필하려는 방편이라는 걸 안다. 마스터 곁을 꼭 지키면서도 인공 태양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모양새가 좀 귀여웠다.

그에 반해 마스터는 그 광경에 별반 관심 없는 듯했다. 그는 눈이 부신 듯 몇 번 눈꺼풀을 내렸다 올리는 동작만으로 동공을 좁혔고, 그것이 실상 마스터가 보인 반응의 전부였다. 그의 마력에서 비롯된 광경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애당초 무언가에 놀람을 느끼는 감각이 없는 걸까.

마스터가 비행기나 기차, TV같은 것들을 보아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 같다는 데서 난 후자에 기울었다. 하지만 실제로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그가 내 세계에 떨어진다면 그건 어떤 재앙이 될지 나는 차마 상상할 수 없었다.

“저건 뭐지?”

입구를 가로막고 선 두 개의 조각상을 보며 난 중얼거렸다. 조각상? 아니, 다르다. 대리석처럼 매끄러운 표면으로 이루어진 그 사람 형체의 돌덩이에선 생명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2미터 남짓 되는 크기의 그것들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윤활유를 부은 듯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주시하는 것이, 로봇이라고 하기엔 너무 덩어리 같다. 이음선이나 인공 관절, 눈에 두드러지는 경계 구분 없이, 마치 일체가 사람인 것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람의 살갗처럼 부드러운 재질의 피부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 조각상 사이의 공간으로 줄을 선 사람들이 통과하고 있었다.

뭐지, 검문절차인가? 의문을 갖기 무섭게 조각상 옆에 서 있던 경비병이 외쳤다.

“마법사를 탐색 중이니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마법사이신 분은 알려주십시오.”

우리와 엇비슷하게 당도한 이들이 꽤 있어, 마침 입구가 북적거리던 참이었다. 금세 군중들 사이에 술렁거림이 들어찼다.

“마법사는 왜 탐색하는 거람?”

“아까 무슨 일이 있었나? 그 왜 아까 바란 쪽에서 빛이 번쩍거렸잖아.”

“마법사길드와 문제가 생긴 거 아니야?”

갖은 추측이 잇따랐지만, 누구도 어찌 된 상황인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경비병은 아무 능력도 없는 듯하고, 순전히 그 로봇 비슷한 인간형 조각상이 마법사를 탐색해내는 듯했다.

“이, 이게 뭐요! 난 마법사가 아니외다!”

……정확히는, 마법적인 기운을.

한 조각상이 대뜸 한 사내의 어깨를 붙잡았다. 다른 하나가 거침없이 그의 배낭을 뒤적여 물건을 빼낸다.

“그건 그냥 불 피우는 마법 부싯돌이오.”

물건을 확인한 조각상들은 곧 사내를 놔주었다. 기겁한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시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경비병이 다시 소리를 높였다.

“마법 물품이 있으면 진작진작 꺼내놓으시오!”

주변에서 오가는 소릴 대충 들어보니, 아무래도 입구에서 이런 식으로 마법사를 색출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은 아닌 듯싶다. 그들이 찾는 게 마법사길드 사람인지 아니면 국경에서의 소란을 틈타 스며들었을 흑마법사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곤란해졌다.

“골렘이로군요. 아마도 유적의 마력으로 움직이는 거겠죠.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뤼비에가 어쩐지 탐욕 어린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난 그 조각상들이 뭐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골렘이라. 마스터가 전달한 지식에 따르면 마력으로 움직이는 로봇 같은 거였나. 대개는 내부에 박힌 마력석이 에너지를 공급하지만, 이 경우에는 이 바란이라는 도시 자체가 마력의 공급원이었다. 내게도 마법사다운 탐구심이 솟구친 건지 그 구동원리가 정확히 어떠할지 궁금해지긴 했다.

이번에도 난 재빨리 마스터를 돌아보았다.

“어쩔까요?”

저 골렘들에겐 뇌물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마스터야 몸에 마력도 별로 없으니 걸리지 않겠지만, 나나 뤼비에의 경우는 다르다. 특히 나는. 저 골렘들을 움직이는 마력은 마탑의 마법사인 내 것과 매우 유사하다.

적발되면 어찌 되는 거지? 애초에 그들이 왜 마법사를 탐색 중인 건지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정체를 밝히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마법사길드가 지척에 있는데, 그들을 사칭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탑의 마법사인 걸 밝히는 건 더욱 껄끄러운데.

마스터만 들어갔다 나오고 나는 밖에 있으면 안 되나? 어차피 이라칼과 함께니까. 뤼비에야 본인이 알아서 할 거고.

“그대로 통과한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마스터는 망설임 없이 답을 주었다. 애초에 적발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한 태도라 여유마저 느껴진다. 마스터에게서 근거 없는 확신이라는 건 잘 나타나지 않는 류다. 설명이 좀 더 붙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리고 나 또한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고.

그리고 짐작대로, 짐작했음에도 내가 다소 긴장한 채로 일행 중 가장 먼저 골렘 앞에 섰을 때 녀석들은 분명히 내게서 그들의 것과 같은 기운을 감지해냈음이 분명하다. 눈 없이 달걀귀신처럼 밋밋한 얼굴에선 무어라 설명하긴 어려우나 미묘하게 그런 기색이 읽혔다.

그러나 골렘들은 나를 색출해내지 않았다. 너무나 깔끔하게 길을 내주어 놀랄 지경이었다. 난 먼저 성큼 그들 사이를 통과했다. 이어 다른 일행들- 심지어 뤼비에까지도 별다를 것 없이 골렘 앞을 통과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이 외관상 눈에 띄었기에, 왠지 모르게 의심스럽게 쳐다보던 경비병도 골렘이 반응하지 않자 순순히 우리를 들여보내 주었다.

“느껴지는 마력이 상당히 강력합니다. 그냥 움직이는 데에 저만한 마력이 필요할 리 없으니, 지능이 있는 골렘 같습니다. 과연 바란이군요.”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걸 봐선 입구를 통과할 수 있을까 별로 걱정을 하지 않은 듯싶었다. 그 점을 물어보니 뤼비에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이 답했다.

“이 유적 자체가 마탑의 산물이라면 저 골렘도 탑의 뜻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다른 분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길래 자연히 그런 줄 알았습니다만.”

거기까지 자연스레 추리해내지 못한 난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도 내심 불안해할 만은 한데, 뤼비에 이 자는 제 논리에 따라서 감정마저 조절할 인물로 보인다. 그것이 나름대로 비인간적이었다.

“일단 머물 곳을 구하고, 후를 생각해보지요.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 바란 쪽에선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뤼비에는 합리적으로 결론을 끌어내었다. 그는 어느새 이 일행에서 주도권을 확보해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예 일행이 되어버린 듯이 당연히 행동을 함께하는 그였지만, 어차피 유적으로 그를 데려가야 하지 않던가.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바란이라함은 도시국가이니 숙소가 넘치게도 많았다. 방을 구하는 건 어려울 게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지나가다가 눈에 띄는 적당한 여관에 들어서서 짐을 풀었다. 마스터와 이라칼은 안전을 기해 같은 방을 쓰기로 하고, 나머지는 각자 따로 독방을 잡았다.

그 이유는 뤼비에가 굳이 그렇게 한 방에 머물러야 하냐고 의아해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리적인 현상을 겪는다면, 한 방을 쓰는데 불편함을 느꼈겠지만 별로 그럴 게 없어서……. 생각해보면 내가 이라칼과 부부고 마스터가 아이인 것도 아닌데 셋이서 한 방을 쓰는 것도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암살자가 침실에 들이닥칠 정도로 위험한 것도 아니고.

거기다가 뤼비에까지 더하면 넷. 넷이서 옹기종기 한 방에 모여 자느니 이라칼이 좀 눈치를 봐야겠지만, 그를 마스터에게 붙이고 바로 옆 독방을 써도 될 듯싶었다.

난 방에 들어서서 간만에 얻은 혼자된 자유를 만끽했다. 비록 벽 하나를 두고 마스터와 이라칼이 있었고, 그건 내게 감각을 조금만 확장하면 움직임을 감지할 만치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 벽 하나만큼의 단절감이 곤두선 신경을 풀어냈다. 실체를 알고 있는 이라칼도 그렇거니와 마스터가 은연중에 나를 긴장하게 하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그건 꽤 피곤한 일이다.

충분히 값을 치렀기에 방은 청결하고 넓었다. 난 냉큼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내 튼튼한 몸은 초인이라도 된 듯이 튼튼하여 도통 피로를 느낄 줄 몰랐지만, 불과 몇 시간 전 땅속에 생매장될 뻔해서인지 정신적인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우선 좀 쉴 참이었다.

얼마나 눈을 붙였을까. 얕은 잠이 들었을 무렵 누군가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찬 공기에 노출된 듯 정신이 훅 살아났다. 난 퍼뜩 잠에서 깨어나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때맞춰 조금 더 작게 똑똑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충 기척을 보아 누군지 알 것 같았기에 눈을 비비고 문을 열자, 막 몸을 돌리려던 그가 멈칫했다.

“이거 죄송합니다.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그래.”

주무시고 있었지. 하지만 깬 이상 의미 없는 일이다. 그냥 놀자고 불렀을 것 같진 않아서, 난 용건을 말하라는 듯이 팔짱을 끼고 그를 응시했다. 헛웃음을 지은 뤼비에가 내게 넌지시 제의했다.

“저와 함께 내려가시지 않겠습니까.”

“왜?”

바깥이 환하다 보니 창에는 검고 두꺼운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방안의 어둠과 잠든 시간을 가늠해서 현재 시각을 어림짐작하니 새벽 같았다. 이 시간이면 근처 술집 정도는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나는 함께 뭔가를 할 만큼 친근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제의는 뜻밖이다.

“그야 물론, 정보를 얻기 위해서지요. 여종업원과 이야기를 좀 나누어보려고 했습니다만, 좀…….”

“좀?”

잠깐 자는 사이, 벌써 돌아다녔단 말이야? 부지런하기도 하지. 감탄할 만하다고 생각하면서 난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가에게 호의를 사는 건 제게 손쉬운 일이거든요. 그런데 남편분이 계시더라고요. 저를 아주 안 좋게 보는 눈치라.”

싱긋 웃는 얼굴은 왠지 기분이 나빴고 나는 약간의 추리 끝에 합당한 결말을 도출해냈다.

“날 방패막이로 세우겠단 거야?”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오해는 곧 풀리게 되어있으니까요. 혼자 술을 마시기엔 적적하기도 하고.”

친근감 넘치는 미소를 자아내는 뤼비에에게, 그가 방심 못 할 자라는 걸 알고 있는 나도 딱 잘라 거절하긴 어려웠다. 나도 대화라는 것에선 상당히 결핍을 겪고 있었고 이라칼이나 마스터는 대화 상대가 잘 되어주지도 않는데 반해 뤼비에는 말을 나누기에 적당한 상대였다. 궁금증을 풀어주기에도 족한 자이니 그를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근데 나조차도 종종 잊고 있는 사실이지만, 난 미성년자였다. 술이라니. 뤼비에는 내가 마탑의 마법사이니 당연히 나이가 많은 걸로 아는 듯싶었다. 여기선 말릴 사람 없으니 좀…… 시도해볼까. 제법 마음이 솔깃했다.

“알았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아니, 바로 나가지.”

그걸로 갑작스러운 밤 외출이 결정되었다.

============================ 작품 후기 ============================

기계식 키보드의 타자감이 굿이군요. 근데 별로 글쓰는 속도는 빨라지지 않은 듯....

심적 만족도만 높아졌어요.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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