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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25화 (125/155)

00125  9. 여정  =========================================================================

위쪽은 고요했다. 거리를 두고 있다곤 하나 마법이 행해지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만한 마력으로 땅속에 길을 내었으니, 그 파동이 감지될 만도 한데 전혀 탐색하는 기미가 비치지 않는 그 의미는 명료했다. 저 위의 마법사들이 다른데 신경 쓸 만한 상황이 못 되기에.

서둘러 뻥 뚫린 통로를 지나면서 나는 점차 기분이 가라앉았다. 쫓기는 듯이 조바심이 일고, 마음이 불안하게 술렁거린다. 정체 모를 힘을 엿보았기 때문일까. 나는 마스터가 무력하다고 믿었다. 마스터 역시도 그리 말했고.

그렇다면…… 지금 이 마력은 뭐지? 그건 보고 느낀 그대로, 그가 불러들인 것이다. 그럼 마스터는 무력하지 않은 게 아닌가?

마스터가 나를 속였다고 까진 생각되진 않았다. 그러나 의혹이 이는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면, 나는 더 이상 마스터의 곁에 머무르지 않아도 된다. 마스터는 내가 바라는 걸 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자신뿐이라고 했지만, 애초에 그 말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나다. 그의 곁에 있는 건, 내게 구명의 은혜와 더불어 의무심처럼 박힌 최소한의 도리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 그리고 나를 마스터에게 맞서게 만들었던 양심.

마스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있다고 바라야 한다고 되뇌었건만, 막상 그럴 수 있을 만한 근거가 떨어지자 애초부터 제대로 굳어진 적 없는 결심은 몇 걸음이고 주춤거린다. 마스터가 어느 정도 힘을 회복한 거라면, 그 단순한 가정은 내게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석면 동굴처럼 견고하게 형성된 통로는 꽤 길었다. 뤼비에가 어느새 따라붙었는지 인기척을 냈다. 그가 내 옆쪽에 서서 흥미로운 듯이 벽을 쓸어보았다. 토사가 흘러내려야 할 벽면에선 조금의 흙가루도 묻어나지 않는다. 기이한 현상. 뤼비에는 벽면을 툭툭 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마력이 형질을 바꾸었군요. 과연, 이만한 마력으로 땅굴을 뚫은 역사는 전무할 겁니다.”

그러면서 동의를 구하듯 내게 시선을 건네었다.

“때로 평생 마법을 접하지 못하고 시골에서 살아온 이들은, 마법을 기적이라고 말한다는데……. 이런 걸 보면 이해가 갑니다.”

그러면서 마스터의 뒷모습을 힐끔 보는 시선이, 경외를 담고 있었다. 가늠할 수 없을 만한 경지의 마법사. 그가 마스터를 얕잡아보는 것보다야 우러러보는 게 나을 터인데, 복잡한 심사를 한층 더 흐트러뜨리는 발언이었다.

이어진 말에 난 놓치고 있던 것을 퍼뜩 깨달았다.

“방향을 보건대, 유적으로부터 불러들인 힘이군요.”

유적으로부터? 그래, 마스터가 끌어낼 힘이 있다면 현재로써는 바란에 잠든 힘밖에 없다. 여기와 바란이 거리가 멀지 않고, 어쨌든 그건 마스터에게서 비롯한 힘이니까. 그러나 이상한 느낌이 찾아들었다. 바로 깨닫진 못했으되 잡힐 듯 말듯 모호한 감각이 나를 예리하게 긁고 지나간다. 무얼까.

궁금증이 도진 듯 생각에서 빠져나온 뤼비에가 곧 연달아 물었다.

“저 유적은, 마탑과는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어째서 저런 걸 바란에 방치해두고 있었던 거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건 마스터 역시도 그러했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고 마스터는 이유를 알지만 침묵한 것이다. 말없이 이 길의 끝이 어디인지 아는 양 걸음을 내딛고만 있는 마스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난 불현듯 깨달았다.

마스터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검의 마력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을. 그리고 바란에 잠든 힘이 내 검에 있는 마력과 유사하다는 것. 알고 있던 사실과 상충되는 현상에 순식간에 의혹이 나를 점령한다. 마스터에게 걸린 봉인은, 마탑의 마력과 마스터를 단절시킨다지 않았던가.

난 성큼 걸어나가 열 보쯤 앞서 있던 마스터를 잡아끌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그리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나뭇잎처럼 가벼운 몸의 마스터는 단숨에 뒤돌려졌다. 그러나 내 무례한 행동에도 그는 한 점의 동요도 담지 않은 고요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태도에 찬물을 끼얹듯 마음이 싹 가라앉았다. 사실이 다르다고 해서 섣불리 그를 추궁하려고 드는 건 애초부터 의심을 품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리라.

나는 되도록 침착하게, 흥분하지 않은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뤼비에의 귀에 닿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탑의 마력, 사용할 수 없다고 제겐-”

말씀하셨었잖아요. 몸을 숙이고 있어서 얼굴이 가까웠다. 얕은 호흡이 그에게 닿다가 내게로 돌아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작은 변화라도 눈에 띌 만한 거리였다.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음에도 마스터는 그 지독한 무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움직여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피치 못한 상황이니 시험해본 것뿐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가능하더군.”

“그럼 그 방식으로, 마법을 다시 쓰실 수 있겠어요?”

느끼기에, 유적이 보유한 마력 전부를 끌어낸 건 아닌 듯이 느껴졌다. 그렇다는 건 그 마력 전부를 운용할 수 있다면…… 시온의 힘이 약화된 이상 마스터도 그들과 해볼 만해진 거 아닌가. 어쨌거나 중대한 사실이었다. 한 번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 할 정도로.

그러나 마스터의 답변은 내가 기대한 바와는 달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저돌적인 방식으로 마력을 움직이는 것뿐. 그조차도 형태를 가지고 행사되는 마법과 구분되니 한계가 있을밖에. 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마스터는 손을 들어 내 손을 떼어냈다.

“이곳을 벗어나서 이어 말하지.”

깔끔하게 나를 끊어낸 마스터는 걸음을 옮겼다. 일순 나를 향한 건, 믿음을 구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그것이 왠지 싸늘하게 가슴에 박혔다. 그는 항상 나와의 관계에서 우위에 선다. 정말로, 내가 바라는 것을 그만이 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껏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던 자의 몸에 밴 오만인지 나는 그것을 분간할 수 없었다.

단 하나, 알고 있는 건 마스터가 이제까지 내게 거짓을 말하지 않았단 것뿐. 하지만 그건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종류였다.

당당하면 확실히 뭐가 있어 뵌다. 정말 뭐가 있든 그렇지 않든. 난 그 말을 진리로 실감하며 마스터를 제법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러면서도 발걸음은 충실히 길을 따라서 그를 쫓았다.

곧 이라칼이 뭔가를 깨달은 듯이 마스터를 등에 업었기에, 우리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통로를 주파할 수 있었다. 두 시간쯤 지나, 국경지대에서 벗어나 바란에 많이 가까워졌을 거라고 여길 때쯤 비스듬하게 위쪽으로 향하던 통로의 경사가 갑자기 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걸어서 올라갈 수는 있다지만, 등산을 하듯 가파른 길이다. 그 끝에서 바람의 흐름이 전해졌다. 바깥은 아직 새벽에 가까운 밤일 터라 컴컴한 건 여전했다. 이대로 쭉 가도 되나 싶어서 난 물었다.

“이 통로, 바란 쪽에서도 알아채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왜 여긴 사람이 없지? 슬슬 속도를 따라붙느라 힘들어지는지 뤼비에가 땀이 밴 얼굴로 술술 설명했다.

“바란에는 마법사가 드뭅니다. 유적지 쪽으로 자꾸만 탐사를 시도해서, 마법사길드와 갈등을 빚고 있기도 하고요. 거의 모든 마법사는 마법사길드 소속이니까요. 그리고 그들 중 다수가 국경을 틀어막는데 모집되었죠.”

“바란에서 방출된 힘이 두 갈래로 갈리지 않았습니까. 하나는 아마 지상에 있는 마법사들을 휩쓸었을 거고, 하나는 이렇듯 땅속에 길을 내었죠. 전자의 마력이 더 강하니 아마 여기까지 당장은 알아내기 어려울 겁니다.”

“죽었을까.”

나도 모르게 그리 중얼거리자 뤼비에는 거침없이 응답했다.

“마법사길드 쪽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죽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당분간 마력 운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중상을 입었을 겁니다. 마탑의 마법사로서 체감하시기는 어려울 테지만, 탑의 마력이라는 건, 확실히 인간이 운용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는 경향이 있어요.”

그리고 묘한 빛이 번뜩이는 눈으로, 덧붙였다.

“아주 경이적입니다.”

“……당신은 마탑의 마법사가 되고 싶은 건가?”

그 질문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뤼비에는, 마탑의 마법사들과 성향이 무척 유사하다. 나보단 적응을 잘하겠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특권은 아니고 그를 받아들일 권리가 내겐 없다. 하지만 마탑의 존재를 아는 마법사들이라면, 은연중에 바라고 있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걸 결정할 만한 권한을 가진 마스터가 여기에 있었고. 그러니- 그걸 미끼로 그를 좀 부려먹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계산에서 한 말이었다.

“아니오.”

너무도 딱 부러지는 대답이 들려와 좀 놀랐다.

“어째서? 당신은 흑마법사잖아. 마법사길드에 쫓기는 몸이니 마탑에 몸을 의탁하는 게 좋지 않나.”

“세상에 무상으로 주어지는 건 없습니다. 모두가 탐하는 많은 힘은, 그만한 대가를 요구하기 마련이지요. 마탑의 계약방식을 미루어보아 그 대가가 작으리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저는 어딘가에 묶여 제약받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요.”

“당신이 추구하는 진리에 대한 해답이 마탑에 있어도?”

뤼비에는 거기서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건 좀 끌리는군요. 하지만, 예. 지금으로선 그렇습니다.”

아까보다 여지를 둔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만큼이나 의지가 확고한 자조차도, 마탑이 내미는 독이 든 사과 앞에 흔들리고 만다. 그러니 막다른 절벽에 서 있는 자라면 오죽할까. 죽음을 앞두고 선택을 강요당한 내게 어쩔 도리가 없었음을 확신시켜주는 듯하다.

난 흘낏 마스터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들렸을 텐데도 듣지 않은 양, 실제로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이 걸음을 옮기는 마스터가 뤼비에의 말을 자유란 게 어떠한 의미인지, 시온들이 왜 반역을 저질렀는지 조금이나마 헤아리려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헛된 기대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곧 우리는 통로를 빠져나와 밤하늘 아래 섰다. 나무가 우거지지 않은, 듬성듬성한 숲. 맑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든다. 나는 탐욕스레 숨을 빨아들였다. 고작 반나절 가량의 시간 동안 땅속을 지났을 뿐인데 갇힌 듯이 답답하여 빨리 지상에 도달하고 싶던 차이기에 상쾌함이 더했다.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이라니, 등골이 오싹하다. 정말 생매장될 뻔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다행히 무사하긴 했으나 트라우마가 남았는지 다신 땅굴 같은 데 들어가고 싶지 않다. 진심으로.

나는 슥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밖에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온통 고요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저편. 먼 곳에서부터 번져오는, 하늘에 찬연한 별을 가릴 만치 밝은 불빛. 원시적으로 피워낸 불이 대부분인 이곳 세계에서 흔치 않은, 도시의 야경처럼 인위적인 불빛으로 물든 그곳.

“바란이로군요.”

나보다 먼저, 뤼비에가 읊조렸다.

“유적의 힘으로 낮과 밤이 구별이 되지 않게 밝음을 유지한다고 하지요.”

일시에 그만한 마력을 분출해내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빛에 휩싸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바란. 나는 묘한 감흥에 사로잡힌 채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저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유적이란 어떤 것일지 예상할 수 없으나, 단 한 가지 알고 있는 건 마스터가 마력을 되찾기 위해선 저곳에 가야 한다는 것.

그러나 내가 품은 바람은 그와 유사한, 그러나 또 다른 색채를 띤다. 어쩌면 저곳에서 나는 마스터의 비밀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알아내야만 했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몇 안 되는 기회이기에.

저 멀리서 밝게 피어오르는 불빛이 그 사실을 새기듯 아릴 만치 안구를 쪼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 장의 마무리.... 다음 편부터는 다음 챕터가 시작됩니다.

단편집 아직도 원고를 못낸 사람이 있어서 -ㄱ 늦어질 것 같아요. 그래도 4월내에 출간되도록 노력해보기로. 사실 전 별로 할건 없고 원고 넘기라고 쪼는 중(...)

주말 잘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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