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4 9. 여정 =========================================================================
꼼짝없이 갇혀버린 신세이건만, 빠져나가야겠단 말을 너무도 쉽게 내뱉어서 그에겐 뭔가 방법이 있나 싶었다. 게다가 죽을 뻔한 상황인데도 저 얼굴, 태도, 너무도 여유가 넘친다. 그래서 난 의심쩍게 물었다.
“어떻게?”
“그거야 대단하신 마탑의 마법사님들이 알아서 하셔야지요. 설마 여기서 이대로 죽을 생각이신 건 아니겠지요?”
능청스럽게 말하며 손을 모으는 낯짝을 한 대 후려갈겨주고 싶었다. 문득 이상한 감각이 스쳤다. 설마 이 자…….
“당신은 똑똑하지.”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똑똑한 당신이라면, 그 아저씨의 배신을 예상범주에 넣었겠군? 가다가 마법사 길드에 들킬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고 말이야.”
미묘하게 움직임이 이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난 확인사살을 날렸다.
“그래서 굳이 우리를 끌어들인 거지? 혹시나 일이 잘못되어도, 우리한테 붙어서 살아남을 셈으로 말이야.”
“아니, 뭐……. 유적에 관심이 깊은 것도 사실입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요.”
그리 말하며 그는 빙긋 웃었다. 얄밉긴 한데 또 뭐라고 하긴 그런 게, 그라고 해서 일이 이렇게 되라고 빌지는 않았을 것이다. 않았…겠지? 그의 성격상 마탑의 마법사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궁금해할 것 같긴 한데, 제 목숨을 내걸고 모험을 감수하지는……. 아니, 그것도 장담 못 하겠다. 지식욕 때문에 흑마법사가 되었다고, 제 입으로 말한 자가 아닌가.
“…….”
고뇌에 잠긴 난 한차례 고개를 흔드는 것만으로 잡념을 털어버렸다. 여하간 지금 중요한 건, 여기를 빠져나가는 일이다. 마법을 통한다면 이 땅속에서 벗어나기 어렵지 않겠지만, 마법을 사용해야 하는 게 문제였다. 어쩔 수 없다고는 하나 이미 한 번 마스터의 경고를 어겼다. 땅속이라곤 해도 마법사길드라면 마법이 사용되었단 정도는 인지하고는 있으리라. 그들로선 조금 전의 마력 방출을 최후의 발악 정도로 여길 가능성이 높았지만.
“어쩌지요?”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여길 빠져나가는 방법, 내가 알 리 없잖아. 우리가 갇힌 공간은 완전히 밀폐된 좁은 공간. 네 명이나 되는 사람이 들어차 있다. 곧 공기가 부족할 테니, 빠르게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곳의 위치는.”
내가 만들어놓은 얼음 굴을 슥 훑은 마스터가 묻자 뤼비에가 냉큼 답해왔다.
“국경선에서 아주 근접한 장소일 겁니다. 아직 국경을 지나지는 못했을 거고요.”
마스터의 시선이 허공에서 고정되었다. 섬뜩한 두 개의 손가락이 남겨진 쪽, 정확히는 우리가 가던 방향. 무슨 방법이 있는 걸까?
그리고 마스터는 말 대신 행동으로 내 의문에 답했다. 동식물에서나 느껴질 법한 아주 미약한 마력. 마스터의 몸에 고인 그것이 술렁였다. 아지랑이처럼, 분사된 물처럼 그의 몸 주위로 흐릿하게 이지러지는 것을 나는 눈으로 보듯이 느꼈다.
아무리 작은 마력이라도, 마력을 이끄는 것은 결국 의지. 더군다나 내 마력의 근원은 마스터이니. 내게 주어진 힘이나 내 것이 아닌 듯하다. 주인의 부름이 답하듯 전신의 마력이 꿈틀거리며 반응한다. 내 안의 마력이 육체의 태를 벗어나 피부 바깥으로 스며 나온다. 낯설고, 침범당한 듯 불쾌하기도 하다. 참을 수 없는 배설과 흡사한, 그보다 어찌할 수 없이 무력한. 그건 흡사 내 몸이 통제당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두렵고, 반감이 솟아올라 난 주먹을 틀어쥐었다.
그가 준 힘이다. 그래도 내 것이었다. 꼭두각시처럼 의지까지 앗아가지는 않는다고 한들 내가 보관 창고도 아니고 내 안에 있는 힘이 언제든 그를 따를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기분 좋을 리 없다.
그러나 다행히, 마스터가 하려는 일엔 마력이 그리 필요치 않았다. 마법인가, 아니면.
훅 일어난 먼지가 고요히 내리깔리듯 그의 눈이 덮였다. 얇은 살갗이 푸른 한설 속에서 도드라지는 심연을 가린다. 일정하게 내쉬어지던 호흡이 멎는 듯했다. 빨려 들어가는 듯, 고도의 집중력이 느껴진다.
마법이라기보단, 그보다 한 차원 위의 영적인 동작. 관찰하려고 새겨보고 있으나, 실상 홀린 것에 불과하다. 시선을 강탈당해 그에게서 일어나는, 아니 그가 일으키는 현상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순금빛, 어디선가 본 듯한 은은하고 유순한 빛이 금테를 두른 듯 그에게 맺혔다. 어디선가……. 그 숲. 맺히는 이슬조차 금으로 만들어버릴 것 같은 비현실적인 금빛 숲. 무의식 속에 존재하던 그 풍경에 마스터에게서 엿보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어둠과 빛은 낮과 밤처럼 한 몸이니 검은 마력의 소유자인 마스터가 금빛을 머금은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그러나 이건 달랐다. 짙은 어둠 속에 꽁꽁 싸여, 가려지고 숨겨져 있던 그 심연 아래 가라앉은 본연의 빛, 근원이 새어나와 물들이는 듯이- 조금 드러났기에 은은하게 여겨졌을 뿐, 실상은 광포하고 강렬한 빛이다. 숲처럼 강대한 생명력. 전율할 만치 강력한 마력.
그러나 그 모든 건 봉인된 채 단절에 이르렀으니, 여기에 남은 것은 실자락처럼 가느다란 잔재, 힘의 파편. 그 미약한 마력만으로 무얼 할 수 있기에?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을, 난 곧 떠올릴 수 있었다. 마스터가 내게 전해준 수많은 지식 중 곁다리에 놓인 한 가지 지식.
영성(靈性). 육신이 아닌 영이 가진 힘. 육신에 구애받지 않는 본질의 힘. 인간이 아닌, 인간을 초월한 어떤 존재나 가지고 있는 의지의 힘. 그것은 그 존재만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니, 이라칼이 스스로 마스터를 따른 것도 그 같은 이치였다.
그리하여 그가 눈을 부릅떴을 때, 그의 눈은 완벽한 금색이었다. 나는 사람의 눈이 그토록 신비로울 수 있다고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따사롭고 때로는 모든 것을 불사를 듯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사람 눈에 옮겨놓은 듯했다. 날개가 녹아버릴 것을 알면서도, 더 높은 곳을 향해 날았던 이카루스가 이해가 될 것처럼, 그리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감각을 이름한다면, 매혹이라기보다는 감동.
그리고 마스터는, 의지로서 불러들였다. 제 영에 새겨진 대로, 제가 가진 권한으로 명했다. 그는 절대적인 것.
금빛이 걷히고, 다시 어둠이 내려앉은 마스터는 정적에 잠겼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했다. 실제로 찰나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정적은 곧 깨어졌다. 쿠르릉! 돌연 둔중한 충격이 우리가 갇힌 빙굴을 강타했다. 고막을 뭉개는 것 같은 소리에 난 귀를 틀어막았다. 몸을 바로 세울 수 없는 충격이 온몸에 저릿하게 퍼져나간다. 운석이 지면이 강타한 듯, 위로부터 전해져오는 파동이었다. 얼어붙은 굴이 온통 떨리니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벽에선 하얀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이 작은 굴이 깨어져 버렸다면 토사에 휩싸였을진대,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닌 듯하다.
이 땅속까지 전달되는 지울 수 없는 굉음. 난데없는 일격이었다. 아마 저 위는 초토화되어 있으리라. 벼락이라도 떨어지게 한 것인지, 도통 짐작이 가질 않았다.
“뭘 하신 거예요?”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난 조금 순화해서 물음을 꺼냈다. 그러나 급히 입을 다물다, 혀를 깨물 뻔했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저 앞, 바란 쪽에서부터 이곳까지 물밀 듯이 마력이 뻗어오고 있었다. 송곳처럼 이 땅속을 일렬로 관통하면서. 그 날카롭고 뾰족한 끝이 이 공간을 꿰뚫어 우릴 한 줌 핏덩이로 만들어버릴 듯했다. 그건 닥쳐오는 해일을 보고 선 기분이었다. 가뜩이나 마력이 몸에서 흘러나와 있으니, 그려지듯이 그 파동이 잡혔다.
절박한 위기감에 난 결계를 치려고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내 손목을 곧바로 뻗어진 다른 손이 잡아낸다. 거의 힘이 들어가지 않은, 작은 손. 뿌리쳐내려고 마음만 먹으면, 쉽사리 뿌리칠 수 있는.
그러나 솟구치려던 마력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그건 마스터가 영을 통해 내게 명을 내리거나, 나를 움직이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간단한 제지의 동작. 나는 그 동작이 품고 있는 뜻에 따랐다. 내가 그 뜻에 따르게 한 것은, 마스터에 대한 믿음. 그가 틀릴 리 없다는 믿음.
두렵고 이해하지 못하여 그에게서 도망치려고 들면서도, 따른다니. 그게 말이 될 성싶은가. 묘한 굴욕감이 나를 휩싼다. 이 짧은, 사고를 거치지 않은 중단이 내가 마스터에게 얼마만큼 길들어 있는지 증명하는 것 같았기에.
결과적으로, 내 선택은 옳았다. 그리하여 마스터는 옳았다.
드릴처럼 땅을 후벼 파며 이리로 전진해오던 힘은 바로 이 얼음동굴을 앞에 두고 질주하던 열차가 종착역에 도달한 듯 멈춰 섰다. 마스터가 턱짓하자 이라칼이 곧바로 나섰다.
두 개의 손가락. 사람 시체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라칼은 그 앞에 섰다. 인간 흉내를 내느라 가지고 있는 검을 뽑아 전력을 다해 벽에 내리꽂았다. 콰직! 손잡이만 남고 쑥 들어간 검을 보아하니, 그의 괴력이 대충 짐작이 갔다. 그대로 검을 빙 돌리자 빙판에 구멍을 내듯이 얼음 위로 길이 생겼다. 사람 하나는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선을 그리며 입구를 파낸 그는 검을 다시 허리춤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서, 손바닥으로 얼음벽을 후려쳤다.
콰작! 거친 단면이 밀려나는 소리를 내며, 저편으로 떨어졌다. 그 안에는 뻥 뚫린 암흑이 도사리고 있었다. 지저 세계로 가는 길인가, 두려울 만치 아득하다.
컴컴한 앞길로 뤼비에가 밝힌 빛의 구가 나비처럼 날아들었다. 토사가 벽에 압축되어 그대로 바위로 변질된 양 안은 놀랍도록 매끄러웠다. 직렬로 길을 파내며, 존재하지 않는 지하 통로를 단숨에 만들어낸 흔적. 이는 분명 마력이 한 일이다. 그것도 엄청난 마력이. 근데 이 마력은 어디에서 온 거지?
의문을 떠올리며 새로 이어진 길로 들어서려던 난 문득 발을 멈추었다. 그 안에 널브러져 있는, 깨지다 만 얼음덩이. 불빛이 완벽하게 비춰내고 있지는 않으나, 그 덩어리 안에 갇힌 형체가 엿보였다.
사람, 죽음……. 시체.
얼음에 가려져 있고 용케 원형을 유지한 듯해서 비위를 상하게 하진 않았지만, 눈뜨고 보기 어려운 몰골인 건 분명했다. 그도 가엾은 운명이다. 잡화점 주인이 배반을 했건 어쨌건, 그는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곤 짐작하지 못했을 텐데.
하지만 시체를 꺼내어 운반하거나 곱게 묻어줄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다. 걸음을 지체하기 어렵단 이유보다는 거기에 가까이 가기가 싫었다. 내가 장의사도 아니고 시체에 익숙할 리 없잖은가.
이라칼과 마스터는 그게 거기 있건 말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는데 반해, 난 신경이 쓰여 머뭇거렸다. 남은 한 사람, 뤼비에는 도리어 그 시체에 가까이 갔다. 심지어 허리를 숙여 슥 살펴본다. 뭐야, 이런데도 실험 정신이 들어?
뤼비에는 나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돈은 그대로 가지고 있을 겁니다. 회수 안 하십니까?”
그 물음을 이해하자마자 구역질이 치밀었다. 진심으로. 내가 치를 떠는 표정을 짓자, 뤼비에는 흐음,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회수하실 생각은 없는 듯하고, 그러면 이건 임자 없는 돈이군요. 제가 가져도?”
“맘대로 해!”
난 경악감에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그쪽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얼음을 어찌 깨어서 시체로부터 돈주머니를 확보했는지 곧 뤼비에가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제야 액수가 꽤 크단 게 기억이 났다. 그리고 뤼비에가 그리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다는 것도.
워낙 무정하고 자기중심적인 마법사이니 그럴 만도 하다 싶어서 이해가 가면서도, 애도하긴커녕 돈주머니부터 챙기고 보는 행태에 질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보다 더한 이들을 접한 적이 없었다면, 이해에 앞서 반감만이 나를 잠식했으리라.
============================ 작품 후기 ============================
단편 원고 마감을 끝냈습니다. 근데 이거 연합 단편집을 내기로는 했으나(이북)
아직 업체를 생각해보지 않아서(...) 고민을 좀 해봐야할듯 싶어요. 어디서 내려나.
봄 분위기 풀풀 풍기는 애달픈 동양풍 로맨스로 썼어요(해피엔딩). 정말 그런 분위기일지는 장담할 수 음슴. 저도 몰라요.... 안 쓰던 스타일로 쓰다가 진빠져 죽을 뻔 했어요. 수록된 내용은 로판, 현대 로맨스, 동양풍 로맨스, 해외 로맨스(?) 스타일이 다양다양.
봄을 주제로 한 로맨스 소설인데 별로 통일성은 없는 거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