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3 9. 여정 =========================================================================
“그렇지요. 때문에 관문에서 수색이 강화될 겁니다.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을 이곳이 아니라 말입니다.”
자신만만한 대꾸가 심히 거슬렸던 난 슬며시 트집을 잡아 보았다.
“그거, 반대로 짚어보면 뻔하게 관문으로는 통과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한 번 더 꼬아서 관문을 노릴 가능성을 그들로선 간과할 수 없을 겁니다. 인력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으니 자연히 다른 쪽으로 돌아가는 시선은 줄어들 수밖에요.”
달리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가는 길이 험난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했기에 곧 좁은 동굴은 온통 잔잔한 발소리로 메워졌다.
뤼비에가 마법으로 환한 빛의 구를 만들어내 띄운 덕에, 우리는 어둠에 잠기지 않고 길을 지날 수 있었다. 그도 이럴 때는 꽤 쓸모가 있다.
동굴 내부는 거의 손보지 않은 양 험난했다. 때로는 뛰어내리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중간중간 훅 떨어져 깊이 패어 있거나 암벽을 등반하듯이 기어올라야할 만큼 가팔라서 숫제 탐험에 나선 듯한 기분이다.
계단까지 만들어 놓을 만큼 오가는 사람이 많은 길은 아니었지만, 편의를 위해서 밧줄이 쳐져있는 터라 그나마 다닐 만했다. 좁아졌다가 넓어졌다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자연동굴의 불규칙성을 그대로 따라가는 터널은 폐소공포증을 가졌거나 심히 체력이 약한 이라면 다 지나기도 전에 실신할 성싶었다.
앞선 사내는 수도 없이 이 동굴을 지나본 양 설렁설렁 다님에도 속도가 묘하게 빨랐다. 웬만한 이들이라면 쫓다가 나가떨어질 만도 하건만, 어딘지 초인이 된 나나 원래부터 인간이 아닌 이라칼은 그렇다 치고 몸이 건장하기는커녕 평생 펜만 쥐었을 서생 타입의 뤼비에도 별로 힘들지 않은 지 곧잘 따라갔다. 확실히 우리 일행 중 누구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스터는,
내색하지 않아도 거칠어진 숨이 공기 중에 번지니 표가 났다. 허약하기 그지없는 아이의 모습이니 그럴 만도 하지. 마냥 업고 다니기엔 비좁은 통로가 수시로 나와서 번거롭다. 대신 널찍한 공간이 나오면 이라칼이 마스터를 들어 안거나, 업고 받쳐주고, 내가 나설 것도 없이 온갖 봉양을 다 하여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마스터는 쓰러져버렸을지 모른다. 낄 자리도 없이 보란 듯이 이라칼이 유난을 떠는 게 또 눈꼴사나웠지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아무도 이 갑갑한 동굴 안에서 오래 쉬고 싶어 하지 않았고, 쫓기는 듯 불안감이 따랐기에 조금도 쉬지 않고 걸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안내역을 맡은 사내가 불쑥 뱉어냈다.
“반쯤 왔소.”
마차로 갈 만한 거리를 두 발로 가고 있으니 오래 걸릴 만도 한데, 생각보다는 짧은 듯싶었다. 아마 어디로 돌아가지 않고, 산을 관통하여 연결되는 직선 통로라서 그런 것 같다.
두 시간이라……. 컴컴한 앞길을 내다보며 난 한숨을 내쉬었다. 환기가 되니 숨 쉴 수 있을 터인데, 공기가 확실히 탁하다. 여기서 지체하기보단 빨리 상쾌한 바깥 공기로 호흡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조금 쉬어가는 편이, 마스터를 위해서도 나을 듯한데.
“국경은 통과한 건가요?”
“아직, 조금만 더 가면 국경을 지날 거요. 동굴의 삼 분의 이 정도를 못 미쳐서 바란이니.”
그리 들으니 여력이 되는 한 좀 더 걷다가 쉬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적어도 바란에 발을 들여야 한시름 놓을 수 있을 성싶으니.
“조금만 더 가서 쉬는 게 어때요.”
조심스럽게 묻자, 마스터는 고개를 까닥여 선뜻 긍정했다. 인내심이 좋다고 말하기 모호하게, 마스터는 거슬리는 것을 좀체 참지 않는 성미였다. 그러나 이 경우 본인의 고통에 무감하여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말하지 않을 이라서 마음에 걸렸다.
아직 말하지 않았단 건, 견딜 만하다는 뜻이리라. 나는 그리 스스로를 설득하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휴식은, 의도하지 않은 때에 찾아왔다.
좁은 구멍을 지나 천장이 탁 트인 공간으로 나아가던 차였다. 미세한 진동이 감각을 스쳤다. 그 뒤로 막대한 힘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 상이 그려지듯 생생했다. 그건 흡사 멀리서 밀려오는 해일 같았다. 이어 드릴로 땅을 파는 듯한 진동음이 고막을 괴롭혔다. 발밑의 돌이 달그락거리던 소리가 숫제 쇠구슬 담긴 주머니를 흔드는 양 소란스러워진다.
공간이 흔들리는 탓에 제대로 서기 어려워 난 다리에 힘을 주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마스터를 이라칼이 붙들어 세웠다.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진이라고 하기엔, 인위의 마력이 짓누르는 듯이 느껴졌다. 위에서부터 찍어내리는 강대한 마법의 기운. 그 모든 게 아주 잠시 앞선 조짐 이후에 비로소 내가 선 공간을 덮쳤다. 그 뒤로 내가 무얼 한 것은, 그저 본능이었다.
콰광!
터져나갈 듯한 굉음이 사방을 울린다. 난 마스터를 낚아채다시피 품에 끌어넣고 감싼 채 몸을 웅크렸다. 따로 챙겨둔 검을 찾아서 꺼내들 여유 따윈 없었다. 피치 못할 상황이라, 뇌리에 새기고 있던 금제가 풀렸다.
온몸의 마력이 한껏 떨치고 일어나 결계를 그려, 이 지하 깊은 곳, 위로부터 내리누르는 토사들을 막아내었다. 여태 죽은 듯이 숨기고 있던 마력을 이토록 단시간에, 힘껏 끌어내자니 잠깐 숨이 가빠왔다.
과다한 힘의 방출. 마스터가 내내 주의시킨 대로, 경각심이 솟아올랐다. 시온이 아무리 약화되었다곤 하나, 우연히라도 그들의 이목에 잡혔다간 돌이킬 수 없다. 마법을 가급적 펼쳐서는 안 된다는 명제가 솟아올라 뇌리를 점령했다.
나는 서서히 전력을 다해 뽑아내었던 마력의 강도를 줄여나갔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나 그 안에서 조절할 필요가 있다. 이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 정도만, 딱 그 정도로 마력을 최소화해야 한다.
“빙결.”
내게 깔리다시피 한 마스터가 짤막하게 지시했다. 빙결? 생각은 찰나, 실행은 빛처럼 이어졌다. 온몸에서 뻗어 나간 마력이 순식간에 의지를 담아 화했다.
콰지직!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냉기가 가지를 뻗었다. 순식간에 푸릇하게 얼어붙어 무너져 내리는 공간을 지탱했다. 마력을 부을수록 얼음은 두께를 더하게 내부를 비좁게 만들었으나, 깊은 땅속의 압력을 견뎌야만 했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 위와 옆으로 형성된 두꺼운 얼음벽이 보였다.
“괜찮으세요?”
나는 신음처럼 물으며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꽤 넓은 구간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일어설 공간은 확보되었다. 만약 비좁은 데에서 이런 사고가 났다면, 어떻게 대처했을지 머리가 다 아찔했다. 그랬을 경우 나는 마탑에 들키고 자시고 생각할 것도 없이 이곳을 부수며 위로 솟구쳐 빠져나가는 방법을 택했으리라. 이처럼 마력이 비틀린 공간에서 이동마법을 펼치는 건, 내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게 뭔 일이야.”
마스터가 멀쩡한 듯이 일어나 앉는 동시에, 옆쪽에 나자빠져 있던 이라칼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마법을 아낌없이 펼친 덕에 가까이 있던 그 역시 영향권 내에 들었나 보다. 워낙 다급한 상황이다 보니 마스터를 감싸는 것 외엔 생각도 못 했는데……. 뭐 여기서 죽지 않을 것 같긴 했다.
짝짝, 다른 편에서 얼빠진 박수가 들려왔다.
“굉장하군요!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감탄한 듯 침착하게 말하긴 했지만, 그의 이마에선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하얗게 질린 안색이며 흐트러진 마력을 보아하니, 짧은 순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마법을 펼쳤나보다. 우리가 있던 홀은 꽤 넓었으니, 내가 벽을 얼릴 때 정신을 차리고 이리로 다가붙었으면 목숨 건지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남은 한 명은?
“그자는 어디 있지?”
두리번거리자, 손을 들어 보인 뤼비에가 제 등 뒤, 즉 우리가 가던 방향을 가리켰다.
“저건가 봅니다.”
처음엔 냉기로 파래진 벽만 보여, 난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없는데?
“자세히 보십시오.”
뤼비에의 말을 듣고, 찬찬히 벽면을 살폈다. 그러다가 불현듯 시선이 붙들렸다.
“이, 이건.”
작고 동그란, 두 개의 돌기. 거의 튀어나오지 않아서 벽에 새겨진 조각처럼 일체가 된 듯이 보였다. 인지하지 못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 만큼 벽면과 유사한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냉기가 훅 끼쳐온 듯, 난 즉시 그 돌기의 정체를 깨달았다. 손가락의 끄트머리. 마치 이리로 급히 손을 뻗다가 그대로 묻혀 얼어버린 것처럼. 소름이 등골 위로 치달렸다. 가슴 한구석, 사납게 후려친 스산한 바람. 머리가 얼얼하다.
“처음 토사가 무너질 때 깔렸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한 뤼비에가 혀를 찼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저도 제 몸 하나 건사하기 바빠서 신경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여력이라면 차라리 내 쪽에 있었을 것이다. 미약한 죄책감이 가슴에 스몄다. 하지만 난 애써 조금 전까지 살아 숨 쉬던 사내의 시신이 묻힌 벽면으로부터 시선을 떼어냈다.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도, 여유가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노릇. 우선 여기를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가지? 잠시 고심해보던 난 꽝꽝 얼어붙은 벽면을 슥 훑어보며 물었다.
“마법사 길드의 소행이겠지?”
“달리 누가 있겠습니까?”
뤼비에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대단위의 마법, 확실히 당신을 죽이려는 목적 아니면 펼칠 이유가 없겠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길이라고 했잖아. 마법사 길드에서 어떻게 눈치챈 거지?”
“글쎄요, 국경지대를 샅샅이 포위한다곤 하나 땅속까지 결계를 쳐두진 않았을 겁니다.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관문이 아닌 다른 길을 통할 거라고 예측해서 여기를 찾았다기엔, 이 통로의 존재를 모를 거고요.”
“일부러 이 통로의 존재를 알려줘서, 당신이 통과하게 만들고 생매장해버리려는 고도의 술책이었다면?”
상대는 흑마법사, 어차피 제거해야 한다면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교묘하게 계책을 세웠을 만도 하다. 그러나 뤼비에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니오,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 똑똑하지 않거든요.”
잘 압니다, 라며 손가락을 치켜들며 뤼비에는 빙긋 웃었다. 이 상황에서 내보이기엔 다소 태평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제 시체를 원할 겁니다. 흑마법사의 목을 쳐서 내걸고 싶어 하는 쪽이거든요. 그래요, 본보기.”
누군가가 제 목을 쳐서 내걸고 싶어 한다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뤼비에는 어쩐지 그걸 언급하는 것을 무척 즐기는 듯이 보였다. 변태인가? 긴장감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인물 같다. 그건 분명, 감정적인 결여 쪽에 가까울 테지만.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
뤼비에는 침중하게 턱을 짚었다.
“ 이건, 그렇지. 배신이군요.”
우스꽝스러울 만치 과장되게 외친 뤼비에가 손바닥을 짝, 하고 내리쳤다.
“그 잡화점 주인이 말해버렸을 겁니다. 돌아가는 길에 발각되었든지, 아니면 포상금이 탐나서 본인이 말해버렸는지 둘 중 하나의 경우로요. 마을은 걸어 다니는 시체로 소란스러울 테니, 발각되었을 가능성은 낮겠고 본인이 제 발로 달려간 것이겠지요.”
일순 뤼비에의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스쳤다.
“하지만 흑마법사와의 거래내용에 대해선 함부로 떠드는 게 아닌데…….”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다. 통찰력 있는 양 잘난 체하더니 그도 별 거 없구나, 뒤통수를 맞게. 난 내심 코웃음 치며 정리했다.
“흑마법사가 있는 동굴로 뒤늦게 추적자를 들여보내느니, 어쩔 수 없이 동굴을 무너뜨려 버리는 쪽을 택한 거로군.”
“그것만으로도 마력 소모가 상당했을 터, 더 이상 뭔가를 하진 못할 겁니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지요.”
============================ 작품 후기 ============================
어쩌다 보니 끼게 되어서.... 아마 곧 단편집(봄을 주제로 한)을 낼 것 같아요.
마감이 내일 모레..... 봄을 소재로 한 로맨스 단편선이라 제가 써본 것중 가장 로맨스 비스무리하게 썼어요. 정말 안써져서 괜히 하기로 했다고 후회중.
여섯 명이서 함께 내는 단편집입니다. 별로 안 보셔도 돼요. 그냥 내는 데 의의가 있는 거라.....ㅎㅎ 글두 나오면 후기로 알림은 할듯.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