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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22화 (122/155)

00122  9. 여정  =========================================================================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길래 아이를 상자에 숨겨 다니는지 의심하는 눈치였으나 정작 그 아이가 너무도 평온하게 내 곁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국경을 통과하는 길이 부피가 큰 짐을 짊어지고 가기엔 좁다기에, 여기서부턴 마스터도 제 발로 걸을 터였다.

“따라오시구려.”

가게 안쪽으론 거대한 책장이 놓여 있었는데, 별로 학구적인 타입으로 보이지 않는 이 잡화점 주인에게 어울리지 않게 책이 한가득한 게 수상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영화에서 본대로 내 세계나 이쪽 세계나 사람들 발상은 똑같은 건지 잡화상 주인이 이곳저곳을 어루만지며 작업하기 무섭게 드르륵거리며 책장이 뒤로 밀려났다. 여닫이문처럼 열리는 구조였다. 그 뒤는 어두웠고, 지저로 향하는 입구인 양 좁은 계단이 아래로 뻗어 있었다.

“이동해서 마차를 탈 거요.”

그리 말한 주인아저씨가 등불을 들고 앞장서고, 뤼비에와 내가 이어 뒤를 따랐다. 내 바로 뒤에 선 것은 마스터, 마지막은 이라칼이었다. 내부가 어둑어둑하다곤 하나 마법을 배운 이후 시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내겐 걷는 데 그리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마스터는 그렇지 못한 모양이다. 아이가 걸어 내려가기엔 계단 한 칸 한 칸이 높은 데다가 이곳저곳 허물어져 있어서, 평범한 어른이라도 위태롭게 느꼈을 성싶었다. 내려서던 마스터는 결국 발을 헛디뎠다. 그가 넘어지기 전에 난 재빨리 마스터를 잡아주었다. 계속 발밑에 신경을 쓰고 있던 터라 마침 주의를 던지려던 참이었다.

“조심하세요.”

난 그를 바로 세우며 붙들었던 어깨를 놓아주었다. 그늘진 어둠처럼 짙은, 그러나 그 가운데 빛 한 점을 쏘아낸 양 흑요석처럼 은은한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나를 향하자 어쩐지 쑥스러워졌다. 나 역시, 이런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진 적이 있었지. 마스터가 타박을 던졌던, 그때에 난…….

기억 속에 박혀 있던 말캉한 감촉이 갑자기 살아나 난 입술을 어루만질 뻔했다. 왠지 낯이 확 달아오르는 듯하다. 다행히 마스터는, 이 어둠 속에서 내 변화를 감지할 만큼 시력이 좋지 않을 테지만.

“동생이라면서, 손이라도 잡아주시면 어떻습니까.”

앞서 가던 뤼비에가 평온하게 권해왔다. 아무 뜻도 없다기엔 묘하게 들리는 음색이었다. 동생이라고 구태여 우긴 걸 트집 잡고 싶은 건지. 난 못마땅하게 그를 노려봤다.

그러나 마스터를 업고 다닌 적도 있던 나로서는 손을 잡는 건 새삼 어려울 건 없는 일이었다. 이상스레 심장이 떨리는 것 빼곤.

난 손을 뻗어 가만히 선 마스터의 손을 움켜쥐었다. 작고 여린 손이 휘감겨 서늘한 기온을 전해주었다. 미동도 없이, 맞잡는다는 기색 없이 그저 내게 잡혀 있을 따름인, 그 순순한 이끌림.

고작 그것 뿐인데, 어찌 이리 가슴이 뛰는지 모를 일이라. 그 사소한 접촉이 사정없이 뛰는 심박 수를 그대로 전해줄까 봐, 난 걸음에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다.

……언제쯤 그에게 무뎌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모습으로는 좀, 위험하기도 하고.

계단을 따라 이른 곳은, 휑한 지하통로였다. 벽도 흙으로 되어 있고 달리 석재로 마감처리를 하지 않아, 지진이라도 나면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 같다. 쥐가 찍찍거리며 나돌아다니는 소리도 들려 난 잔뜩 곤두섰다. 쥐라니!

“이 통로는 마을 바깥쪽의 장소와 통해 있소. 거기에 마차를 준비시켜 놓았수.”

도대체 이런 통로는 어떻게 파놨는지 모를 일이다. 길이도 꽤 길어서 십여 분 이상 걸은 후에야 저 멀리 올라가는 계단이 나왔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사람 하나만 통과할 만큼 좁아진 통로의 끝엔 위로 들어 올리는 쇠뚜껑 같은 게 덮여 있었다. 지하실 형식으로 된 듯한 출구였다. 잡화점 주인이 얼핏 바깥의 동정을 살피다가 문을 위로 들자 기름칠을 해둔 듯 거의 소리 없이 뚜껑문이 열렸다. 시야가 약간 밝아지며 바깥 공기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주변에 나무덩굴이 치렁치렁하게 덮인 외진 장소였다. 모두 걸어 나오자 다시 덮인 뚜껑 문은 바닥과 거의 구별이 되지 않아서 완벽하게 통로의 존재를 감추어냈다.

규모가 크지 않은 국경 마을이라지만 그래도 우리가 들어선 잡화점은 사람들이 꽤 오가는 번화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결된 장소는 컴컴하여 불빛이라곤 별빛처럼 멀찍이서 비치는 게 전부였다.

마을 쪽으로 다시 갈 이유는 없었다. 거기서 몇 걸음 옮겨 수풀을 헤치고 나서자 허름한 건물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서 언뜻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잡화점 주인이 곧 마차를 끌어왔다.

“어서 타시오. 여기서 그곳까지 약 한 시간 반. 쉼 없이 달릴 거요.”

변소를 갈 거라면 미리 가두라고는 했는데 우리 중 누구도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것도 참 비인간적이다. 모두가 마차에 올라타자, 잡화점 주인이 채찍을 들었다. 곧 다가닥거리며 어둠 속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규칙적인 배경음에 귀를 기울이는데 불현듯 잡화점 주인이 말해왔다.

“경고해두겠는데, 내 알기론 별로 마법사 길드 쪽에서 얼쩡거리지 않는 장소이긴 하나 재수 없으면 마주칠지도 모르오. 이 근방을 종종 수색하곤 한다니까.”

“그건 제가 잘 처리해두었습니다.”

뤼비에가 그래도 뭔가 하긴 했다는 듯 자랑스레 손을 들어 보였다. 어떻게 처리를 했다는 건지 그 세세한 내역이 궁금해졌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일이 있었다. 난 잡화점 주인의 뒤통수를 응시하며 물었다.

“당신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있나요?”

돈이 좋기야 하겠지. 요구하는 액수가 많기도 많더니만. 이런 국경마을에서 그만큼 벌어서 뭐에 쓸까 궁금하긴 한데, 한탕 크게 벌고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도 있으니 돈벌이에 이유란 중요치 않다.

하지만 마법사길드와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인데……. 어째서 우리를 돕나 싶었다. 돈을 밝히긴 하지만 거기에 눈먼 타입으로 보이진 않는 사람이었다. 지능적인 면모도 있고.

마법사길드가 그토록 세력이 강성하다면 잡화점 주인 목숨쯤 우습게 보지 않을까. 이곳의 문명도를 보건대 재판 없이도 즉결 처형이 가능하리라.

그러나 잡화점 주인이 투덜거리는 말에, 정말로 말문이 막혔다.

“협박당해서 하는 거요. 돈이라도 많이 주니까 하지. 이거 들통 나면 사형감이라고.”

협박당한 것치곤 뭔가 적응을 잘 한 듯싶다. 체념이라기엔 뭐랄까 탐욕적이었다. 뤼비에가 팔짱을 낀 채 여상하게 답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협박은 그쪽이 먼저 했습니다. 아마 실행할 의지도 있어 보이더군요.”

자업자득이라기엔 상황이 묘했다. 어쨌든 우리를 별 탈 없이, 들키지 않고 국경 밖으로 내보내면 그에게도 득이 되는 거 아닌가. 잡화점 주인은 본전도 찾지 못하고 뭐라고 꿍시렁거렸다.

그런 와중에도 착실히 채찍질한 탓에 말은 쉼 없이 달렸다. 속도가 그리 빠르게 느껴지지 않았건만, 다듬어지지 않은 길이라 마차가 사정없이 요동쳐 멀미가 날 듯싶었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충격이 쿠션 없이 있는 그대로 전달된다고 할까. 그러나 다행히 내 몸은 그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튼튼했다.

이라칼 역시도 그건 마찬가지였지만, 마스터는 그러지 못해서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고통스럽다고 해서 티 내기는커녕 애초에 괴로운 걸 괴롭다고 말하는 데 익숙지 못한 성격이라. 난 품에서 담요를 끄집어내서 마스터를 대충 그 위에 앉게끔 했다. 딱딱한 의자 위에 앉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제 것도…….”

뤼비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틀어막으며 중얼댔지만 난 가차 없이 무시했다.

“구토하고 싶으면 창밖으로 뱉어.”

상당한 경지의 마법사로 유추되는 뤼비에가 멀미를 견뎌내지 못하는 걸 보면, 마탑의 마법에는 확실히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아니면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내가 멀미에 강하던가.

혹여 마차를 불러 세우는 일이 있을까, 난 바깥에 신경을 집중하며 긴장감을 유지했다. 그렇게 되질 않기를 바라고 있지만, 마법사길드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그땐…….

다행히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흑마법사를 만난 것에서 애초에 그리 재수가 좋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게 마법사길드와 맞부딪치게 될 불운을 뜻하지는 않는가 보다.

“다 왔소. 어서 갑시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잡화점 주인은 초조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정말 사형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듯 빨리 우리를 넘겨버리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언뜻 경사가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도착한 곳은 야트막한 산이었다. 언덕이라기엔 높았지만, 산맥 일부라기보단 고만고만한 높낮이의 숲에서 홀로 솟은 형태다.

우리가 뒤따르는 걸 확인한 잡화점 주인은 마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유독 경사가 진 바위 면에 다가섰다. 그리고 흙가루가 묻어나는 통짜 바위면-산 일부로 박혀 있는-에 대고 신호를 전하듯 간격을 두어 두드렸다. 다섯 번을 연달아 두드리고 끊어서 두 번, 그리고 또 끊어서 세 번.

잠시 후, 바위 면이 그르렁거리는 소음을 내며 옆으로 움직였다. 예상대로의 광경이나 실제로 보는 건 또 놀라워서 비밀통로며 은신처가 할리우드 영화 뺨친다는 생각만 들었다. 얼굴에 검은 반점이 두드러지는 중년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잡화점 주인이 사내에게 돈을 건네며 중얼거리다시피 말했다.

“말해둔 네 명일세.”

슥 훑으며 돈을 확인한 그가 손짓하자 잡화점 주인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가 목적지까지 안내해줄 거요. 나는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

그의 어깨를 툭 친 뤼비에가 앞장섰다. 빨리 마을로 돌아가고 싶은지 바로 돌아서 마차 쪽으로 향하는 그를 뒤로하고 우리는 새로 등장한 사내를 따랐다.

초로 밝힌 내부는 아까의 잡화점만큼이나 어두웠고, 비밀통로만큼이나 거주하기엔 비적합한 공간으로 보였다. 그러나 안쪽의 단단한 내벽과 자연의 흔적을 보건대 사람이 뚫은 동굴 같지는 않았다. 한 사람만이 통과할 수 있을 듯이 좁은 동굴은 끝없이, 무저갱으로 치닫는 듯이 암흑에 휩싸인 채 길게 뚫려있었다. 아득하다 못해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느낌.

바위 문이 닫히자, 완전히 동굴체험을 하는 기분이다. 아니, 동굴체험이 맞다. 다소 길고, 현실적인. 왜냐하면 우리는 이 동굴을 지나서 바란으로 가게 될 테니까.

내가 뤼비에게 들은 방도는 바로 그것이었다. 바란까지 뚫린 땅속 동굴. 아무도 모르고, 소수의 밀수꾼들만 쉬쉬하며 알고 있는 비밀통로였다. 자연동굴에 끝을 조금 더 파서 이어놨다나. 북한에서도 남침을 위해서 땅굴을 판 적이 있으니, 여기나 거기나 발상은 비슷한 듯하다.

돈을 받고 안내를 맡은 사내는 사무적인 얼굴로 말했다.

“그대로 날 따라오시면 되오. 좁아지는 곳도 있지만 거기만 지나면 걷는데 지장이 없을 거요.”

허공을, 정확히는 마을 쪽을 그리듯 바라보던 뤼비에가 바로 말했다.

“어서 가지요. 지금이 적기입니다.”

통로를 통과하는 순서는 이전과 같았다. 안내자, 뤼비에, 나, 마스터, 이라칼. 자연스레 그리 되었다.

그런데 적기라니. 그러고 보니 아까도 처리해두었다고 말했지. 무얼? 퍼뜩 의문이 번진 난 그를 따르며 작게 물었다.

“뭘 처리해두었다고 한 거야?”

“아아, 지금쯤 마을에서 시체가 돌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다들 좀 놀라긴 하겠지만, 별탈은 없을 테지요. 마법사길드가 근처에 있으니까요. 제가 마을을 떠나면 마법이 발동하도록 조처를 해놓았지요.”

“그럼 방금 전까지 당신이 마을에 있었단 게 들통이 나는 거잖아.”

“그렇지요. 때문에 관문에서 수색이 강화될 겁니다.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을 이곳이 아니라 말입니다.”

============================ 작품 후기 ============================

비밀땅굴행!

남침땅굴 가본 적 있었는데(두어번인가) 통일하면 정당하게 통로로 이용되지 않을까요(...) 그전에 지뢰를 제거해야겠지만.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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