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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21화 (121/155)

00121  9. 여정  =========================================================================

“준비는 마치셨습니까?”

성의 없는 노크 소리가 들리고, 이틀간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던 뤼비에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난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늦은 오후, 채비는 완벽히 마친 상태였다. 길거리에서 사람을 추적해오질 않나, 남의 방에 무단침입하지 않나 그간의 행태가 심히 의심스러운 탓에 고민을 좀 해보았지만, 그가 마법사길드원이라면 굳이 우리를 유인해낼 필요 없단 결론이 내려졌다.

우리는 꼴랑 세 명이고-무능력한 한 명을 포함해-국경지대에 포진한 마법사들은 수백에 달한다. 나라도 그들과 충돌하여 무사히 몸을 뺀다고, 무조건 장담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좀 더 손실을 피하기 위해 우릴 함정으로 인도하는 것도, 가능성은 있으나 마스터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뤼비에와 함께하기로.

무슨 근거가 있는지는 몰랐지만, 나는 마스터의 판단을 믿었다. 냉정하고 똑똑한 사람이니 오죽 알아서 했겠어. 더군다나 그렇게까지 지어내면서 철저하게 연기를 하기엔 잘난 척이 너무 심했다. 말도 많고 입도 근질근질한 타입으로 보였으니까. 그의 말만 믿고 따르긴 좀 못 미더워도 현실성 없는 방안 같지는 않았고.

“출발하죠.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인 뤼비에는 여관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하곤 십여 분 일찍 밖으로 나갔다. 생각 외로 내 로브는 용적량이 상당해서, 거의 모든 짐을 끌어넣을 수 있어서 외관상으로 보기에 우린 여행자라기엔 상당히 단출해 보였다. 다만, 마스터가 앉아있는 거대한 나무상자를 이라칼이 짊어진 걸 빼면.

뤼비에가 나타나기 전부터 줄곧 못마땅한 듯이 입을 삐죽거렸던 것치고 이라칼은 순순히 따라왔다. 마법생물인 그로서는 인간에게 의존하는 게 못 내켜하는 듯했지만, 마스터의 결정에 거역하지 못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였으니까.

“다음에 또 들려주십쇼!”

우렁찬 외침을 뒤로하고 여관을 나섰다. 남몰래 떠날까 하다가 그게 더 유난해 보일 듯하여, 경비가 모자라 돌아가겠다고 수더분한 여관 주인에게는 핑계를 대둔 상태였다. 저쪽 골목 편에서 뤼비에가 손을 흔들었다.

“우리까지 합류하기로 이야기는 잘되었어?”

이왕 말을 놓은 김에, 그의 동의 없이 앞으로 쭉 반말을 고수하기로 했는데 뤼비에는 별생각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물론이지요. 제가 일 처리 하나는 확실하거든요. 철두철미하지 않으면 흑마법사로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척살 당했겠지.”

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말을 들어보면 마법사길드에 적을 두긴 했다는 것 같은데, 그것도 유망주고…… 그 기대를 모두 저버리고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는 건, 소신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배신이다. 기존에 알던 사람들과 척을 지게 되는 선택이라면 목숨이 위태롭고 어쩌고 하는 문제를 떠나서, 좀 어렵지 않나.

물론 꿈이라거나 목표를 위해선 피치 못했다고 할만도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별로 고뇌한다거나 죄책감을 느낀다거나 하는 기색도 없이, 도리어 대수롭지 않은 양 가볍게 언급하고 말았다. 그의 과거와 인간관계에 대해선 아는 바 없지만, 그 선택이 보통 사람에게 결코 쉬웠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까 뤼비에라는 이 남자에게선, 마탑스러운 냄새가 났다. 원하는 바를 위해선 어떤 짓이든 가책 없이 감수할 수 있는 그러한 비인간적인 품성. 익숙하되 꺼려지는 것이라 그를 따르는 발길이 무거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건 어쨌건, 뤼비에는 여전히 평온한 기색을 유지한 채 걸음을 옮길 따름이었다. 몇 번 오갔던 거리를 지나며 침묵에 잠겨있던 내게 뤼비에가 다시금 말을 걸었다.

“제가 처음 당신을 발견했을 때 말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잡화상에 들어가는 날 봤다고 했지.”

그 정도 기억력은 있다고. 내심 투덜거리는데 문득, 예감이 스쳤다. 잡힐 듯이, 그러나 무엇인지 확연히 알 수 없는 어떤 감각이 심장을 자극한다. 뭘까?

뤼비에의 말이 이어졌다.

“네, 그 잡화상 주인 친절하고 수완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에게도 무척 친절하게 대하면서 알고 싶어 하는 정보에 대해서 말해주었겠지요. 당신은 그 보답으로 이것저것 물건을 샀을 거고요.”

“그, 렇지…….”

기분이 묘해졌다. 뤼비에의 말은 마치 그 주인아저씨가 그걸 의도했단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당연한 이야기다. 상점 주인이 손님에게 친절한 게, 특별한 일은 아니잖은가. 물건을 팔아야 하니까. 그런데?

“입이 가벼워서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있다고 느껴지는 사람의 말은 대개 의심하지 않지요. 진정성을 떠나서, 그 사람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는요.”

“잡화상 주인이, 내게 중요한 사실을 숨겼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바로 맞추셨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기에 바로 해답이 있지요.”

나는 잡화상 주인과 나누었던 대화를 빠르게 뇌리에서 끄집어 올렸다. 국경봉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가 무어라고 말했던가.

“밀수꾼……. 결계 때문에 샛길도 막혀버렸다고 했지.”

이상하게도 그는, 흑마법사에게 우호적이었다. 또한 바란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지 않던가. 그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게, 눈앞의 이 자라면.

“혹시 그와 당신이?”

매끄러운 투로 설명이 흘러나왔다.

“저도 이곳 마을에 와서 알게 된 사이입니다. 잡화상 주인이란 건 위장일 뿐 그는 이 마을에서 은밀한 거래를 도맡는 큰손이지요. 밀수꾼과 거래를 하기도 하여, 국경을 통과할 만한 길을 여럿 알고 있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마법사길드에도 몇 번 불려가기도 했고요.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말하지 않았더군요.”

차분한 음성에 웃음기가 어렸다.

“그래요, 저는 이 마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가 알고자 하는 걸,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잡화상 주인일 거란 걸 눈치챘습니다. 그는 솔직하고 입 가벼운 사람처럼 가장하고 있었거든요. 특히나- 타지에서 온 것이 분명한 낯선 사람에게는요. 그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지요.”

“협박한 건가?”

아무리 밀수 루트를 막고 있는 마법사길드가 마땅치 않다고 쳐도, 제정신이라면 흑마법사를 돕는 일 따윈 하지 않을 테니까.

“협박은 그쪽이 했습니다. 어디다가 발설하면 죽여서 땅에 파묻겠다고 했지요. 제가 누군지 몰랐거든요.”

“당신 수배 전단이 온 사방에 붙어 있잖아?”

말하면서도 알쏭달쏭해지는 게, 난 그 전단을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여관 주인이라면 범죄자들을 들이려고 하지 않을 테니, 이 자를 보았다면 눈치챌 만도 한데 그런 기색도 없었다.

“그 수배 전단에 올려진 건 제 얼굴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어린 시절 제 얼굴이지요. 저는 오래전부터 이런 일이 있을 걸 준비하고 마법사길드나 타마법사와는 서신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지요. 제 얼굴이 어떻다고 설명할 수 있는 자는 드뭅니다.”

준비된 이탈자라는 건가. 난 혀를 찼다. 그가 정보를 얻어낸 과정에 대해서 묻고 싶었지만, 어느덧 걸음은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 가게는 닫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들어가십시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를 따라 우리는 잡화상에 들어섰다. 가게 안에는 절약정신이 투철하게도 등불 두어 개만 켜져 있어서, 그 주위를 제외하곤 온통 컴컴하기만 했다.

어둠이 휩싸인 건물이 가져다주는 스산한 느낌에 불안해진 난 소근거렸다.

“그가 당신을 고발하지 않을까? 현상금이 있잖아.”

“가능성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기가 쉽진 않을 겁니다.”

낮게 울리는 음성은 묘한 여운을 담고 있었다. 인질이라도 잡았나? 미심쩍게 쳐다봤지만 그는 조금도 거리낌 없이 잡화점 안쪽으로 발길을 향했다. 이건 마치 수배당한 게 그가 아니라 나인 것 같다. 뤼비에한테선 자신감이 묻어났다. 힘이 있기에 갖는 자신감과는 다른,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기에 품은 자신감.

이 경우엔, 잡화상 주인이 뒤통수를 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었고 확신이었다. 뤼비에가 노크를 하자, 그제서야 안쪽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툭 튀어나왔다.

“아이고, 왔는가. 내가 좀 볼일을 보느라고.”

하하 웃는 얼굴이, 협박이 오간 사이치고는 친근해 보였다. 하지만 난 저 사람 좋은 얼굴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적어도 뤼비에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아니, 아가씨는?”

이 마을의 검은 손이었으니까. 잡화점 주인이 내 쪽을 보면서 화들짝 놀란 채 손가락질을 해댔다.

“같이 통과할 만한 사람을 데려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헌데. 괜찮겠나? 이러다가 혹시 들통이라도 나면.”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저만큼이나 은밀히 행동해야 하는 분들이니까요.”

“뭐 어디서 쫓기기라도 하는가? 이 동네 흑마법사는 자네밖에 없잖아.”

그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언급하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이라칼이 뒤쪽에서 위협적으로 발을 구르자, 잡화점 주인은 질문을 접었다. 그리고 대신 손을 내밀었다.

“5만 미너일세.”

……내 쪽으로.

“5만…… 이라고요?”

어이가 없을 정도로 큰 금액이 뇌리를 때려, 난 잠시 말을 잊었다. 이 마을에 와서 그동안 쓴 돈이 1000미너가 안 된다. 무슨 통행세를 그리 과하게 받는단 말인가. 주머니 사정상 부담이 될 만큼 큰돈은 아니었지만, 적은 돈도 아니었다.

잡화점 주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더 바짝 내밀었다.

“선불일세. 우리는 돈으로만 거래한단 말이지. 그 돈을 안 내면 통과가 안 되네. 내가 된다고 해도 저쪽에서 안 해줄 걸세.”

“어서 내시지요. 돈 많으신 거 다 압니다.”

등쳐먹는 사기꾼과 한통속이 된 태세로 뤼비에는 느긋하게 고갯짓했다. 그 요구하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당신 통행료도 내가 내게 되는 건가.”

“예리하시군요. 사실 제가 가진 돈이 별로 많지 않아서 말입니다. 곤란하게 되었다 했는데, 역시 사람은 머리를 써야지요.”

뤼비에는 멋쩍게 웃었다. 바란에서의 일이 있다곤 하나,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를 끌어들였단 게 더 그럴듯한 이유로 보였다. 어쩐지 설명이 부실하다 싶었더니, 이런 수작이었구나. 뤼비에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래도 제가 좀 할인을 받았습니다. 4명이면 인당 1만 5천씩 6만 미너거든요. 1만이나 할인을 받았지요.”

“내 흑마법사가 그리 흥정을 잘할 줄은 몰랐네만.”

잡화점 주인이 거들었다. 그러면서도 내게 내민 손은 거두질 않아서, 난 신경질적으로 품을 뒤적였다. 보석을 금화로 바꿔둔 것이 있어서 그럭저럭 액수가 맞아떨어졌다. 뤼비에의 것까지 내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 있나.

“그런데 왜 네 명입니까? 한 명은 어디로 가고? 나중에 합류하는 건 안 됩니다.”

잡화상 주인이 흡족하게 돈을 세어보며 하는 소리에 난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이라칼이 상자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마스터를 쑥 끌어 올렸다. 상자 안에서 아이가 튀어나오자 그는 비명을 지를 듯이 입을 떡 벌렸다.

“애 시, 시체인 줄 알았수.”

왜 아이를 물건처럼 상자에 넣어서 다니는 건지, 비인도적인 처사에 대한 비난의 눈초리가 따라왔다. 정작 마스터는 감정 없는 얼굴로 바닥에 바로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꼭 인형 같았다. 검은 손이라는 것치곤 도덕심 충만한 얼굴에 대고 난 짤막하게 답했다.

“사정이 있어서요.”

============================ 작품 후기 ============================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설날 중에 써보려고했는데 fail....z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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