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0 9. 여정 =========================================================================
청년의 눈빛이 변했다. 느물거렸던 이때까지와는 다르게 진지한 기색이 낯에 어렸다. 그는 결의를 다지는 양 놀랍도록 단호하게 답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어 스러질 몸, 죽음이 두려워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한다면 어찌 마법사다운 일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눈에 어른거리는 빛이 참으로 강렬했다. 마법사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지 모른 채 어쩌다 보니 마법사가 되어버린 나로서는, 고개를 수그리게 되는 기세였다.
하지만 뭔가 괴리감이 있었다. 그는 탄압에 맞서는 진정한 지식인처럼 굴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냥 사자를 농락하는 흑마법사 아니던가.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네 목적이 무엇이지?”
침묵만을 지키고 섰던 마스터가, 중요한 화제를 빗겨가고 있단 걸 지적하듯 입을 열었다. 차분한 음성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난 재빨리 말을 보태었다.
“우리는 당신을 도울 수 없어. 우리에겐 할 일이 있다고.”
마탑의 마법사라면, 마법사길드와도 맞서는 데 거리낌이 없으니 그가 도움을 바랄 만하다. 마탑이라면 사실상 유일하다시피 마법사길드가 물러서야 하는 상대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태도가 아니었지. 그는 굽히고 들어오긴커녕 유희를 즐기는 양 거슬리게 굴었다. 마치 조금도 아쉬운 게 없는 사람처럼. 실제로도 그의 눈빛은 다소 자신만만했다.
“도움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제가 바라는 건- 도움이 아니라 협력입니다.”
“협력……이라고?”
어리둥절해지는 발언이었다.
“바란으로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지체하길 원치 않으실 텐데, 국경은 봉쇄되어 있지요. 제게 계획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당신과 협력해야만 하지?”
“왜냐하면, 당신들이 강제로 국경을 돌파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마탑의 일반적인 방식임에도 말입니다.”
그건, 그랬다. 청년은 턱을 쓰다듬으며 제 짐작을 털어놓았다.
“그건 다시 말해서, 마법사길드와 맞설 수 없는 거겠지요.”
“억측…….”
“아니, 그럴 상황이 안 된다고, 해야 하나요?”
흐려진 말 틈새를 비집고 끼어든 그의 눈빛이 묘하게 번뜩였다.
“마탑의 마법사가 어떤 존재인지 압니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강력한 마력, 기나긴 수명, 냉혹함. 그들은 결코 자신을 숨기지 않지요. 정면에서 먼저 싸움을 걸진 않지만, 걸어온 싸움을 피하지도 않습니다. 세계를 정복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
“그러니 마법사길드를 앞두고 머뭇거린다는 건, 있지 못 할 일입니다. 실제로 제가 이렇게 거치적거리고 있음에도, 두 번이나 방에 침범했음에도 내버려두시지 않습니까. 원래라면 대화고 뭐고 할 것 없이, 제가 입을 열기 이전에 없애버리고도 남았을 텐데도요. 이쯤에서 제 첫 가정을 뒤엎어서 당신들이 마탑인이 아니라고 의심해봐야겠지만, 방금 확신을 가졌습니다. 실제로 당신이 절 보고 물컵을 던졌을 때, 물컵은 그 가녀린 팔뚝에서 나올 수 없는 물리적인 힘을 담고 있었거든요. 하마터면 피하지 못 할 뻔했습니다.”
예리한 놈, 그걸 또 포착했어.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물론 저는 경솔한 자가 아닙니다. 이렇듯 행동하기까지 면밀한 계산을 거쳤지요.”
이쯤 되면 잘난 척할 만도 한 것 같아서, 배알이 꼴리지만 뭐라고 하기가 그랬다.
“마탑의 마법사가 갑자기 조심스러워진 이유, 저는 그게 궁금하더군요. 뭐, 제 처지와 겹쳐보자면 마법사길드의 규율을 어겨 떨어져 나간 자들을 흑마법사라고 부르듯, 마탑에서도 떨어져 나간 이들이 있겠지요. 최초일진 저로서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뭐, 다른 가정도 있지만.”
그는 마스터에게 눌러 박듯이 시선을 주었다.
“이만한 미형이면, 부동심을 가진 마탑의 마법사라도 변태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군요. 그 때문에 탑 내에서 갈등이 촉발되어 피치 못하게 탈주하게 되는 상황이…….”
“그만.”
허황되게 뻗어나가는 떠벌거림을 듣다 보니 지칠 지경이다. 혼란하여 조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잠시 엉킨 머릿속을 풀어보려던 난, 마침 결정권자가 곁에 있었기에 복잡한 결정은 그에게 떠넘기기로 했다.
막 마스터를 부르려는 찰나, 흡사 마음을 읽어낸 것처럼 마스터가 명령했다.
“네 계획을 말해보아라.”
그래, 말 그대로 명령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가 마스터의 정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슬쩍 눈썹을 치켜뜬 청년은 한결 공손해진 투로 말했다.
“우선 자기소개를 먼저 하지요. 제 이름은 뤼비에라고 합니다.”
“펠.”
그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서, 난 입술을 깨물 뻔했다. 아니, 나한테는 달랑 마스터로 부르게 해놓고, 최근에야 알려준 그 비싼 이름을 생판 남한테 그리 냅다 공개하다니. 진짜 억울해서 팔짝 뛸 지경이다. 마스터야 이왕 밝혀졌으니 이리저리 까발려도 상관없단, 단순히 그런 걸지도 몰랐지만, 진짜 너무한 거 아냐? 분노마저 느껴졌다.
“아힌.”
이를 갈듯이 음성이 튀어나왔다.
“좋은 이름입니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제 계획은-”
그리 시작된 말은, 진중한 음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자신을 뤼비에라고 밝힌 이 흑마법사의 말이 끝났을 때쯤 난 의혹에 잠겨 있었다.
“해서,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다소 희망적인 관측으로 가득하긴 했지만, 그의 계획은 명쾌하고 일리가 있었다. 그런 방법이 있었단 말이야? 흔하다면 흔한 데, 지나치게 쉬워서 김이 빠지기도 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렇다면 우리는 뭘 해야 하지? 이대로라면 그가 애초에 짠 탈출 계획에 수저를 얹는 것에 불과하다. 그 점이 좀 의아했다.
“그 계획대로라면, 그쪽만 고생하고 우리는 별로 하는 게 없잖아?”
뤼비에는 능청스럽게 지적했다.
“별로라기 보단, 거의 하는 게 없단 쪽이 맞겠지요.”
“그럼 그쪽이 우리한테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거지요.”
해사하게 웃으며 말을 맺는데, 그 꿍꿍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왜 그렇게 하는 건데. 우리한테 바라는 게 뭐길래? 협력이라면서.”
“저는 다른 쪽에서 도움을 구할 겁니다. 바란에서 말이지요.”
“바란이라면……. 고대유적?”
마법에 대한 탐구욕 때문에 금기를 저질러 흑마법사가 된 자가 흥미를 보일 만한 거라면 그 외에 또 있을까. 짐작대로 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고대유적, 저는 그곳에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도 바란으로 향한다니, 그곳을 목적하고 있다고 유추합니다. 고대유적은 스스로 외부의 접근을 불허한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거니와, 바란에서의 경비도 삼엄할 테지만 마탑의 마법사께는 뭔가 방법이 있겠지요.”
난 힐끗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그 방법은 마스터에게 있었으므로 결정은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마스터가 결정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윽고 냉담한 선언이 떨어졌다.
“네 쓸모를 보겠다.”
“허면 고대 유적으로 절 인도해주시겠단 겁니까?”
“네 계획대로 국경을 통과하게 된다면.”
“그럼 이제 계약이 성립된 겁니다!”
그는 답지 않게 활짝 핀 미소를 지었다. 뭐 때문에 그리 기뻐하는지 아리송해 하는데, 청년이 선뜻 고백했다.
“마탑과의 계약이라니, 가슴이 두근거리는군요.”
실제 마탑과의 계약이 얼마나 가혹한지 알긴 알려나. 그게 누군가에겐 마스터의 평생 노예가 된다는 의미란 건 알지 모르겠네. 그의 환상을 와장창 깨주고 싶지만, 그것까지 까발릴 수는 없기에 심술부리는 건 참기로 했다.
“결행은 언제로?”
“이틀 후로 밤으로 하지요. 준비하실 시간이 필요할 것 아닙니까.”
자못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였다. 막 대화가 마무리되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뭐야, 이 자식은?”
살쾡이처럼 노란 눈을 빛내며 이라칼이 날을 세웠다. 으르렁거림 비슷한 소리가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입안에서 삐죽 돋는 송곳니를 발견한 뤼비에는 당황한 듯 양손을 들어보였다.
“어, 어. 그럼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슬슬 이라칼 옆을 돌아서 문밖으로 내빼었다. 물론 마스터가 친절히 말해줄 리 없으니, 설명은 내 몫이었다.
“저자, 믿을 만하긴 한가요?”
일련의 사연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마자, 이라칼이 이내 툴툴거리며 마스터에게 물었다. 나도 별로 믿음이 가진 않지만, 마스터가 결정한 사안인데 어쩌겠어?
“다른 방법이 있는가.”
그 한 마디에, 이라칼은 급격히 찌그러들었다. 그래, 뤼비에는 분명히 방법을 말해주었다. 누구나가 쓸 수 있는, 그러나 정보를 알고 있거나 마법으로 탐색하지 않는 이상 모래알 속에서 사금을 찾아내는 것만큼 막막한 방법이었다. 마을 사람을 붙들고 일일이 물어볼 수도 없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뤼비에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중요한 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아서 그와 함께하는 것 외에 당장, 다른 방도를 찾기 어려웠다. 뤼비에를 밀고해버리는 것도 좋은 생각일 테지만, 붙잡힌 뤼비에가 우리에 대해 불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긴 어려웠다. 더군다나 일단 약속한 이상 마스터가 그렇게 하지는 않으리라.
“마법사길드가 지키는 국경을 통과하지 않고, 바란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니. 그게 말이 돼? 있다면 어떻게 그들이 모를 수가 있어. 호구도 아니고.”
이라칼은 자신이 시선을 끌어 우리가 국경을 통과하도록 하는 게 제가 활약할 여지가 있으니 그걸 아쉬워하는 느낌이었다. 난 핀잔을 주었다.
“제 목숨도 달린 일인데, 그걸 가지고 장난치겠어?”
그리고 그가 한 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확실히 지식에의 탐구 때문에 흑마법사가 된 자라면, 바란의 고대유적도 궁금해할 만하지. 그로서도 우리를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 라고 하기엔 너무도 확신이 넘쳐 보였다. 말과 표정, 몸짓에서 우러나는 그 모든 걸 보고 판단을 내렸겠지. 그의 말대로, 난 다소 뻔한 사람이니까!
뤼비에가 잘난 듯이 말하긴 했지만, 그런 종류의 사람이 내 세계에서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보통 FBI같은 데서 범인 심리 조사할 때 하는 거 아니었어? 내 참.
그런데 이틀이라……. 찜찜하도록 일이 쉽게 되어가는 듯하지만, 방심하기는 이르다. 난 먼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차근히 생각했다.
“일단, 그 길은 상당히 협소하다고 해. 말은 다시 내다 팔아야겠어. 수레도……. 아니, 떠난다는 티를 내지 않고 떠나는 쪽이 낫지 않을까.”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거면 말은 내가 잡아먹고 수레는 불태우면 돼.”
“말을, 잡아먹는……. 다고?”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말고기가 얼마나 맛있는…… 아니 기껏 산 거잖아!”
질겁한 표정을 짓는 내게 이라칼이 버럭 역정을 내었다. 뭐 야생짐승을 잡아먹는 건 그렇다 쳐, 그런데 아무래도 저 큰 말을 이라칼이 잡아먹는 걸 상상하니 소름이 다 끼쳤다. 무슨 동물의 왕국도 아니고.
“……그냥 내다 팔아. 여비가 부족해졌다고 대충 핑계를 대면 되겠지. 네가 제값에 샀다면 제값에 팔 수도 있을 거야. 수레는 끌어다가 처리하기 그러니 그냥 여기 두고 가자. 마스터는 네가 업으면 되겠지.”
사둔 것들이 좀 아쉬운데, 내 로브에 다 들어가려나 모르겠다.
“알았다고, 그렇게 하면 되잖아. 아차!”
갑자기 소리 높인 이라칼은 새파랗게 질려 입을 틀어막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문득 깨달았다. 아, 대화 금지령이 내렸었지. 그런데 이거 마스터 면전에서 말을 나누고 있었잖아? 이라칼이 또 혼찌검이 날까 싶어, 난 슬슬 눈치를 봤다. 그러나 오도카니 의자에 앉은 마스터는 생각 외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가 듣는 곳에서, 필요한 대화는 허가한다. 남은 시일동안 채비를 마쳐라.”
지시를 내린 마스터는 또 다시 익숙한 정적 속으로 잠겨들었다. 어쩌면 이제는 포기한 걸지도……. 최고결정권자답게 결정을 내리는 이외에 무엇도 하지 않는다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따라야지.
그렇게 이틀이 긴장 속에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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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 된 거 아닙니다. 딱히 건강검진은 받지 않지만 아마도 괜찮은 걸로.....
가까운 시일 내로 또 오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