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9 9. 여정 =========================================================================
이거 놀랐습니다, 라며 그는 태연스럽게 웃었다. ‘폭력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난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세웠다.
“난 또, 내 동생을 추행하려는 건 줄 알고.”
“추행이라뇨. 그리고 동생 아니잖습니까.”
“복잡한 사정이 있긴 하지만, 현재로썬 동생인데요. 함부로 손대지 마시죠.”
“……남자아이 아닙니까?”
난 좀 놀랐다. 사실 마스터는 여자아이라고 해도 무방한 외형을 하고 있었던 터라, 그리 바로 남자라는 걸 알아채긴 어려웠을 텐데. 확실히 눈썰미가 좋다. 난 마스터의 어깨를 감싸서 등 뒤로 감추며 내쏘았다.
“이만한 미모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아이면 되는 변태들의 표적이 될 만하죠.”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남자는 취향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아이는 더더욱.”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확실히 저는 자칭 누나분 쪽에 더 관심이 갑니다만.”
그의 말은 확실히 날 정색하게 만들었다.
“난 당신이 싫어.”
“여자의 싫어는 실제로 싫다는 뜻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빙글거리는 낯짝에 확 찬물이라도 끼얹어주고 싶다. 죽빵을 날리고 싶은 면상이란 게 어떤 의미인지, 난 똑똑히 깨닫고 있었다. 더군다나 마스터의 존재가 심히 의식이 되었다. 어차피 상관 안 할 것 같지만, 수상한 남자에게 집적거림을 받고 있는 모습을 마스터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왠지 의식이 되었다.
“개수작 말고, 목적이나 말해. 언제까지 남몰래 방에 숨어들 거지?”
“하긴 그것도 그렇습니다. 사실 저도 그동안 망설였거든요. 제 짐작이 맞는지 확인하기가 조금 곤란해서.”
불안한 기분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짐작이 뭐기에?”
“그쪽 아가씨가 마탑의 마법사라는 것 말입니다.”
그리 대뜸 말해버릴 줄은 또 몰라서 난 그대로 얼어버렸다.
“제 짐작이 틀린 것 같진 않은데, 분위기가 좀 묘해서 이리저리 추측할 거리가 많았거든요. 사실 이렇게 찾아온 건 아무래도, 단서를 얻기 위해서?”
하하 웃는 낯짝을 보고 난 조용히 옆에 놓인 물컵을 집어 들었다. 내 안에 숨겨진 폭력성을 남김없이 불러내는 재주 좋은 작자였다.
“마탑 소속이시지 않습니까.”
이젠 거의 확신한 듯이 청년은 매끈한 턱을 검지로 짚으며 물었다. 일순 그 눈에 어린 광채는 기이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광기마저 엿보이는 눈빛이 날 압도했다. 그는 표정을 고쳐 다시 빙그레 웃었다.
“제 말이 맞다고 얼굴에 쓰여 있군요.”
난 흠칫 마스터의 눈치를 봤다. 칠칠치 못하게 속내를 드러낸다고, 그리 생각하시진 않을까. 하지만 마스터는 애초부터 나에 대한 기대치가 바닥이었다. 왜 너는 배신하지 않느냐고 물을 정도이니, 고작 이 정도에 실망한다거나 바닥에 이른 평가를 더 낮추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생각이 조금 위안이 되었다.
청년은 과장되게 몸을 꾸벅 굽혀 인사했다.
“이리도 특별한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니, ‘분들’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의 눈길이 마스터를 향해 꽂혔다.
“당신이 마스터라고 부른 이 소년. 저는 그에게서 아무 마력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단 건 적어도, 제가 가늠할 수 없는 경지의 마법사겠지요.”
그의 말은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했다. 마력이 없으니 감지하지 못한 것이지만, 마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마스터의 경지가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다. 틀림없이 마스터는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대단한 경지의 마법사였다.
“마탑의 마법사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지요. 하지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이라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이리 뵙게 되어 진실로 기쁩니다.”
이렇게 된 이상 시치미를 떼는 건 아예 그른 일 같다. 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물었다.
“마탑의 마법사를 왜 찾은 건데. 단순히 궁금해서?”
언젠가부터 난 더 이상 예의를 차리지 않고 반말을 찍찍 내뱉고 있었다. 불법 침입에 스토커, 온갖 욕을 들어먹어도 할 말 없는 상대 아닌가. 그러나 그도 내가 반말을 하든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물론 단순한 궁금증 때문은 아닙니다. 그 전에, 당신의 정체를 어떻게 알았는지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는 뽐내듯이 제 추리과정을 토로하고 싶은 것 같았다. 은근히 즐기는 듯도 하고. 필요 없고 목적이나 말하라고 하고 싶었으나, 마음이 의지를 배반했다. 솔직히 궁금하긴 했다.
어떻게 알았지? 나는 어디로 보나 마탑의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유형이었다. 무표정하고 인형 같고 외부에선 마스터를 빼다 박은 듯이 구는, 고고한 그들에 비하면 난 납치를 당할 만큼 만만하고 어찌 보면 친근한 타입이었으니까.
“어떻게 알았는데.”
내가 조심스레 묻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말을 뱉어냈다.
“처음 당신을 본 건, 막 잡화상에 발을 들이던 모습이었습니다. 흔치 않은 검은 머리 때문에 눈길이 갔고, 찰나같이 뜯어보니 흥미로운 점이 몇 가지 눈에 띄더군요. 우선 평민이라고 보기엔 피부가 희었고 손이 고왔으며 그에 반해 입고 있는 옷은 그리 고급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위장을 하고 있는 것이라 추측이 되었죠.”
“그래서 밖에서 기다렸나?”
“네, 저는 궁금한 게 있으면 참질 못하거든요. 그래서 이 신세가 되었지만……. 여하간 당신이 잡화상에서 나오는 데는 상당히 시간이 걸렸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언뜻 보니 잡화상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저는 당신이 여행자들이 흔히 그러듯 정보를 얻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나를 관찰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빠져드는 듯이 흥미로워서, 난 귀를 기울였다.
“사실 거기까진 특별히 수상한 건 없었습니다. 하지만 멀찍이서 지켜본 결과 당신의 태도가 묘했습니다. 여행자이고 젊은 여성이면서도 낯선 타지를 돌아다니며 험악하고 덩치 큰 사내들 사이를 거리낌 없이 지나다니고, 뒷골목에도 별 고민하지 않고 들어서더군요. 그건 부주의하고는 달랐습니다. 또한 누구에게 정보를 얻어야 할지 아는 사람이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
“그래요, 당신에게선 누구를 대하든 안전할 수 있다는 확신이 느껴졌어요. 누구도 당신에게 해를 끼칠 수 없을 것처럼 말입니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물론, 별 생각 없이 그랬던 게 맞다. 긴장되지 않는데 긴장하는 척하고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무슨 연기파 배우도 아니고.
하지만 그래, 여기가 내 세계였고 내가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가 말한 대로 주위를 경계하고 조심히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완벽하게 논리가 들어맞았다.
그걸 떠나서, 마법사라는 게 다 이런 자들인가? 나도 마법사이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이 된 거고. 그 사소한 이상점을 포착해서 집요하게 잡아낸 그의 눈썰미에 놀라다 못해 질리는 기분이다. 그 능력으로 탐정이나 경찰을 하면 오죽 좋았겠어.
왠지 주춤 거리를 두는 날 두고 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비밀리에 호위가 따르는 것 같지도 않고, 당신에겐 검이 없었습니다. 당신이 남모를 괴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답은 하나 마법사라는 거겠지요. 그런데-”
그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당신의 경지가 제게 읽히지 않지 뭡니까. 놀랍게도 당신은 평범한 여성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이래 봬도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라, 마법사길드 전체를 통틀어도 저만한 마법사는 정말로 드문데 말입니다.”
“당신이?”
난 의혹스럽게 그를 쳐다봤다. 피곤하게 머리 굴리는 걸 보아선 제법 실력이 있을 것 같긴 한데……. 별로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저는 보이는 그대로를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건 마법사로서 필경 지양해야 할 태도지요. 보다 직접적으로 당신의 몸을 마법으로 훑어볼 수 있지만, 그랬다간 당신이 눈치챌 게 뻔했습니다. 어쩔까 고민하던 찰나!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짝, 하고 양손이 눈앞에서 맞부딪혔다.
“마법사길드는 모든 마법사들을 국경에 밀집시키고 있습니다. 서로의 신분을 판별하기 위해서 하나같이 로브를 입고 있지요. 그들에겐 이런 곳에 여행자로 위장한 마법사를 보내서 정보를 수집할 만한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젊은 여성이, 저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단 건 들어보지 못한 일이고요.”
내 눈에는 그냥 집착증 심하고 머리 잘 돌아가는 의심병 환자로 보이는데, 마법사로선 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나 보다. 저리 자신하는 걸 보면.
“그래서 저는, 마법사길드에 속하지 않은 마법사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결론은 간단하게 내려졌지요. 알려진 흑마법사 중 여성은 없으니 말입니다.”
그는 단정 짓듯 말했다.
“그리고 제 추리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것 같군요.”
자화자찬하는 꼴이 보기 싫어 난 고개를 팩 돌렸다. 청년은 의미심장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 후로는- 제 짐작을 확인해야 했지요. 별건 아닙니다. 그저 골목을 좀 빠르게 돌아들어서 당신이 나타날 지점에서 불쑥 튀어나오기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예상대로, 당신은 저를 알아보지 못하더군요.”
그의 어조에서 느껴지는 뉘앙스가 묘해, 난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내가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게 왜? 그러자 앞서 스쳐 지나갔던 점이 양각처럼 도드라졌다. 그는 내가 로브를 입고 있지 않아서, 마법사길드의 소속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로브를 입고 있지는…… 않은데?
그 말이 지목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당신, 흑마법사?”
“바로 맞추셨습니다.”
모든 힌트를 내어준 주제에 그는 기쁜 듯한 얼굴로 짝짝 손뼉을 쳤다. 그가 마법사길드의 마법사가 아니란 걸 깨닫자, 흑마법사라는 걸 알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입을 막기 위해서 그를 해할 필요는 없겠구나, 하고.
그건 그거고, 난 당사자가 나타난 김에 발칵 화를 냈다.
“당신 때문에, 지금 국경이 봉쇄되어서 꼼짝도 못 하고 있잖아! 자수해.”
“곤란합니다. 자수하면 저는 죽거든요.”
너무도 난처한 얼굴로 덤덤히 말해오는 소리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
“예, 틀림없이. 깐깐한 사람들이라, 자신들의 유망주가 타락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게 분명합니다. 제게 실망하고 분노하는 분이 워낙 많아서요. 이게 다 제 죄지요. 누굴 탓하겠습니까.”
눈앞의 흑마법사는 분노와 열등감에 차있을-내 선입견에 따르면-흑마법사치고는 뭔가 현실을 이해심 있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게 왜 시체를 조종하는 짓 같은 걸해서 화를 자초한담.”
“어차피 죽어서 땅속에 묻힌 몸, 무덤에 난 잔디에 거름이 되는 것보단 쓰임새가 있는 쪽이 좋을 겁니다. 살아있을 때처럼 움직일 수 있으니 어떤 의미에선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마법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면, 죽어서도 세상에 도움을 주는 거겠지요.”
참 긍정적인 정당화라 왠지 설득력이 있었다. 사자의 기분이란 건 알 수 없는 거니까, 꼭 나쁜 짓이라고 볼 수만은 없지 않나.
“저는 마법사가 진리를 탐구하는 데 제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 방법까지 규제하는 건, 도가 지나칩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류라도 그런 반대쯤은 물리칠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겠지요.”
“그래서 당신은 마법사길드의 공적이 되었지. 목숨을 걸고 있는데 후회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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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다음편이 올라옵니다. 진짜 곧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