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7 9. 여정 =========================================================================
뒤를 살피면서도 혹여 따라오면 따돌릴 셈으로, 바삐 걸음을 디뎌 여관에 다다랐다. 감각을 키우자 슥 훑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라칼이 나보다 먼저 돌아왔구나.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이라칼이 투덜거리면서 나를 맞았다. 대화 금지의 명은 아직 유효했으므로 혼잣말이다. 아무리 여관이라지만 마스터를 홀로 두는 게 걱정되어 부리나케 돌아온 듯싶었다.
마스터가 정말 아이도 아닌데. 강대한 마탑의 군주였던 마스터가 아직도 새겨지듯 남아있는 내겐, 그런 태도가 미묘하게 낯설었다. 좀 거북스럽기도 했다.
“아 이상한 사람을 만나서,”
우리 부부인척 하는 게 어떠냐고 제의해볼까 했지만, 마차를 끌라고 말한 이상으로 치를 떨 것 같았기에, 난 괜스레 불 지르지 않기로 했다.
“말은 어떻게 되었지?”
이라칼은 입술을 꾹 다물고, 마구간 쪽으로 손가락질했다. 구해왔다는 뜻이다.
“바가지 쓴 건 아니고?”
이라칼은 이번엔 도리질 쳤다. 자길 어떻게 보냐는 듯이 눈을 부라리면서. 굳이 확인해볼 필요는 없겠지.
근데 이 대화방식, 정말 답답하고 비효율적이지만 어쩔 수 있나. 난 한숨을 내쉬면서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스터는 침대가에 서서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듯,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는 흡사 내가 보지 못하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나는 그의 시선을 머물 가치도 없는 초라한 존재가 되어버린 느낌이라,
“밖에 뭐가 있나요?”
밀려드는 자격지심을 이기지 못한 난 말을 걸었다. 천천히 그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들었다. 나를 담는 검은 눈은 이런 내 보잘것없는 속내를 꿰뚫듯이, 이세계의 것 같지 않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 선연한 고요함을 마주 대하며 난 내가 얻어온 정보를 찬찬히 털어놓았다.
“―그래서 일단 국경을 통과할 방도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거죠.”
우선 이라칼은 인간이 아니다. 또한 마스터 역시 그렇다. 글쎄, 나로서는 마스터처럼 눈에 띄게 특이한 아이를 마법사들이 그냥 지나칠 거라고 장담하긴 어려웠다. 마력적인 측면에서 특별날 건 없다고 해도, 마스터는 분명히 시선을 잡아끌 만하니까.
그리고 나 역시도, 그들에게서 내가 마법사란 걸 감출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숨기고 지나치려다가 들키기라도 한다면, 분명 문제가 될 테고…… 그 문제로 말미암아 어떤 강렬한 인상을 남겨서는 안 되었다. 현상수배라도 걸리면, 그래서 마탑의 이목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정말로 곤란해진다. 어쩌면 마탑에서 마법사 길드에 손을 뻗었을지도 모르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까 내게 말을 걸었던 청년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내 인상착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던 터라, 시험 차 그리 수작을 걸어보았던 건 아닐까. 하지만 난 확실히, 효과적으로 그를 물리친 편이었다. 아마 그리 수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으리라. 어쨌든, 난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마탑의 마법사다운 성격이 아니니까.
난 목소리를 가다듬고 선결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래서 생각해봤어요. 이라칼이 소란을 일으켜서 시선을 끌면 어떨까 하고요. 하지만 이라칼이 과연 마법사들에게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이라칼이 자신을 무시하느냐는 듯이 항의를 품고 눈을 번뜩였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 너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사실 나도 이라칼이 꽤 강한 축에 들 거라고 생각하긴 한다. 하지만 그가 마법사 길드의 마법사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는 이곳에서 충분히 시선을 끌 수 있을 만큼 강한지는 알지 못했다. 그와는 가볍게 충돌을 빚어본 적도 있지만, 정작 마법사 길드의 마법사들하고는…….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처음에 마스터를 만났을 때, 그들은 마스터가 가볍게 친 결계를 부수지 못해서 포위하고만 있지 않았나. 그리고 다음날 그들이 유귄의 손에 대거 죽음을 맞았던 그 소름 끼치는 기억, 그때의 단말마. 만약 마법사 길드가 마스터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등골이 오싹한 와중에도 난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무사히 국경을 통과한다고 쳐도, 이라칼과 다시 합류하는 데는 위험부담이 생겨요. 그가 여행하는 데 도움을 많이 주고 있으니, 아예 떨어지게 될지도 모르는 방법은 되도록 피하는 게 좋겠지요. 가장 안전한 방법은 기다리는 거지요. 흑마법사가 빨리 잡히거나, 타국으로 도주해서 마법사들의 포위가 풀리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들이 마냥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 흑마법사가 언제고 나타나지 않으면 필경, 이 나라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행적을 찾아내려고 들겠지. 그 와중에 우리의 존재가 마법사 길드의 이목에 걸려들 수 있었다. 그 위험성을 배제할 순 없다. 이라칼이 끼어들었다.
“기억을 지우지 않았으니, 마을의 누군가가 우리에 대해서 고할지도 몰라요.”
그건……. 생각지도 못한 지적에 말문이 막혔다. 난 그저 멀리 떠나버리기만 하면, 그 마을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뭐라고 떠들건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충분히 멀어졌고. 하지만 아직 나라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런 변수가 존재할 거라고 예측하긴 어려웠으니까.
마스터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내가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 말하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드는 듯하다.
잔인스러우나 철저한 현명함. 폐쇄된 마을이고 이후로 우리 일행의 존재를 드러낸 적이 없으니, 그 마을 사람들만 제대로 처리하거나 기억을 지웠다면…….
그러나 마법사가 아닌 이라칼이 마을 사람 모두의 기억을 지우는 건 어려운듯싶고, 나는 마법을 사용해선 안 된다. 일기장 같은 데 기록된 것마저 일일이 없애는 건 불가하니…… 사실상 마스터가 말했던 방법이 가장 확실하다. 물론 나는 거기에 대해서 강경히 반대했었다.
그래, 마스터는 옳다. 그러나 그 옳음은 도덕과 법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효율의 옳음. 그러하기에 마스터는 지난 일에 대해서 다시금 꺼내어 나와 언쟁을 벌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 또한 나에 대한 파악을 전제로 한 것.
어쨌든, 마법사 길드가 우리의 존재를 알게 되는 건 피해야 할 일이었다.
난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마탑에서 마법사 길드와 접촉할 가능성은요? 사이가 안 좋지 않았나요?”
“그들은 마탑을 두려워한다. 하여 요구한다면 따를 것이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약화되었단 거……. 눈치채지 않았겠어요?”
그렇게 되면 애초에 제멋대로인 마탑에 반감을 품었을 만도 한데, 도리어 이 기회에 한판 해보자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탑 밖에선 마법사 길드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걸로 아는데, 다른 강력한 마법사 집단의 존재를 달가워하진 않을 것이다. 이 기회에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찍어 누르려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들은 어차피 마탑에 이를 수 없다. 그리고 약화된 원인을 알지 못하니 행동하는 데 신중할 것이다. 당장은, 그들을 재물로 협조시킬 수 있겠지. 마탑은 무수한 재보를 보유하고 있고, 개중에는 마법사들이 탐할 만한 것들도 상당하다. 지금은 무용해진 마력석을 넘기는 걸 조건으로 삼을 수 있겠지. 바깥과의 교류 역시, 엘리야의 소관이니 어려울 것 없다.”
마스터는 엘리야에게 정말로 많은 권한을 쥐여주었구나. 놀라울 만치. 또한 그건 다른 제자들과 너무도 비교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조금, 무거운 의구심을 떠올려야 했다. 마스터가 엘리야를 믿었다는 건, 정말 단순히 그가 배신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었다는 의미일까. 정말로…… 그 오랜 세월 그를 섬긴 제자, 그것도 첫 번째 제자인 엘리야에게 전혀 신뢰를 주지 않았을까. 전혀, 마음을…….
주지 않는 게, 가능한 걸까. 그 엘리야에게. 아무리 마스터라도.
나는 엘리야의 오묘한 보랏빛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의 입가에 맺힌 화사한 미소. 그 분위기. 대단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처음 만난 게 그였다면, 나는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건 그가 남자이고, 내가 여자여서가 아니다. 그냥 엘리야라는 사람이 그랬다. 다른 모든 시온이 그를 따를 만큼. 또한 아모스와 룻을 한손에 거머쥘 만큼.
그런 그에게 아주 얄팍한 정이라도, 품지 않았을까.
질투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만 나는…….
그렇다면 마스터에게도, 그의 배신이 조금쯤 충격이지 않을까 하여 마음이 쓰였다. 마스터는 그 점을 개의치 않는 듯하지만, 워낙 무표정하고 절제가 뛰어나 티 내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아 참, 사람 아니지.
나도 모르게 동정심 그득한 눈으로 쳐다봤는지, 이라칼이 도리어 날 이상하게 봤다. ‘쟤 왜 저래?’라고 묻는 듯한. 난 헛기침을 한 뒤 마스터에게 결론을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실상 중대한 선택을 마스터에게 냉큼 떠넘겼다고 표현하는 쪽이 걸맞다.
“며칠 이곳에 머물며 상황을 보고 결정한다.”
마스터의 결론은 깔끔했다. 지금 상황에선 최선이긴 했다. 마냥 시간을 보낼 수 없는 것도 내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위험을 감수하여 국경을 돌파해야 할 만큼 급한 것도 없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루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동태를 살피며, 며칠 이 여관에서 지내야 할 터였다. 그간 너무도 달려온 탓에 피로 아닌 피로가 쌓이기도 했고. 휴식이라고 생각하지 뭐.
“괜히 돌아다니면서 눈에 띄지 말고, 웬만하면 마스터의 곁을 지키도록 해.”
여관에 죽치고 있어야 한다니 벌써 좀이 쑤시는지 죽상을 하는 이라칼에게 난 신신당부를 해두었다. 녀석의 본체는 괴물이니까 국경지대에서 정체가 들통 나기라도 한다면 흑마법사와 연관될 가능성이 높았다. 왜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 고쳐 쓰지 말라는 말도 있잖은가.
녀석은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난 뭘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아래로 내려가서 여관 주인과 친목을 다져보기로 했다. 이리저리 오가는 여행자들을 받으니, 주워들은 게 있을 터였다. 그리고 친해 두면 보통 의심을 벗기 마련이니 어디다가 이상하게 말하진 않을 거고.
그러나 아래층에 다다랐을 때, 난 정말로 화들짝 놀랐다.
“안녕하신지요.”
부드러운 미소를 만면에 머금은 채 슬쩍 손을 들어 보이는 상대는, 아까 골목길에서 부딪힐 뻔했던 바로 그 자였다!
추적……. 당한 건가? 그런 낌새는 없었는데. 이 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날 쫓을 수 있는 실력자란 뜻인가.
긴장하는 듯이 보이는 건 유리하지 않다. 난 최대한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오셨죠?”
“아, 그리 경계하실 건 없습니다. 뒤를 밟은 건 아니니까요. 그저 제가 가진 정보와 추리를 통한 간단한 결론이죠.”
“네?”
뭔 소리야. 청년은 재수 없도록 여유로운 태도로 어린아이 달래듯 설명했다.
“가시는 방향을 추측할 수 있었고, 중심가에 머무시진 않을 것 같았고, 외곽지대에 변변한 여관은 몇 없거든요. 아가씨이니까 험악한 이들이 드나드는 싸구려 여관보다는 그럴듯한 곳을 찾았겠지요. 그 정도로 좁히면, 지나가는 아이에게 동전 몇 개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조건에 부합하는 여관을 찾을 수 있지요. 그리고 제 추리가 옳았던 것뿐입니다.”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투에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자신의 명철한 두뇌에 스스로 탄복하고 있는 듯했다. 그게 참 보기에 아니꼬웠을뿐더러,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그래서 왜 저를 찾아오신 건데요?”
============================ 작품 후기 ============================
별로 아힌이랑 썸씽을 유발하려고 넣은 캐는 아닙니다. 있어도 부수일 뿐 나름의 역할과 목적이....
아 그리고 저는 슼팬이 맞습니다. ㅎㅎ
좋은 하루 되세요!